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벌어진 미술계의 스캔들 때문에 학벌숭배, 학력자본 같은 키워드를 들먹이게 됐는데, 그 자연스런 귀결은 '학벌사회'를 타파하고 학력자본을 넘어서자는 것이 되겠다. 어떻게? 가령, '외모자본'은 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 역시 '학력' 못지 않게 만만찮은 '자본'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자본임에는 틀림없다. 대안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보이는데(요샌 외모 역차별도 있다잖은가?). 혹 '지능성형'까지 가능해진다면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세상이 될지는 모르겠다. 

한국일보(07. 07. 13) '학력 자본'을 넘어… 새로운 권력 '외모 자본'

연예인 성형 고백의 원조인 탤런트 김남주. 그가 한 TV프로그램을 통해 성형수술 사실을 밝힌 2001년만 해도 연예인의 성형수술은 열애설 만큼이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살이 빠져서 그렇다”, “치아교정을 해서 달리 보이는 것 같다”가 성형 논란에 휩싸인 연예인들이 쏟아 내던 단골 멘트. 하지만 이제는 “연도별로 조금씩 보수해 나갔다”는 탤런트 현영의 파격적인 발언조차 그다지 놀랄만한 뉴스가 아니다. 성형수술에 관대해진 대한민국 여론. 불과 몇 년 만에 어떻게 이런 큰 변화가 인 것일까.

■ 학력 자본보다 강력한 외모 자본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가 전신 성형수술로 사랑과 성공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다는 내용의 영화 <미녀는 괴로워>. 성형수술을 바라보는 대중의 달라진 시선을 그대로 반영한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말 개봉된 이 영화는 흥행면에서 성공을 거뒀을 뿐 아니라 얼마 전 제 44회 대종상영화제에서는 여우주연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역시 성형수술을 소재로 비슷한 시기에 제작ㆍ개봉된 <신데렐라>, <시간> 등이 성형수술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그린 것과 달리 중립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영화를 만든 김용화 감독은 기획 의도를 묻는 질문에 “한국 사회는 외모에 관한 계급이 분명히 존재하는 사회”라고 답했다. 김 감독은 “영화를 기획하던 2002년만 하더라도 성형에 대한 사회 인식은 부정적인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누구나 낮은 계급에서 높은 계급으로 진출하려는 욕구가 있는 만큼 외모의 ‘계급’을 높이려는 성형수술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고 말했다.

한 영화평론가는 “영화는 부화하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리게 마련”이라면서 “2000년대 후반 한국 영화 최고의 이슈가 부동산과 성형수술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이제껏 학력 자본에 매달려 온 한국사회가 이제 외모 자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에 눈을 뜨게 되면서 성형수술을 일종의 자기계발이나 성공의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 예뻐지고 싶다=젊어지고 싶다
성형수술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달라진 인식은 중ㆍ장년층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서도 읽을 수 있다. 최근 40, 50대에도 젊고 건강하며 경제력이 있는 여성인 나우족(NOWㆍNew Old Women)이나 남성인 노무족(NOMUㆍNo More Uncle) 등이 등장하면서 중ㆍ장년층의 성형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지고 있다

심영섭 심리학 박사는 ‘루키즘(Lookismㆍ외모지상주의)’의 확산을 지적하면서, 고령화 시대에 수반되는 ‘동안 열풍’을 성형수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주 요인으로 꼽았다. 심 박사는 “고령화사회에 접어들면서 젊어지고 어려 보이는 것에 대한 욕망이 커지고 있다”면서 “‘은퇴는 제 2의 인생’이라는 식의 광고가 확산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장년들의 젊어지고 싶은 욕망과 아름다운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인 욕구가 결합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성형수술에 매달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 자연미인 같은 인공미인
최창호 사회심리학 박사는 “현대사회에서 자연의 힘만으로 이뤄진 것은 없다”며 “경제력과 기술 발달이 결합되면서 인공적인 미도 또 하나의 미로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난히 잦아진 연예인의 성형수술 고백에 대해 대중과 매스컴이 대체로 ‘용감하다’, ‘솔직해서 좋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ㆍ원형)’에 대한 집착이 바탕에 있다는 의견도 있다. 대중은 선망의 대상인 연예인도 ‘원래는 나보다 못한 외모였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고 열광적인 박수를 보낸다는 것이다.

여전히 자연미를 더 우월하게 본다는 차원에서 의료기술의 발달이야말로 일반인들이 성형수술을 자연스럽게 혹은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진짜 배경이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수술의 부작용에 대한 걱정도 한층 덜게 되고 자연미인에 가까운 인공미인의 등장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김소연 기자)

한국일보(07. 07. 13) "내 인생은 나의 것" 성형수술 전성시대

생긴 대로 살라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외모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 고치면 더 좋아진다는데 굳이 ‘자연 그대로’를 고집해야 할 것은 뭐란 말인가. 영화<미녀는 괴로워>가 여실히 입증했듯, 연예인 현영이 TV브라운관을 통해 성형수술을 고백하고도 당당히 톱스타가 됐듯 2007년의 대한민국은 성형수술에 사뭇 관대하다. 외모지상주의라는 비난에 쉬쉬했던 시절은 가고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이자 자신감 확보를 위한 결단으로 받아들인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처럼 성형외과를 찾아 자기애를 사는 사람들. 민감하지만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성형수술 전성시대의 현주소를 이번 주 프리가 살짝 엿봤다.

바텐더로 일하는 A(29ㆍ여)씨는 4년전 처음 수술을 받기 시작, 이마 코 눈 안면윤곽에 이르는 일명 ‘얼굴 종합 4종 세트’ 성형을 끝냈다. “평소 사각턱에 대한 불만이 많았어요. 성형수술이 뭐 별건가요. 외모가 바뀌면 자기만족을 느끼고 남들 보는 눈도 달라지니 사회 생활하기 훨씬 좋아졌어요.”
A씨는 성형수술을 여러 차례 받은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굳이 광고를 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창회에서 “어머, 너 용 됐다”는 친구들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숨겨도 다 알아봐요. 그리고 친구들 열이면 일곱은 성형 경험이 있는데 숨길 필요가 있나요.” A씨는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 눈 근육수술과‘귀족(貴族) 수술’이라 불리는 입가 주름교정 수술도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패션광고 디렉터이자 저술가로 활동하는 S(43)씨는 남성이지만 성형수술 예찬론자이다. 콧대를 높이고 콧망울을 좁혔으며 쌍꺼풀 수술을 받는 등 10년에 걸쳐 약 7차례 수술대에 올랐다. “외모를 중시하면서 내면의 아름다움만 가치 있다고 말하는 건 위선”이라는 S씨는 “못생긴 사람을 박대하면서 고쳐도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에요. 생긴 대로 살라니요. 내면과 외면 모두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죠.”라고 말한다.

중소기업 대표 Y(45ㆍ여)씨는 비즈니스를 위해서 수술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대인관계가 많은 편이라 젊고 활기찬 인상을 주려고 이마와 목의 주름을 제거한 것이 시작. 이후 쌍꺼풀 수술을 받았으며 내친 김에 볼의 자가지방 이식수술과 복부 지방흡입술도 받았다. “주변 친구들이 너무 자주 수술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사실 은근히 부러운 마음에 하는 시기어린 이야기로 들려요. 성형을 받는데 나이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감 충족에 도움만 된다면 이거 이상 좋은 게 있을까요.”

홍보 일에 종사하는 C(26ㆍ여)씨는 ‘여자는 무덤에 들어갈 때도 예뻐야 한다’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중학교 때 처음 쌍꺼풀 수술을 받은 경우다. 대학에 들어가서 안면 윤곽수술을, 지난해에는 동글동글한 코끝을 쭉 펴주는 수술도 받았다. “성형수술을 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과연 자신을 위해 무엇을 투자하는지 되묻고 싶다”는 C씨는 “긍정적으로 사는데 도움을 주는 한 계속 수술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형수술에 대한 관대한 시각은 수치로도 나타난다. 프리가 우리 사회의 성형수술 관용도를 알아보기 위해 최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0명중 6명은 성형수술을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지난 1~7일 인터넷을 통해 G마켓과 공동으로 전국의 남녀 5,8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무료 수술의 기회가 주어지면 성형수술을 받겠다는 응답자는 70% 를 넘었다. 경제적 부담이 없다면 성형수술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대한성형외과학회가 전국 65개 대학병원을 대상으로 2005년 5월부터 1년간 성형수술 건수를 집계한 결과 총 7만3,714건이 시행됐다. 이중 순전히 미용을 위해 이뤄진 성형수술은 1만7,501건으로 23%에 이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용 성형수술이 대학병원이 아닌 일반 성형외과(2006년 말 현재 629개. 이중 )에서 이루어지고, 건강보헙급여 대상이 아니기에 정부 통계가 잡히지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성형수술 횟수는 대폭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해서 성형을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곱지는 않다. 중소기업체에 다니는 B(34)씨는 학창시절에 눈과 코 수술을 받은 후 지난해 10년 만에 수술 부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재수술을 받았다. 당시 ‘이렇게 약 먹듯이 (수술을) 받다간 걷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성형은 중독성이 있어요. 아무리 사회적으로 관대해졌다 해도 여전히 성형이 진짜 필요한지, 한때의 바람은 아닌지, 심사숙고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07. 0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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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avinsky 2007-07-13 00:3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전 오히려 "외모야 나중에 고치면 얼마든지 트랜스포밍(?)할 수 있으니깐 마음씨를 보자"는 생각이...(아 언제쯤 궁상맞은 솔로 생활을 청산할련지...ㅜ.ㅜ)

그러고 보니깐 연예계는 온통 일급 기술로 완성된 트랜스포머들 세상이군요.

로쟈 2007-07-13 09:07   좋아요 0 | URL
성격도 대개는 외모를 따라가던데요...

LAYLA 2007-07-13 02:23   좋아요 0 | URL
학교 축제때 응원단 소개를 쭈욱 하는데 신입생들이라 그런지 성형티가 너무 나는 거에요. "어머 쟤는 쌍꺼풀 어머 쟤는 코.." 이러고들 있는데 제 친구가 한명을 가르키며 "와 저애 이쁘다. 성형안한거같애. 그래서 더 이뻐."라고 했는데...잠시 뒤 이름을 들은뒤 "어머어머 저애 내가 알던애야 고등학교 1년 후배인데 성형해서 못알와봤어 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연스러운 성형이었던게죠 ^.^

로쟈 2007-07-13 09:09   좋아요 0 | URL
대학가에서도 새학기에 전학기와는 다른 얼굴이 눈에 띄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합니다(학생부 사진으로는 식별이 잘 안되는)...

마늘빵 2007-07-13 09:13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 라일라님 넘 웃겨요. ㅋㅋㅋ

기인 2007-07-13 21:12   좋아요 0 | URL
멍청한 명문대졸자는 충분히 많은 것 같은데요. ㅋㅋ
정치인들 보면..
대표적으로으로는 이인'재'씨... -_-;;

2007-07-14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7-15 15:55   좋아요 0 | URL
저도 동생들이 다 의사이긴 하지만 다른 책 읽을 시간들은 없나 보더군요. 그래도 신문마저 보지 않는다면 좀 심한데요...
 

어제 한국에서의 영어열풍에 관한 논평/좌담 기사를 모아놓았었는데, 담비에 실린 '과학기술계 속의 한국인과 외국인'이란 칼럼의 리뷰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외국인'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과연, 외국인이란 무엇인가?). 마침 거론되는 게 '러시아 애들'인지라 '영어 조기유학 문제'에 견주어 '러시아 애들 문제'라고 이름붙여둔다.

담비(07. 07. 12) "논문은 왜 써? 그냥 러시아 애들 시키지”

한두해 전 국내 모 유명(?) 과학자가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며 온 매스컴을 달군 적이 있었다. 과학을 설탕처럼 달콤한 민족주의적 색채와 절묘하게 혼합시키며 수많은 한국인들을 눈물이 찔끔 나도록 열광시켰다.

이론물리학자로 끈이론에 대한 연구로 주목받아온 이수종 서울대 교수가 ‘과학과기술’4월호에 ‘과학기술계 속의 한국인과 외국인’이란 칼럼을 실었다. 내용인즉 이렇다. 이 교수는 매달 정기적으로 갖는 학술토론을 마치고 여러 동료학자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화제가 국내에 있는 외국인 유학생 및 연구자에게 옮겨갔다.

그 때 평소 민족주의라면 부르르 몸을 떨며 열변을 토해내는 H대학교 S교수의 요지는 이랬다. “금쪽같은 대한민국의 예산으로 외국인들을 이렇게 데려다가 고등교육도 시켜주고 연구를 할 수 있는 직장도 주는 것이 과연 옳겠는가. 능력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한국인들을 우선적으로 고용하고 나머지 자리가 있거나 여력이 있으면 외국인을 고용하자”는 것이었다. 반반으로 나뉘어 이에 대한 불꽃논쟁이 벌어졌다.

이 교수는 반대하는 편에 섰다. 그가 20년전 대학원공부를 해보겠다고 교수님 추천서를 첨부해 미국 명문대학의 문을 두드렸을 때가 생각났던 것이다. 한군데가 아니라 몇군데에서 오라고, 그리고 장학금도 준다고 연락이 왔다. 도대체 이 대학들은 듣도보도 못한 외국학생을 무얼 믿고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러고보니 앞의 H대 S교수도 K대 N교수도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장학금 받으며 공부한 사람이다. 그 덕에 지금 각자 한국의 내로라하는 명문대학에서 교수로 취업해 사회적 지위도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국의 대학에서 재직하는 우리가 외국학생들을 차별없이 받아들여 그렇게 진 빚을 갚아야 하지 않을까. 이게 이 교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S,N교수는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고.

이 교수는 또 상념에 빠진다. 자신이 박사학위 후에 머물던 산타바바라의 연구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거기를 시작으로 12년간 그는 미국에서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다. 연구비 따내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허탈하게 지내는 날이 많았고, 그나마 학술행사로 방문한 외국 교수들과 학문적으로 토론하는 일로 갈증을 풀었던 날들이었다. 이는 이 교수만이 아니라 P대학 P교수, K대학 C교수, E대학 A교수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앞서나간 유학파 과학자들의 보편적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 젖어가고 있을무렵 또 한번 이해할 수 없는 외국인들의 사고방식을 경험하게 됐다고 한다. 좋은 연구성과를 이뤄냈다고 외국의 기관에서 상을 받은 것이다.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받았다. 꽤 큰 액수의 상금도 줬다. 그뿐 아니라 독일에서는 방문연구 때마다 필요한 경비도 제공했다. 물론 그 전에는 독일에 가본적도 공동연구를 해본 적도 없었다. 또 이런저런 자리들을 받지 않겠냐는 질문의 빈도수도 늘어났다. 이 교수는 읊조린다. “내가 프랑스에 대해 무얼 안다고, 세금 한푼 안낸 영국과 캐나다에 무슨 기여를 했다고, 미국에 어떤 애국적 행동을 했다고 그런 부탁을 한단 말인가. 그들에게 자국인과 외국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교수는 말한다. 외국의 대학과 연구소들을 보라. 수많은 재력가들이 과학연구에 엄청난 액수의 재산을 흔쾌히 기부하고 있다. 그 기부금으로 브라질의 생태학자를 불러오든, 아니면 에콰도르의 수학자를 채용하든 전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 교수는 묻는다. 우리 과학계에 외국인이란 무엇인가. 프로스포츠 팀처럼 형형색색 장식하며 만들어낸 장식품인가. 그러니 C대학 H교수가 한탄하며 이야기에 끼어든다. 대덕에 있는 K국책연구소에 연구 관련으로 찾아갔더니 그곳 부장급 연구원이 “뭐 힘들게 연구해? 논문은 저 러시아애들 몇 명 불러다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해 먼길 찾아온 사람 맥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외국인 과학자란 그저 부려서 논문 만들어내는 제조기라는 말인가. 이 교수는 프랑스 정부가 매년 기초과학분야에 엄청난 국가예산을 배정하며 백서에 남기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증대하고 전 인류가 프랑스의 연구활동을 통해 우주와 합리적 사회, 그리고 과학기술문명을 향유할 수 있도록 기여한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물론 이 땅에서는 강아지가 웃을 소리지만.

이 교수 일행은 찻집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토론을 멈출 줄 몰랐다. 그 때까지 조용히 논쟁을 듣고 있던 S대학 B교수가 한마디 툭 던졌다. 골목길에 미군 지프차가 나타나면 달려가서 “Give me gum!”을 노래 부르듯 외치며 자라왔던 전후세대가 지나가면 아마도 한국인과 외국인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방식도 희미해질 것이라며, 그 때까지 늙더라도 죽지 말고 악바리로 살아남자고 했단다. 이것이 어느 저녁 느닷없이 벌어진 논쟁의 전말기다.

이 교수 일행의 논쟁은 실제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논했던 듯하다. 다만 정치사회적 맥락이 충분히 음미되는 인문학적 논쟁은 아닌 듯하다. 다만 가치가 있는 논쟁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다. “러시아 애들을 불러다 논문을 쓰게”한다니. 그것도 말 많은 국책연구소에서 말이다.(리뷰팀)

07.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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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지만 같은 날짜에 같은 주제에 관한 흥미로운 논평과 기사가 게재되어 있어서 옮겨놓는다(그리고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먼저 읽은 건 '기러기 아빠'들의 조기유학을 이슈로 한 대담인데, 말 그대로 '생생토크'이다. 그리고 뒤에 읽었지만 앞에 놓은 건 현직 영문과 교수의 대학가 영어강의 붐에 대한 쓴소리이다. 모두가 대한민국의 '영어광풍'과 관련되는 것이어서 제목은 '영어에 미친 나라'라고 붙였다(사실 같은 타이틀의 책이 있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를 따라가노라면 한국사회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아름답지만은 않은 풍경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게 된다. 한국학 키워드에 '영어'도 들어가 있는지?.. 

창비주간논평(07. 07. 10) 대학의 영어강의를 향한 쓴소리

지난달 미국 댈러스에서 이민생활을 하던 한국인 부부가 폭우와 엉터리 표지판 때문에 차가 강에 빠져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그런데 일부 국내 언론은 정확한 취재도 없이 이 사건을 희생자들의 영어가 서툴러 구조요청을 제대로 못한 탓으로 보도하는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유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오보는 한국사회가 영어에 얼마나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지난 4월 인터넷 상의 '토플대란'은 미국의 대학(원)에서 공부하기 위한 영어능력을 측정하는 시험 응시자의 80%가 유학 준비생이 아니라 특목고 진학이나 대학입학시의 혜택을 겨냥한 초중고생이며 수험료가 연 160억원에 달한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조기 영어교육과 해외어학연수, 조기유학과 기러기 아빠는 어느덧 한국사회의 낯익은 풍속도로 자리잡았고,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3학년 아닌 1학년부터 실시하는 방안이 나오기도 한다. OECD 국가 중 GDP 대비 사교육비 지출이 최고이며 초중등학교까지 포함할 경우 미국 유학생 수가 인도나 중국을 앞질러 당당히 1위인 대한민국의 사교육 영어 시장이 얼마나 큰 규모일지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영어광풍 부추기는 대학 영어강의의 실상

그야말로 영어광풍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그런데 일부 상위권 대학들이 이런 흐름을 바로잡기는커녕 부추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럽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후 갓 대학에 자리잡은 한 신임교수는 학기당 한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는 계약서 상의 의무 조항을 어겼다가 낭패를 겪었다. 그는 첫 학기 담당과목을 모두 우리말로 강의하다가 경고를 받았고 다음 학기에 두 과목을 영어로 진행해야 했는데, 그가 유학한 나라는 불행하게도 영국이 아니었다. 선생의 영어능력이 모자란 상황에서 수업진행이 원활할 리 만무하고, 학생들도 영어로 하는 철학수업을 따라갈 능력이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이 어이없는 사례에서 보듯이 요즘 우리 대학의 영어강의 관련 정책이 과연 고등교육기관에 걸맞은 철학 위에 서 있는지 의문스럽다. 한 명문 사립대는 몇년 전에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 신임교수가 모든 과목을 영어, 혹은 해당 원어로 강의하도록 강제했고, 그럼으로써 앞으로 전체 개설과목의 60%를 영어강의로 바꾸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대학 외에도 신임교수에게 영어강의를 의무로 부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기존 교수에게도 영어강의를 의무화하여 영어강의 100% 달성을 목표로 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미국 유학 출신 교수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우리 학문의 편향성은 심화되게 마련이다.

학문의 대미편향과 영어학습에 매몰되는 대학교육

물론 영어강의를 확충하려는 시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현대 세계에서 아직도 달러가 기축통화이듯이 오늘의 국제어는 영어임에 틀림없고, 수준높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인력에 대한 수요는 매우 크다. 이를 위해 영어강의의 양적, 질적 발전은 긴요하며, 실제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교양영어'는 상당수 대학에서 영어강의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대학의 영어강의 정책은 우려할 만하다. 영어강의가 투자 없이 무원칙하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대학생들에게 사교육으로 영어 실력을 늘리라고 압력을 가하는 꼴이다. 그 결과 영미에서 살아봤거나 특목고나 철저한 사교육 덕분에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춘 경우가 아닌 학생은 학원, 해외어학연수 등을 이용해 영어능력―주로 듣고 말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대학생활과 취업전선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되어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수준높은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며 토론하고 고민하는 일에서 성취될 대학교육의 본모습은 그만 실종되고 만다.

영어 공용화론의 맹목과 허구성

경쟁지상주의 담론의 핵심에 자리잡은 영어능력에 대한 강조는 어느새 질적 변화를 일으켜 아예 지적 활동과 사회생활의 수단을 우리말에서 영어로 바꾸려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은 그것을 상징하는 담론이다. 그는 한국의 고등교육 기관들이 지식을 창조하지 못하며 남들이 생산한 지식을 소비만 한다는 어느 미국 학자의 발언을 논거로 들면서, 영어공용화가 한국의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한다.(《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복거일의 영어 공용론》, 삼성경제연구소 2003, 46면) 그러나 한국의 고등교육기관들이 지식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현실을 정확히 짚은 것은 결코 아닐뿐더러, 한국 대학의 질적 도약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영어공용화 하나로 달성 가능한 양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진지하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우리는 외국어를 공용어(公用語)로 강요당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해방 후 3년간 미군정의 공용어는 영어였고, 일제강점기도 처음부터 일본어가 공용어였으며 나중에는 일상생활에서마저 일본어 사용이 강제되었다. 소설가 김동인이 외국문화에 관심을 가진 조선인은 적어도 중등학교 이상 학력이고 일본어를 잘 하는 그들은 외국문물을 우수한 일본어 번역으로 쉽게 접할 수 있으니 우리말 번역을 하려는 노력은 무익하다고 쓴 데에서 그 시절의 실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번역문학〉, 《매일신보》 1935년 8월 31일)

식민지시대의 조선어말살정책과 오늘의 영어광풍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좀 우스꽝스럽지만, 언어의 선택이 인간 생활 전반과 직결된 총체적인 사안이라는 상식을 환기시켜 준다.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는 것이지만, 한국어를 포기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택하는 것은 우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영어 공용화는 강남의 중상류층이 상징하는 경제적, 문화적 역량이 전국민에게 주어져야 현실적 가능성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일일 터인데, 이는 자유주의자 복거일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무계급사회의 지상낙원을 당장 건설하겠다는 이데올로기적 선전과 흡사하다. 이 점을 의식한 탓인지 복거일은 영어 공용화를 반대하면 오히려 많은 국민들을 영어의 혜택에서 소외시키는 계급적 자세가 된다는 묘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어쨌든 요즘 일부 상위권 대학의 영어강의 정책은 그의 입론을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셈이라는 점에서 착잡하기 짝이 없다. 

세계화에 대응하는 문화주체성 세워야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는 명확한 목표 설정과 그것을 위한 조건을 제대로 갖춰가며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대학에서 꼭 거쳐야 할 지적 훈련을 제한된 영어구사력 향상을 위해 속절없이 희생할 위험이 크다. 영어강의 도입의 당위성이 큰 영어영문학과에서도 영어강의로만 수업을 편성하면 많은 문제가 따를진대, 학생의 전반적 수준이나 학생간의 편차, 전공 분야의 특수성을 막론하고 영어강의만이 살길인양 밀어붙이는 일만큼은 재고되어야 한다. 충분한 준비와 투자가 없이 영어로 수업을 한다면, 학생들은 영어도 늘지 않고 수업 내용도 못 따라가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또 일정 수준 이상의 고급 외국어독해력 향상은 수업이 우리말로 진행될 때 종종 더 효과적이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입증될뿐더러 상식적으로도 쉽게 납득이 간다.

영어의 문제는 단순히 외국어 습득의 문제가 아니다. 영어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가 장기적으로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이냐는 전망과 연결된 심각한 사회적 쟁점이다. 명심할 일은 세계화와 개방이라는 대세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도 우리 나름의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면서 우리 역사에 뿌리박은 학문과 문화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비이성적 영어열풍은 어떤 성격의 세계화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며 사회적 갈등만을 심화시킬 것이다. 세계화와 공동체의 주체성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김명환/ 서울대 교수)

*이 글의 일부는 필자가 《안과밖: 영미문학연구》(2007년 상반기, 창비)에 게재한 시평 〈대학의 영어강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내용을 가져온 것임을 밝힌다 - 필자. 

경향신문(07. 07. 10) [2007한국인의 자화상](7)조기유학 열병앓는 ‘기러기 아빠’

조기유학 바람은 상류층에서 중산층으로까지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한 다리 건너면 기러기 아빠’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들은 매년 3만~5만달러의 유학비용은 물론 부부·가족간 생이별을 감내한다. 이런 고통과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이 ‘교육 엑소더스’란 무엇인가. 지난 6월9일 3명의 기러기 아빠가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모여 항상 곁에 두어도 부족한 아이를 이역만리로 떠나 보내게 된 사연을 이야기 했다. 이들은 아이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우리 사회의 ‘영어 만능주의’와 ‘입시지옥’에 관해 매우 강한 비판을 했다. 경향신문 사회부 최민영 기자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집담회는 참석자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했다.

사회(최민영 기자)=조기유학 보내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김익준(가명·54세)=저는 애가 둘입니다. 내 소신은 애들한테 과외도, 영어공부도 안시키는 것이었어요. 둘째 아이가 영어유치원에 등록해 가방을 받아왔을 때 ‘우리 말부터 배우라’며 아내랑 싸워 결국 가방을 억지로 반납시켰어요. 그런데 애가 초등학교 취학하고는 내가 졌습니다. 학원 안가니까 친구가 없어요. 애가 ‘왕따’를 당해도 학교에서는 관심도 없었어요.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나라는 영어만 잘하면 뭐든 ‘오케이’더라고요. 그래서 조기유학 초창기인 1990년대 후반에 중학생이던 첫째와 둘째를 모두 미국에 보냈죠. 당시 주변의 고위 국가공무원들이 자녀들을 막 조기유학 보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자기들 자식 편하게 살 수 있게 정책 개발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괘씸하게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어요. 자기 애들 대학갈 즈음에 국내 대학들이 영어 잘하는 애들을 위한 특별전형을 만들더라고요.

구영찬(가명·48세)=나는 아이 둘과 애엄마를 미국에 보낸 지 4년 됐습니다. 둘째애 때문에 결심했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 갔다가 가방 안이 텅 비어 있는데 집에 와도 ‘그냥 친구들한테 빌려줬다’고만 대답하더라고요. 초등 2년때 선생님들이 미국 가면 ‘왕따’ 없고, 아이도 잘 적응할 것이라고 조언하더군요. 능력이 되든 안되든 우리 애한테 새로운 교육환경을 주자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최세현(가명·50세)=우리 딸애는 중학교 2학년 때 보냈고 지금 고등학교 2학년쯤 됐어요. 애엄마가 먼저 조기유학을 제안했지만 한달가량 “그렇게는 못한다, 월급쟁이가 어떻게 그러냐”고 버텼어요. 그런데 애가 출근하는 내 손에 “아빠, 이거 한번 읽어보세요”라며 편지를 주더라고요. 자기 학교 생활을 적은 것이었어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저녁 학교 끝나고 학원 가서 자정에 돌아오면 또 새벽 2시까지 숙제하고…. 시험 때는 더 심하더라고요. 아이는 “나중에 커서 누가 어린 시절에 뭐 했냐고 물어보면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고 해요. 그 말에 두손 들었어요. 딸애는 몰라도 늦둥이인 5살배기 아들은 그래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할 생각입니다.

사회=조기유학, 효과는 있었나요.

최세현=우리 딸은 수수깡처럼 말랐었는데 보낸 지 1년 만에 스트레스를 벗어나서 건강해졌어요. 거기서도 여전히 우리나라 엄마들은 ‘두들겨 패가면서’ 공부시키지만 아이들에게는 여기보다는 여유가 있어요.

김익준=난 얻은 게 있고 잃은 게 있습니다. 얻은 것은 애가 중·고등학생 기간을 무척 행복하게 지냈다는 거예요. 잃은 것은 내가 가족과 몇년간 떨어져 살았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애들을 예뻐하면서 키울 기회를 이 나라 위정자들이 박탈했어요. 내 결단이었지만, 배경을 제공한 것이죠. 꼴보기 싫어요.

최세현=한 예로 우리 회사의 한 분은 재작년에 아이가 강남 8학군의 모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반 남학생 중 1, 2등 하고 여자까지 합치면 8등쯤 했어요. 한달에 과외비가 적게 들 때 400만~500만원, 많이 들 땐 1000만원도 들었다더라고요. 그렇게 돈 많이 들여가지고 등수가 많이 오르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라, 그 돈 들여서 등수 유지하는 게 목표라는 겁니다. 목표로 하는 대학이 어디냐고 물어봤어요. 우리 때는 공부 못해도 서울대, 연·고대 반이었고 다른 반은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목표가 서울대 연·고대도 아니고 ‘인(in) 서울’대였습니다. 그것도 불안해 하더라고요. 그렇게 공부를 시키는데도. 그 분은 자정쯤 퇴근할 때 부인한테 전화가 옵니다. 애 과외 중이라 방해될테니 좀 있다 들어오라고요. 좋은 과외선생 잡으려면 12시 넘어서 수업받는 것도 감내해야 된다나. 그 정도 돈이면 미국에서는 웬만한 대학교에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아이 조기유학 보낼 때 아내가 설득하며 하는 얘기가 “당신 유학비 아까워서 그러는데 고교 때 과외비는 뭘로 댈 거냐, 그 돈이면 유학간다” 그러더라고요.

구영찬=이번에 11학년된 딸애는 한국에 들어오고 싶어하는데 다시 한국에서 교육을 받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둘째애는 내가 워낙 예뻐하는지라 지난 3월 미국에 만나러 갔을 때 “여기 안맞지? 아빠랑 같이 한국가자”고 운을 떼봤어요. 그런데 말수도 적은 애가 조그만 목소리로 “아빠가 와요” 이러더라고요. 여기 교육환경이 싫은 겁니다. 그래도 거기는 학교폭력이라는 게 없으니까요.

김익준=내 생각은 좀 달라요. 그쪽 선생은 결코 따뜻하지 않습니다. 폭력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학생을 퇴학시킬까를 고민하지 봐주는 게 없어요. 체벌도 안합니다. 여차하면 잘라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애정이 없어요.

사회=아이들 대학도 미국에서 졸업시킬 계획입니까.

김익준=미국 대학은 도대체 입학사정의 기준이 뭔지 밝히질 않아요. 1등이 떨어지고 10등이 붙어도 저간의 배경을 알 수가 없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 같은 사람도 예일대를 나옵니다. 학비가 일단 너무 비싸니까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어서 포기하고, 거기에 불만을 안가져요. 우리 국민은 그런 식의 선발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 나라 제도를 꼭 좋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둘째애는 한국에 돌아와서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지금 고3입니다. 애가 죽어요. 아침에 내가 자고 있을 때 애는 나가고, 자정 넘어도 애는 안오고 내가 먼저 잡니다. 주말에나 보고 ‘힘들지?’ 물어보면 ‘괜찮아요’라고 합니다. 내신으로 애를 왜 이리 괴롭힙니까. 미국처럼 돌머리라도 부잣집 애로 뽑는 식이면 차라리 모르겠어요. 애가 고1 때는 과외 안받았는데, 고2 올라가서 과외받게 해달라고 조르면서 “진작 과외받았으면 내신이 더 나았을걸” 얘기하는 모습 보면서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애가 텝스(TEPS) 만점에 가까운데, 학교 내신 영어시험에서는 하나 틀려서 내신 3등급입니다. 말이 됩니까.

미국에 유학갔다 온 박사들이 우리나라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게 아주 불만입니다. 어느 아프리카 사막 지역 추장이 미국에 갔는데 사막에서 물이 콸콸 나오는 게 너무 좋아서 수도꼭지를 떼서 가져갔답니다. 물이 나오겠나, 안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영어 타령입니다. 가까이 지내는, 돈 없는 친구들은 가슴을 칩니다. 내 애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조기 유학을 못보내줘서 그렇다는 거예요. 국내에서 가르치려니 됩니까. 그런데 정책결정자들, 이 인간들 하는 짓 봐요. 영어 잘한다고 대학 어느 과든지 갈 수 있는 나라가 어딨나요. 정책을 하는 사람들이 제 새끼 챙기느라 국민을 배신했어요. 요즘엔 영어 잘하면 의대도 갑니다. 이렇게 만들어놓고 못가진 사람 가슴 치게 만들어요. 교육부 미국박사 출신들 다 나쁜 놈들이고, 이렇게 만든 정치인들도 나쁜 놈들입니다.

구영찬=대부분 국민들이 공감하는 말입니다. 대학뿐 아니라 입사할 때도 토익, 토플, 텝스 봅니다. 우리도 경제대국인데, 영어를 그렇게 강제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후처럼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을 때가 아니잖아요. 프랑스 봐요. 절대 영어 안씁니다. 영어로 말 걸면 대꾸를 안합니다. 미국애들이 우리나라 오면 걔들이 우리말 공부를 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정도라도 말 할 때 수용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러시아어도 배우고, 중국어도 배우고 해서 다원화해야지 끝까지 영어니까 주변나라에서 뭐라 그러겠습니까.

김익준=강의 듣는 큰애한테 물어보니 한국 대학에서 교수들 영어는 영어가 아니고 ‘콩글리시’랍니다. 귀 버린다고 하더군요. 한국 관련 강의를 하는데 왜 영어로 번역을 해서 가르칩니까. 우리는 백날 해도 미국 대학 못따라갑니다. 교육부가 정신이 나갔어요. 각 대학에 돈을 지원하는데 영어강의 비율에 따라 지원합니다. 미국 유학파가 환상에 젖어서 이 나라를 버려놨어요.

최세현=전염이 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젠 애 친구 대부분이 미국에 가있어요.

김익준=유행병이죠.

최세현=우리 애가 외국 나가기 전에 학교 선생님들께 밥을 사야겠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갔더니 여섯분 정도 와 있더라고요. 아주 잘 보낸다 그래요. 그 중에 2명이 애들 유학을 보냈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가려는 사람들 말려서 국내에서 공부시켜야 할 선생님들이 보내면 어떡하느냐” 했더니 선생님 말씀이 “제 아내도 교사인데 우리나라에 몇년도부터 몇차 교육제도 그러는데 그게 뭘 의미하고 애들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말해요. 공교육 종사자들부터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신뢰가 안선다는 거예요.

또다른 얘긴데, 우리 딸애 학교친구 하나가 공부를 좀 못했어요. 그런데 아빠 닮아서 음악을 좀 잘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타를 쳤는데, 김밥집하던 그집 부모들은 고민고민하다가 애를 호주로 유학보냈어요. 음악 전문학교가 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에서 하면 엄청나게 레슨비가 들텐데 거긴 교육비에 다 포함돼 있다고 해요. 그걸 잘해서 오세아니아 전체 대회에서 1등했고, 미국 대학 입학허가를 받아 장학금 받고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지금 그집 부부는 뉴질랜드에서 김밥 팔면서 애 뒷바라지 해요. 우리나라에 그 아이 있어봤자 ‘문제아’ 취급밖에 더 받았겠어요.

김익준=사실 미국 문과계통은 좋은 대학 나와봤자 일자리가 없어요. 그러니 도로 한국으로 턴해서 ‘하버드 출신이다. 영어 잘한다’밖에 내세울 게 없습니다. 걔네가 써먹는 건 공대 계통 기술자뿐이지요. 문과는 자기네 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인데 한국에 돌아오면 그게 어마어마한 것이 돼요. 그러니 누가 안보내고 싶겠습니까. 김밥 팔아서라도 보내야지.

구영찬=조기유학이라는 네 글자를 놓고 실패냐 아니냐 하는 게 어폐가 있어요.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여기가 너무 피곤하고 지옥이고 십몇년간을 그러니까 가서 좀 선진문화에서 공부도 해볼 기회를 주는 게 반 이상이지 조기유학 가서 대학입학에 실패했다, 그게 아닙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 예술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겁니다. 대학을 못갔다고 해서 조기유학 가서 실패했다고 정의내릴 수는 없어요.

사회=몇년 전 뉴욕타임스가 ‘제 식구한테 손님대우 받는 기러기 아버지’에 관한 기사를 다뤘는데, 실제로 어떻습니까.

구영찬=그 부분(부모자식관계)은 포기했어요. 애가 성장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지 한국 와서 살든 미국 가서 살든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든 기대감은 없습니다. 보내놓고 1년 정도가 힘들었어요. 한 4년 됐는데, 여러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 위해서 보냈으니까 그에 따른 결과를 수용해야지, 내가 못보니까 힘들다고 하는 건 과장이더라고요. 내가 아는 대부분 사람들은 언론에서 보여주는 ‘소주병 끼고 사는 기러기 아빠’ 생활 안합니다.

김익준=첫째 애는 아버지인 나를 과연 사랑할까 싶기도 해요. 가끔 보는 ‘손님’인데. 처음에는 반가워하더니 점점 크고 자기 생활 생기니까, 심지어 아내조차도 자기 생활이 생겨서 잠깐 왔다가는 손님처럼 대하더라고요. 고의로 그러는 건 아닌데 겉도는 느낌이 듭니다.

최세현=난 아직까지는 지낼 만해요. 교회 가서 아빠를 위해 기도도 같이 하고 그런다고 들었어요. 난 퇴근해서 집에 오면 아무도 없으니 할 일이 없어요. 텔레비전 리모컨 갖고 왔다갔다 채널만 바꾸죠. 주말되면 어떻게든 약속 만들어야 하는데, 안되면 소파 주변 반경 1m 안에서 하루종일 뒹굴뒹굴해요. 허리가 2인치 늘더라고요. 통상 집사람이 오면 처음 1주일은 굉장히 좋아요. 사람 사는 거 같고. 그러다 한두달 있으면 싸우고, 돌아가면 또 허전해집디다.

사회=조기유학 실패 걱정을 안하나요.

최세현=아내한테 리스크를 줄이려면 같이 가야 한다고 했어요. 혼자 가면 거의 탈선한다고요. 홈스테이가 많은데, 순전히 돈벌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10년 정도 하면 새집 비용이 빠진다고 그래요. 거기 교포들도 그리 잘해주지 않아요. 애 지옥에서 꺼낸다고 보냈는데 또 지옥으로 보냅니까. 그냥 내가 기러기 아빠 하고 말지.

김익준=여기서는 영어라도 배우라고 홈스테이 보내는데, 처우가 나빠도 한국 애들은 이상하게도 착해서 부모한테 아무 말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아요. 우리나라는 부실해도 급식이라도 있지, 미국은 그것도 없어요. 홈스테이 점심을 유학생들은 ‘3초 샌드위치’라고 해요. 빵 하나, 치즈 한장, 양상추 한장, 다시 빵 하나. 그걸 점심 때 앉아서 구겨먹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자식을 청소년기에 왜 그렇게 불쌍한 인간으로 키웁니까.



구영찬=공부를 하려면 조금 나이가 돼야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간 애는 영어는 잘하는데 한국어를 못해요. 자꾸 까먹으니까 서머스쿨 때 거꾸로 한국어 교육을 받아요. 국적이 한국인데, 한국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사회=조기유학 문제는 국내 고교평준화 해제 및 특목고 추가설립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김익준=우리나라 애들은 이런 교육환경에서 쇠고기 취급 당합니다. 1등급, 2등급….

최세현=대학교 들어가기까지 너무 애들을 혹사시켜요. 우리나라 입시 유아 때부터 시작입니다. 5살짜리 늦둥이가 있는데, 방학 때에만 한국에서 유치원에 다닙다. 그런데 놀이기구도 방안에 있고, 거의 하루 종일 공부시키더라고요. 그 어린 것을 공부시켜 뭐합니까. 노는 게 공부죠. 우리나라 학부모는 애들이 유치원에서 논다고 하면 아마 당장 다른 데로 옮길 것입니다. 전반적인 교육시스템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구영찬=자율성을 부여해서 대학이 입시기준을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1등이 서울대 못가도 5등은 갈 수 있도록 생활기록부랑 연계해서 입학사정관제를 정착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명문고를 늘리기보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도록 구조 자체를 바꿔줘야 됩니다. 교육이라는 게 학교와 부모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져서 ‘얘는 공부는 아닌 것 같다, 음악쪽에 소질이 있다’ 이렇게 이뤄져야지, ‘얘는 몇점 나와서 3등급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됩니까?

최세현=미국은 학생 뽑을 때 성적 외에 과외활동도 봐요. 미국에서 우리나라 여학생이 SAT 만점 받고 전학년 올 A받았는데 아이비리그 여러 대학 넣어서 다 떨어졌다고 인종차별로 소송 거는 기사를 봤어요. 공부만 한 애들은 당연히 떨어집니다. 학교에서 공부 외에 학생회라든가, 자기 특기활동한 걸 중요시 여깁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노는 것도 커리어가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그런 과외활동으로 대학간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김익준=일단 내신부터 없애야 합니다. 내신을 점수화해서 애를 왜 잡아요. 그것만 없애도 떠나는 비율 확 떨어집니다. 고교평준화 하든 말든 큰 상관 없어요. 특목고 만들어도 조기유학 갈 사람 다 갑니다.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에 따른 일체의 특혜를 없애야 합니다. 공적 영역이든 사적 영역이든 공채를 표방하면서 영어 성적에 의해 결정하는 것은 아예 형사처벌해야 해요.

사회=요즘 고민은 뭡니까.

김익준=지금의 40~50대는 유례없이 쓸쓸한 노년을 보내는 세대가 될 것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들은 없는 대로 쓸쓸할 거예요. 있는 집의 잘 나가는 자녀들은 외국 나가 있어서 부모가 못봅니다. 임종이나 지켜볼까. 없는 집의 못나가는 자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이후 노동시장이 급격히 유연화되면서 먹고살기 더 힘들어질 겁니다. 그러니 부모 봉양도 제대로 못할 테고.

최세현=그래도 조기유학은 잘 보낸 것 같아요.

김익준=대신 아빠는 ‘꽝’됐지. 화상으로 가족 메일 본다고 해도 직접 애 한번 안아보는 것만 하겠습니까.(정리|박영흠기자)

P.S. 좌담 내용 가운데는 상식적인 대목도 있고 다소 과장(오버)된 부분들도 눈에 띄지만 인상적인 건 "공교육 종사자들부터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신뢰가 안선다는 거예요"란 지적.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교사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실감할 수 있는 지적이다. '공교육에 대한 신뢰'란 말이 이미 허사(虛辭)가 된 지 오래인 것 아닌가? "당시 주변의 고위 국가공무원들이 자녀들을 막 조기유학 보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자기들 자식 편하게 살 수 있게 정책 개발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괘씸하게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어요. 자기 애들 대학갈 즈음에 국내 대학들이 영어 잘하는 애들을 위한 특별전형을 만들더라고요." That's the way things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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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7-11 16:44   좋아요 0 | URL
유학보낼돈이면 한국에서 제대로 교육시킬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들어보면 미국에서도 과외받을것 다받고있고, 영주권이 없으면 나와도 취직이 제대로 안되는 상황인데.
아는분 2년에 1억 쓸 예산하고 캐나다 가셨는데. 그돈으로 책집에 쌓아놓고 읽어나가면 그게 더 남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거든요. 공상인가요.

로쟈 2007-07-12 09:17   좋아요 0 | URL
아마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공상'이라고 생각할 거 같습니다.^^;

마늘빵 2007-07-11 21:16   좋아요 0 | URL
영어에 미친 나라가 되어가는게 확실합니다. 그럴수록 저는 점점 영어를 못하고 싶어져요. 아예 싹 다 까먹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근데 그럼 안되는데. -_- 공부하려면.

로쟈 2007-07-12 09:19   좋아요 0 | URL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무너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각자가 자력갱생하라는...

여형사 2007-07-12 16:3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어떤 사회를 건설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무너진 것 같다는 말씀이 너무 와닿네요. 씁슬해 집니다.
 

7, 8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인문학/인문주의 관련서들을 올려놓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문지성으로 꼽히는 김우창 교수 관련기사가 나란히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우리시대의 명저로 소개되고 있는 김우창 전집은 한번쯤 완독해볼 만하다(나는 이전에 두어 권을 사두었는데, 절판되고 새 판본이 출간돼 좀 난감하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만 일단 사두었다). 그 아래는 가장 최근에 실린 그의 칼럼기사이다.   

한국일보(07. 07. 05) [우리 시대의 명저 50]<26>김우창 전집 '궁핍한 시대의 시인' 등 5권

'김우창 전집’은 인문주의가 현실을 끌어 안을 때, 귀납돼 나오는 사유의 풍경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증명하는 전거다. 김우창(71) 고려대 명예 교수는 밝혔다. “(내 글쓰기의)지향점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주어진다. 시대에 대해 촉발된 느낌이 (글을) 쓰게 한다.” 글쓰기와 사유의 지향점에 대한 질문에 들려 준 답변은 다섯 권의 책에 모범적으로 적용된다.

평소 이런 저런 지면을 통해 실어 오던 그의 평론을 주목해 오던 박맹호 당시 민음사 사장이 “책으로 만들자”며 강권하다시피 했고, 어느새 진짜 책이 돼 있었다. 1977년 첫 권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빛을 보고 2권 <지상의 척도>, 3권 <시인의 보석>, 4권 <법 없는 길>을 거쳐 1993년 마지막 권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가 나오기까지, 자칫 비연속적 사유의 기록으로 치부되고 말았을 일련의 글은 출판인의 안목 덕에 전집으로 묶였다.

그러나 저자 자신으로서는 아직도 결벽증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문학사상, 창작과비평 등 잡지에 수록된 글이라 체계가 없어 유감이에요. 그러나 당시 현안에 민감히 반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널적이라는 자평이다. “박 사장이 출판을 제의했을 때 체계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거부했으나, 강권에 못 이긴 거죠.” 결과적으로 일련의 책은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갈망하는 한 인문주의자의 내면을 절절하게 증거하고 있다.

생활 주변의 모든 것이 인문학적 텍스트였다. 예를 들어 1972년 12월 9일자 한국일보의 칼럼 ‘천자춘추’(유치진 씀)는 당시 미국 사회가 직면한 변화를 주제로 한 ‘자유의 논리’에서 도입부로 쓰였다(2권 <지상의 척도>). 첨단의 편의와 번다함이 공존하는 국제 공항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상황에 대한 명상의 계기로 전용된다(4권 <법 없는 길>).

책은 우리 문화의 정통을 이야기한다. “조선 자기, 수묵의 산수화, 조촐한 전원 생활의 낙을 이야기하는 시조, 일상적 사건들에 대한 담담한 관찰을 기록한 시화, 수필, 잡기 등은 자연과 인간의 절제된 균형을 목표로 하는 조화의 이상”과 닿아 있다는 것.(3권 <시인의 보석>) 북한의 예술 또는 예술적 현상에 대해서는 같은 책 중 ‘이념과 표현’이란 제하로 사유를 전개한다. 북한에서 서사시적 충동이 강한 이유, 개인과 사회의 충돌이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대전제 속으로 복속돼 가는 기제 등이 북한 예술가들의 작품에 근거해 언급된다. 그 모든 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예술 혹은 문화관에 대한 갖가지 현상을 전제한 후에 나온다. 하나의 체계 아래 유기체적으로 꽉 짜인 글이다.

예술과 세계, 실존과 현상에 대해 그는 포괄적 입장을 취한다. 글의 설득력은 그 같은 배려의 결과다. 그는 문학은 결국 제도 안에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현존하는 것의 잠재적 부분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관념적 당위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영역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 인문학적 지평의 방대함은 특유의 유연성과 공존한다. 문학이란, 제도 안에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있는 것의 잠재적 부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입장이다. 그의 글은 그래서 지상에 발 디디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설득력을 갖고 접근한다.

이 시대의 화두라 할 페미니즘 역시 사유의 그물에 이미 포착됐다. 여성 문제의 의식과 그 현실적 표현을 반성하고 그 성쇠의 요인을 검토하면서,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의 상황을 점검하는 대목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격세지감까지 든다. 책은 “오늘날의 여성이 매우 불행한 상황에 있는 것은 사실”이라 전제, 여성 운동의 성패는 다른 사회적 투쟁과 연결돼 있다는 시각을 제시한다. 근대화, 경제 성장, 대중 문화 시대, 민족 분단의 시대, 민족주의 시대, 민족 중흥기, 민중 시대 등을 포괄하는 당시의 핵심적 개념은 ‘산업화’였다.

문화에 대한 통찰은 시대를 초월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특히 언어의 타락에 크게 기여하는 것은 정치적 또는 상업적 선전을 위한 언어의 사용”이라는 지적은 날로 정치적 대립이 격화돼 가는 지금 한국이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책은 곳곳에 인문주의에 대한 신뢰의 보루를 쌓아 두고 있다. “적어도 고급 문화의 표현으로는”이라는 유보 조항을 달긴 했으나, 문화는 “한 사회의 인문적 전통의 전부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라고 책은 단언한다. “인문적 전통을 통한 교양은 지식의 훈련과 함께 지식으로부터 또는 모든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마음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3권은 저자의 본령을 확인시켜 준다. 황석영 이문구 등 소설가, 황동규 김광규 등 시인을 중점적으로 논하는 자리다. 그럼에도 책은 자유에 대한 여러 차원의 참고서로 읽힌다. 그에 대한 사유의 흔적은 전집 곳곳에 배어 있다. 저자에 의하면 세 가지 차원의 자유가 필요하다. 동료와 신뢰ㆍ공감할 수 있는 자유, 자연과 조화하며 사는 심미적ㆍ생태학적 자유, 그리고 스스로의 깨우침으로 도달하는 자유. “세 번째가 바로 인문 과학이 필요한 대목이죠.”

4권 <법 없는 길>에서는 오래 음미하고픈 명구가 눈을 붙든다. 근원을 사유케 하는 글이다. “마음의 실체는 고요함이다. 이것이 우리를 자아로서 지속하게 하며, 또 세계를 있는 대로 드러내주게 된다.”(‘고요함에 대하여’) 책의 초입은 이맘때가 제격이다. “장마가 끝나고 밝은 해가 비치고 태평양으로부터 올라온다는 태풍의 영향인지 맑은 바람이 분다.…(중략)…반드시 실제적이 아니고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순간을 넘어서는 영원 아니면 지속에 대한 우리의 갈구는 삶의 근원적인 지향인지 모른다.”

자유는 이 전집의 모태이기도 하다. 저자는 “학문적 계보란 내게 없는 것 같다”며 “바로 계보가 없었던 덕에, 즉 요구하는 바가 없어서, 너무 자유로워서, 쓸 수 있었던 것”이라며 돌이켰다. 저자는 자신의 전집이 ‘좋은 사회’에 대한 인문 과학적 이해와, 그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데 쓰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김우창 전집은 인문학에 대한 드높은 애정의 결과다. 어느 한 곳에 편재됨 없이, 그 근원적인 지향점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내면 풍경을 요약한 지도이면서 후세를 위한 솟대이다.(장병욱기자)

경향신문(07. 07. 05) [시대의 흐름에 서서]큰 생각, 작은 생각, 인간성

정치는 사회가 하나의 체제로 기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떠한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인가, 사회주의인가, 또는 공산주의 체제인가를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념이 정치 전체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책도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사회를 전제로 한다. 하나의 정책으로 크고 작은 일체의 것들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교육, 의료 또는 사회 복지 제도는 물론 경제, 사회, 외교 등의 정책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체제적 발상에 위험과 착각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구소련이 보여주는 것은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체제적 사고와 정책의 실패이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삶을 생각하는 데에는 체제적 전제는 불가피하다.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정책들이 논의되고 대통령 선거에서 정책이 주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된다. 정책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사회가 하나의 체제라고 할 때, 정책은 체제를 움직이는 데에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기준은 일관성이다. 일관성은 일의 바른 추진을 위하여 필수적인 요건의 하나이다. 또 그것은 현실 자원의 제한 속에서 여러 정책들로 하여금 상호모순에 빠지지 않게 하는 데에 중요한 원리가 된다.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모든 문제에 대한 모든 답을 제공하겠다는 잡다한 단편적인 정책들이 가장 큰 득표 효과를 갖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일관성은 사회적 삶의 근본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다.

-대선,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의 1992년 선거 유세에서 유명하게 된 말에,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하는 것이 있지만, 경제는 어디에서나 오늘의 정치적, 사회적 과제로서 기본이 될 수밖에 없다. 자명한 일이지만, 경제는 사람의 삶의 경영에서 기본이 된다. 여기에서 삶이란 최소한의 존명(存命)이 될 수도 있고, 보다 활달한 삶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의 필요가 우선한다. 이 점이 문명된 사회에서 고용이나 사회 안전망 그리고 의료, 교육, 연금 등의 제도가 정책적 대상으로 크게 부상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길고 넓게 보면, 건강하고 훈련된 노동력이 없이 또 사회적 평화가 없이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제도 잘 되어 갈 수가 없다. 완전고용이나 완전한 사회복지 제도가 결국은 경제 전체에 지나친 부담을 주어 당초의 사회적 목적을 실패에 이르게 한다는 생각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조정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치는, 사회 전체의 행복과 번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더 나은 삶이 경제만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선진사회는 이제 ‘탈물질주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진단이 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부의 확대보다 삶의 질에 있고, 그것이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환경 문제가 이슈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로 설명된다. 이것은 ‘부유한 다수자’로 인하여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인간은 부보다 복합적 요소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은 이 이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부유한 다수’가 이제 이것을 다시 발견한 것은 경제발전이 가져온 환경 파괴 속에서 살아남는 데에 자연 보존이 절실한 과제가 된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나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제에서, 환경의 문제는 최종적인 심급이 된다.

환경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의 환경-멀고 가까운 나라들이 이루는 세계적 국가 공동체제라는 환경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외에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할 남북 문제가 있다. 우리의 삶을 더욱 만족스럽게 영위하는 정책은 이 모든 것을 상호 관계 또 일관성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비친 바와 같이 삶의 큰 테두리를 다스리는 것만으로 보다 나은 사회를 기약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 체제의 기본은 계획경제였다. 자원 발굴, 생산, 분배 등을 전체적인 합리적 계획으로 다스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프라를 구축하고 체제의 토대를 정비하는 데에 있어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후의 유연한 발전을 촉진하는 데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 사회적 삶의 다른 부문에서도 사회에 대한 체제적 접근은 체제의 기초적 정비와 확립을 위해서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었으나, 행복과 사회 평화의 자발적 근원을 봉쇄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책의 일관성이나 전체성이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고 수많은 작은 사실에 밀착하여 스스로를 수정할 수 있게 하는 유연성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도 정책의 빈곤보다도 현실에서 들어오는 결과를 입력하고 조율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빈부 격차 해소나 부동산 투기 억제의 정책들은 모두 목표에 반대되는 결과를 냈다. 작금에 논의의 대상이 된 대학 입시제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정부의 정책은, 모순은 아니라도, 정책 수행방식의 불균형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게 한다.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목표는 정당하다하더라도 그 목표와 관련해서 고교 내신 성적의 일정한 처리를, 무리를 무릅쓰고 대학에 강요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 것 같지는 않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교육 철학 자체도 문제라 할 수 있다. 참다운 교육의 목표는 용이 못되는 사람에게도 자아실현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용이 나온다면, 그 한 열매일 뿐이다. 물론 국가는 용을 필요로 한다. 필요한 것은 상치되는 목표들을 수용하는 더 복잡한 정책 대안이다.)

-제도와 현실 조율능력 살펴야-

제도가 참으로 인간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 되게 하려면, 끊임없는 점검과 수정과 정밀화가 있어야 한다. 의료제도를 비롯한 여러 복지제도의 현재 운영 상태는 구소련에서의 어떤 생산 체제, 가령, 구두 생산체제를 생각하게 한다. 체제 붕괴 후 터져 나온 이야기의 하나는, 소련에 구두는 많았지만, 발에 맞는 구두를 찾기가 지극히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구두를 한 가지 크기로 제조하는 것이 할당량에 맞추는 쉬운 방법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정책은 있어도, 현실과의 조율이 없는 곳에서, 관료기구의 확대와 통계 숫자는 구체적 현실을 대신한다. 참여정부는 무수한 정책 로드맵을 내 놓았다. 또 수없이 위원회를 만들고 행정기구를 증설했다. 정책 입안자들은 거기에서 성취감을 가졌을 것이다. 정책을 현실에 맞추어 섬세하게 조율할 수 있는 능력만이 정책을 현실이 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율에 바탕이 되는 것은 현장에 움직이는 인간적 감성이다. 지도자의 자질에서도 근본이 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책의 고안과 수행에는 포괄적이고 유연한 지적 능력, 강한 실천적 의지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느낌에서 나온다. 정책의 여러 함의 그리고 예산 문제를 포함한 현실성에 대한 평가가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적 측면의 평가는 더욱 어렵다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됨이 정책, 그 설명의 현장, 그리고 이런저런 기회에서의 언동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지도자를 찾을 수는 없겠지만, 정책, 현실적 유연성, 인간성-정치지도자의 자격과 관련하여, 이러한 항목들을 평가의 기준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07. 07. 05-07.

P.S.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은 김우창 입문서로 <행동과 사유 - 김우창과의 대화>(생각의나무, 2004)를 꼽는다. 육성 대담을 녹취한 것이기에 따라가기 쉽고 무엇보다도 '김우창 인문주의'의 기원 같은 것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의 아웃라인을 잡는 데에도 적합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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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2007-07-06 10:04   좋아요 0 | URL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느낌에서 나온다.' 과연 인문학자 답습니다.
로쟈님 덕분에 찾는 수고 없이 늘 잘 읽고 있습니다.

로쟈 2007-07-07 11:15   좋아요 0 | URL
수고를 덜어드린다니 제가 헛수고를 하고 있는 건 아니네요.^^
 

7, 8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을 작성한다. 한달 단위로 목록을 뽑았었지만, 지난 6월에 사정이 좋지 않아 5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을 연장했었고, 여름이 실질적인 '독서의 계절'이라곤 하지만 책만 읽을 수 있는 계절은 아니기에 기한을 넉넉하게 잡기로 했다. '새로 나온 책'들에 대한 편애 때문에 미리 이런 리스트를 뽑는 게 취향에 맞지는 않지만 여하튼 다섯 가지 주제에 따라 다섯 권의 목록을 만들어본다. 이를테면 오지선다인 셈이며 주제별로 한 권 정도씩을 읽어보자는 게 나의 제안이다(빠져나갈 구멍들도 만들어놓았다). 이런 사회적 독서의 제안 취지는 소위 '상식'을 공유하고 공통감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첫번째 주제는 지난 6월의 '후일담' 같은 것인데, 실질적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무의식은 '97년 체제'처럼 보이지만 여하튼 공식적으로 더 많이 공론화되고 있는 것은 '87년 체제'이며 그 '민주화'의 열망과 절망이 연말 대선을 앞둔 올해의 화두이다. 최근에 출간된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웅진지식하우스, 2007)은 지난봄에 나온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후마니타스, 2007)과 짝을 지어 읽어볼 만하다. 후자는 경향신문의 기획특집이었고 전자는 현재는 휴간중인 당대비평의 편집위원회가 엮은 것으로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사회에 대한 성찰'이란 화두를 붙들고 있다. 다양한 필자들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모색해보고 있다.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되새겨보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되어줄 듯하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이 창간 5주년 기념으로 기획했던 것은 문제의 진단보다는 해법이었는데, 우리시대의 명망가 '다섯 지식인이 말하는 소통과 공존의 해법'을 담은 <여럿이 함께>(프레시안북, 2007)는 '부교재' 정도로 읽어봄 직하다(지면이 아닌 온라인으로도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몇년 동안 부쩍 언론 노출 빈도가 잦아진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2/2005)는 '한국 민주주의' 담론 유포에 도화선이 된 책이다. 넓은 의미의 '정치적인 것'이 아닌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에서 지난 20년을 회고하고 문제를 진단하며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 2007)는 우리의 시야를 동아시아로 넓혀주는 책. 한국적으로 '행동'하기 이전에 동아시아적으로 '사고'해볼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두번째 주제는 한반도와 북미관계이다. 새로운 화제는 아니지만 일부러 이 주제의 책들을 검색해본 일은 드물었다. 최근 BDA 문제가 타결되어 북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와 주변국들간의 긴장관계가 일단은 해결국면으로 접어든 양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을 향한 로드맵이 앞으로 탄탄대로일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욱식의 <동맹의 덫>(삼인, 2005)의 표현을 빌면 우리에게 가로놓여 있는 건 '동맹의 덫'과 지정학적인 '지독한 역설'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주 따끈한 신간들은 아니지만 개번 맥코맥의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이카루스미디어, 2006), 브루스 커밍스 등의 <악의 축의 말명: 미국의 북한 이란 시리아 때리기>(지식의풍경, 2005), 마이크 모치주키 등의 <대타협: 북한 vs 미국, 평화를 위한 로드맵>(삼인, 2004) 등이 모두 관련서들도 눈길을 끄는 책들이다. 거기에 백낙청 교수의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이 최근 국내에서 나온 책으로는 독보적이다.

소개에 따르면 "통일을 지금의 분단체제보다 국민들이 더 나은 체제에서 살게 만드는 작업이라는 인식 하에서, 국가연합 형태의 점진적인 분단체제 극복을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는 지은이는 이른바 '6.15 시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전쟁 같은 불가피한 파국을 전제로 하는 일회성 사건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면, 통일은 어느 순간 '도둑같이' 찾아올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만큼 사전대비가 필요하다는 얘기이다(여름 휴가중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겠다).  

 

 

 

 

다소 무거운 주제들을 나열한 듯싶은데 스트레이트로 하나 더 보태자면 '인문학 문제' 또한 이 여름의 읽을 거리이다. '인문학 위기'는 이미 지난 2-3년간 학술 저널리즘의 최대 유행어가 되었고, 최근에는 급기야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이란 것까지 발표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인문학 IMF'라고도 할 만한데(생각해보면 경제파탄 10년후에 정신파탄이 수반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덕분에 인문학-인문주의-인문정신의 가치와 위상과 정체성에 대한 물음들이 간단없이 제기되었던 건 나름대로 소득이라 할 만하다.  

최근에 한국학술협의회에서 펴낸 <인문정신과 인문학>(아카넷, 2007)은 한국 인문학의 현재를 가늠해보는 데 유익한 참조가 될 만한 글들을 다수 싣고 있다. 대담 코너에서는 김우창 교수와 최근 타계한 리처드 로티의 서신대담이 연재돼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책에 손길이 간다. 그런 대담 꼭지에서도 시사되는 바이지만 한국 인문학의 간판급 지식인으로 자주 거론되는 이는 김우창 교수이다(가령, '김우창 vs 리처드 로티', '김우창 vs 가라타니 고진' 등등). 알려진 대로 문광훈 교수의 여러 저작들이 인문학자 김우창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김우창의 인문주의>(한길사, 2006)은 대표적이다. 내친 김에 5권으로 묶인 김우창 전집에 이 여름에 독파해볼 수도 있겠다(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더불어 이미 많은 화제를 모았던 책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 또한 시세에 둔감한 분들을 위해 다시금 거명해둔다. 앞서 언급한 교육부의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에 보면 "인문학은 자기와 주변의 이해를 돕고 품위 있는 삶을 유도하는 학문"이라고 규정돼 있는데, 이는 "인문학을 배움으로써 자기 자신을 존중하게 되고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얼 쇼리스의 주장을 참고한 것이다(라고 부언해놓았다). 그 정도면 '한국을 움직인 책' 후보감이다.     

인문학 알레르기가 있으신 분들은 이 여름에 통섭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최재천 교수의 '작명'이지만 어느새 입에 익숙한 단어가 돼버린 통섭은 개별 학문의 경계를 넘어 폭넓게 사유하는 것을 뜻하는데, 사실 기원으로 소급해 올라갈 수록 현재의 허다한 학문들은 몇몇 교차점과 공통의 근원에 가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찌보면 학문의 '오래된 미래'를 다시 회복해보자는 취지로도 들린다. 에드먼드 윌슨의 <통섭>(사이언스북스, 2005)이 소개된 이후 올해엔 아예 통섭원총서 제1권으로 <지식의 통섭>(이음, 2007)까지 출간됐다. 개인적으론 책들을 구해놓은 지는 꽤 되는데, 이번 여름에나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읽어도 좋겠다. 통섭 본래의 아이디어도 그러하고.    

 

 

 

 

드디어 좀 가벼운 분야로 와서 올 여름에 읽을 문학이다. 일단은 <올해의 좋은 소설>(현대문학, 2007), <올해의 좋은 시>(현대문학, 2007)을 꼽아둔다. 물론 '좋은 소설'에 선정된 작품들은 대개 문예지들에 발표되었던 중단편들이다. 장편소설들이야 독자들이 알아서 챙겨읽지만 문예지들이 거의 읽히지 않는 상황에서 아깝게 묻히게 되는 문제작/수작들이 적지 않다. 그런 작품들을 좀 챙겨두자는 취지이고 최소한 동시대 작가들이 어떤 고민거리를 안고 있으며 어떤 성취에 도달하고 있는가 정도는 가늠해볼 수 있겠다. 그리고 고른 장편들은 동아시아 삼국의 문제작들을 꼽았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를 거론하는 건 새삼스럽지만 지난 1967년에 씌어진 그의 대표작 <만년원년의 풋볼>(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이번에 재출간됐으므로 핑계가 없지는 않다. 이전에 나온 고려원 전집판은 절판된 상태였고 나도 따로 구해두지 않았던 터라 이참에 게획을 잡은 것. 그리고 중국 소설로는 본토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 된 작가 위화의 최신작 <형제>(휴머니스트, 2007)이다. 3권짜리로 종횡무진 중국 현대사와 그 시대를 살아간 군상들의 삶을 대표작가의 입담을 통해서 들어볼 수 있겠다.

그리고 올 상반기 최대 베스트셀러이자 문제작인 김훈의 <남한산성>(학고재, 2007)은 따로 거론할 필요가 없는데, 동아시아 3국의 소설을 비교해보려니 다른 작품을 얼른 떠올리기 어려웠다. 이미 읽으신 분들은 한번 더 읽으시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여름 휴가때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라면 교양과학서를 일순위로 꼽는다. 일반독자들에게 추리소설이나 SF소설에 해당하는 것이 내겐 교양과학서들인 셈인데, 지난 2-3년간 휴가다운 휴가를 다녀온 적이 없어서 스스로는 실행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밀린 책들이 많지만 이 여름에 읽을 책들도 부지런히 사두었다. '한국 최고의 과학지성들이 현대과학의 난제에 도전한다'는 부제의 <우주와 인간 사이에 질문들 던지다>(해나무, 2007)은 국내 필자들의 책이어서 거명은 하지만 270쪽의 얄팍한 책이다. 휴가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닥날.

아미르 아젤의 <데카르트의 비밀노트>(한겨레출판, 2007), 도널 오셔의 <푸앵카레의 추측>(까치글방, 2007) 모두 수학(기하학)에 관한 책들이다. 올해가 18세기의 수학자 오일러 탄생 300주년이라고 하여 그에 관한 책을 찾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내에는 변변한 책이 소개돼 있지 않다(오일러는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수학자이다).

<핀치의 부리>의 저자 조더던 와이너의 <초파리의 기억>(이끌리오, 2007) 또한 소설에 못지 않은 재미와 이야기를 들려줄 것으로 기대된다(원제는 보다 고급스럽다. <시간, 사랑, 기억>). "행동도 당연히 유전자에 적혀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마땅하다 믿고 그 증거를 찾아낸 생물학자 시모어 벤저와 그의 연구과정을 풀어낸 책. 진화학, 동물행독학, 분자생물학등 생물학의 다양한 파노라마가 한 곳에서 펼쳐진다"고. 그리고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란 부제의 <의학의 진실>(마티, 2007)은 교양서를 거의 읽지 않는 동생들에게 선물을 할까 생각중이다(그들은 의사이다)...

07. 07. 01.

 

 

 

 

P.S. '사회적 독서'만 늘어놓고 보니 약한 허전한 듯하여 '개인적 독서' 목록도 적어둔다. 현재 읽고 있거나 조만간 읽어볼 생각인 책들이다(주로 에세이들이다). <다른 곳을 사유하자>(푸른숲, 2007)와 <브레이크 없는 문화>(이카루스미디어, 2007)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소개한 바 있고, 미셀 포쉐의 <행복의 역사>(열린터, 2007)는 프랑스 역자학자의 행복을 주제로 한 대중적인 에세이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해왔던가를 돌이켜보노라면 행복에 대한 강박에서 약간은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그리고 프랑스 미술사가인 다니엘 아라스의 <디테일: 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도서출판 숲, 2007)는 기이하게도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책이다. "이 저작은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연다. 그것은 디테일이다. 우연하게 보여졌거나 차츰차츰 발견된, 식별되고 고립되고 전체에서 분리된 디테일은 '멀리서' 성립된 것처럼 보이는 미술사의 범주들에 의문을 던진다. 프랑스의 미술사가 다니엘 아라스는 그림 속 디테일의 서로 다른 지위를 연구함으로써 또 다른 미술사를 제안한다. 그것은 붓과 시선의 실천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미술사다."란 소개가 머쓱한데, 경제력 때문에 아직 구입한 책은 아니지만 충분히 관심을 끄는 책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1902-1977)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갈라파고스, 2007)는 어제 퇴근길에 손에 든 책인데, '한 기억술사의 삶으로 본 기억의 심리학'이 부제이다. 저자인 루리야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신경심리학자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올리버 색스의 책들에서 그의 이름이 종종 언급되면서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러시아에서는 그의 <일반심리학 강의> 등이 아직도 교재로 나오고 있다(아래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신경심리학의 기초>).

Основы нейропсихологии

책은 솔로몬 셰르셉스키라는 러시아 출신의 언론인 겸 기억술사에 관한 루리야의 임상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다. 국역본은 영역판의 중역이지만 193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나 같은 러시아문학 전공자의 관심 또한 충분히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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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01 21:40   좋아요 0 | URL
로쟈님 페이퍼를 오면 제가 읽고프지만 부담가서 못읽고 있는 책들을 자주 접합니다. 그 책이 지니는 무게감 때문에 주제별로 줄줄이 엮어 볼 수 없는. 언제쯤이면 로쟈님 같이 독서를 할 수 있으려나...

로쟈 2007-07-01 23:55   좋아요 0 | URL
'사회적 독서'에 올려놓는 책들은 대부분 내용 자체가 '부담'스러운 책들은 아닌데요.^^; 줄줄이 읽으려면 경제적인 부담이 될 듯하나...

동대장 2007-07-10 09:07   좋아요 0 | URL
경제적 부담에 한표 던지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