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북리뷰들에서 크게 다루어진 책들 가운데 하나가 우석훈-박권일 공저의 <88만원 세대>(레디앙)이다. 이른바 '세대 경제학'적 차원에서 한국 사회를 다룬 '초유의' 책이라고. 리뷰기사에 보면 책은 "세대간 불균형 문제를 다루는 데는 좌파나 우파나 모두 미숙하다고 싸잡아 비판한다"고도 한다. 저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40대와 50대 남자가 주축이 된 한국 경제의 주도세력이 10대를 인질로 잡고 20대를 착취하는 형국"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인데, 40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착취'당하는 부류가 있다면 분류상 20대인 건가?(하긴 요즘 다시 20대로 되돌아간 듯한 긴장감(!)은 자주 느낀다. 몸이 안 따라 주어서 그렇지.) 개인적으로 최근 '다윈주의 좌파'에 관한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저자들의 입장이 다윈주의 좌파의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어 흥미롭다(왜 그런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적어보겠다). 주변에 10-20대가 있다면 권해볼 만한 책이다.

경향신문(07. 08. 11) 한국 20대의 슬픈 ‘알바 인생’

“20대여,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이성과 합리성을 존중하고 권면해야 할 책의 메시지가 마치 시위를 선동하는 듯하다. ‘88만원 세대’라는 기발한 제목이 붙은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실제로 가슴이 뛴다.

‘세대 간 불균형’이라는 구조적인 현안을 다룬 우리나라 초유의 ‘세대 경제학’ 책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88만원 세대’라는 도발적이고 상징적인 이름은 저자들이 짜낸 독특한 아이디어다. 비정규직 평균 임금 119만원에 20대 급여의 평균 비율인 74%를 곱하면 88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 88만원이 기껏해야 편의점과 주유소를 전전하는 한국 20대의 슬픈 ‘알바 인생’을 표징하는 것이다. 현재의 20대는 상위 5%만이 그럴 듯한 일자리를 가질 뿐 나머지는 비정규직의 삶이 불가피하다고 전제한다.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 비해 20대의 자립이 터무니없게 늦어지는 이유가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과 경제 시스템의 문제라고 저자들은 진맥을 먼저 한다. ‘첫 섹스의 경제학’이라는 다소 야한 제목이 붙은 1장부터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불행한 10대를 다른 나라 사정과 조목조목 살갑게 비교하며 논점을 설파해 나간다.

저자들은 한국에서 가장 저급하면서 장기적으로 경제시스템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두 가지 악재로 ‘1318 마케팅’과 ‘다단계 판매’를 지목한다. 이 두 가지 모두 10, 20대에게는 마약 같은 존재이며,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급성장한 신규 산업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1318 마케팅’ 때문에 한국은 소녀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일찍 화장을 시작하는 나라, 가장 많은 화장품을 10대가 집단적으로 소비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불법 다단계 판매’의 최대 피해자도 10, 20대다.

저자들은 ‘1318 마케팅’을 ‘세대 착취 자본주의’ ‘인질경제’라고 과격하게 몰아붙인다. 중첩한 경제적 불균형이 낳은 결과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40대와 50대 남자가 주축이 된 한국 경제의 주도세력이 10대를 인질로 잡고 20대를 착취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구조적인 문제 해결책으로 왜 하필 바리케이드이고 짱돌인가. 경제적 약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처음으로 갖기 시작한 것은 바리케이드라는 물리적 장치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들이 10, 20대들에게 주문하는 바리케이드와 짱돌은 시위 현장에 필요한 실물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다. 독자적으로 설 수 있는 저항정신과 자세다.

책은 10대 문제를 다루는 한국 사회가 초보적인 까닭이 자본주의 운영방식을 서양에서 껍데기만 들여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제 노동자·농민 문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노하우가 축적돼 있지만 10대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 세대간 불균형 문제를 다루는 데는 좌파나 우파나 모두 미숙하다고 싸잡아 비판한다.

저자들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 경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세대 간의 문제와 다음 세대의 문제라는 ‘새로운 축’으로 바꿀 것을 촉구한다. 기성 세대 대부분은 성장률이 낮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일부에서는 양극화 문제로 진단하지만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할 돈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회의가 끝난 뒤 저녁 먹는 데 쓰는 사업집행비, 수조 원씩 아무 이유도 없이 사용되는 정부 예산만 합쳐도 상황을 훨씬 개선할 수 있고, 최소한 일본이나 프랑스 수준을 따라갈 수 있다고 장담한다.

10, 20대가 맞은 위기상황이 386세대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음을 엄중하게 추궁한다. 386세대는 어느 나라, 어느 세대보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강력하게 반영하는 사회적 장치와 흔들리지 않는 단결력을 지녔다. 하지만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386은 대학개혁에 대해서도 아무런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학벌사회를 강화시켜 역사에 대한 배신을 행한 세대라고 비판한다.

주 저자 우석훈은 프랑스에서 생태경제학을 공부한 진보적인 소장경제학자다. 스스로 C급 경제학자라고 늘 낮추지만 내공은 만만찮다. 그의 글쓰기에 매료된 독자들이 적지 않은 것이 방증한다.
저자들 스스로 밝혔듯이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세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차기 정부를 이끌어 보겠다고 나선 대통령 후보와 정책 참모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주류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방법론에 관한 생각이 다르다는 대목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의식에는 고개를 끄덕이리라 믿는다. 적어도 이 책이 세대 간의 불균형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토대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제 대안 연작 시리즈로 ‘88만원 세대’와 함께 나온 같은 공저자들의 두 번째 책 ‘샌드위치론은 허구다’(개마고원)는 한국 기업의 위기 본질이 외부가 아닌 기업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고 호루라기를 분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과 후발 개도국 중국의 협공에서 원인을 찾는 샌드위치 위기론은 경제 논리가 아니라 정치적 담론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 책은 조직론이라는 관점에서 한국 기업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한다. 캐비아 자본주의, 엘리트 신입사원만 선발하는 귀공자 자본주의, 여성들과 일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마초 자본주의, ‘토호들의 짝패’ 자본주의, 중소기업을 배려하지 않는 조폭 자본주의의 문제가 그것이다. 여기서 캐비아란 경제행위를 하는 개인들이 기대하는 경제수준으로 임금, 부동산, 조기유학, 과외 등을 의미한다.(김학순 선임기자)

한겨레(07. 08. 11) "40·50대가 10대를 인질로 20대를 착취”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한국의 20대를 가리킨다. 자칭 ‘C급 경제학자’인 우석훈 박사(사진)와 박권일 전 <말>지 기자는 최근 함께 펴낸 책 <88만원 세대>(레디앙)에서 직접 만들어낸 이 신조어를 둘러싼 사실과 해석을 펼쳐 놓는다. 비정규직 평균 월급여가 119만원이다. 이 액수에 20대가 전체 평균 급여에 견줘 받는 몫을 곱해보니 대략 88만원이 나왔다. 그러니까 이 용어는 20대 비정규직이 받는 월평균 급여다. 우 박사는 지금의 한국 경제를 “40대와 50대 남자가 주축이 된 주도 세력이 10대를 인질로 잡고 20대를 착취하는 형국”으로 본다. 20대와 50대가 전체 고용인구의 3분의 1인 800만명 비정규직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88만원 세대’인 20대에 대한 세대 착취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교육과 소비마케팅의 포로가 된 10대는 인질이라고 했다.

이런 현실이 가진 함의는 “16살부터 사랑을 시작하고 18살에 고교를 졸업하면서 독립을 희망하는” 유럽 젊은이들과 견줄 때 확연히 드러난다. 프랑스는 최근 대학 등록금을 크게 올렸으나 50만원에 불과하다. 학생들에게 주거보조금도 준다. 스웨덴에선 20살이 되면 생애 첫 창업자금으로 2000만원을 대준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스무 살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학생의 동거권’이 경제적으로 원천 봉쇄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행복지수’의 차이는 상상하기 힘들다.

더 심각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확산된 직업 불안정 추세가 더 심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는 현 10대들에 대해서, “지금의 비정상적인 변화가 계속되고, 또 그 속성상 가속이 붙어 나가게 된다면 단 10% 미만의 선택된 소수들만이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명목실업률이 높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비율입니다. 현 추세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1000만~1500만명 수준이 될지 그게 관심사입니다.”

최근 이랜드 사태를 촉발시킨 비정규직 보호법이야말로 비정규직을 양산시킬 ‘원흉’이다. “회사 고용의 몇%는 정규직으로 가야 하고 이런 체계를 갖춘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법안이어야 했습니다. 법 시행 이후, 취지와는 달리 기업들이 주나 일 단위 계약서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착취’는 유독 한국에서 가혹하다. 일본만 해도 ‘알바’들은 대기업 초임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우리의 경우 시간당 최저임금 3480원이 급여 책정의 기준이 되지만 일본은 대법원 판결로 알바의 고임금을 보장해주었다. 비인간적인 저임금은 사회풍속에 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의 몰락도 20대를 나락으로 몰고 있다.

그는 20대의 가혹한 운명이 사회의 파시즘화를 불러올 것으로 점쳤다. “황우석 사태 때 최대 98%까지 황 교수 편에 섰습니다. 이 정도 수치라면 우리 사회의 논의나 결정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이죠.” 그는 다음 정권이 파시즘 성격을 가질 것으로 단언했다. “개인 통제를 강화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젊은 세대는 배고픔의 열정 때문에 제국주의적 성격의 해외 진출이나 길게 보면 자원 부족으로 가상할 수 있는 한·중·일 사이의 전쟁 기류에 박수를 칠 겁니다.”

극단적인 과거회귀는 막아야 한다. 그는 우리 경제가 인간의 얼굴을 한 유럽이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일본형 경제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스위스와 덴마크의 중간 어디쯤”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했다. “스위스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강합니다. 국민들의 지식 수준이 높지 않아도 가볼 수 있는 모델이라고 봅니다.”

그는 ‘88만원 세대’의 고통을 덜기 위한 몇 가지 주문을 내놓았다. “그들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 예컨대 세대 대변자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 이사회의 ‘주니어 보드’ 같은 게 한 예다. “다 토플책만 보고 있으면 각개격파 당합니다.” 지식기반 사회의 젖줄인 창의력을 키우기 위한 독서도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지금의 10대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있다. 그들을 겨냥한 소비광고마케팅에 휩쓸려 가거나 아니면 독서를 통한 지식경제 1세대로 나아가느냐는 것이 그 선택지다. 이는 한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외부에는 △감원 대신 감봉을 택해 일자리를 나누는 스웨덴 볼보주의 정책 도입 △정규직화 비율을 높이기 위한 예산 지원 △2조원의 20대 창업지원금 확보 △자영업자를 위한 홍보 및 마케팅 지원 △지자체의 알바 보조금 지원 등을 제시했다.

지은이들은 함께 펴낸 다른 책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개마고원)에서 삼성과 현대 자동차 등의 사례 분석을 통해 한국 기업 조직이 빠져 있는 함정을 집중 분석했다. “삼성전자는 살길이 없는 ‘붕괴’ 모델입니다. 외부에서 굉장히 많은 돈이 유입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모델이죠. 돈이 끊기면 그 순간 불만이 쌓이면서 무너질 수 있죠.” 그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1~2년 이내에 창사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면서, 이 경우 거액의 연말 보너스 보상 체계로 돌아가고 있는 삼성이 강성 노조가 버티고 있는 현대보다 더 격렬한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삼성의 강남 엘리트 중심의 채용 시스템도 위기를 키우는 요인으로 봤다. 창의성은 떨어뜨리고 조직원들의 소모적인 경쟁만 촉발시키고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글 강성만 기자)

07.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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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펌]다윈주의 좌파?
    from 영혼의 아까징끼 2007-08-13 14:19 
    '로쟈'라는 아이디는 눈에 익다. 예전에 그가 쓴 서평을 몇번 읽어본 적이 있었고 날카로운 시각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알라딘에서 꽤 유명한 소위 '스타급' 서평자라는데, 공부하는 분인 듯(러시아문학 같다) 하다. 얼마 전부터는 『한겨레21』에 칼럼도 쓰나 보다. 아래의 글은 그가 『88만원 세대』에 대해 포스팅한 글인데, "저자들의 입장이 다윈주의 좌파의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어 흥미롭다"고 말한다. 그가  다윈주의 좌파에 대해...
 
 
philocinema 2007-08-13 13:09   좋아요 0 | URL
그 위대했던 88올림픽 근처의 세상에서 태어나 양육된 기운도 88한 우리의 젊은이들에겐 88만원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군요.

람혼 2007-08-13 13:29   좋아요 0 | URL
센스 88만점의 댓글입니다!ㅎㅎ^^

philocinema 2007-08-13 13:51   좋아요 0 | URL
만점이 100점이 아니었군요!

람혼 2007-08-13 16:25   좋아요 0 | URL
9진법으로 읽어주시길! ^^

로쟈 2007-08-13 13:58   좋아요 0 | URL
88올림픽 즈음에 태어난 분들은 거의 '착취세대'에 들어갈 텐데요.^^

마늘빵 2007-08-14 00:39   좋아요 0 | URL
음 저는 다행히 70년대 마지막 열차를 탔는데 비껴갈 순 없을거 같군요. 흐흐.

섬나무 2007-08-14 12:48   좋아요 0 | URL
아들이 고1인데 '착취세대'란 살벌한 용어에서 썩 자유로울듯하지도 않은 현실이니 난 아들에게 스무살에 해야할 몇 가지.. 따위의 책들 대신 필히 이 책을 들려줘야겠습니다.
영혼의 아까징끼님이 소개한 로쟈님의 글도 잘 읽었습니다. 영혼의 아가징끼님은 그러니까 88만원 세대의 공저자 중 한 분이란 말씀이겠지요.
어떤 분 블로그를 보고 로쟈님 서재를 보는 오늘 아침엔 불쑥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온통 디워 난리통에 피랍사건이 묻혀버렸다는 그 분의 시니컬 멘트의 냄새가 디워 굿판에 일조한 지식인들의 정체성 아닌가 싶은.. 엊그제도 그분 열정적으로 디워 굿판에 참석하시던데.. 그깟 시시한 일로 왜 그렇게 열을 올리셨는지. 피랍사건이나 영화 한 편에 대한 시비는 한 발 떨어진 사람들에겐 뉴스거리 이상일리 없고 공허한 말들은 보태질수록 가난해지는 듯합니다.
그 속에서 돌부처처럼 독서하시는 감탄스러운 로쟈님!^^

로쟈 2007-08-14 13:53   좋아요 0 | URL
<디워>는 보지 않았기 때문에(보게 될 것 같지도 않구요) 저로선 할말이 없고, '미학적 비평'이 나오는 게 난데없이 여겨지는 것 정도입니다. 미학과는 무관한 사회적 현상일 뿐이라고 봅니다. '돌부처'처럼 독서할 만한 여유가 저도 좀 있었으면 싶습니다.--;
 

'통섭'을 주제로 한 책 두 권을 7,8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놓았는데, 거기에 참고가 될만한 기사들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경향신문의 기사는 '통섭'이란 번역어가 에드워드 윌슨이 제안한 원래의 취지보다 과장/왜곡됐다는 최종덕 교수의 지적을 소개하고 있고, 교수신문의 지난 6월 인터뷰 기사에서 재미 철학자 승계호 교수는 통섭이란 것이 좋긴 하지만 엄두도 내기 어려운 것이란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챙겨둘 만한 견해들이다.

경향신문(07. 08. 07) "통섭, 왜곡 번역됐다”…최종덕교수 세미나서 지적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통섭(統攝)’이라는 번역어가 지나치게 과장되고 왜곡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최종덕 상지대 교수(철학)는 지난달 말 ‘한국 의철학회’ 여름 세미나에서 발표한 ‘통섭에 대한 오해’라는 글에서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가 번역한 ‘통섭’이라는 말이 학계의 충분한 성찰적 논의 없이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고 밝혔다.



‘통섭’은 ‘사회생물학’(1975)을 저술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사용한 ‘컨슬리언스(consilience)’를 그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가 번역한 말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벽을 허물고 더불어 넘나든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최종덕 교수는 “윌슨이 ‘컨슬리언스’라는 말을 썼을 때에는 실제로는 대등한 통합이 아니라 인문학이 자연과학에 종속되는 일방향적 통합을 의미했다”며 “하지만 이 용어가 최재천 교수에 의해 번역되면서 원저자의 의도와 다른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종덕 교수에 따르면 윌슨은 문화적 진화가 생물학적 진화와 서로 피드백 관계로 상호진화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학적 현상은 심리학적 현상으로 환원되고, 심리학적 현상은 생물학적 현상으로 환원되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물리학적 현상으로 설명된다는 물리환원주의를 신봉하는 흐름 속에 있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는 원효의 화쟁사상과 성리학, 최한기의 통섭 등을 거론하며 ‘컨슬리언스’ 개념이 일반인으로 하여금 마치 동등하고 상호적이며 양방향적인 관점의 합일 수준인 양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최종덕 교수는 “만약 최재천 교수가 ‘통섭’을 윌슨처럼 일방향성의 환원적 통합이 아니라 상호적 통합에 있다고 믿는다면 최교수는 ‘컨슬리언스’ 저서의 유명도에 의존하지 말고 최교수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태도를 분명히 한 뒤 ‘통섭’의 의미를 전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교수의 ‘통섭’은 윌슨의 책을 번역하면서 얻은 결과라서 분명한 표명이 어려울 것으로 추측한다”며 “그럼에도 분명성을 보여야 하는 것은 최교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통섭’의 활용이 인문학 정신을 오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종덕 교수는 “최재천 교수와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권위는 윌슨에게서 빌려오면서 그 뜻을 모호하게 사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며 “이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정식 논문을 작성 중이며 최재천 교수와는 언제든 논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손제민기자)

교수신문(07. 06. 11) "서양 흉내만 내면 뭐해, 문제의식이 있어야지”

“반세기 이상 나는 서양철학을 이해하고자 했다.” 승계호 美 텍사스(오스틴)大 석좌교수(74세, 사진)는 ‘나’라는 말 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타자에 기대어 주장하지 않는 노학자의 자신감이랄까. 서울나들이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려는 승 교수를 붙잡고 물었다. ‘한국 인문학에 대한 나로서의 의견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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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한에서 한국의 철학자를 두루 만난 승 교수는 정부의 인문학 진흥방안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거, 그거 그래서는 안돼요.” 그는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다. “인문학은 문화를 정화하는 일이오. 문화를 정화하는 게 뭐요. 무엇보다 우리말을 정화하는 것에서 출발하지요.” 말 정화를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는 곳에서 자금이 지원된다고 인문학이 발전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요지다.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인문학 연구 소용없어

“더러워진 우리말”에 대한 그의 강연이 쏟아졌다. “기자 선생, 아(아래아)리나래가 뭔지 아시오” 오리가 많은 강, 압록강. “중국 문자가 들어와서 우리의 원래 말이 더러워졌어요. 뫼란 말이 있는데도 산이라고 씁니다. 원래 백두산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 ‘어제’는 우리말이 있지요. 그럼 ‘내일’은 우리말로 뭐요. 없잖아요. 원래 없었겠어요. 없어 진거요. 사라진 거요. 죽은 거지요.”

일본어나 영어에 대한 생각도 비슷했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일본문화를 떨어내자는 말을 합디다. 正義가 뭐요. 일본에서 받아들인 정의는 천황권위의 질서를 의미하지요. 얼마나 부끄럽소. 사회정의는 공정한 거잖아요. ‘고른 뜻’ 이렇게 쓰면 얼마나 좋소. 뭐 요즘에는 지도자를 리더라고 부릅디다. 그거 독자(reader)잖아요. 외국어조차도 일본을 통해서 이중번역 돼 들어오는 수준인데 어떤 문화가 만들어 질 수 있소. 우리말도 제대로 못쓰면서 인문학연구가 무슨 의미가 있소. 거기에 돈 줘서 문화정화도 제대로 못하면 뭐합니까.”

그는 말을 이었다. “한국 성형수술 기술이 최고지요. 아름답게 하려는 건데 꼭 서양사람 모습으로 얼굴이며 몸을 만들고 있어요. 아름다워지는 것은 본성에서 나와야지, 그러려면 말의 본성이 아름다워져야지요. 한국 인문학은 서양사람 얼굴을 만드는 성형수술 같은 거요.”

방한동안 만났던 한국의 철학자들에 대한 쓴 소리도 이었다. “철학회에서 칸트니 플라톤이니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왜 그런지 물어봤지요. 한 학자가 그런 이름을 따야 권위가 선답디다.” 이 대목에서 그는 껄껄 웃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옛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거죠. 왜 자기 이야기할 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합니까. 지금 하는 꼴은 허섭이오.” 10년 전부터 포스트모던 유행이 불었다고 귀뜸했다. “것도 그래. 서양처럼 근대사를 거쳐서 나오는 건데, 한국은 근대 경험이 없잖아. 마치 구교도 없는 곳에서 종교개혁을 한다는 거지요.”

한국의 학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거라 말했다. 하지만 승 교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더 큰 문제는 학자들이 문제의식이 없어요. 문제의식이 있어야 의제도 설정하고 해결책도 찾을 거 아니오. ‘인문학 위기’가 아니라 본질을 못 찾고 잘못 연구해왔던 거요. 우리 자신의 본체도 깨닫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적인 연구를 하느냐는 거요. 우리말로 우리 생각을 내뱉을 수도 없는 수준에서 서양철학을 흉내 내면 뭐하나요. 이거 미장문화요. 누가 그랬고 누가 그렇다는 식으로 모방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오.”

학문에 대한 비판은 생활의식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한국 많이 변했죠. 어리둥절해요. 아파트들 전부 넓게 지어 지냅디다. 그런데 창문만 열어보면 얼마나 더러워요. 그런 더러운 도시 속에 아름다운 아파트는 없지요. 차도 큰 차만 타고 다니더군요. 길은 좁은데 어떻게 그래요. 차에 맞게 길을 어떻게 맞춰요. 길에 맞게 차를 맞춰야지요.”

한국의 대학에서 부는 ‘세계화 바람’에 대해 물었다. “그거 세계화 아니잖아요. 솔직하게 써야지요. 미국화잖아요. 세계화라면서 태국에 관심 있나요. 제 나라 말도 제대로 못 배운 아이들에게 유학 보내고 영어 가르치고, 도대체 무슨 소용이에요.”

‘통섭’, ‘융합’과 같이 학문을 전체적인 지적활동으로 보자는 말에 대해 승 교수는 “좋긴 하고, 학자들이 그런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독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쉽게 말 못하잖아요. 학문 한 가지하기도 힘듭니다. 통섭 학문하는 사람은 천만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할 겁니다. 진짜 그거 하려는 사람은 무서워서 엄두가 안 나는 그런 겁니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지요.”

교수는 교수 일만 제대로 하면 돼
학회에서 그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내게 그런 걸 물어요. 교수님은 아직도 평교수입니까라고. 학계에 있는 친구들 말을 들으면 학자들이 교수가 되고 싶어 하고, 그것도 서울대 교수가 되고 싶어 하고, 장관되고, 국무총리되고 이래야 교수 제대로 하는 거고, 그게 소망이래요.”

승 교수는 후예양성을 학자의 최고 덕목으로 쳤다. “후예를 기르는 것은 평교수가 하는 일입니다. 장래의 인물을 기르는 이런 성직이 어디있소. 신문에 논설 쓰고, TV 스타가 되려고 하지 말고 평교수 일을 명예롭게 생각해야 해요. 장래에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의 인생관과 일생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나요. 그런 일을 하는 평교수가 이제 賤職이 돼 버렸어요.” 교직이 성직이라는 말과 함께 이어지는 논란이 노동조합이다. “교수 노조를 반대하지 않아요. 교수들 대우가 시원치 않아서 하는 거니까.” 승 교수는 옷에 낀 먼지를 털어내듯 시원스럽게 말을 떨어내고 간다고 했다. “교수는 진리를 실천하는 거지, 인기에 영합하려면 교수 할 필요 있나. 한 마디만 하지요. 교수는 교수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승 교수는 1995년 한국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한 이후 12년 만에 방한했다. 이번에는 가족들과 함께 보름간 서울에서 머물면서 다양한 한국의 철학자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완전하게 알아들을 때까지, 상대방의 말을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팽팽하게 대화했다. 영어가 섞여 나오면 우리말로 무슨 의미인지 도리어 물어보고 가능한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면지를 꺼내 그림을 그려 설명하고 상대방 팔을 붙들고 흔들면서 설득했다.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할 때는 흥분에 도취해 체면을 던져두고 일어서서 방방 뛰기를 서슴지 않았다. 젠체하지 않는 모습이 담백해 보였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승 교수의 아내가 걱정했다. 막말해도 되냐고. 승 교수는 웃으며 답했다. “뭐, 내일이면 가는데. 허허.” (박상주 기자)

07.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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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갑작스레 '화두'가 됐다.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는 아프칸 인질 사건과 최근 출간된 도킨스의 종교비판서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이 이 화두의 배경이다. 그리고 이는 종교적 근본주의 내지는 종교 자체에 대해 새삼 성찰해볼 것을 요구한다. 그와 관련한 여러 문제들 가운데 공산주의와 종교, 보다 정확하게는 '종교로서의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임지현 교수의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처갓집에 점심을 먹으러 건너갔다가 우연히 읽게 된 해외서평인데, <종교를 닮은 공산주의>란 폴란드 책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종교로서의 주체사상'에 관한 기사도. 따지고 보면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내용들이긴 하나 그러한 비판이 함축하는 바는 더 음미될 필요가 있다. 가령, 나로선 '공산주의로서의 종교', '주체사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사실 이런 타이틀의 책들도 이젠 나옴 직하지 않을까?). 

조선일보(07. 07. 28) 공산주의는 종교를 패러디한 권력의 산물

종교를 닮은 공산주의(Religiopodobny komunizm)
마르친 쿨라 지음|크라코프 노모스|181쪽|32즐로티

구 소련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레니나(Lenina), 니넬(Ninel) 등의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레니나는 레닌의 여성형, 니넬은 레닌의 철자를 거꾸로 부른 이름이다. 남자 아이에게는 블라딜렌(Vladilen)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곤 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약어인 셈이다. 유대인 아이들이 모세라는 이름을 흔히 갖듯이, 소련의 아이들은 러시아 인민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공산주의의 모세인 레닌의 이름을 가졌다.

공산주의의 종교적 특성에 주목한 것은 물론 마르친 쿨라(Marcin Kula)가 처음은 아니다. 저자도 인용하듯이, 사회학자 오소프스키(Ossowski)는 1956년 일기장에 “사회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신정국가의 신의 독재의 근대화된 형태”라고 조심스럽게 썼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 폴란드의 신학자 티쉬네르(Tischner) 신부는 “공산주의는 종교의 적대자일 뿐만 아니라 캐리커처이자 패러디였다”고 선언했다.

무신론을 외치는 공산주의와 종교는 서로 적이라는 상식을 한 꺼풀 벗겨보면, 닮은 점이 의외로 많다. 공산주의 역사철학은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마니교적 비전을 담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라는 세속적 사탄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위대한 수령의 영도 아래 낙원을 향해가는 고난의 행군의 역사인 공산당 약사는 동족을 끌고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에 정착한 모세의 이야기와 닮았다. 결국 공산당 약사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역사는 같은 플롯 위에 서 있다.

교회와 당은 계시된 진리 혹은 절대적 진리의 유일하고 정당한 수호자이다. 교회와 당은 모두 밖의 이교도보다는 내부의 이단을 더 위험하게 여겼다. 트로츠키 주의와 수정주의를 비롯한 무수한 이단적 ‘주의’들에 대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를 떠올리게 한다. 이단이기 때문에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받기 때문에 이단이 되는 것이다. 모스크바는 공산주의의 로마였으며, 크레믈린은 세속의 바티칸이었다.

당 조직은 수도원과 유사하다. 교회법에 대한 순종, 엄격한 규율, 완전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수도원의 조직은 당 조직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들은 집단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사회적 조직이라기보다는 굳건한 ‘형제애’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이들 공동체는 개인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대신, 의식주에서부터 장례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한다.

가톨릭의 역사 못지않게 공산주의의 역사 또한 많은 ‘성인’들을 낳았다. 이 성인들은 죽어서도 당과 인민에 봉사한다. 평양의 혁명 열사릉이나 크레믈린의 담장 밑에 묻힌 죽은 자들이 산 자를 인도한다. 붉은 광장의 ‘영묘’ 속에 누워있는 레닌의 시신을 필두로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 프라하의 고트발트, 하노이의 호치민, 베이징의 마오쩌둥, 평양의 김일성 등 방부 처리된 ‘성인’의 시신들은 부패한 가톨릭 성인들의 유해보다 기술적으로 근대화되었을 뿐, 기본 정신은 같다.

모로조프, 스타하노프, 레이펑 등의 각종 사회주의 영웅들은 바로 이들 사회주의 성인 따라잡기의 결과이다. 1980년대에 한국의 대학가에서도 널리 읽힌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중세 성인전의 사회주의 버전이며, 그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 및 순교자 명부 등재 요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인민들에 대해 체제에 대한 순응과 동의를 넘어서 그들의 영혼까지 지배하고자 했던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적 권력은 교회 못지 않게 많은 성인들을 필요로 했다.

공산주의는 사실상 ‘호모 소비에티쿠스’ 혹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려는 ‘인간혁명’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기적이고 원자화된 개인을 혁명과 공동체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만드는 작업은 각 개인의 실존적 근거까지 근원적으로 바꾸는 ‘개종’ 작업이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인간혁명’의 프로젝트는 곧 현실의 벽에 부딪쳐 그 원대한 꿈을 접어야 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자신이 직접 겪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한다. 매년 레닌의 기일마다 연구소와 문화 관련 국가기관을 다니며 그 안에 놓인 레닌 흉상에 꽃다발을 바치고 가는 문화부 고위 공무원이 있었다. 그는 저자가 근무하던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건물 안의 레닌 흉상에도 어김없이 꽃다발을 바치곤 했는데, 소장 비서는 그가 나가자마자 늘 그 꽃다발을 소장실의 화병에 꽂아버렸다는 것이다. 스스로 성자가 되지 못한 관료들이 남에게 성인처럼 굴기를 설득하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었을까?

흥미진진한 분석과 유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전근대적 동유럽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종교를 닮게 됐다는 저자의 결론은 다소 아쉽다. 민족, 조국, 국가, 계급 등의 세속적 실재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정치의 신성화’ 혹은 ‘정치종교’는 그 자체로 이미 근대성의 산물인 것이다. 막스 베버가 근대에서 ‘탈주술화’와 ‘재주술화’를 동시에 읽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근대적 합리주의가 정교분리에서 보듯이 전통종교의 헤게모니적 지위를 박탈했지만, 근대야말로 새로운 유형의 세속적 종교성이 만들어지는 온상인 것이다(*참고로, 임지현 교수가 주도한 <대중독재2>는 '정치종교와 헤게모니'를 주제로 하고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쟈코뱅이 공화주의 사상에 입각해 정교분리를 외치면서 국가교회였던 팡테온을 혁명열사와 민족 영웅의 성스러운 묘역으로 만들었을 때, 이미 정치종교는 근대적 헤게모니적 지배장치로서 꿈틀대고 있었다. 주기도문을 그대로 패러디한 나치 독일의 히틀러 총통을 위한 기도문이나 종교를 닮은 공산주의는 모두 근대 권력의 무한한 지배 욕망이 만들어낸 산물인 것이다.

내용을 조금 바꾸더라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인 21세기 남한사회에서 스스로 종교가 되고자 하는 근대 권력의 욕망은 얼마나 큰 것일까? 나라 사랑의 표현인 우리의 ‘국민의례’는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의 정치종교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세계일보(07. 05. 18) 北 주체사상 종교로 볼 수 있나

미국의 종교 사이트 ‘어드히런츠닷컴’(adherents.com)이 최근 “어마어마한 신도수(1900만명)를 가지고 있고, 그들 인생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다” 등의 이유로 북한 주체사상을 종교로 규정, 세계 10대 종교로 올려놓자 국내 관련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어드히런츠닷컴은 심지어 ‘주체교’를 유대교(12위·신도수 1400만명)보다 앞세웠다. 그런데, 왜 ‘주체’를 종교로 파악했을까.

 

 

 

 

 

 

 

 

 #주체사상이 종교인 이유
어드히런츠닷컴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주체사상은 명백히 종교”라고 못박았다. 사이트는 북한 체제가 옛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에서 연유됐음을 인정하면서도 스스로 독특한 변이를 이룬 점에 주목한다. 또, 북한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승을 공식적으로 부인한 점도 언급했다. 사이트는 “지금 상황에서 주체사상을 공산주의의 이단적 갈래라고 구분하는 것은 불교를 힌두교에 포함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순위 선정의 합리성을 주장했다.

종교가 성립되려면 ‘교주(敎主)’ ‘교리(敎理)’ ‘교단(敎團)’ 등 크게 3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일견 그 요건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주체사상을 태동시켰던 김일성을 교주로 볼 수 있고, 주체사상 자체를 교리로 파악할 수 있으며,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북한사회 전체를 하나의 교단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진 전 조선노동당 황장엽 비서도 김일성의 수령절대주의 독재가 계급독재와 다른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동안 남한사회에서 주체사상을 거의 ‘종교’ 수준으로 보아온 것도 사실이다. 이미 국내에는 주체사상을 종교로 인식한 ‘북한사회의 종교성-주체사상과 기독교의 종교양식 비교’(김병로 지음, 통일연구원 펴냄)라는 저서까지 출간된 바 있다.

#국내 신학자·종교학자들의 반응
주체사상이 10대 종교로 ‘둔갑’한 것에 대해 국내 신학 및 종교 학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내놓았다.
신학자인 이정배 감리대 교수는 “주체사상을 종교에 포함시키는 건 신학적인 면에서 어불성설”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주체사상은 아주 인위적인 통치이념으로 자기초월적 기능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종교엔 자기초월·자기비판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인간을 숭고하게 이끄는 체험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사회학 입장에서 종교로도 볼 수 있지만, 이 경우 미국과 대결 상황에서 발생한 아주 기형적인 형태임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종교·인류학자 김성례 서강대 교수 역시 부정적 입장이다. 그는 “주체사상이 종교라면 히틀러의 나치즘도 종교“라면서 “한 세대만 지나면 소멸할 유사종교일 뿐”이라며 통계의 의미를 축소했다. 주체사상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땔감으로 쓰인 ‘가장된’(disguised) 종교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김정일이 죽고,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간단히 와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매우 정치적인 통치 이데올로기일 뿐인데, 북한의 위력을 간접적으로 선전할 가능성이 있다”며 통계 결과가 초래할 파급력을 우려했다.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실장은 “주체사상을 충분히 종교로 볼 수 있다”며 유연하게 말한다. 단, 종교의 범주가 넓고 역기능도 있음을 전제한다. 장 실장은 “내세관과 초월적 요소가 없어도 종교라 부를 수 있다”며 “심지어 사람을 미혹하고, 괴롭히는 종교도 있지 않은가”하고 반문했다. 장 실장은 “‘종교’란 용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주체사상을 달리 볼 수 있다”면서 “통계 결과보다는 종교의 개념을 좀더 확실히 한 뒤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서방 세계의 시각과는 달리, 북한은 주체사상을 하나의 철학과 사상 체계로 선전하고 있어 이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 불거져 나올 것으로 관측된다.(심재천 기자)

07. 07. 29.

P.S. 러시아 공산주의와 관련하여 언급해두고 싶은 책은 니콜라이 베르쟈예프(1874-1948)의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1937). 우리말로는 <러시아 지성사>(종로서적, 1975)로 옮겨졌는데, 영역본을 중역한 책이다(영역본은 http://www.questia.com/PM.qst?a=o&d=297502에서 읽어볼 수 있다). 저자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닌 러시아 전통사상과 공동체의식에서 찾는다. 20세기 러시아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베르자예프의 책들은 과거에 몇 권 번역된 바 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되었다. 분량도 얇은 만큼 이 책만큼이라도 재번역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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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7-29 23:28   좋아요 0 | URL
모든 거대 담론이 신학적인 지점들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사상도 종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임지현 교수가 조선일보에 글을 쓴 것을 보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많은 학자들이 우파들과 모종의 이해의 일치를 보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면 조선일보와 임지현은 '적대적 공범자'?)

로쟈 2007-07-29 23:51   좋아요 0 | URL
조선일보(박정희주의)와 주체사상(김일성주의)가 실상 '적대적 공범자'였던 걸 상기해볼 수 있겠습니다...

자꾸때리다 2007-07-30 00:12   좋아요 0 | URL
지금의 조선일보를 박정희주의로 볼 수 있을까요? 조갑제 같은 사람 제외하고는 대세는 신자유주의로 알고 있는데요...

로쟈 2007-07-30 00:22   좋아요 0 | URL
지금이야 이명박주의쯤 되나요?(성장주의, 친미주의 혹은 기득권주의?)사실 '생활우파'란 말이 시사해주듯이 '머릿속 이념'은 한국에서 별거 아니거나 속임수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포장이거나 알리바이인 셈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조선일보는 순진한(노골적인) 면이 있습니다...
 

아침신문에서 도정일 교수의 칼럼을 읽었다. CEO들의 서재 얘기인데, 사실 내용 자체는 며칠 전에 접한 것이니 관심은 그에 대한 '논평'이었다. 한편으론 개인도서관들을 갖고 있는 데다가 주로 (경영서가 아니라) 인문계열의 책들을 읽는다는 이 CEO들이 '강적'이란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론 "책 읽는 CEO들의 얘기는 그래서 가뭄의 비 소식 같은 데가 있다"란 주장에 묘한 반발심이 생겼다. CEO들도 읽는 인문학? 책이야 각자가 알아서 읽을 일 아닌가 싶고, CEO들도 인문서를 읽고서 사업의 영감을 얻으니 이런저린 핑계를 대며 독서를 게을리하는 샐러리맨들도 인문서 좀 읽으시오, 란 암묵적인 권유가 너무 속보였다(거꾸로, 인문서를 즐겨 읽던 한 CEO의 회사가 부도나면 그것도 인문서 탓일까?). 

그러다 오늘 받은 김우창 교수의 <자유와 인간적인 삶>(생각의나무, 2007)을 펼치니 제일 첫 얘기가 작년 여름의 '페렐만 사건'에 관한 것이다. 러시아의 젊은 수학자 페렐만이 막대한 상금이 걸려 있던 난제 '푸앵카레의 추측'을 풀었지만 상금도 거부한 채 은둔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는 얘기가 당시 화제가 되었던 그 '사건'의 골자다(http://blog.aladin.co.kr/mramor/937360). 김우창 교수의 글을 읽으며 역시나 그맘때 읽은 도정일 교수의 칼럼이 생각났다. 두 칼럼을 거푸 다시 읽으며 도정일 교수가 경탄을 아끼지 않는 두 사례, 곧 '책 읽는 CEO'와 '버섯 따는 페렐만' 가운데 누가 우리의 '모델'이어야 할지 잠시 생각해본다...  

경향신문(07. 07. 26) [도정일 칼럼]CEO들의 샘 ‘서재’

미국의 각종 업계를 이끌어온 최고경영자(CEO)들은 주로 어디서 창조적 아이디어를 얻고 생각할 거리를 공급받는가? ‘아이디어가 돈’이라는 말은 현대 비즈니스의 ‘황금 언어’가 되어 있다. 밥 먹을 때도 오고, 길 가다가도 얻고, 얘기하다가도 떠오르는 것이 아이디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영감처럼 아이디어도 평소에 준비되어 있는 사람의 머리에만 찾아온다. 녹슬고 무딘 안테나에는 아이디어가 걸려들지 않는다. 문제는 그 CEO들이 평소 어떻게 자기네 안테나를 섬세하고 예민한 상태로 준비해두느냐라는 것이다.

-고전 책 읽는 요즘 경영자들-

뉴욕 타임스 신문은 지난 21일자 인터넷 판에 ‘CEO들의 성공의 열쇠’에 관한 기사 한 꼭지를 내보내고 있다. 그 열쇠는 놀랍게도 ‘서재’다. 기사에 따르면 미국 업계를 이끌어온 주요 CEO들의 상당수가 자기 집이나 회사 집무실에 개인 도서관 규모의 큰 서재들을 갖추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같은 속도전 시대에, 인터넷과 전자매체로 무슨 정보이건 쉽게, 빠르게, 싸게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시대에 책으로 꽉 찬 서재라?

더 놀라운 것은 그 CEO들이 즐겨 읽는 책의 종류다. 틀림없이 경영이나 비즈니스에 관한 책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얼른 들지만, 천만에 말씀, 기자가 취재한 ‘서재’파 CEO들 중에 경영이나 비즈니스 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럼 무슨 책? 시, 소설, 전기, 역사, 철학 같은 이른바 인문학 계열 책들이거나 예술서들이다. 예컨대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가 지금도 즐겨 읽는 것은 아시아 역사에 관한 책, 미술 책, 시집이다. 유명한 벤처 캐피털리스트 마이클 모리츠가 노상 꺼내어 읽고 또 읽는 책은 티 이 로런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이다. 신용카드 사업의 아버지이자 ‘비자’ 창업자인 디 호크가 서재 탁자에 펼쳐놓고 매일 읽는 것은 12세기 페르샤 시인 오마르 카얌의 시집 ‘루바이야트’다.

티 이 로런스? 오마르 카얌? 젊은 세대들로선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이름들일 것이다. 영화로 알려진 ‘아라비아의 로런스’가 바로 그 로런스라는 걸 아는 사람은 더러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책 ‘지혜의 일곱 기둥’은 금시초문일 것이 틀림없다. 대학에서 세계문학 강의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오마르 카얌이라는 이름을 어렴풋이 기억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시집 ‘루바이야트’를 읽어보는 젊은이를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다. 사운드 시스템 사업의 대부격인 시드니 하만은 셰익스피어, 테니슨 같은 시인들과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같은 소설의 애독자다. 이런 작품들도 지금은 젊은 세대의 관심 대상에서는 한참 멀어진 책들이다.



CEO들은 왜 이런 책을 읽는가? 시인 경영자를 구하려 했으나 구할 수 없어 스스로 시인과 비슷해지기로 했다는 시드니 하만은 말한다. “시인들은 우리가 생각한 ‘시스템’을 생각해낸 원초적 사상가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처해있는 복잡한 환경들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바꿔준다.” 또 ‘세일즈맨의 죽음’이나 ‘이방인’ 같은 작품은 일하는 삶의 품위를 정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그 작품들의 시적 품질을 노동자 친화적 공장 환경에 들여오고 싶었다는 것이 CEO 하만의 말이다. “나는 논픽션보다는 픽션을 더 많이 읽는다. 비즈니스 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 유일한 예외가 앤디 그로브의 ‘헤엄쳐 건너기’인데, 그것도 비즈니스와는 관계없이 어떤 탁월한 개인의 정서적 바탕을 기술한 책이다.”

-가치는 가격이 아닌 문화에서-

모든 것에 ‘가격’을 갖다 붙이고 모든 가치들을 돈이 되는가 안 되는가의 잣대에 의한 가격체계로 바꿔놓는 것이 우리 시대다. 오늘날 문화는 ‘오락’이다.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쪼가리 뉴스가 심층적 분석과 신중한 판단들을 밀어내고, 모든 창조적 작업을 가능하게 할 가장 창조적인 지식과 통찰의 소스들이 말라죽고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콜레라, 우리 시대의 문화적 위기다. 책 읽는 CEO들의 얘기는 그래서 가뭄의 비 소식 같은 데가 있다.

한겨레(06. 08. 25) [비판적상상력을위하여] 버섯 따러 간 천재 수학자

지난 22일 마드리드 세계수학자대회에서 사람들은 그를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회에 앞서 세계수학자연맹 회장 존 볼 경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스부르크까지 날아가 이틀씩 머물며 대회 참석을 종용한 끝인데도 그는 종내 오지 않은 것이다. 개막식에서 존 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섭섭하다. 그러나 참석하지 않은 것은 그의 결정이고 그에게 상을 주기로 한 것은 우리의 결정이다.” 그렇게 해서, 4년에 한 번 40세 미만의 젊은 수학자에게 주어지는 큰 상 ‘필즈메달’이 그 고집스런 불참자에게 수여된다.

세계 수학계가 백 년 동안 매달렸으나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문제 하나를 풀어냈다 해서 신문들이 대서특필하는 통에 갑자기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러시아 수학자 그리고리 페렐만, 그가 ‘그’다. 연예인도, 정치인도, 스포츠 영웅도 아닌 수학자가 세계의 눈을 끌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진귀한 뉴스다. 수학은 지금 어느 나라에서도 ‘인기 학문’이 아니다. 수학은 돈, 명성, 권력의 어느 것도 가져다주기 어려운 기초학문 분야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대학 총장들조차도 “수학? 수학이 밥 먹여주나?”라고 공공연히 말하기 시작한지 10년이 넘는 나라다. 그런데 수학자가 수학으로 유명해졌다니?

따지고 보면, 그리샤(그리고리의 애칭) 페렐만이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게 된 것이 꼭 그의 학문적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우주공간의 생김새에 관한 가설의 하나인 이른바 ‘푸앵카레 문제’를 풀어낸 것은 수학계의 대사건은 될 수 있을지라도 대중적 관심을 끌만한 뉴스거리는 아니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오히려 수학 외적 요소들이다. 그가 세계수학자대회의 수상 후보가 되었으면서도 종적을 감추어버려 “그리샤, 너 어디 있니?”라고 신문들이 찾아나서야 했다는 사실, 그 이전에도 그가 유럽 수학회의 어떤 상을 거부한 적이 있다는 일화, 미국 스탠포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이 교수로 모셔오고자 했는데도 그가 “싫다”며 퇴짜를 놓았다는 소식, 생김새가 제정 러시아 말기의 괴승 라스푸틴 (이 괴승은 총알 여섯 발인가를 맞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고 되레 저격자들에게 달려들었다는 얘기로 유명하다) 비슷하다는 형용묘사, 지난 3년간 어딘가로 꼭꼭 숨어 전자우편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 고등학생 시절인 16세 때 세계 수학올핌피아드에서 만점을 받은 ‘천재’라는 칭송, 이런 일화들이 말하자면 그를 뉴스의 인물이 되게 한 ‘페렐만 미스테리’의 요소들이다.


지금 이 시장시대의 눈으로 보자면 페렐만 미스테리에서 단연 압권은 천재 그리샤가 돈 알기를 뭣 같이 한다는 얘기다. 그가 풀어낸 푸앵카레 문제는 미국의 클레이연구소가 큰 상금을 걸고 지정한 ‘제3천년의 7대 난제’ 가운데 하나다. 아직 풀지 못한 그 일곱 개의 수학문제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풀어내는 사람에게는 상금 1백만 불을 주겠다는 것이 ‘클레이 밀레니엄 상’의 내용이다. 그리샤는 이 상의 아주 유력한 수상 후보다. 그의 업적이 향후 2년을 더 기다리며 테스트를 견디어낸다면 그는 백만 불을 받게 된다. 그가 백만 불의 주인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수학계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지금 같은 행보로 보아 그가 냉큼 돈을 받아 챙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도 관계자들의 생각이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돈 백만 불을 감히 거절한다고? 백만 불이 무슨 껌 값이냐? 그리샤, 너 참 사람 놀라게 하는구나.

그렇다. 그러고 보니 우리를 놀라게 하고 뭔가 생각하게 하는 것은 페렐만의 학문적 업적보다는 그의 이 괴짜 운신법이다. 그의 행보는 돈, 명예, 권력으로 사람값이 매겨지는 시대의 물결을 거스르고 시대의 도덕률과 성공의 법칙을 넘어선다. 상트페테르스부르크로 찾아간 존 볼 경에게 그는 “문제를 풀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상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 대학들로부터의 교수직 제의만 거절한 것이 아니라 재직하고 있던 상트페테르스부르크 대학에서도 사임했다고 한다. 이런 운신은 그가 괴짜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찐이 은근히 자랑해마지 않던 ‘러시아의 정신성’이란 것의 한 자락에 연결된 어떤 삶의 원칙 혹은 가치관 때문인가?


모를 일이다. 러시아에서 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와 박사후 과정을 밟는 동안 그를 알고 지낸 미국인 동료들은 평소의 그리샤가 ‘딴 세상 사람’ 같았다고 회고한다. 그가 즐겨 추억거리로 얘기했던 것은 고향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숲에서 ‘버섯’을 찾아 돌아다닌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들을 종합해보면 그의 일련의 처신법이 돌발적 행동은 아님이 분명하다. 지금도 그는 딴 세상 사람처럼 버섯 하이킹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를 만나고 온 존 볼의 보고 가운데 심상치 않은 대목이 하나 있다. “그는 수학 한다는 것에 어쩐지 실망한 것 같았다”는 보고가 그것이다. 수학 그 자체에 실망한 것인지, 아니면 수학 한다는 사람들의 ‘노는 꼴’에 정나미 떨어져 ‘수학하기’를 그만두려는 것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유럽 수학회가 상을 주려 했을 때 그가 거절한 사유를 들어보면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 “심사위원들의 자격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가 수상을 거부한 이유다. 심사할 자격이 의심스러운 자들이 주는 상은 받지 않겠다--오 그랬구나, 그리샤, “차라리 버섯상이 낫지”가 그대의 메시지였구나, 잉? 그렇다면 세계수학자대회의 필즈메달을 거부한 것도 심상치 않군 그래.

우리가 궁극적으로 생각할 거리는 그리샤 페렐만 같은 사람이 지금의 대한민국에 태어나 학위를 한다면 그가 대학에 취직이나 할 수 있을 까, 버섯이나 따러 다니고 영광도 명예도 돈도 내팽개치는 사람이 한국 대학사회 어느 곳에 발붙일 수 있을까라는 문제다. 그가 천재라면 우리의 교육이, 우리 대학들이, 그런 유형의 천재를 길러내고 보듬을 수 있을까. 돈 될 ‘대형연구’ 같은 것에나 목매단 대학들이 혼자 외롭게 무언가를 추구하는 페렐만 스타일의 학자를 쫒아내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그리샤, 너는 한국에는 오지 말라. 여긴 버섯의 숲도 없다네.(도정일/경희대 명예교수, ‘책읽는사회’ 대표)

07. 07. 26.

P.S. 생각해본 결론은 내가 CEO도, 수학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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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7-27 00:48   좋아요 0 | URL
"심사위원들의 자격을 믿지 않기 때문”거참 말되네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페렐만이 저런 이야기하니 왠지 납득이 되는군요..^^그리고 돈 이야기나와서 말인데..페렐만이 거부한것은 클레이수학연구소에서 준다는 100만달러만이 아닌걸로. 필즈메달도 만만찮은 액수의 상금을 부상으로 준다고 합니다. 페렐만은 그것도 거부한거죠..

yoonta 2007-07-27 03:44   좋아요 0 | URL
페렐만 관련글을 찾아보니 이런 기사가 있더군요. 위의 글도 아마 이 내용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http://www.newyorker.com/archive/2006/08/28/060828fa_fact2?currentPage=1

로쟈 2007-07-27 08:45   좋아요 0 | URL
칼럼의 첫 내용이 필즈상 거부에 관한 것이죠.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장문의 기사까지 찾으셨네요.^^

전자인간 2007-07-27 15:32   좋아요 0 | URL
나이키 회장은 아시아인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 아시아 역사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나 보군요.

philocinema 2007-07-27 16:30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효과적 착취.

로쟈 2007-07-27 22:44   좋아요 0 | URL
착취 당하지 않으려면 나이키에 대한 책을 읽어야 할까 봅니다...

수유 2007-07-28 21:02   좋아요 0 | URL
<지혜의 일곱기둥>은 정말 아라비아의 로렌스 의 그 T.E.로렌스가 맞죠^^ 토마스 로렌스가 오뒷세이아를 산문으로 번역도 하였다 하더군요.. 그리고 루바이야트, 오마르 카이얌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요..페렐만도 요즘 꽤 회자되는 물리학자이구요^^

로쟈 2007-07-28 21:26   좋아요 0 | URL
페렐만은 수학잡니다.^^

수유 2007-07-28 23:52   좋아요 0 | URL
앗!! 수학자이지요. 더 이상 수학과 관련된 연구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지요마는..
 

낮에 처갓집에 갔다가 우연히 읽은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장인은 조선일보를 구독하시는지라 내가 가끔 건너가서(아파트 앞동이다) 들여다보는 건 조선일보의 주말판이다. 소설가 김훈과의 장문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안 했던 얘기'만 들어 있는 건 아니지만 신작 소설에 대한 구상은 나로선 처음 접한다(동시대를 다룬 그의 소설에 대한 기대는 http://blog.aladin.co.kr/mramor/1367796 참조). 구체적으로는 내년 겨울에 집필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하니까 그의 '대표작'을 생각보다는 일찍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아래 인터뷰는 <남한산성>을 7-8월의 사회적 독서목록에도 올려놓은지라 '시회적 독서'로 분류한다. 말미에는 후배작가 김연수의 인물평도 붙여놓는다.    

조선일보(07. 07. 21) [광일 기자가 만난 사람] 베스트셀러 ‘남한산성’ 소설가 김훈

김훈은 재작년 세금만 8700 만원을 냈다. 소설로 밥 먹는 한국 작가 중 최고 납세자 그룹에 속한다. 약속 장소는 일산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김훈은 자전거를 끌고 땀을 흘리며 나타났다. “(이 자전거) 1500만 원짜리야. (기사에) 써도 돼.” 그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자발적 편집이 필요했다. 3시간 반을 인터뷰하다 다시 옮긴 자리에서 그는 부드러운 사케(청주)를 다소 거칠게 마셨다.

2004년에 인터넷서점 YES24에서 대표작가들 중 ‘지금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을 물었다. 1위는 ‘토지’의 박경리였다. ‘앞으로 받을 것 같은 사람’은 1위가 ‘칼의 노래’의 김훈이었다. 요즘 그는 여러 북클럽에서 가장 모시고 싶은 첫 번째 손님이다. 4월 중순에 낸 ‘남한산성’은 갖가지 화제를 뿌리면서 이번 주까지 27만부를 찍었다. 물론 종합 1위다. 현대, 삼성, 금호, 아모레퍼시픽 등등 굴지의 그룹들도 그를 모셔간다. 강의료는 ‘200(만원)안팎’인데, 역사와 김훈에게 배우자는 열풍 같은 것이다. 검사들, 현직 교사들, 대학생들 강의 요청은 수십 개가 쌓여 있고, 틈을 내려고 최선을 다한다. 영화사에서도 3곳에서 접촉이 왔다. TV 드라마 제작사 2곳도 출판사에 의사타진을 했고, 뮤지컬도 2곳에서 오퍼를 넣었다. 심지어 CF 제안도 들어왔다. 요컨대 그는 이 시대 최고 인기작가이고 또한 부자다. 본격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약속을 했다.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안 했던 얘기만 합시다.” “…”



―몇 시에 일어나나?

“7시쯤 일어난다. 술 안 먹으면 6시쯤. 방 청소하고, 옷 입고, 신문 본다.”

―침대에서 자는가?

“장판 방바닥에서 요 깔고 홑이불 덮고 잔다. 나는 어디서든 문 열고 잔다. 문 닫으면 답답하다.”

―해외여행가면 호텔 방문도 열어 놓는가?

“해외여행 별로 안 간다. 작년에 프랑크푸르트에 간 것이 구라파(유럽)에 30년 만에 간 것이다. 나는 비행기도 싫다. 사람 묶어놓고 개밥 주고…. 증오하지. 엄마가 미국에 계셔서 뵈러 갈 때가 있긴 하지만 관광목적으로는 안 간다.”

―신문은 뭘 보는가.

“조선일보와 국민일보다. 내가 국민일보 근무할 때 평생 독자가 됐다.”

―신문은 어떤 면을 주로 보는가.

“뉴스면은 제목만 보고, 사설과 오피니언면을 꼼꼼히 읽는다. 논객들이 미리 설정한 틀 안으로 이 세계를 밀어 넣으려는 안간힘이 보인다. 세상이 그 안으로 들어갈 리가 없는데. 보편적 진리를 말하려는 강박에 빠져서 아무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자들은 이념의 일관성을 과시하기도 해. 이념을 일관되게 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나는 그런 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논객들을 보면 다 옳아. 틀린 소리 안 해. 그렇지만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옳은 말이 모자라서 이런 것은 아니란 말이지.”

김훈은 말 밭을 솎아 낸다. 뵈게 나 있는 문장들을 못 참는다. 몇 밤을 공들인 문장도 내 것이 아닌 듯하면 고랑을 뒤엎고 다시 김을 매듯 그 자리에서 버린다. 그래서 더디다. 작가라고 명함 박으면 누군들 안 그럴까 싶지만 그는 참 유난스럽다. 그가 2001년 동인문학상을 받았을 때 심사위원회는 한국 문단에 ‘벼락처럼 내린 축복’이라고 했었다.

―아침은 뭘 먹는가.

“과일, 야채, 된장국, 밥. 마누라가 주는 대로 먹는다. 난 식단과 돈에 대한 권력이 없어.”

―식사 마치면 바로 집필에 들어가나.

“9시쯤 시작되지. 연필 들면 오늘 글이 써지는지 안 써지는지를 알아. 안 되는 날은 종일 앉아 있어도 안 돼. 그런 날은 그냥 나가 놀아. 그러나 아침 9시부터 다음날 새벽2시쯤까지 쓸 때도 있어. 그런데 겨우 5장밖에 안 써지면 환장하지. 그것마저 맘에 안 들어 새벽에 버리기도 해.”

―점심은 어디서 먹나.

“마누라가 집에 있으면 집에 가서 먹고, 외출했으면 근처에서 해결하지. 가장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먹어. 김밥과 자장면. 자장면은 인이 박혀서 한동안 안 먹으면 먹고 싶어져. 맛의 근원 정서를 갖고 있어. 그 빌어먹을 찜찜한 게 생각나.”

―술은 무슨 술 먹나.

“소주는 안 먹으려 해. 빚을 내서라도 좋은 술 먹자는 생각이지. 싼 술 먹으면 몸이 부대껴. 요즘 와인을 배웠는데 최근에는 사케로 바꿨어. 와인을 마시면 계통 없이 취해서 너무 로맨틱해져.”

―계통 없이 취한다니?

“술이 뼈 속에 스며 논리의 계통이 무너져. 대신 위스키는 딱, 취하는 계통이 서지. 사케는 양쪽이 다 있어.”

김훈은 성큼성큼 냉장고로 가서 사케 ‘월계관’을 꺼내왔다. 안주는 마른 오징어에 고추장이었다.

―당신은 뭐 하냐고 물으면 ‘논다’고 대답할 때가 많다.

‘논다’는 건 매우 치열한 행위야. 작가에겐 세상을 관찰하는 행위지. 나는 혼자서 잘 놀아. 자전거 타고 나가 바람 쐬고 노을을 본다고. 놀면서 세상을 들여다 보고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구나 하는 것을 알게 돼. 노을이나 바람 속에 있다는 것은 내가 시간 속에 있다는 얘기야. 생애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을 어떻게 언어로 포착해서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답함이 있는 거지. 결국 할 수 없는 것이고.”

―당신은 세상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쓴다. 감정을 표백해버린, 강시들의 언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죽고, 통치자로서만 기능한 임금의 언어다. 작가의 매혹적인 오만과 전지전능의 시각에서 나올 수 있는 문장만 쓴다. 유머를 혐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수다를 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어. 나는 내 문장이 뼈만 가지고 있으면 좋겠어. 골격만…. 뼈 안에 모든 정서나 정한(情恨)이 저절로 드러나길 바라는 것이야. 나는 내 문장이, 말하자면, ‘귀족의 문체’를 완성하는 것이길 바래. 유머? 나는 뼈대 안에 유머가 있다고 생각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아니지. 기자 시절에 배운 스트레이트 문장에 대한 편애와 집착이 있는 것이고.”

―당신은 말과 글을 경멸하면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 말은 ‘쓰레기’고 글은 ‘똥’이다. 그래서 꼭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나머지는 절대로 내뱉지 않는다. ‘…같은’, ‘…처럼’ 같은 비유법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말과 글을 경멸하면서 말과 글로 먹고 사는 것,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밥벌이의 지겨움’인가.

나는 말과 글을 불신하는 사람인데, 경멸까지는 아니야. 혐의를 두는 정도지. 그것들이 소통 가능한 것인지 의심해. 객관적 진실에 도달할 도구인지 불신하는 것이지. 그러나 결국 말을 안 하고는 살 수 없으니 신뢰할 수는 없고 말을 끌고 살아가.”

―산성에 갇힌 신하들에게 임금으로부터 적장 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글을 쓰라는 명이 떨어진다. 결국 최명길이 그 글을 썼고, 임금은 그 글을 밟고 나가서 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당신은 현실주의자인가. 글을 밟고 지나가 길을 내겠다는 것인데, 그 길은 어디로 뚫려 있는 것인가. 결국 삶을 도모하는 도생(圖生)의 길이 옳은 길인가.

“나는 누구의 편이 아니야. 고립 무원의 성 안에서 양대 담론의 축은 김상헌과 최명길이지. 서로 부딪치고 뒤엉켜 무화(無化)되는 것을 그리려 했던 것이야. 인조가 걸어간 길은 선택해서 간 것이 아니야.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간 것이지. 인조가 서문(西門)에서 삼전도까지 걸어갈 때 비로소 만 백성의 아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죽더라도 뜻을 남기자는 김상헌과, 임금에게 살길을 열어주려는 최명길, 그들 사이에 임금은 뜻은 양쪽에 다 걸려 있었다. 그러나 대장장이 서날쇠가 결국은 이 땅을 메워간다. 이 작품에서 작가 자신이 가장 많이 투영되어 있는 인간은 임금인가, 최명길인가, 서날쇠인가.

"나는 가령 내가 그 시대에 지식인으로 태어나서 임금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면 어떤 행동으로 47일을 견뎠을까 생각해봤어. 등에서 진땀이 나고 사지가 떨렸어. 글을 못 쓰겠더라고. 짐작컨대 나는 아무 말도 안 하는 자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내 소설 속에 아무 말도 안 하는 자를 그리려 했는데 그릴 수가 없었어. 입 닥치고 있는 지식인을 그리고 싶었는데 못 썼어. 이 놈이 빠졌으니 이번 소설은 미완성인 것이야.”

―일반 독자들이 가장 많이 거론하고 있는 대목은 김상헌이 강을 건넌 다음 뱃사공의 목을 베는 장면이다. 그리고 김상헌은 눈물을 흘린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독자들은 ‘가볍고 온순했다’에서 전율한다.

“사공은 죽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이지. 그러나 김상헌은 그 놈을 살려줄 수가 없는 것이야. 사공을 설치하는 것은 그냥은 못 건너는 강, 그만한 고통을 치러야 하는 강이란 점, 사공을 죽여야 한다는 점 등을 그리려 했던 것이야. 마지막에 ‘눈물’을 넣을까 말까 몇 번 망설였지. 그 놈의 두 글자가 들어가서 이것이 뽕짝이 된 거야. 눈물이 들어가야 인간의 냄새가 나긴 하는데. 그참. 괴로웠어. 그 두 글자가 추잡했어. 써야만 독자가 알아 먹는 것인가. 이상해.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 재판 찍을 때 빼버릴까….”

―당신의 작품들은 놀랍게도 ‘서정적 국가주의’를 호흡하고 있다. 국가주의로만 침투하기 힘들 때는 그곳에 ‘허무’를 함께 섞는다. 당신의 이번 작품도 ‘조국의 성’에 바친다고 했다. 그 조국은 운명론적으로 갈 길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허무라고 말한다. 흡사 파울로 코엘료가 자주 쓰는 ‘마크툽’이란 아랍어를 떠올리게 한다. ‘어차피 그렇게 되어 있는 일’이란 뜻인데, 그들의 운명은 ‘마크툽’이었는가.

“서문에 ‘조국의 성’이라고 썼는데, 나는 조국이란 단어를 내 평생 처음 쓴 것이야. 내가 감히 쓸 수 없는 단어였어. 내가 조국을 쓴 뜻은 내 역사적 혈연을 말한다기 보다 삶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야. 삶은 단념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국가도 마찬가지라 생각해. 개인의 윤리와 국가의 윤리는 다른 것이야. 개인은 치욕을 참지 못해 순국선열처럼 자결할 수 있지. 그러나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없어. 국가는 그런 윤리의 길을 갈 수 없어. 국가가 자멸의 길을 간다면 죄악이지. 국가는 치욕을 걸머지고 살아 남는 것이 도덕이야.”



김훈은 “지금도 무슨 부대라고 얘기하면 절대 안 되는” 곳에서 37개월 군역을 치렀다. 고려대 영문과를 다니다 군대 갔는데 돈이 없어서 복학을 못했다. 그는 휘문고 졸업이다. 그는 “군대 가니까 정말 좋더구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로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육사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것에 실패해서 기자가 됐고, 지금은 작가다. 사적인 이야기로 잠시 화제를 바꿨다.

―키, 몸무게?

“172㎝, 63㎏”

―시력은? 안경은 언제 쓰는가?

“시력도 청력도 나빠. 귀가 안 들려 병원에 갔더니 노화 현상이라면서 못 고친대. 귀가 나빠져도 괜찮아. 듣고 싶은 것도 없고. 그러나 눈이 안보이면 안 되지. 책을 못 읽잖아.”

―영화 볼 때는 안경을 쓰지 않나.

“영화를 안 봐. 내 생애에 지금까지 5개도 안 봤어. 나이 먹고 가려니 컴컴한데 가기 싫고, 냄새 나고, 껌 씹고…. 영화뿐만 아니라 테레비도 안 봐. 뉴스만 봐. 인이 박힌 것이지, 기자질을 많이 해서. 뉴스는 하루만 안 봐도 큰 일이 벌어져 있더군. 나라가 뒤죽박죽이니까 그렇지. 뭔가 무너져 가고 있어. 뉴스 장사 해먹기가 정말 좋은 나라야.”

―삐뚜름하게 모자를 쓰고 다니는 이유는 무엇인가.

“머리카락이 빠져서 그래. 병원 갔더니 직사광선 받지 마라고 하데. 패션이 아니야. 일종의 노인용품인 게지. 겨울에는 안 써.”



김훈과 이야기하면서 자전거를 빼놓을 수는 없다.

―1500만 원짜리 자전거도 있나.

처음 10만 원짜리는 타다 버렸어. 지금이 네 번째야. 조립품이니까 다국적이지. 내가 원하는 것은 가볍고, 튼튼하고, 고장 안 나고, 세 가지야. 미관은 필요 없어. 4000만 원짜리도 봤어. NASA가 개발한 카본소재로 만든 자전거야. 어떤 놈이 그 자전거를 끌고 왔길래 10분만 타 보자고 해놓고 1시간을 탔지. 진짜 좋더군. NASA는 얼마나 위대해. 나 같은 놈까지 매혹시키니까. ‘남한산성’ 팔아서 그거 살 거야. 귀족 취미라고 비웃는 놈들이 있는데 30년 동안 야근한 끝에 지금 1500만 원짜리 타는데 뭐가 잘못이야.”

―대회에도 나간다는데.

“9월7일부터 8일까지 전남 월출산에서 40㎞코스를 열 번 왕복하는 400㎞ 대회가 열려. 전국 레이서들이 오는데 나도 가서 한판 붙을 거야. 월출산을 넘는 아름다운 코스야. 차밭도 지나고. 꼴등을 하더라도 갈 거야. 지금 체력 강화훈련을 하고 있어. 최소한 20등은 해야 되는데….”

― ‘기록’이 얼마나 되나.

“경기장에서 쟀더니 내리막에서 50㎞가 나오데. 선수들은 평지에서 80㎞쯤 나오고, 나는 평지에서 30㎞수준이야. 그것도 무서워. 30㎞로 10분 이상을 못 달려. 400㎞를 간다면 지구력으로 가는 것인데, 몇 놈 꼬꾸라지겠지. 나중에 스퍼팅해서 따라잡아야지.”

김훈은 자기 이름이 새겨진 원고지에 연필로만 집필한다. 김훈이 팬 사인회를 할 때는 그에게 반한 여성 독자들이 장사진을 친다. 그들 중에는 연필을 선물하는 여성도 많다. 최고급품으로 치는 연필이 독일산 스테드틀러 HB다. 김훈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 연필을 자랑했다. “나 좋아하는 ‘부녀자’가 준 것이야.” 이런 대목에서 그냥 ‘여자’라고 하면 김훈이 아니다.

―방송이든 신문이든 공개 장소에서 대화를 할 때 말을 문어체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족들과도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가.

“나는 어문일치에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말과 글은 전혀 다른 것이야. 한글지상주의자들이 한자를 배격하는 것은 야만적 폭거야. 나는 나의 글과 말에 한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다 써.”

―‘비호’를 쓴 소설가이자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김광주 선생이 아버지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무엇인가. 문장인가. 정신인가.

나는 유산이라고는 숟가락 하나 받은 게 없어. 우리 집에 장안의 글쟁이들이 다 왔어.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아버지를 묻고 와 그 묘지 값을 못내 13개월 월부로 갚았어. 제대 후(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는데 첫 월급이 2만5000원이야. 아버지가 장흥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히셨는데, 외판원이 와서 내 봉급에서 묘지 값으로 7000원씩 떼 갔다고. 월부로 다 갚고 나자 그쪽에서 10평 묘지에 대한 문서를 주데. 이제 네 것이다. 그날 산소 가서 소주 먹고 통곡했어. 그런 아버지야. 허랑방탕하고 술을 엄청 먹었지. 상해에서 김구 캠프에서 한 20년 먹고, 광복된 서울에서 먹고, 6·25때 부산 피난 가서 먹고, 수복 후 명동서 박인환과 먹고…. 나는 지금 술 먹는 것도 아니야. 아버지는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따라다니며 술 먹었지. 술의 본류를 따라다니며 먹은 것이지.”

―지금도 아버지 편인가.

“지금도.”



김훈의 소설에는 열렬한 팬들이 많다. 반대로 그의 문장에 대해 안티들도 있다. 문체 미학의 매혹이 너무 강렬해서 금세 피로증세를 느낀다는 독자도 있다. 그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목숨 걸고 쓰는데 하루에 원고지 3장 밖에 못 쓰고, 그나마 갖다 버리는데, 그들이 모르겠다면 난들 어쩌겠어. 헤어질 뿐이지. 사실 나는 독자들을 고문하고 싶었어. 잔혹하게 끝까지 고문하자. 희망은 안 보이는데 고문만 하면 결국 나를 이해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었어.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독자를 고문해서 사지로 몰아넣듯이 했어. 기름 짜는 압유기에 넣어 독자를 짜려고 했어. 그래야 그들이 정신을 차리는 것이지. 그래야 김훈을 욕하더라도 삶과 역사를 생각할 것 아냐.”

그런 김훈의 책상 위에는 천칭저울이 천장으로부터 걸려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한의사였는데 물려 받은 것이다. 김훈은 한의사도 소설가도 시대의 중인(中人)계급이라고 생각한다. 중인만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고 믿는다.

―내년이면 육체적 나이로 ‘환갑’이다. 그러나 당신은 소설을 낼 때마다 ‘나는 신인이다’고 했었다. 이제 세계적으로 이름이 크게 알려지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신인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신인으로 살다 죽으려고 해. 신인은 문화의 꽃이지. 전위와 아방가르드라는 점에서. 이류나 삼류더라도 전위가 돼야 해. 그게 안 되면 문학은 망해.”

―대표작을 썼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내년 겨울에 쓰려고 해. 내가 살아온 시대, 아까 말한 희망이 좌절된 시대를 쓰는 것이지. 세상과 부딪쳐 좌충우돌하는 기자를 주인공 삼을 거야. 애인은 도망가고 좌충우돌만 남은 기자. 금방 쓸 수 있을 거야. 당대를 쓰는 것은 소설가로서 치사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어. 우리 청춘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지.”

―당신이 살아온 시대의 대부분을 당신은 기자로 살았다. 기자(언론인)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은 무엇이 가장 크게 다른가.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점 말고.

작가가 되면 자기가 자기를 통제해. 기자는 육군처럼 삼엄한 기율과 통제가 있잖아. 소설가는 스스로 통제 않으면 날라리 깡패가 되는 것이지. 자기 통제가 어렵고 슬퍼. 나를 통제할 놈은 없고, 대신 욕하고 비판하는 놈은 많아. 그것은 처절하게 외로워. 나는 우리 선배들이 정계, 금융계, 관계로 가는 것 좋다고 생각해. 언론계의 수많은 엘리트가 경륜을 펴고 세상에 발전을 가져오니 좋잖아. 언론계에 뼈를 갈아 바치는 것만이 순수한 언론인이라고는 생각 안 해.

―기자로서의 경력 가운데 한국일보, 시사저널, 국민일보 그리고 한겨레신문으로 옮겨다닌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조직과 후배에 대한 불화가 많았어. 나는 엉기는 것이 싫어. 그들은 자꾸 신문사를 혈연집단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나는 정말 싫었어. 나는 회사를 떠날 때도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 지금도 미래에 대한 공포가 없어. 나의 천부적인 자질이야. 백척간두에 서면 뛰어내리는 거야. 그리고 살아 남아. 나는 낙법을 안다고. 노무현 대통령은 못 뛰어내린 거야. 그래서 지금 저 모양이 된 거지. 1989년12월31일 한국일보에서 나올 때 다시는 언론사에 안 가려고 했어. 80년대를 하도 비굴하게 살았기 때문이지. 굴욕, 치욕, 죄악이 있었지. 90년대 들어 1년을 방랑하니까 쌀이 없어. 그때는 술 많이 먹었어. 남해안을 돌면서 뼈가 삭고 똥물이 나오도록 마셨지.”

김훈은 국가에 감사한다고 했다. 자신의 책을 사고,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교육 받은 독자를 국가가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조국이 수십 년 동안 수백 조의 돈을 투자해서 교육 받은 인간을 만들어 놓았기에 자신이 먹고 산다는 것이다. 국물을 부어주던 단골 어묵집 직원 정혜은 양은 “(김훈 선생이)처음에는 무서웠으나 갈수록 따뜻하고 귀엽다”고 말했다. 김훈은 마지막에 말했다. “ ‘남한산성’에 그 모든 역사의 하중을 걸지 말라고!” 그는 취했다. “민중들이 숫자의 힘으로 덤비면 안돼. 나는 숫자의 힘에 절대 지지 않아. 문체라는 것은 문명을 지배하는 것이야.”

조선일보(07. 07. 21) 소설가 김연수 ‘내가 본 김훈’

그의 작업실 칠판에는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말이 적혀 있다. 10년 전쯤, 나는 잡지사 기자, 그는 신문사 기자였을 때 그의 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삼각파도 대처법에 관한 매뉴얼 책을 추천했다. 선원들이 보는 책이었다. 그는 닦고 조이고 기름칠 때,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영혼은 수리공에 가깝다. 공구에 대한 그의 페티시즘적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공구로도, 매뉴얼로도 대처할 수 없는 일에 관해서라면 그의 문장은 그쯤에서 멈춘다.

공구와 매뉴얼이 없다면 아마도 그는 쓰지 못할 것이다. 그건 그가 20여 년 간 몸담았던 직장의 직업윤리였다. 그가 ‘겨우’ 쓰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는 단어의 운용에도 매우 인색한데, 그 역시 공학적으로 한글을 다루기 때문이다. 자음과 모음을 이리저리 연결시켜서 얻어내는 문장이어서 그의 글은 만연체가 불가능하다. 그 글은 또한 언제라도 자음과 모음으로 해체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문장은 허무한 느낌마저 든다. 언젠가 해체될 것을 알면서도 조립해야만 하는 자의 허무다.

조립하고 해체하는 세계 너머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지는 언어로는 그 세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그럴 때 보면 그는 ‘공자(孔子)주의자’다. 매뉴얼대로 공구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다. 그가 최상의 인간으로 믿고 있는 사람은 육군 대위인데, 그 까닭은 육군 대위야말로 필드 매뉴얼에 가장 근접하게 행동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에게 육군 대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음악가다. 그들은 공학적으로 행동한다.

그의 고향은 서울 삼청동이다. 그러므로 그건 사대문 안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감각이리라. 시정에는 시정을 움직이는 원리가 존재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 원리를 지킬 때, 시정은 즐길 만한 곳이다. 공구와 매뉴얼의 세계를 믿을 때, 그는 세상 안에서 잘 놀 수 있다. 그러니 계속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만 하리라. 그래야만 이 세계를 한 번 더 지독하게 긍정하면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내가 들은 가장 인상적인 말은 “내년 봄까지 술값은 모두 내가 낸다”였다. 어느 해 가을이 한참일 무렵, 들었던 말이다. 적어도 꽃이 필 때까지는 함께 술을 마실 수 있겠구나고 혼자 안도하던 찰나, 그가 덧붙였다. “내년 연말까지는 김연수가 사라.” 다행이다. 그리고 몇 해가 더 흘렀지만, 우린 지금껏 아주 잘 놀고 있다. 술은 거의 대부분 그가 산다. 정말 다행이다.

07. 07. 22.

P.S. 김훈의 오랜 독자로서(내가 기억하는 건 한국일보의 '문학기행'을 연재하던 시절부터의 김훈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풍경과 상처>(문학동네, 1994)와 <남한산성>(학고재, 2007)이다(그 사이에 <자전거여행>이 있다). 나는 <남한산성>을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풍경과 상처>는 여러 권의 책을 사서 여러 번 읽었다. <풍경과 상처>에도 윤선도와 관련하여 남한산성이 언급되는 대목이 한 군데 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쫓겨간 임금이 삼전도로 내려와서 청태종에게 투항하자, 해남에 은거해 있던 윤선도(1587-1671)는 지체없이 배를 내어 섬으로 향했다. 윤선도의 배는 치욕의 육지 맨 끝, 토말(土末)에서 출항했고, 육지의 한복판에서 임금은 치욕을 수용하는 용량을 극대화함으로서(*'극대화함으로써'의 오타이다) 창민과 국토를 겨우겨우 보존했다. 임금이 인욕의 붉은 옷을 걸치고 성문을 나설 때 눈덮인 겨울 산성에 통곡소리 가득했으나, 울기는 쉬운 일이었고 살아남기는 어려운 일이었다."(56쪽)

이 대목을 포함하고 있는 글 '낙원의 치욕'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윤선도는 향년 85세로 부용동 낙서재에서 죽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기간은 모두 20년에 달했고 유배지는 함경도 경원, 혹은 삼수갑산 같은 극지였다. 그는 유배와 유배 사이의 19년을 보길도나 해남에서 은둔했다. 은둔과 은둔 사이사이에 그는 또다시 격렬한 언어를 동원하여 당대현실을 공격했고, 그 결과는 또다른 유배였다. 보길도가 윤선도의 낙원인지, 아니면 함경도 경원과 삼수갑산이 윤선도의 낙원인지 보길도에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당대 현실의 양쪽 극지에 보길도와 삼수갑산이 있다. 보길도에서 삼수갑산의 거리는 멀고 멀다. 그의 낙원은 아마도 그가 한번도 발붙일 수 없었던 '당대 현실' 안에 혹시 있다면 있을 터이었다."(59쪽)

그렇게 적은 김훈 또한 소설가로서 바야흐로 '당대 현실'에 밭을 내딛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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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22 16:27   좋아요 0 | URL
이 글 보고 김훈에게 궁금한거 두 개. 하나는, 한국일보, 시사저널, 국민일보 그리고 한겨레신문. 근데 왜 국민일보에 애착을 가지고, 조선일보를 구독하는지 묻고 싶어요. 두번째는,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 묻고픈데 전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네요. 이번에 참언론실천연대 지지성명에 김훈과 고종석씨 빠져있었는데... 제게는 관심은 많이 가는 사람이면서 호감도는 마이너스인 작가입니다.

로쟈 2007-07-22 20:08   좋아요 0 | URL
어떤 신문을 보느냐는 그의 취향이죠.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서는 이전에 다른 인터뷰들에서 언급한 걸로 기억됩니다. 그가 후배들에게 한 얘기들도 찾아보면 나올 듯한데요...

과객 2007-07-22 22:2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비싼 자전거라 딱 김훈의 포즈와 맞아 떨어지는군요. 누구는 놀라 쳐다볼수도 누구는 그래봤자 자전거지... 나름대로 합치된 몬가를 꾸미는 모양인데 그게 몰지... 그것까지 확인해본 후 판단해도 늦지 않을듯...

바벨의도서관 2007-07-23 19:03   좋아요 0 | URL
왜 국민일보를 -애착이 아니라- 구독하냐면, 필시 수년 전 국민일보 평생구독 운동을 펼칠 때에 국민일보 직원들도 모두 강제로 해야 했기 때문이겠죠(당시에 들어온 엄청난 수입을 조용기 목사의 철없는 아들의 경영 실패로 날려버렸지만 말입니다).

수유 2007-07-23 21:56   좋아요 0 | URL
와인을 마시면 계통 없이 취해서 너무 로맨틱해져..나는 저런 말이 좋습니다. <풍경과 상처>도 좋고. <남한산성>도 좋고. <칼의 노래>도 좋았습니다.


마누스 2007-08-09 16:14   좋아요 0 | URL
김훈 소설이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만, 제가 과문해서 그런지 그의 소설을 '비판'적으로 논한 글(고명섭 기자의 글 정도)을 별로 못 봤습니다. 김훈 소설(및 김훈 소설이 많이 팔리는 현상)을 '좌파'(김훈이 스스로 우파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므로)의 입장에서 치밀하게 비판하는 글이 하나쯤 나왔으면 좋겠군요.

로쟈 2007-08-09 16:26   좋아요 0 | URL
'좌파소설'과 '우파소설'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해주시면 비판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누스 2007-08-09 16:49   좋아요 0 | URL
저는 '좌파소설'과 '우파소설'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김훈의 소설이 우파소설이라고 한 적도 없는 걸요. 다만, 김훈이 인터뷰에서 스스로 '보수주의자'다, '혁명은 실패했다' 등의 말을 하는 걸로 보아 좌파(적어도 지젝이 말하는 급진적 좌파)는 분명히 아니고, 그렇다면 아직도 '(자본주의를 뒤엎는) 혁명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좌파의 입장에서 뭔가 그럴듯한 비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마누스 2007-08-09 16:53   좋아요 0 | URL
써놓고 보니, 굳이 '좌파'의 입장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좌파의 입장이 아니라도 괜찮으니 그럴듯한 비판이 좀 나왔으면 합니다. 김훈 소설이 너무 '무비판적'으로 읽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로쟈 2007-08-10 18:39   좋아요 0 | URL
이견을 표시하는 문단의 한 가지 관행은 '침묵'입니다. 김훈은 대중적인 지명도에 비해서는 비평적 주목을 덜 받고 있는 작가입니다(공지영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한 바 있지요). 언제부터인가 '불편함'을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비판'이 아니라 '무시'이며, 이 점은 김훈에 대해서도 충분히 표현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