한동안 시끄러웠던 '디워' 논란도 이젠 잦아드는 국면인 듯하다. 여전히 약간의 '후일담'은 새어나오고 있지만, 어쨌거나 '정리 모드'로 접어든 게 아닌가 싶다(진중권의 최근 몇몇 칼럼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는다). '디워'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말썽의 건덕지도 없어 보이지만(말 그대로 '디워'가 걸작이어서 700만이 넘는 관객을 불러들였다고 말할 사람은 없는 거 아닌가? 왜 그게 시비의 대상이 되는지?), '디워'가 '핑계'가 되어준 거라고 하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소위 평론가 집단과 대중은 서로에 대한 쌓이고 쌓인 경멸과 반감을 '디워'를 핑계로 '터놓고' 교환한 것이 되니까. 최근 몇몇 언론의 '진단'은 이젠 그런 쪽으로 시야를 돌리는 듯하다(가령 이번 논란의 구도를 '386세대 지식인 vs 포스트386세대 대중'의 구도로 보는 식이다). 눈에 띄는 관련기사들을 옮겨놓는다. 'So what?'은 '대중의 반역'의 구호이면서(그런데, '대중의 시대'에도 '대중의 반역'은 가능한 건가?) 동시에 스스로가 감당해야 하는 반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So what?'은 부정의 변증법을 체현한다...

  

중앙일보(07. 08. 28) 21세기판 저주받은 걸작에 대하여

‘저주받은 걸작’이란 어느 비평가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이 단어를 사용하는 주체는 교체되어야 한다. 소수의 비평가 집단에서 일반 대중으로.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를 둘러싼 논쟁을 보며 든 생각이다.

이번 논란의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다. 23일 열린 토론회에서 비평가 진중권은 “문근영이나 이나영 보겠다고 영화를 보러 가긴 하지만 그걸 가지고 평론하거나 평점을 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게 바로 정답이다. 같은 시각 같은 극장에 앉아 있어도 비평가와 대중의 동기와 목적은 다르다. 하여 반응도 당연히 다르다.

비평가에게 예술작품은 텍스트다. 텍스트이므로 그들은, 학생이 교과서 공부하듯이 영화를 분석하고 소설을 해부한다. 한 번은 문학평론가의 노트를 구경한 적 있다. 그 노트엔 한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캐릭터와 관계가 설계도면 마냥 촘촘히 그려져 있었고, 어구 하나하나를 옮겨놓은 바로 아래엔 깨알 같은 해설이 달려있었다. 그게 그들의 업이다. 다시 말해 벌이의 수단이다.

하나 대중(Mass)에게 문화는 소비의 대상이다. 문근영이 나와서 또는 컴퓨터그래픽이 그럴싸해서, 아니면 작정하고 울어 보려고, 이도 아니면 소일삼아, 그들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다. 전문가 버금가는 매니어도 물론 있다. 그러나 매니어란 말 자체엔 아마추어란 개념이 포함돼 있다. 먹고사는 일이 아니므로 매니어의 작업은 일종의 유희다.

마침 계간문예지 ‘문학수첩’ 가을호가 흥미로운 특집을 실었다. 김훈·공지영·류시화·하루키의 문학이 왜 인기인지를 ‘이 작가는 왜 읽히는가’란 제목 아래 조명했다. 찬찬히 읽어봤지만 ‘이 작가는 왜 읽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글쎄다… 훈계 조의 몇 말씀만 눈에 띄었을 뿐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기획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했다.

앞서 언급한 넷 중 공지영과 류시화는, 대중의 지지가 무색할 만큼 비평과 사이가 나쁘다. 이에 대해 공지영이 진작에 한 말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떠들게 하라. 난 내 길을 가겠다.” 이런 식의 대응은 젊은 작가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개중 한 신예작가의 재치 어린 화법이 기억에 남는다. “지젝이고 라깡대는 소리.” ‘지젝’과 ‘라캉’은 현재 한국 비평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소위 ‘주석용 학자’다. 마치 ‘지껄이고 깡깡대는 소리’처럼 들린다. 일찍이 평단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던 박민규가 자신의 SF소설 ‘깊’이 올해 황순원문학상 최종심에 오르자 “왜들 이러셔”라고 대꾸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비평 작업을 깎아내릴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비평을 거치지 않고도 대중과 바로 교류하는 문화상품이 늘고 있음을 지적할 따름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문화상품’이란 용어다. 혜택받은 소수만이 문화를 향유하던 시절은 지났다는 걸 ‘문화상품’은 스스로 증명한다. 한 문학평론가의 고백이 떠오른다. “박민규는 비평을 통하지 않고 독자와 직접 접촉한 문학에서의 첫 사례다.” 공지영이나 류시화, 나아가 ‘디 워’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이다.

한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엄청난 발견을 했다 치자. 관련 계통에선 위대한 업적이겠지만 대중에겐 그저 “So what(그래서 뭐)?”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비평 언어는 애초부터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비평은 각 장르 안에서 엄연한 학문이다. 문화 유통업자들이 비평의 권위를 빌릴 뿐이다. 그러니 너무 몰아붙이지 말자. 세상은 이미 변했다.(손민호 기자)

경향신문(07. 08. 25)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대중을 향한 생산’이 열쇠

현대의 대중과 지식인 : ‘디워’ 논란
문화 연구는 대중문화가 모든 사회적 힘이 관여된 전장이며 늘 새로운 터라는 데 착안하고 있다. 영화 ‘디워’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오늘날 한국 문화의 구조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내용과 테크놀로지의 문제, ‘괴수 영화’라는 장르와 수용의 행태, 그리고 배경에 있는 미국 대중문화와의 관계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롭고도 중요한 것은 ‘디워’ 수용과 논란에 개재된 참여자들의 행동 양식이다. 거기에 바로 거대한 카오스모스로 존재하는 한국의 ‘대중’이 있다.

'디워’ 논란은 아직 우리가 ‘대중’이라는 현상과 그 카오스모스를 잘 읽어내거나,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때로는 오히려 ‘지식인’의 비평이 오히려 문화지체와 지적 한계의 덫에 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들끓는 대중 현상이야말로 ‘지식인의 죽음’을 확증해주는 듯하다. 지식인은 자신이 가진 몇 가지 해석의 도구 때문에 대중보다 더 텍스트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갖기 십상이다. 그러나 텍스트에 대한 대중의 수용은 텍스트 자체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며, 현학적 언어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도구란 대중이 처한 현실 자체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디워’ 논란만 보아도 거기에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대중의 앎과 삶이 반영되어 있다. 즉 그들은 단지 애국주의와 상업주의의 포로가 되는 ‘무지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문화권력과 권위에 대한 건강한 도전 의식과 소외된 자로서의 분노, 그리고 무차별한 향유의 정신과 상식적 윤리성, 또한 마니아적 집요함과 여러 분야의 지식을 나눠 가진 모순적 존재이다. 평소에 이들은 각각 서로 다른 데서 서식하지만, 때론 한데 뭉쳐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폭발의 방향과 반응도 진화하고 변이를 일으킨다. 몇 줄짜리 ‘댓글’이 곧 대중은 아니다.

양심적이고 날카로운 한 문화평론가가 ‘디워’ 때문에 마치 공적처럼 돼버린 사태는 대중의 모순적 역동을 그 혼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겠다. 그는 쉽게 사태를 애국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황우석 사태와 같은 ‘추상’에 환원하고 대중을 ‘초딩’에 비유했다. 그는 전혀 공적도 아니고, 그의 ‘디워’ 평가도 옳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오류에 빠진 게 아닐까. 그는 복잡다단한 현상으로서의 대중을 단순히 사상하며, 윤리적·문화적 주체로서 대중의 자의식을 건드린 듯하다. 물론 대중의 파도 속에는 참주선동을 일삼는 음험한 세력이 언제나 끼어있을 수는 있다. 문화연구는 이와 같은 대중문화의 주체-수용자 현상을 가장 주요한 대상으로 한다. 문화의 정치 경제학적 재생산과 개별 텍스트에 대한 분석·비판은 그를 위한 중요한 통로이다.

◆한국에서의 ‘문학에서 문화연구로’
하지만 문화연구가 ‘대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음악·미술·문학·영화 같은 개별 장르들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해이다. 문화연구는 수용주체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와 돈,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깊게 문제 삼는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주지하듯 후기산업사회의 계급대립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영국에서 탄생한 ‘시각’이다. 이는 대중과 엘리트, 문화와 정치, 이데올로기와 생활양식 등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하는 효과를 지닌 입장들을 지칭했다. 그래서 문화연구는 하위 주체와 그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인해 젠더 연구와 탈식민주의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문화 연구는 문학 연구의 밭으로부터 움이 터서 일구어지고 있다. 문학이 전 시대의 중심적인 양식이었고, 그래서 거기에 총체적인 것과 새로운 것에 예민함이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이전의 국문학은 1990년대 이후 대중문화·풍속·일상·문화제도·수용자·젠더 등에 대한 논의를 지렛대로 삼아 한국 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구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문화사나 문화 연구의 방법론을 참조해서 많은 성과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 이외에도 계급·젠더·민족(인종) 문제에 민감한 정치 경제학, 사회학, 커뮤니케이션 연구, 그리고 전통적인 미학이 다 문화 연구와 직접 관련된다. 그래서 한국의 문화 연구는 인문-사회과학 내부의 ‘통섭’의 수준을 보여주는 한편, 현실과 연구 및 현실과 비평의 연결 강도를 보여주는 좋은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현대 한국의 문화사가 제대로 서술된 적이 없고, 문화 재생산의 한국적 양상이 총체적으로 연구된 바도 없다. 또한 ‘문화과학’ 등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각개 약진하는 여러 분야의 연구와 담론이 어떻게 공통의 의제와 담론의 장을 만들 것인지도 광범위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영미의 문화 연구가 가진 한계는 이미 지젝이나 스피박 같은 이론가들에 의해 지적됐다. 문화 연구는 현실과의 연관이 미미해진 이론과 문학에 대한 중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했고, 그 본성상 대학 학과의 틀 속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문화 연구라는 문제 의식 자체 속에 앎의 ‘근대’를 넘어서고자 의도가 내장되어 있지만 실제로 넘어서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 연구도 서구 문화 연구 이론의 영향을 물론 받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끝없이 역동하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문화 현실이 더 1차적이며 근본적인 문제틀이다. 오늘날 한국과 동아시아의 현실은 미국과 유럽의 발걸음을 추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연구’는 소위 ‘선진국’의 이론에도 한 발, 또 현실에도 여러 발 뒤처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의 긴장력은 무조건 중요하다. 문화적 현실은 ‘지식인의 죽음’을 증거하지만, 그것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문화 연구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지식인의 영역을 지킨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앎을 종합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며,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20세기적인 계몽이 불가능하고, 대신에 소통과 연대가 가능한 길임을 문화연구자들은 잘 알고 있다.

◆문화의 변화와 과제
어떻게 한국의 문화 연구는 공동의 주제를 설정할 것인가? 세계적으로 비판적 문화 연구는 계급과 성, 민족주의와 세계화의 토픽을 다루지만, 그것은 ‘지금-여기’의 문화변혁의 의제와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대중문화는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2002년의 승리는 문화적 변혁의 결과이기도 했다. 대중성의 성격 변화와 한국 자본주의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다고 말해지는 것처럼, ‘대중의 외부’도 없고 대중문화의 외부도 없다. 다시 말해서 문화(즉 삶의 양식) 전체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또한 그 활동과 소통이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영역이 없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대중성 변화의 가장 중요한 첫번째 측면이다. 오늘날 한국의 문화에서 돈은 얼마나 더 중요해지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시끌벅적한 대중문화의 장이야말로 오히려 돈만으로 다 안 되는, 내지는 돈의 장악이 지닌 모순이 감춰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전쟁터이다.

한국 사회에는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8대 2, 아니 9대 1 사회로 영구히 공고화될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교육불평등과 계급불평등은 이제 단단히 구조화되어가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는 교육적 양극화를 비롯한 사회적 양극화로 파급되고,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면적으로 문화적 양극화는 잘 관철되고 있는 듯하다. 빈곤과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은 실로 문화의 적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문화는 정치 문제이다.

그런데 문화의 양극화는 ‘반-경향’과 함께 관철된다. 대규모 자본이 투여된 상품만이 시장을 장악하여 대량의 이윤으로 회수되는 양극화는 기본적으로 심각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추구는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사람들은 동시성을 통해 구현되는 공통의 문화를 향유하면서도, 다른 한편 취향에 의해 수평적으로 준별되는 문화의 향유에로 달려가고 있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복잡성의 주요한 측면을 이룬다.

마니아(동호인·문화 부족) 현상은 일단 소요 자본과 진입장벽이 크지 않은 분야에서만 두드러지지만, 문화적 취향을 근대적인 ‘고급/저급’ ‘본격/통속’과 같이 위계지어진 것으로 구분하거나 특정한 문화적 취향을 특정 경제적 계급에 귀속시키는 일이 불가능하게 한다. 문화적 계급 구성과 정치·경제적 계급 구성 사이의 불일치, 또 노동과 향유 사이의 괴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항존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불일치와의 괴리가 점점 더 복잡하고 커지는 양상을 띤다.

마니아는 대중의 존재성을 바꾸고 또한 강화한다. 그들은 지적 엘리트나 지배계급이 아니지만, 새로운 앎을 개척하고 문화를 공유하는 데 엄청나게 기여한다. 그들의 자발적인 횡적 연대는 그 자체로 오늘날 대중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참여군중(Smart Mobs)’ ‘대중지성’ 등이 운위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한 제품(자동차, 패션, 각종 전자기기 등)과 특정한 대중문화 상품(TV드라마, 연예인, 영화 등)에 대한 동호인 문화는 이제 일상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소비제품과 대중문화 수용에 있어 마니아들의 도움을 얻고, 또한 스스로 마니아가 되어 비평하고 옹호한다.

거대한 대중의 행동을 선동하고 선도하는 힘이 전위나 지식인이 아니라, 열정을 바치는 마니아들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기억하자. 거기에 새로운 정치도 있다. ‘지식인의 죽음’과 전통적 비평의 불가능함도 여기와 연관된다. 문화 연구도 생산되는 텍스트를 뒤따라 다니면서 주석 달고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생산하는 앎이 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문화 연구가 ‘대중을 향한 생산’이 될 수 있느냐는 것에 그 미래의 중요한 부분이 달려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외부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활용하고 필요한 만큼 긍정하고, 대중 현상에 배후에 숨어서 권력과 지배를 항구적으로 누리려는 세력에 저항하고, 대중의 역능을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연대의 전선을 개척하는 것이다. 또한 앎의 연대 전선을 다시 설치하는 것은 순종과 발전주의의 나락에 빠진 대학을 변화시키고, 인문학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과업과 관계 깊다.(천정환|성균관대 교수·국문학)

07. 08. 29.

P.S. 관련기사로 더 보탤만한 건 프레시안의 기사이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0823134236. 그리고 더불어서 이번주 한겨레21의 '노 땡큐!'에 실린 김규항의 '타인의 취향'도 읽어두는 게 공평하겠다. 덧붙이자면 나는 계몽적 대중주의자이다. 나는 '지젝이고 라깡대는 소리'가 엘리트 평론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일용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계몽의 끝이다). 내가 기대하는 건 엘리트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엘리트화이다. 그럼으로써 엘리트주의를 해소하는 것. 엘리트주의의 상징적 폭력을 무력화하는 것. 자기부정의 운동은 그래서 요구된다. 타인의 취향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자신의 취향에 안주하는 건 존중받을 만한 취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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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30 01:25   좋아요 0 | URL
제목만 보고 엄청나게 원색적인 가사가 대부분인 메탈리카의 곡명이 생각났었습니다.^^

섬나무 2007-08-30 11:14   좋아요 0 | URL
로긴 안하고 보고 가려고 했는데 그냥 갈 수 없네요.^^인상적인 사회현상을 들추게 된 영화얘기니까요. 하여간 이번을 계기로 진중권씨에 대한 호감이 박살이 난 사람이거든요.그렇다고 디워 옹호론자도 못되는데 말입니다. 문화를 꼭꼭 씹어 먹는 일이 업인 사람이 그걸 대충 삼키는 대중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열을 낼 일이었나 싶습니다.역시 대중의 가치관은 전문가들의 그것보다 현실적이며 폭넓다는 생각입니다.
올리신 기사들이 깊이 공감됩니다.

람혼 2007-08-30 12:12   좋아요 0 | URL
제목만 보자면, 저로서는 바로 Miles Davis가 떠오르는군요...ㅎㅎ

로쟈 2007-08-30 15:32   좋아요 0 | URL
노래를 먼저 떠올리신 분들께는 죄송한데요.^^
섬나무님/ 저의 So what?은 대중과 지식인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저부터도 지식인-대중이니까요)...

섬나무 2007-09-03 10:42   좋아요 0 | URL
저는 가끔 아주 몹시 어느 한 쪽에 서고 싶어집니다. 아무래도 저는 흔들리는-대중 입니다^^ 하지만 로쟈님의 조언은 백번 지당합니다.

람혼 2007-08-31 02:33   좋아요 0 | URL
사실 Miles Davis의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