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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때, 영화 <비트>를 보면서 "따끔"했다.
영화에서 로미(고소영)는 공부를 디따 잘하는 고등학생이다. 로미는 공부를 안하면서 잘하는 척, 실컷 놀면서 잘하는 척 한다.
민(정우성)을 야구장에 보내서 관중석에서 홈런볼을 받으려다 싸우고 이런 세세한 사건까지 다 보고하게 한 다음에, " 나 어제 야구장 갔다 왔는데, 글쎄 말이야..." 하며 친구들한테 으스대며 떠든다.
매일매일 밤늦게,코피 터지게 공부해도 로미보다 공부를 못하던 친구는 지하철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고, 친구의 자살에 가책을 느낀 로미는 사라진다.
로미에게서 "잘 노는 척"하는 범생이의 모습, 그러니까....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학교 다닐 때, 신입사원 때, 아니 지금까지도 난 남들한테 "날라리"로 보이고 싶었다. 답답한 범생이의 이미지가 너무도.....싫었다.
아마도 범생이,모범시민,KS mark에 대한 이런 뿌리 깊은 저항감은 엄마,아빠에게 느끼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로미만큼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난 참 "노는 척"을 많이 했다.
신입사원 때는 나이트에 자주 다니는 "척"했다. 실제로.....난 나이트 좋아하지도 않고, 춤 추는 것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동기들이 모여 " 야...주말에 힐탑 갔었는데 물 좋더라." " 그래? 노보텔은 완전 물 갔던데." 이런 유치한 대화를 하고 있으면, 나도 갔다 온것처럼 한마디씩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생일인가 해서 연례행사처럼 나이트에 갔다가 "양아"로 통하던 동기 H를 만났다.
난 H를 못봤는데, H는 스테이지에서 어설프게 춤추던 나를 쭉 보고 있었나 보다.
H가 어깨를 탁 쳤을 때,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H는 의미심장한, 동시에 느끼한 미소를 흘렸다.
월요일에 출근했을 때, H가 커피나 한잔 하자며 내가 있던 층으로 놀러왔다.
H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야....너 참....귀엽다. 난 니가 정말 많이 놀아본 앤지 알았어. 너....솔직히 말해서...여태까지 나이트 10번도 안가봤지? 푸하하하. 난 보면 다 알아. 짜식....귀엽긴."
H는 7살 조카한테 하듯이 내 머리통을 톡톡 치더니 자기 층으로 갔다. 정말....뻘쭘하고 쩍 팔렸다.
이렇게 어설프게 들키면서도 나는 여전히 노는 "척"을 하곤 했다. 범생이로 보이는게 싫어서....
근데 왜 갑자기 범생이 타령이냐고?
오늘....아침부터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너는 펫>(1~14권) 세트를 샀다. 어제 밤부터 열광하며 읽었다.
쌩뚱맞게 아침부터 만화책을 보며 킥킥거리고 있는 딸을 보며 아빠가 말씀하셨다.
"만화책 읽는게 그리 좋은 습관이 아닌데...."
헉....난 30대 딸에게 어울리지 않는 아빠의 충고(?)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지만, 아빠를 상대로 만화책의 위대함을 주제로 토론하고 싶지는 않아서....참았다.
나....고등학교 때까지 만화가게 한번 가본 적 없는 범생이었다. 나....만화책 즐겨본거 몇년 안됐다. 나....A형도 아닌데 디따 소심한 것이 툭하면 내 잘못인 거 같다.
이런거.....너.무.싫.다.
며칠 전에도 엄마한테 혼났다. 왜? 삼일절인데 태극기 안달았다고... 엄마가 아침 일찍 외출하면서 태극기 달라고 시켰는데, 난 숙취로 늘어져 자고 있었다.
30대가 태극기 안달아서 엄마한테 혼나다니.... 쓰면서 보니 웃음이 나온다.코.미.디.
나는.....범생이가 싫다. 그런데....나는 범생이다.
사소한 일에 조마조마해 하고, 운전할 때 차선을 칼날처럼 지키며, 어쩌다 거짓말을 하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나는 나는.....범.생.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