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끝내지 못한 일을 과감히 포기하고, 바람을 휘날리며 퇴근했다.

왜?
Chagall 전시회에 가려고.
원래 10/15까지 전시예정이었는데,
워낙 방문객들이 많아서 22일(오늘)까지 연장되었다,

내가 하는 일이 항상 그렇듯이
( 벼락치기의 대가.時테크랑 전혀 관계 없는 대표적 인간 유형!
자랑도 아닌데...ㅋㅋ)
전시 종료를 이틀 남기고 부랴 부랴 미술관을 찾았다.

7시에 갔는데도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는 시민들을 위한 꽁짜 콘서트까지 하고 있었다. 박기영이 한껏 가창력을 뽐내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시원한 저녁 바람, 음악, 샤갈전을 보기 위해 찾아 온 많은 사람들..
분위기 참 좋았다.

그 때, 시커먼 대형 승용차 한대가 섰다.
경비가 90도로 인사를 하고,
양복 차림의 공무원 아저씨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차 주위를 둘러쌌다.

도대체 누가 왔는데, 이 난린가?

차 문이 열리더니, 이명박이 내렸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90도로 절을 하고 악수하고 난리였다.

우리는 힐끔 그들의 "쑈"를 바라보면서, 미술관에 입장했다.
전시종료 이틀 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미술관에서 줄을 서서 작품을 본건 정말이지 처음인 것 같다.
살바도르 달리展에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었다.

초등학생들한테는 학교에서 숙제를 내 줬는지
어린이들이 수첩에 깍둑이 글씨로 작품 제목들을 적고 다녔다.
뭐하러 그런 숙제를 내 줘가지고.....한심하다.

그 놀라운 색감에, 그 몽롱한 상상력에 반해서
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어린이들이 대폭 탄생할 중요한 시점에서
교사들이 내준 100년 전과 똑 같은 숙제로
어린이들은 작품 제목을 적는다고 바빠서 그림도 제대로 못 보고 있었다.

달력, 엽서, 책, cafe에 걸려 있는 프린트화 등에서 샤갈의 그림을 수도 없이 봤지만,
원화를 보니 그 색감에 너무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떻게 이런 색감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Chagall은 천재다.

Chagall의 그림을 보면 인물들의 얼굴 색깔이 다 다르다.
초록색 얼굴, 파란색 얼굴, 빨간색 얼굴......
그 어떤 얼굴도 이상하다거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국민학교 때가 생각난다.(난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국민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냥 국민학교라고 부른다.)

미술시간에 항상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고,
친구들의 생일선물로도 가장 흔하고 만만한게 크레용이었다.
미술 시간 뿐 아니라 그림 일기까지 그려야 했기에
크레용은 거의 연필과 맞먹는 국민학생들의 생필품이었다.

기본 크레용은 12가지 컬러,
그 다음은 24가지 컬러,
디따 큰건 48가지 컬러도 있었던 것 같다.
( 48개 짜리 대형 크레용을 가지고 온 애들은 하루 종일 자랑한다고 침을 튀겼다.)

크레용은 어린이들의 손에 묻지 않도록
종이로 쌓여 있었고 그 종이에는 색깔 이름이 써 있었다.

기억나겠지만,
크레용에는 "살색"이 있었다.
"살색"
그 때는 한번도 "살색"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아빠를 그릴 떄,
선생님을 그릴 때,
친구들을 그릴 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살색으로 얼굴을 색칠했다.

그런데....
어떻게 "살색"이라는 색깔 이름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이 세상 사람들의 "살색"이 모두 다 다른데 말이다.
꼭 "살색"이라고 부르려면 좀 길더라도 "한국사람 살색"이라고 불러야 했던 거 아닐까?

물론 같은 한국 사람이라도
사람 마다 살색은 모두 다르다.

그러니까 화장품 종류도 많은거 아닌가?
내츄럴 베이지, 다크 베이지 , 페일 베이지 등등....

"살색"이라는 호칭은 너무도 파쇼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아무런 비판적 대응 없이 "살색"은 크레용의 그런 엷게 누르끼리한 색이라고 믿었다.
살색은 사람 마다 다 다른데도 말이다.

아프리카에서는 "black"을 "살색"이라고 부를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거주지역에서는 "white"를 "살색"이라고 부를까?
미국 같이 온갖 인종이 다 뒤섞여 사는 나라에서는 도대체 무슨 색깔을 "살색"이라고 불러야 할까?

샤갈이 그린 총 천연색의, 너무도 눈부신 원색으로 빛나는 얼굴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상상력의 상실"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살색"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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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달 째 계속된 야근,
해도 해도 계속 밀리는 업무,
회신 늦는다고 난리 치는 거래선들,
정말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데도
"원래 대리 때 일 제일 많이 하는거 아니야?"
너무도 당연하게 표정 없이 얘기하시는 팀장님.

요즘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다.

드뎌 오늘 아침,
잔뜩 지친 얼굴로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 보다
바람이라도 좀 쐬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잠시라도 탈출하고 싶었다.

근데....
팀장님이 자리에 안계셨다.

그래서 포스트 잇에 또박또박한 글자로(원래 내 글씨는 아직 국민학생 같다.)

"감기가 심해서 병원에 갑니다.13시까지 들어오겠습니다. 성수선"

라고 써서, 팀장님 모니터 하단부에 얌전히 붙힌 다음,
사무실을 나왔다.

그때가 11시 10분 전 쯤?

일단 나오니 살 것 같았다.
날씨도 좋았다.
광화문까지 터벅 터벅 걸어갔다.

일단은 광화문 우체국 옆의 커피빈에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점심 시간 전에 가니 사람도 없고 참 좋았다.
평일에도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구나....

12시가 되면 근처 회사원들이 몰려와 아수라장을 만들 것 같아서,
잠깐의 독서를 마치고 교보문고에 갔다.
서점에 가면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 난 아침에 일어나서 잠을 깨려고 책을 읽는다.뭔가를 읽어야 정신이 집중된다. 잠 들려고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몇권의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고, 또 알라딘에서 찜해둔 책들을 확인사살했다.

그리고....
책을 한권 샀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지금 "일민미술관"에서 사진전을 하고 있는 최민식 선생의 사진집이다. 시인 조은이 사진 한컷 한컷에 짧은 글을 써놓았다.

예술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꽂혀 있기에 집어 들었는데,
긴 세월, 만만치 않은 삶을 견뎌낸 시골 할머니들의 사진을 보고
순간 울컥했다.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최민식의 사진들을 보면서,
특히 만만치 않은 인생을 견뎌낸,
평생 고된 일을 하느라 울퉁불퉁해진 손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고 참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툴툴거리면서
사무실을 뛰쳐나와 여기에 있는거지?

모진 인생을 견뎐낸 할머니들,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난 할머니들에게 아주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래서 영화 <집으로>도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볼 생각 없다)
구부정한 할머니가 외손주에게 무시 당하고 그런거 보면 막 화날 것 같다. 영화 보면서 스트레스를 무시무시하게 받을 것 같다.
마지막이 해피엔딩이건 감동적이건 상관 없다.
나는 지하도에서 껌파는 할머니만 봐도,
시장통에서 팔리지도 않는 나물을 팔면서 하루 종일 앉아 있는 할머니를 봐도,
평생 고기 한번 제대로 못먹고 모은 돈을 집 앞에 있는 대학 장학금으로 턱하니 내놓는 할머니를 봐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난 평생 화장품 하나 제대로 된거 안쓰고,
고기 한번 제대로 못 먹어 보고,
악세사리라고는 금가락지 하나 뿐인 할머니들이,
평생 하도 고된 일을 해서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평생 모은 돈을 대학에 기증하는 걸 보면 화가 난다.

그냥 그돈으로 평생 고생만 해온 할머니들이
비행기도 한번 타보고,
비싼 고깃집에서 고기도 한번 배터지게 먹어 보고,
집도 좀 번듯한 데로 이사가서 등따시고 배부르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 피와 땀과 한의 결정체인 돈을 공부도 안하는 애들 잔뜩 모여있는 대학에 기증하다니...
뜻은 고맙지만, 난 평생 당신을 위해 단 한번의 사치를 해 보지 않은 할머니들이 안타깝다.

짧은 시간 최민식 선생의 사진집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주로 "부끄러움"이었다.

서점을 나오는 길에 바로 그 옆에 있는 일민미술관에서
최민식 사진전을 볼까도 생각했지만,
13시까지 간다고 스스로 말했기에,
땡떙이를 치고 사진을 감상하면 그 피사체들에게 더욱 더 미안할 것 같아서,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주말엔 최민식 사진전을 보러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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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2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저 책 샀어요.
당장 읽고싶어 주문해놓고설랑 실컷 딴짓하는 이 심리는 뭘까요?

마냐 2004-11-09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최민식전...별로라는 풍문만 그득....벼르고 벼르다 아직 못가구 있슴다.
 
4월 이야기 (CD + DVD) - [초특가판], Movie & Classic, Antonio Vivaldi - The Four Seasons / Concerto Grosso D minor
이와이 슈운지 감독, 마츠 다카코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주말에 DVD로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四月物語 / April Story, 1998)를 봤다.

그 유명한 이와이 슌지가 감독도 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제작도 했다.

이와이 슌지.
<러브 레터>로 한국을 강타했던,
일본어라고는 "아리가또"랑 "스미마셍" 밖에 몰랐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 오 겡끼 데스까?" 이 한 마디를 더 알게한 이와이 슌지.

내가 본 이와지 슌지의 두번째 영화다.
왜 이 옛날 영화를 봤냐구?

요즘 내가 일본어에 미쳐있기 때문이다.
정말 미치도록 재미있다.
이렇게 재미있는걸 왜 진작 배우지 않았을까?

그래서 영화를 하나 봐도,
노래를 하나 들어도,
일본 영화, 영화 노래를 고르게 된다.

일본어가 너무 재미있어서....

<4월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요즘에도 주인공 같은 여자애들이 있을까?
특히 일본에....?

<4월 이야기>의 줄거리는 정말 단순하다.

고등학교 때 선배를 짝사랑했던 수줍은 여자애가
그 선배가 보고 싶어서 훗카이도에서 도꾜까지 대학을 간다.
그리고 그 선배가 아르바이트하는 학교 옆 서점에 매일매일 간다.
매일매일 책을 사러 간 끝에.....
드디어 그 선배는 여자애를 알아본다.
"혹시....OO 고등학교?"
여자애는 너무도 기다려온 대답을 한다.
"네...."

그리고 둘이 사귀냐구?
앞으로 사귈것이라는 암시가 전해진다.
하지만 단지 암시일뿐...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애가 선배가 빌려준 우산을 쓰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미소지으며 혼잣말을 할 뿐이다.
"이건 기적이야. 사랑의 기적!"

여기서 끝.... The End.

이 영화 재미있게 봤다.
일본 대학이 나와서 재미있었다.
아....일본 캠퍼스는 저렇구나....학교식당 메뉴가 저렇구나...
동아리 선배들이 하는 짓은 한국하고 똑같구나...
한국에서는 제주도에서 서울 온 애 안 놀리는데,
일본에서는 훗카이도에서 도꾜 온 애 억수로 놀리는구나....등등.

그런데....
요즘에도 이런 순정 만화같은 사랑을 하는 여자애가 있을까 싶었다. 그것도 일본에서.... 그래서 좀 서글펐다.

시부야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고딩 여자애들이 눈에 아른거리면서.... 왜 한겨울에 맨다리에 망사 스타킹을 신고 똥꾸 치마에 부츠를 신는지.... 시부야 109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탄 수많은 고딩들.
거의 모두가 엇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다. 겨울이라고 오리털 파카라도 입으면 큰일 날 것 같다.
(출장 갔을 때 시부야가 도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시부야 109에 갔다가,정장입고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참....민망했다.)

일본 고딩들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을까?
보면서 피식 웃지는 않았을까?
훗카이도에서 도꾜까지 따라가서 말 한마디 먼저 못꺼내는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와이 슌지를 잘 모르지만, 아니 <러브레터> 만든 감독이라는 것 밖에 아는거 없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와이 슌지는 혼잡한 세상에 너무 지친게 아닐까?

그래서 몇년 전 죽은 남자 친구를 못 잊어
깊은 산 속의 눈밭에서 "오 겡끼 데스까?"를 외치고,
말 한마디 못해본 선배를 만나러 도꾜까지 가서 사랑의 기적을 만나는 순정만화형 영화를 만드는게 아닐까?

<러브레터> 보고는 많이 울었었는데,
<4월 이야기>는 사실 좀 실망했다.

구성도 너무 단순하고,
스토리나 배경, 배우의 이미지 그 모든 것에서 "순수함"을 느낄 것을 관객들에게 강요하는 것 같다.

감독에게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다.
요즘에도....이런 애들 진짜 있나요? 혼또?

수선이의 도서관

www.kleinsu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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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2008-04-28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러브레터 보고 나까야마 미호짱의 고 깜직한 커트머리에 반해서 비됴가게 가서 '러브레터'류의 일본영화 더 없냐며 채근하곤 했었는데..ㅋㅋㅋ 러브레터는 처음엔 신선했으나 몇번보니 시들시들~~ 무엇보다 여주인공의 수동적이면서 내숭시런 자세가
환장하게 답답해 부러요.^^

4월이야기는 막상 그렇게 뭔가를 암시하기'만' 하고 허무하게 끝나 셥셥했지만
여운이 있더군요.^^ 그 뒤의 이야기를 내 마음대로 마구 상상할수 있는 자유도 주고요.

그리고 비포선라잇선셋 묶음처럼 다음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도 되고요.
슌지감독아니라도 다른 누군가가....

4월....에 나오는 주인공 츠자같은 여성은 아마 이와이 슌지 감독의 로망이 아닐까요?
그 나이때 늠자들이 청춘을 보낼때 선망하던 타입이 아닐런지...
저는 마흔줄에 합류해서 그런지 무언가를 시작하는
그 봄과 그 청춘이 좋고 부러웠습니다.

아아, 내게도 한번더 청춘이 와준다면....꺼이꺼이..

청춘의 풋풋함을 상징하는 듯한 봄들판의 신록이며, 장대비, 벛꽃등도
아짐의 가심에 불을 질러...ㅋㅋ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어에 관심이 있다보니 주인공들의 대사가 너무 맛있었습니다.
마츠다까꼬와 선배의 목소리에서 풍겨지던 풋풋한 어감, 소리의 색조등이 띵호아~~

'셈빠이, 이마모 반도 얏떼마스까?'를 시작으로 주인공은 작업에 들어가지요.ㅋㅋ







모모모구구 2010-10-2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와이 슌지의 다른 영화들을 살펴보면 어두운 영화도 더러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피크닉>이나 그의 초기작 <프라이드 드래곤 피쉬>, 그리고 '돈'을 소재로 한 영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왕따를 소재로 한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 그렇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대표작을 <러브레터>로 뽑지만, 몇몇 사람들은 <릴리슈슈의 모든 것> 혹은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뽑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이 슌지 세계에 좀 더 빠져 묘한 느낌을 경험해보셨으면 해요.^^
 



오늘 봄츄자의 미니 홈피에 아주아주 오랜만에 들어갔다가
"Fairy Moon"이라는 그림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런데....
쭈끄리고 앉아서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마치 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구?
니가 그림 속 여자 처럼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냐구?

물론 내가 살이 좀 많긴 하지....ㅋㅋ

그림 속의 여자는,
날개를 달고도 어데로 갈지를 몰라,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체념에 가까운 표정에는
바라보기는 하지만 달은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녀는 어디로 날아가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달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조금 있다 달이 살을 불리면서 반달이 되면
여자는 날아야만 한다.
달에 의탁할 공간이 없어진다.

그런데.....
날개 또한 튼튼하지가 않다.
마치 잠자리의 날개 같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헛갈리고,
날개는 튼튼하지도 않고,
일단 미친 척 하고 날아가다가 날개가 꺽이지는 않을까 걱정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에게 의탁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꼭 나 같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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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보낸 수선의 31번째 생일>

디카로 사진을 찍는건 좋은데....
디카 잭을 이어서 컴에 옮기는 그 단순하고도 기계적인 행위.
그게 귀찮아서 이제야 사진을 올린다.
나 또한 이 시대의 귀차니스트?

귀차니스트까지는 아닌지 몰라도,
난 귀찮은 일을 아주 아주 싫어한다.

구내식당에 가면 난 어떤 메뉴를 선택하느냐?
나의 선택은 항상 너무도 확실하다.
메뉴에 상관 없이 줄이 가장 짧은데 선다.
줄 서는거...정말 싫어한다.

울 팀 김대리는 매일 아침 게시판에서 오늘의 메뉴가 뭔지 확인하고 사람들한테 말한다.
" 오늘은 1보다 2가 낫겠는데요? 1공제회관은 오늘 카레야...어제 술도 많이 마셨는데..."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있다면,
나 처럼 게으른 사람이랑 일요일 아침에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거다. 늦잠을 자고 책을 읽고 뒹굴뒹굴....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청소기 밀고, 조기 축구라도 나간다고 츄리닝 소리 바스락 거리고 그런다면 정말 기절할 것 같다.

결혼을 결정할 때,
다른건 몰라도 이 조건만큼은 꼭 밝혀야 겠다.

" 누구라도 나를 일요일 아침에 깨울 수는 없다!"

뭐? 아직 정신 못 차렸다구? ㅋㅋ

30번째 생일은 덴마크의 한 시골 마을에서,
31번째 생일은 상하이에서 보냈다.

이 얘기를 들은 승태 오빠가 물었다.

" 넌 생일 때 마다 외국에 가는거야? "

우하하하하.....
내가 뭐 연예인이야?
생일을 즐기려고 외국에 가게?
(사실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ㅋㅋ)

작년에는 7박 8일의 출장 기간 동안 생일이 끼어 있었다.
그래서 덴마크 시골 마을의 한적한 호텔에서 아침을 먹었다.
Rodney 아저씨랑 출장을 같이 같었는데,
친절한 수다장이 Rodney 아저씨가 탁상시계를 선물했다.
이쁜 카드랑 같이....
카드에는 Rodney 아저씨 partner의 축하 메시지도 써 있었다.
(각주 : 유럽에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커플들이 많다.
이들은 서로를 파트너라고 부른다.아이를 낳고도 결혼 안하는 커플들도 많다.내 직업의 강점이 있다면 세계를 돌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성"을 느끼는데 있다. 그 외에는? 스트레스 덩어리다.)

올해 생일은 추석 연휴에 끼어 있었다.
사실.....
상하이에 가고 싶어서 갔다기 보다는,
추석 연휴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었다.

결혼 안한 30대 싱글들은 정말 치명적인 명절 스트레스를 받는다.뭐 영국같은 나라에서도 그렇게 당하는데(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라!)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 한국에서 30대 싱글의 명절은 얼마나 처참하겠는가? ㅋㅋ

사랑하는 후배 남생이와 떠난 상하이에서의 4박 5일.
참 행복했다.
글쿠..... 또 하나!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느끼고 또 느꼈다.절절하게...

뭐 오래 살진 않았지만,
후배들에게 말할 기회가 있을 때 난 항상 주장한다.

진정한 투자란 자기 자신한테 하는 투자라고!

그러니 별 득도 안되는 재테크 책 보면서 이자 몇만원 더 받아 보려고 안간힘 쓰지 말고,
책 한권이라도 더 읽고,
여행을 하고,
가끔 사치도 즐기라고....
자기 자신한테 투자하라고!
내 자신한테 이 세상을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사랑할 기회를 주라고!

멋있는 말이라고?
아마 내가 모아둔 돈이 없어서 나의 처지를 합리화 시키려고 이런 연설을 하는 것 같다.ㅋㅋ

그런데 "여행"은 정말 필요하다.
그것도 젊었을 때....
여행을 통해서 항상 나는 느낀다.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알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너무 많다.
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너무 많다.

상하이 Museum에 갔을 때였다.
스위스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단체 관광을 왔다.
인생에 주어진 숙제(아이들을 낳고, 결혼시키고, 열심히 일하고, 명예롭게 은퇴를 하고 등등) 를 훌륭히 마치고, 멀고 먼 중국으로 여행을 온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의 여행은 여유가 있다.
회사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맡기고 온 애들도 없고,
경비를 아끼려고 노숙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 보면서 너무도 아쉬운건
에너지가 딸린다는 거다.

좀만 걸으면 힘들어서 좀 쉬어 주어야 하고,
가이드의 말을 너무도 잘 듣는 (좋게 말해서 "존중"하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은 그 많은 작품 하나하나 앞에 다 멈춰 서서
박물관에서 나눠준 헤드폰을 끼고(물론 유료다) 작품 설명을 듣는다. 설명을 들으려면 손에 쥔 리모콘 조작을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 할어버지,할머니들도 많다.
그래서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삼삼오오로 모여 리모콘 조작 방법에 대해 의논을 한다.

" 들려?"
" 아니,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
" 그 초록색 단추를 눌러야지. 이제 나와?"
" 어....이제 나오네..... Jerom한테도 말해 줘야지."

쓰다 보니 코미디 같다.
작품 앞에서 리모콘 조작법을 의논하다니....
일단 헤드폰에서 설명이 나오면 또 다른 작품 앞으로 간다.

" 아까 초록색 단추 맞았지? 왜 또 안돼지? "
" 그 진열장에 번호 붙어있어? 번호 붙어 있는 진열장 앞에서만 방송이 나와."
" 어...그래? 어쩐지... 아까 열번도 넘게 눌렀는데 안 나오더라.그 도자기 앞에서 말이야."
" 그래, 번호 있는데서만 누르라니까...."
" 고마워. 그런데 Jerom은 어디있지? "
" 전시실 밖 쇼파에서 쉬고 있어. 어제 부터 무릎이 아프다고 하더라구..."
" 그래?나도 좀 쉬어야 겠네."

어떻게 알아 들었냐구?
뻥 아니냐구?
나 독문과 나왔다. 써먹을 일이 없어서 그렇지, 이런 수준은 알아 듣는다.ㅋㅋ

여행은 충전이다.
여행은 자기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너무도 좋은 기회다.
여행에서 에너지를 듬뿍 듬뿍 받아와서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 또 다른 책을 읽게 되는 것 처럼,
(이름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여행도 한번 해야 계속 하게 된다.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말고 집을 나서자.
꼭 멀리 가지 않아도 좋다.
가까운 계곡도 좋고,
단풍도 아름다운 계절인데 산사에 가보는 것도 좋다.
혼자라고 겁낼 필요도 없다.

여행....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단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또 떠나고 싶다.

참! 31번째 생일에 대한 정리.

하나. 남생이에게 이쁜 목걸이를 선물 받았다. 고마워, 남생아!
둘. Wang을 만나서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인간이 그렇게 말을 잘할 수 있다는데 대단히 놀랐다.
셋. 최사장님이 근사한 저녁을 사주셔서 실컷 먹었다.

넷.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위가든에 있는 절에서 기도를 했다.

내 인생에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나를 낳아주시고, 한결 같이 사랑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다시 태어나도 같이 태어나고 싶은 내 동생들에게 감사한다.
항상 엉뚱한 나를 웃으며 지켜봐 주는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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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18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합니다.
모르는 이의 인사이지만 기쁘게 받아주세요.
내 인생에 감사한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감사한다.
멋진 분이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