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회사에 오니 팀 분위기가 술렁였다.
A과장의 어머니가 어젯밤 돌아가셨다고 한다.

회사원들은 누가 상을 당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게시판에 위치,발인일, 연락처 등을 올리고,
조화를 보내고, 조의금을 걷고,
조를 짜서 영안실로 달려가고,
음식을 나르고, 일을 거든다.

하지만...감정적인 동요는 거의 없다.
마치 메뉴얼이 있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동료가 얼마나 슬플까 걱정되어서 일을 못한다던지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일 년에, 아니 어쩔 땐 한 달에도 몇 번씩 상이 있고,
조직에 속한 개인이 상을 당하면,
조직의 다른 개인들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하나의 조직으로서 움직인다.

상을 당해 본 사람들에 의하면,
실제로 이런 조직의 도움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신입사원 때,
내 사수가 모친상을 당했었다.
사수는 상을 마치고 일주일 후에 출근했다.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너무도 놀랐다.
왜냐면..... 내 사수였던 L선배는 출근 첫날부터 너무도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마치 일주일간 출장 갔다가 출근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덤덤하게, 말없이, 묵묵히 일했다.

난 생각했다.
아..... 이 선배 참 독한 사람이구나.
하늘이 무너져 내릴 만큼 힘들 텐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 티 내지 않고 열심히 일할까?

회사를 다닌지 몇 년 되지 않아 난 알게 되었다.
그 선배가 독한 사람도, 유별난 사람도 아니었음을....
조직에서는 원래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걸....

모두가 그렇게 한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되도록 티 내지 않고,
되도록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한다.

물론 나도 힘든 적이 있었다.
뭐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일이 힘들고, 권태를 느끼고
이렇게 어찌 보면 소소하고 시시컬컬한 일들 말고
진짜로 힘든 일.

그 때, 난 참 많이 헤맸었다.
회사에서 표정관리도 잘 못했다.
정말 가면이라도 있으면 하나 쓰고 다니고 싶었다.
포커페이스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일도 여느 때처럼 "aggressive"하게 하지 못했다.
뭐를 해도 느리고 밍기적거렸다.

그 때 울 팀장님이 내게 말했다.
"너 요새 왜 그렇게 생산성이 떨어지니?"

그래, 그 때 나는 조직원으로서의 "생산성"이 떨어졌다.
조직원의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조직의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것이다.

그 때, 팀장님의 말이 내겐 참으로 비정하게 들렸다.
(물론 울 팀장님은 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축구를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골키퍼가 자꾸 딴 생각에 빠져서 펑펑 점수를 내준다면,
그 선수 개인에게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 한들
그 개인적인 일이 팀의 패배에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을까?

뭐.....회사원이나 축구선수나 다를 것도 없다.
조직은 개인들로 구성된 유기체이고,
그 유기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전력 차질은 조직의 전력 저하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조직에서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티 내지 말고 열심히, 펑크 내지 말고 일해야 한다.

이런게 프로 정신 뭐 그런 것도 아니고,
뭐 조직이 삭막하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당연한 얘기다.
물론....이걸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다.

영안실에 먼저 간 몇 명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 모두는 여느 때처럼 일하고 있다.

A과장은 지금쯤 얼마나 마음이 무너져 내릴까?

p.s) 아침에 A과장 모친상 얘기를 듣고 맘이 아팠다.

하나는, A과장이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상심이 될까...하는
생각에.

하나는, 아침에 엄마한테 짜증 부리고 나온 게 양심에 찔리고,
미안하고, 후회가 되어서...

항상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은 굴뚝처럼 하면서도
사소한 일로 짜증이나 부리고 심술 부리고 그런다.
오늘 아침처럼...

점심 시간에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괜히 미안해서....
엄마는 말씀하셨다.
"추운데 제발 좀 일찍 일찍 들어와라!"

A과장 조문을 가야하니 오늘도 일찍 들어가지는 못하는데.....쩝

엄마, 내일 아침부터는 안 깨워도 일찍 일찍 일어날께!
자주 하는 결심이지만, 착한 딸이 되기를 다시 한 번 결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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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5-12-1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데 그걸 모르고 있다가 꼭 뒤에 후회하죠.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깨워야 일어나는건 심하다. 울 엄마는 나 학교 다닐때도 안깨웠는데..."지가 아쉬우면 일어나겠지"라는 방관주의.

moonnight 2005-12-1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닌 수선님 맘 다 알고 계실 거에요. 아빠, 엄마께는 아무리 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는데 오히려 더 섭섭하게만 만드는 거 같아 맘이 아플 때 많아요. 저도 오늘 선배 부친상 소식을 들었답니다. 예전엔 몰랐는데 이젠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오늘 저녁에 가서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해 주어야겠어요. 그리고 그 전에 수선님처럼 집에 전화 한 번 해야겠네요. 쑥스러워서 말로는 못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요. 이미 착한 딸이신 우리 수선님 ^^

암리타 2005-12-14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직사회에서는 개인적 슬픔, 동정같은 감정도 숨긴 채 괜찮은 듯이 일하는 것이 때론 비정하게 보이면서도 어쩔 수 돌아가는 일상의 굴레가 아닐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ㅠㅠ

kleinsusun 2005-12-14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쥐님,안 깨워도 일어나요.아슬아슬하게.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근데 울 엄마가 그 꼴을 못봐요. 엄마 마음이 더 급하답니다. ㅋㅋ
우리 모두 효도 하자구요, 효도!

moonnight님, 어제 어찌나 후회가 되던지....전 절대 착한 딸이 아니랍니다. ㅠㅠ
어제 맘에 걸려서 집에 두번이나 전화를 했어요. moonnight님도 어제 전화하셨나요?^^

암리타님, 맞아요.일상의 굴레. 그 일상의 굴레에서 지치고 또 힘내고 그러는게 그 조직 속의 개인이구요. 一喜一悲 속에 굴러가는 일상.ㅎㅎ

2005-12-16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12-16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2005-12-16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