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추워서 결혼할 뻔했다>
이런 책이 있다.

제목이 맘에 들어서 살까 했는데,
서점에 가서 보니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어떤 책이냐구?

알파벳 A부터 Y까지 첫 글자에서 연상되는 단어를 가려 뽑아 소제목으로 삼고, 그에 적합한 인용글들을 배치했다. 부재(Absence), 충고(Advice), 아름다움(Beauty), 연인들(Lovers), 실연 이후의 사랑(On the Rebound)...우디 알렌, 존 레논, 체스터튼 등 유명인사들이 털어놓는 사랑에 관한 짧은 담론 모음.
- 인터넷 서점 <알라딘> 책 소개.

난 이런 책이 싫다.
유명한 사람들이 한 말들을 주어와서 뛰엄 뛰엄 만든 책.
왠지 멍청해 보인다.

그런데...
제목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왜 이 책 얘기를 하냐구?

감기로 하루 종일 고생하다 일찍 퇴근,
집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아빠가 TV를 켜고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시다가
영화 <약속>에 고정,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약속>을 봤다.

벌써 몇년 된 영화다.
98년인가? 그 때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난 의도적으로 울라고 만든 아주아주 인위적인 설정의 영화,
<약속>,<편지>,<집으로>,<가족> 이런 류의 영화 디따 싫어한다.
보면 막 화난다.

<약속>.
아주 자극적인 대사들로,
"이래도 안 울어?" 하는 감독의 장치들로 가득하다.

특히 박신양이 자수하러 가기 전,
교회에서 결혼하는 장면.
전도연이 "여보!" 할 때, 압권이었다.
감독의 야심찬 표정이 보인다.
" 아무리 독한 여자라도 이 장면에서는 울 수 밖에 없을껄?"

내 마음에 와닿은건 주인공들의 최루성 대사나 중요 줄거리가 아니었다. 전도연을 좋아하는 선배의사의 대사 한 마디였다.

전도연을 찾아 와서
자기 미국에 PhD하러 간다고 함께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때 전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그 선배가 다시 한번 전도연을 찾아와 말한다.
(비행기 표를 손에 지어 주며) "기다릴께".

아..... 누군가 나한테도 비행기표를 지어 주며 말했으면 좋겠다."같이 가자!"

그럼 난 막 달려갈 것이다.
빨리 집에 가서 짐 싸려구....ㅋㅋ

난 항상 탈출을 꿈꾸었다.

99년에 유학을 가려고 했다.
TOEFL 2번, GMAT는 5번이나 봤다.
GMAT 점수가 생각처럼 나오지 않아서 때려쳤다.
유학 준비를 한답시고 몇 달 놀다가(박정 어학원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다시 취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GMAT를 번번히 망친게 참 잘된 일이다.
왜냐구?
그 때 내가 하고 싶었던건 공부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원했던건 "탈출"이었다.

한비야 같은 잘난 여자 처럼
그냥 배낭 하나 매고 떠날 용기가 없어서
"안전 장치"로 생각한게 유학이었을 뿐이니까....

그것도 MBA.
그냥 주위에서 다들 난리를 치기에
대학 졸업하고 대기업 다니다가 MBA 가는게 무슨 순서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정신으로 유학을 갔다면
그건 심각한 외화 낭비였고,
울 아빠가 피땀 흘려 벌고 울 엄마가 피땀 흘려 아낀 재산을 축내는 파렴치한 행동이었으며,
청춘의 낭비였을 꺼다.

유학 준비 뿐이랴?
난 항상 "탈출"을 꿈꿨다.

태국에서 일하려고 인터뷰하러 방콕까지 가기도 했고,
BK 21 지원으로 학비가 들지 않는다는 대학원 시험을 보기도 했고,
(취열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하지만...안 갔다)
북경어언대학 어학과정에 등록을 하기도 했다.
북경어언대학 캠퍼스 사진을 바탕화면으로 깔아 두고,
개강일을 기다리다 결국.....가지 않았다.

한 마디로 별 일을 다했다.
탈출하려고....

유학 준비, 해외 취업, 대학원, 어학 연수....
이 모든 것을 다 합한 것 보다 더 엄청난 발상을 하기도 했다.

그건 바로.....
"결혼".

회사 다니기가 너무 싫고 힘들어서,
차라리 결혼을 해 버릴까....이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탈출을 하려고 무덤을 파다니...

그 때의 내 심정은
"너무 힘들어서 결혼할 뻔했다."

이제 알겠지?
<너무 추워서 결혼할 뻔했다>라는 대수롭지 않은 책제목을 왜 그렇게 맘에 들어 했는지....

난 알고 있다.
필요한건 "견고한 자아"라는 걸....
내가 약하면 이 세상 어디를 가도 다 똑 같으리라는 것을...
내 힘으로, 내 두 다리로 우뚝 서야 한다는 걸....

하지만 가끔 힘들 때면,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어떤 멋진 남자가 불쑥 나타나,
비행기 표를 지어주며 "같이 가자!" 말하는 장면을...

Be 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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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1-2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서재로 넘어오는 그 ?은 순간에 축하 메시지를 뭐라 적을까 고민했더랬습니다. ㅋㅋ 제목 정말 멋지네요~ 너무 힘들어서 결혼해도 좋은데. 결혼은 해봐야 알아요. 진짜...누가 옆에서 아무리 달콤쌉싸름한 말을 해줘도 모르는 게 결혼인 것 같아요. 걍 눈 딱 감고 해버리시는건... 안될라나요? ㅎㅎ

갈대 2004-11-22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남자인 저로서는 힘들 때는 오히려 결혼 생각이 안 날 것 같습니다. 남자는 문제가 생기면 혼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책 내용은 별로인 것 같습니다만 제목 하나 만큼은 땡기네요^^

kleinsusun 2004-11-23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겁이 많아서 눈 딱 감고는 못하겠어요.ㅋㅋ

우울할 때 쇼핑하면 이상한 옷을 사게 되쟎아요. 원색에 형광색에 그런거....

한 번 입고 후회하는 옷.

그럴까봐 겁이 나요. 결혼은 평화로울 때 할려고....ㅋㅋ

비로그인 2004-11-23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화로울 때 하든 추울 때 하든 후회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은 데... ^^;

초치는 말로 첫인사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kleinsusun 2004-11-23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초 안쳤어요.반갑습니당.

nada 2006-06-03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탈출할 '기회'가 많았는데 왜 안 하셨을까... (전 기회가 없어서라고 박박 우기며 사는 중..ㅋ) 아마 뭔가 2% 이건 아니다 싶으셨겠죠. Be strong! 평생의 과제예요. -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