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엔 성남도서관의 인문학강좌 마지막 강의가 있었다. 지난 중순에 섭외를 받고 3주 동안 세 차례에 걸쳐서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란 주제와 함께 고골의 <외투>,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두 단편을 읽었다. 그리고 청탁을 받아서 겸사겸사 도서관소식지 '지식 정보의 샘'(48호)에 '인문학 멘토'란 글을 실었다. 새로 쓴 글은 아니고 <대학생이 된 당신을 위하여>(학이시습, 2010)에 실은 인문학 소개 글을 간추린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란 주제의 도서관 강의에서 주로 활용하는 자료이다.
지식 정보의 샘(11년 봄호) 교양인의 첫걸음, 인문학을 배우다
요즘 들어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도서관에서도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고 있고요. 새롭게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신 분들도 많습니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신 분이 아니라면, 인문학이 무엇인가 얼른 감이 오지 않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번 봄 성남도서관의 초청으로 인문학 강좌를 갖게 된 김에 인문학 ‘초심자’ 분들을 위한 몇 가지 안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문학에 대한 간단한 ‘가이드’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인문학(人文學)이란 무엇인가요? 말 뜻대로 하자면 ‘인문’에 대한 배움이고 공부입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인문학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서양의 라틴어로는 ‘스투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nitas)’이고, 이 말의 번역어가 또한 ‘인문학’입니다. ‘후마니타스’란 본래 로마인들의 인문적 소양을 뜻하는 말이었으므로 ‘스투디아 후마니타스’란 그러한 인문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공부를 가리킵니다. 보통 문법, 수사학, 시학, 역사가 그 공부의 내용이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대학 편제로까지 이어져 보통 문학(文學)과 사학(史學)과 철학(哲學) 공부를 통칭하여 인문학 공부라고 합니다. ‘문․사․철’이라고 약칭하기도 하고요. 요컨대 인문학은 이 문․사․철에 대한 공부입니다.
고전적인 의미의 인문학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인문적 소양을 함양하기 위한 공부를 뜻했지만 근대 학문체계가 형성되면서 ‘인문’학보다는 인문‘학’으로 방점이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듯 인문학의 각 분야들이 전문화됨에 따라서, 인문학은 인문적 교양을 뜻하면서 동시에 특정한 전공분야를 가리키는 말이 됐습니다. 전공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는 대학에서 주로 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이 쓰는 말이긴 하지만, 먼저 교양이란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교양’은 ‘문화’와 함께 ‘culture’의 번역어로 사용되는데, 본래는 토지의 경작이나 가축의 사육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정신적 능력의 계발과 육성이나 교육이란 의미로 확장됐고요. 수련과 도야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교양의 이념은 ‘호모 쿵푸스’의 이념이기도 합니다. 공부는 원래 ‘쿵후(工夫)’란 말에서 왔으니, 호모 쿵푸스는 곧 ‘공부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호모 쿵푸스의 또 다른 이름으로 ‘호모 부커스’, 곧 ‘책을 읽는 인간’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름들이 시사하는 것은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규정해주고 인간과 동물 간의 차이를 지정해주는 종차(種差)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얻는 과정이고 인간다움에 이르는 필수적 여정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이 질문 자체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곧바로 ‘인간다움’을 갖췄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으며, 그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거기서 ‘인간답다’는 우리말 뜻은 세 가지 정도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 같다. 인간다움이란 ‘인간 같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곧바로 ‘같잖은 인간’이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둘째, 인간이 되다. 인간이란 ‘자라나는’ 존재이자 ‘되어가는’ 존재란 뜻이며,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덜 된 인간’도 있다는 것을 ‘인간다움’이란 말은 상기시켜줍니다. 끝으로, 인간으로서 제값을 한다. ‘인간다움’은 거꾸로 인간으로서 제값을 못하는 ‘값싼 인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또한 일러줍니다. 인문학 공부가 ‘그저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다운 인간’인가를 판별해주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그때 공부는 ‘인간 같기’ ‘인간되기’ ‘인간 값하기’를 위한 공부입니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란 이렇듯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자기를 정립하고 확장하는 공부입니다.
자기 정립이란 말이 나왔는데, 조금 어려운 말인 듯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 이탁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 50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일종의 자기비판이지만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명확한 주관과 생각 없이 남의 말을 따라 말하고 남의 의견을 좇아 짖어댄다면 이탁오의 자탄과 마찬가지로 ‘한 마리 개’의 처지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정립을 위한 인문학 공부란 ‘한 마리 개’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육과 수련을 통해 앎과 행함을 일치시킨다는 의미에서 ‘몸으로’ 합니다. 이 ‘지행합일’의 정신은 사실 공자의 어록인 <논어>의 첫머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거기서 배움(學)은 정신의 일이고 익힘(習)은 몸의 일입니다. 즉,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힙니다. 원래 ‘習’(습)이란 글자는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을 나타낸다고 하므로, 어미 새에게서 비행하는 법을 배우고 처음 날갯짓을 하는 것이 바로 ‘습’입니다. 자신이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배움의 기쁨이고, 학습의 즐거움입니다. 그것이 이론과 실천의 합일이고 일치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공부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습’이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학습을 실천하기 위한 방책의 기본은 ‘독서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단순히 책을 읽을 줄 안다는 의미의 독서력이 아니라, 인문고전과 교양서를 읽고 소화해내기 위한 독서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컨대, ‘문학작품 100권과 교양서 50권’ 정도를 각자의 독서 목표치로 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학작품’은 가벼운 읽은 거리가 아닌 ‘고전’이나 ‘세계명작’ 수준의 작품을 말하고, ‘교양서’는 인문․사회과학 교양서를 말합니다. 이런 분량의 책을 비교적 단기간(2년도 좋고 4년도 좋습니다) 동안 독파하는 것이 독서력 형성의 지름길입니다. 자기만의 목록을 만들 수도 있지만, 여러 권장도서의 목록을 참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관련 교양강좌를 적극적으로 수강함으로써 독서를 ‘자발적 의무’로 강제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게 독서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독서력이 붙고 독서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 인문학 공부는 평탄해집니다. 다양한 수준의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독서력을 지속적으로 단련시켜나가는 일이 남을 뿐입니다.
흔히 인간의 욕구에는 위계가 있어서 생리적 욕구와 소속감, 자존심에 대한 욕구 등이 먼저 충족된 후에야 비로소 자아실현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품위 있는 삶에 대한 욕구는 다른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야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요? 기본적인 욕구 충족만을 관심대상으로 삼는 삶은 단순한 ‘생존’만을 지향하는 ‘벌거벗은 삶’입니다. ‘벌거벗은 삶’의 자리에서 인문학은 무의미한 사치이거나 장식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 삶이며 품위가 결여된 삶입니다. 생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문학 공부입니다.
11. 0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