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내 홈피의 글들을 자주 읽는다는 한 출판사의 기획자가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같은 "치열한 직장생활"을 담은 책을 한번 써 보라고 했다.
기획자는 내가 당연히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를 읽었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하지만...나는 읽지 않았다. 오히려 "과하다" 싶은 제목에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난 페미니스트, 일하는 여자를 이렇게 오버해서 표현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툭하면 전사, 투쟁,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 총 없는 전쟁터 어쩌고.....

난 분명 이 책을 읽기 전에 심각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 책 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이기는 게임만 한다>
<사람들은 나를 성공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벼랑 끝에 나를 세워라>

제목만 들어도 팍팍하다.
이런 책들의 제목은 사뭇 위협적이다.

" 여자가 성공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아니면 이 책 읽고 감동이나 하거나...."
이런 은근한 협박.

조선희의 글들을 <씨네 21>에서 수차례 읽어보긴 했지만,
조선희의 책을 읽은건 처음이다.
조선희의 소설 <열정과 불안>을 몇년 전 샀는데 아직 읽지 않았다.
뭐...그런 책들이 좀...많다.

조선희는 참 "대단한" 여자다.
참 대단한 "성취"를 했다.
<씨네21> 편집장을 하면서 일관되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치적 입장을 유지했다.
흔들림 없이....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멀지만,
여자들이 일할 수 있는 이 만큼의 토양이 갖추어진 것도
조선희 같은 선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한다.

하지만...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는 뭔가..."아쉬움"이 느껴지는 책이다.

이 책은
1부 씨네21, 성공모델 만들기
2부 일하는 여자, 그 뒷모습
3부 영화계에서 보낸 한철
4부 씨네 21 편집장이 독자에게
이렇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부는 책장을 채우기 위해서 부록처럼 달았다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씨네 21에 연재했던 편집장이 독자에게 쓰는 편지를
책의 1/4로 구성했다는건 좀....너무...성의가 없다.
1~2부의 "치열함"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느슨한" 구성이다.

3부 또한 1~2부와 따로 논다.
1~2부의 치열함과 리얼함, 한국사회의 남자위주 조직에 대한 신랄한 비판, 일하는 여자가 만나는 수많은 장애들과 조직의 벽들, 그 극복과 열정....이런 것들을 숨가뿌게 써 나가다가
3부에서 뜬금 없이 "내 인생의 영화" 7편을 소개하고 할 때는
김 다 빠진 콜라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이 책은 1~2부를 확장해서 써야했다. 처음의 박자 그대로 치열하게...
제목은 팍팍하고,
글에서 느껴지는 조선희의 삶은 치열하고,
책의 구성은 느슨하다.

내가 쓰고 싶은 책은,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은

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노라....
내가 얼마나 아프게 피를 흘렸노라....
살아 남기 위해 내가 얼마나 이를 악물고 버텼는가...
하는게 아니다.

뭐...그렇게 치열하게 살지도 못했지만...

나는 "커리어 우먼"이란 말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커리어 맨"이란 말이 없듯이...
바꾸어 말하면...
"일하는 여자"에게 별의 별 수식어와 편견이 따라 다니는 현실이 슬프다.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밥벌이는 자기 스스로 해야하는거 아닐까?

내가 바라는 세상은
여자가 일을 하는게
특별한 것도 아니고, 비장한 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세상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여자들이 더 이상 마이너리티로 존재하지 않는,
더 이상 조직의 거대한 벽에 머리를 쿵쿵 부딪히지 않는,
그냥 밥먹고 화장실에 가듯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일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남자들이 수월하게 가질 수 있는걸 가지려고
아둥바둥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언제쯤....그런 세상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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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08-1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디지만 조금씩,다가오고 있는것 같은데요? ^^
잘 읽고갑니다.

수선님 글 보니까 갑자기 새콤한 싱글벙글복매운탕이 생각나네요.ㅋㅋㅋ

로드무비 2005-08-13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거북함을 콕 집어주셨군요.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과도한 제스처. 그리고 얼렁뚱땅 끌어 모은 원고....
그의 단짝친구 최보은은 더더욱 마음에 안 들어요.
수선님의 균형감각이라니!^^
(반가워요.^^)

kleinsusun 2005-08-13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글벙글...저도 먹고 싶어요. 이제 구미에 갈 일이 없네요. 담에 가시면 포장을 좀...ㅋㅋ

로드무비님, 이 책 읽으면서 참....불편했어요. "치열함"은 작가가 외치는게 아니라 독자들이 느껴야 하는건데....자극적인 제목과 느슨한 구성의 부조화란....
"커리어 우먼"이란 말이 없는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BRINY 2005-08-1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여자 ***니까][여자니까 남자들보다 더 잘하고 조심해야한다]는 말 좀 안듣고 사는 세상이 빨리 되면 좋겠습니다.

kleinsusun 2005-08-13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정말, 간절하게...
"여자는 안된다." , "여자라서 안된다" 이런 말 안듣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moonnight 2005-08-13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이 꿈꾸는 세상에서 저도 같이 살고 싶어요 ^^ 딱 맞춤으로 가슴에 와닿는 리뷰네요. 치열한 페미니스트의 삶 어쩌고 하는 말은 화려한 싱글이란 말처럼 왠지 속빈강정처럼 느껴지거든요. 시원한 글 감사합니다. 당연히 추천!! ^^

바람돌이 2005-08-1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예리한 수선님!
수선님이 꿈꾸는 세상이 바로 제가 꿈꾸는 세상이예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서로가 좀 더 사람답게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왜이리 멀까요? 저는 전투적으로 살기 싫은데...

kleinsusun 2005-08-1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onnight님, 이런 책을 읽으면 갑갑해요.
그런데....왜 그 편집자는 저한테 이 책 얘기를 했을까요?
일하는 여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치열하고 전투적이어야 할까요?
제가 쓰고 싶은 책이랑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요.ㅋㅋ

바람돌이님, 맞아요. 전투적이고 소모적인 삶이 너무 싫어요.힘겹고....
다함께 좀 편안하게, 평등하게,사람답게, 평화롭게...그런 세상을 꿈꿔요.
이런 책들도 사람들을, 특히 여자들을 "강박"하는 것 같아서 읽으면서 편하지가 않더라구요.

2005-08-14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