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 때였다.

교양영어 시간에 만화영화 비디오를 자주 보여줬다.
(물론 영어로, 자막 없이!)

그날, 그러니까 내가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 날,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의 에피소드가 상당히 슬펐다.
(둘이 싸웠다가 화해를 하는...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아님 누가 아팠나? 가물가물...)

난 그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왜냐?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 복도에 붙어 있던 FA(failure in attendance) 명단에서
내 이름을 봤기 때문이다.

2학점 짜리 강의엔 4시간,
3학점 짜리 강의엔 6시간 이상 결석을 하면 FA를 받는다.
그러면? F를 받는 거랑 똑같다. 재수강을 해야 한다.

※ 내가 나온 대학 선배인 신해철이 학점을 못따 고생을 한 것도
바로 이 희한한 제도 때문이다.

FA를 받은 강의는 <동양문화사>였는데
종강이 얼마 남지 않았던 데다,
숙제로 리포트를 몇개나 냈었기 때문에 더더욱 억울했다.

멍하게 앉아서 비디오를 보다가
분하고 억울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때, 내가 비디오를 보다 슬퍼서 운다고 생각한 C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야......넌 참 순수하구나."

그 때부터 C는 내게 부쩍 관심을 보였고,
난 C의 그다지 달갑지 않은 관심에
내 눈물의 "진정성"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난 만화를 보고 운게 아니란 말이야!

연말에 <로맨틱 홀리데이>를 보다 눈물을 흘렸다.
감동해서? 땡
마음이 짜~안 해서? 땡
감정 이입이 되서? 땡

그럼 도대체 왜?
이제...그런 열정적인 연애를 못할까봐,
짱구를 굴리지 않고 연애에 올인하지 못할까봐....두려워서.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영화가 너무 늘어진다.
감독이 욕심을 낸 나머지 오히려 완성도가 떨어진다.
카메론 디아즈 많이 늙었다.
<러브 액츄얼리>가 정말 훌륭한 영화였구나...

산만하게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갑자기....두려웠다.
나 너무.....시니컬해진 거....아니야?

하루에 기름 종이를 몇개나 썼던 지성피부가
세수하자 마자 당기는 건성 피부로 바뀌는 것처럼,
나랑 아무 관련 없을 것 같았던 "시니컬함"이
나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다.
아....무서워라~

영화를 보고 나서 저녁을 먹을 때,
영화를 같이 본 남자(Eric Clapton 공연을 같이 본 바로 그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교환은 생산이다."

<로맨틱 홀리데이>를 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또...
이 세상에 몇명이나 될까?

아....아무 생각 없이, 짱구 굴리지 않고, 비평하지 않고,
그저 로맨틱 코미디의 유치하고 전형적인 스토리 라인에 푹~빠져
영화를 보고 싶다. 옛날처럼!

아니면 차라리.....완죤히..."dry" 해지고 싶다. 어중간하지 않게.
뭐든...어중간하면 힘들다.

그래서... 결론은?
몇시간 후면 출근해야 하니 자자.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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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02-12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을 위해 잠 드셨을까요?
FA,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저는 아니고 제 남동생이 '독후감 숙제' 와 함께 자주 입에 올렸던 말인데 ^ ^
저 찰리부라운과 스누피, 왕팬이었어요 (그후, 가필드로 옮겨갔지만). 음반도 있었는데, 가벼움이 폴폴 묻어나는 jazz였지요.
맞아요. 저도 나름 지성피부였는데 나이 들면서 건성으로 야금야금 변해가더군요.
저로 하여금 수다스러워지게 만드는 페이퍼였어요 ^ ^

2007-02-12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nnerist 2007-02-12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FA를 내가 아는 모씨는 이게 뭐냐는 엄니 물음에 Fantastic A라고 A+위의 거라고 뻥을 쳐서 위기를 모면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요-_-ㅋ

바람돌이 2007-02-12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영화는 안봤으니 모르겠고.... 에릭클랩튼 공연을 같이 봤던 그분에게 저는 자꾸 관심이.... 저런 로맨틱 영화를 보고 비평적으로 볼 수 있는건 아직도 수선님이 젊어서라구요. 저는 이나이가 되니 다시 어려지는건지 저런 영화보면서 옛날 소녀시절처럼 또 그냥 푹 빠져들어보게 되던데요. 이젠 나랑은 정말 아주 완전히 상관이 없어져서 그런가? ^^

BRINY 2007-02-12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로만 듣던 FA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선님께서....안 믿겨져요. 하긴 저도 출석일수 계산해서 늘 아슬아슬점까지는 결석하고 그랬어요. 집이 멀기도 했고^^;

2007-02-12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7-02-1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은 순수하신 게 맞아요. 영화와 현실을 대입해보며 안타까와할 수 있다니. ^^

kleinsusun 2007-02-1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bi님, 네...그 남자는 정말 요점 정리를 잘해요. 가끔씩은 분위기 쏴~하게.ㅋㅋ
제가..1학년때 워낙..공부를 안해서...학교 가기가 싫더라구요. 아..정말 옛날 얘기네요.ㅋㅋ

hnine님, 아...동생분이 저랑 동문이구요.^^
제가 다닐 때는 토요일 수업까지 있었어요. ㅋㅋ
전 정말...제 피부가 "건성"이 될지 상상도 못했답니다.
아...세월이여~ Time flies!!!

속삭이신 님, 님의 열정...언제나 지금처럼!^^

매너야, 그건 떠도는 무용담일 뿐이란다.
Fantastic A 밑에 숫자가 없는데...ㅋㅋ

바람돌이님, 아...요즘 다시 로맨틱 코미디에 몰입하시는군요. 그럼...저도 희망을!^^

kleinsusun 2007-02-12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FA뿐만 아니라....학사경고도 받았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음하하하

속삭이신님, 아.....님의 한마디는 항상 제게 힘이되요. 감사합니다.^^

달밤님, 아....달밤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전 순수한거죠! 호홋

2007-02-12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7-02-12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첫사랑이랑 헤어진 뒤 그런 경험이 있는데^^ 학생회에서 이집트왕자라는 만화 상영해주길래 별 생각 없이 보고 있었는데, 모세가 홍해를 쫘악 가르는 장면에서 갑자기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면서 흠뻑 젖었죠 ㅋ 본 사람이 없어서 '너 순수하다'는 말은 못 들었네요=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