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조건 -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을 얻는가
바스 카스트 지음, 정인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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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인간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여기에 관한 재밌는 실험이 있다. 일명 '돈과 의자 실험'인데 방법은 이렇다. A, B 실험자에게 서로 다른 화면이 나오는 컴퓨터의 모니터를 보게 하는 것이다. A 실험자의 컴퓨터에는 알록달록한 물고기들이 노는 화면을, B 실험자의 컴퓨터에는 지폐가 펄럭이는 화면이 나온다. 그런 후 A, B 실험자에게 다른 실험자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줄 테니 자신의 의자 옆에 다른 사람의 의자를 옆에 가져다 놓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실험의 끝인데 그 결과는 놀랍게도 서로 달랐다. 즉 A 실험자가 상대방의 의자를 가까이에 놓았다면 B 실험자는 멀리 놓았다.

 

위의 실험을 통해 바스 카스트는『선택의 조건』에서 우리에게 흥미로운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돈은 인간관계를 불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경제가 호황인데도 여전히 행복의 만족도가 불황인 원인을 진단한다. 물론 돈이라는 물질적인 풍요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돈이 없으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돈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문제를 생각하면 끔직하다. 불편함을 넘어 엄청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저자는 베를린 프리드리히 가의 한 모퉁이에 있는 전광판을 주목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고급 레스토랑 위에 있는 전광판의 문구는 '자본주의는 사랑을 죽인다.'는 것이다.

 

때로는 복잡하고 지루한 설명보다는 간단한 문장이 오히려 더 감각적일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가 사랑을 죽인다는 메시지는 저자의 통찰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되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돈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물질적인 결핍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더 바쁘게 살아야 하는데 그럴수록 중요한 삶의 가치를 희생해야만 한다. 즉 정신적인 결핍 현상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다. 친밀함도 찾아볼 수 없는 막막한 사막 같다고 할까? 또한 바쁠수록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안하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신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돈을 최고로 선택하고 있다. 일찍이 허버트 A. 사이먼은 ‘인간의 생각은 첫째 어떤 대상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대한 능력과 둘째, 선택적 탐색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굳이 철학자의 사유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 선택은 불가피하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만족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선택의 질이라고 한다면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하지만 선택의 양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 말대로 선택할 게 많은데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물건을 선택하는 데 있어 ‘극대화자’인가, ‘만족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극대화자는 물건을 사기 위해 이것저것 탐색하며 오랜 시간을 투자한 반면 만족자는 자신이 세운 기준까지만 탐색한다. 이유인즉 극대화자는 최고를 추구하기 때문이며 만족자는 좋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최고는 끝이 없다는 데 있다. 언제든지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라는 극대화된 감정에 있어 기회비용은 늘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바쁜 현대인들에게 좋은 것은 뭘까? 느리게 사는 것이다. 느림은 단순히 천천히 걷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게 걷는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느림은 상대방의 빠름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수 있다. 바쁜 사람들의 눈을 보면 괴테가 주변에서 직접 느꼈던 성급한 태도, ‘벨로치퍼리시’(veloziferisch)를 알 수 있다. 어디 그뿐 만인가, 그들의 ‘악마의 눈’(이탈리아어로 malocchio)은 어떤가? 그러나 느림은 결코 상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적이어야 한다. 저자가『선택의 조건』에서 충고한대로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을 이겨야’ 한다. 이것이 행복에 있어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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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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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당신이든 누구든 자기를 넘어선 삶이 있고, 또는 그런 삶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만약 내가 이 지상의 것이야만 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무엇일까?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나는 그 일부분으로 생각되지도 않을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폭풍의 언덕』중에서

 

사랑하는 영혼은 같은 것

어떤 사람의 영혼이 달빛이거나 불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에밀리 브론테의『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은 제목만큼이나 사랑하는 방법이 폭풍 같습니다. 그녀는 서로가 사랑한다면 서로의 영혼이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사랑하는 영혼은 같은 것이야 합니다. 만약에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영혼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던 것은 그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 말대로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캐서린이 사랑했던 히스클리프는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어릴 때부터 버려진 아이였는데 캐서린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여행 중에 자신이 사는 ‘위더링 하이츠’에 데려왔습니다. 시커먼 악마 같은 두 눈을 가진 히스클리프를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말광량이였던 캐서린만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힌들리 오빠의 히스클리프에 대한 학대가 문제였습니다. 학대란 성인(聖人)도 악마로 만들기에 족한 것입니다. 캐서린 이런 현재만을 생각해서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히스클리프를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히스클리프는 예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소중했습니다.

 

오만한 사람의 이상한 쾌감

정말로 마음씨가 착하면 얼굴도 선해지는 걸까요? 치장한 인형 같았던 에드거와는 달리 촌뜨기였던 히스클리프가 크고 푸른 눈과 번듯한 이마를 원했습니다. 캐서린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악마 같은 두 눈을 천사 같은 눈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하지만 힘든 일과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멸시를 받으면서 점차로 이러한 우월감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무뚝뚝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품게 하는 이상한 쾌감을 느끼며 오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 슬픈 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마침내 폭풍이 치던 어느 날 밤, 히스클리프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자 캐서린은 불같은 성미를 억누르지 못해 사랑의 열병에 걸렸습니다. 열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캐서린의 마음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마치 가시나무가 인덩덜굴 쪽으로 휘어진 것이 아니라 인동덩굴이 가시나무를 감은 격으로 말입니다.

 

에드거와 결혼한 캐서린은 폭발하는 불이 가까이 없었기 때문에 이따금 우울했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히스클리프가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그녀의 영혼에 폭풍이 불었습니다. 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달라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서로의 기쁨에 열중하자 에드거는 반대로 불쾌감으로 점점 창백해졌습니다. 히스클리프와 그는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히스클리프와 있으면 가장 훌륭한 사람도 악에 물들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히스클리프가 워더링 하이츠에서 지내는 동안 힌들리는 노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걱정거리는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가 갑자기 히스클리프를 좋아하게 된 예지치 않은 불행이었습니다. 캐서린은 겉모습과 달리 히스클리프의 속은 사나운 늑대라고 하며 반대했지만 이사벨라는 훌륭하고 진실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캐서린의 이기심일까요? 이사벨라의 질투일까요? 그러나 진짜 정답은 히스클리프의 복수심에 있었습니다. 지독하게 대접을 받았던 삶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벨라와 결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복수를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결국 이사벨라는 비참해질 정도로 바보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캐서린을 지금까지 잊지 않았던 건은 에드거처럼 어떤 의무감이나 인정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삶은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에드거가 팔십 년 동안 캐서린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의 하루 동안 사랑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캐서린이 에드거를 한 번 생각하는 동안에 자신을 천 번이나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 왜 당신 마음을 배반했는지 격정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자기 마음을 죽이 것이며, 당신은 나를 사랑했는데도 무슨 권리로 자신을 버리고 갔느지, 에드거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는지,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는데…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 것이며,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 놓은 거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당신 같으면 마음 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고도 살고 싶겠어? 말했습니다. 캐서린이 괴로운 나머지 흐느끼면서 용서해달라고 하자 히스클리프는 나는 나를 죽인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라고 하면서 용서했습니다.

 

유령의 존재를 믿으며

그러나 캐서린이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지만 편안하게 천국으로 갔다고 하자 히스클리프는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하면서 했습니다. 지난 18년 동안 밤낮으로 자신을 괴롭혀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캐서린 언쇼!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찾아오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인 사람에게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면서?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아! 견딜 수가 없어! 내 생명인 당신 없이는 못 산단 말이야! 내 영혼인 당신 없이는 난 살 수 없단 말이야!

 

히스클리프는 유령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는 교회 묘지의 머슴에게 부탁하여 캐서린의 관 뚜껑을 열고는 조금 느슨하게 하고는 흙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캐서린에 옆에 묻힐 때 자신의 관도 한쪽을 조금 느슨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서로의 영혼이 넘나들기 위해서 입니다. 캐서린이 죽은 뒤 그는 미치광이처럼 밤낮으로 내게 돌아오기를 빌었습니다. 적어도 영혼이라도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유령이라는 게 있을 있다면 그런 것이라는 의심이 아니라, 유령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하며 그는 유령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다시 한 번 캐시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에 관 두껑을 뜯어냈는데 그때 그 귓전에서 진눈깨비를 몰고 오는 바람을 물리치는 따뜻한 숨결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캐서린이 땅속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걸 느끼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온몸으로 퍼졌습니다.

 

영혼 자신은 아직 만족하지 못하네

히스클리프의 악마적인 성격은 비참함을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파멸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가 훨씬 비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악마 같은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으며, 이로 인해 외롭고 더욱 상실감이 클 뿐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가까워진 그의 고백을 들으면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는 죽음이 두렵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을 성취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꿋꿋하게 그 소원의 성취를 열망했던지 그는 그것이 꼭 성취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소원이 성취되리라는 기대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는 고백한다고 해서 어떤 구원을 받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이 오랜 싸움에 대한 자신의 성격의 설명할 수 없는 면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만을 위한 생활을 하며 신자답지 않은 생활을 했습니다. 아마 그동안 성경이란 것에 한 번도 손도 대지 않은 탓에 그는 틀림없이 성경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도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걸 뒤적거릴 여유도 없습니다. 만약 이제라도 돌아가기 전에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도저히 성경 말씀에 나오는 천국에 갈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뉘우칠 게 없으며 너무 행복하지만 아직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영혼의 행복이 자신의 육체를 죽이고 있지만 영혼 자신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남들이 바라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는 자신이 바라는 천국에 거의 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궤도

히스클리프는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의 유령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랑과 욕망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사랑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소유란 우리의 궤도를 돌던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욕망은 그 대상을 얻는 순간 없어진다. 반대로 사랑은 불완전하고 영원한 어떤 것이다. 욕망은 수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원하게 된다. 이때 나는 중력의 한 가운데에 서서 그 대상들이 내게로 빨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대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유일한 시련일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괴상하다고요? 어쩌면 괴상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멸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무모한 노력은 행복인 동시에 고뇌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사랑의 궤도는 사랑의 유령을 불러낼 정도로 영혼을 넘나듭니다. 한 번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어떤 궤도를 타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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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3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오우아님, 오랜만에 리뷰 보니 반가워요.
저는 저 위의 두 문장만으로도 기분이 상당히 좋아지네요.
그럼에도 자신만을 생각하는 연약하고 한심한 사랑도 있지요.
 
새기고 싶은 명문장 - 흔들리는 나를 세우는 고전의 단단한 가르침
박수밀.송원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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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삼아 내 입으로 읽으니, 이를 듣는 것은 나의 귀였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이를 감상하는 것은 내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거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랴!

이덕무,『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옛 지식인 이덕무 선생을 만난 것은 뜻밖의 기쁨이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사뭇 만족했지만 정작 마땅한 필명 하나 못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간서치(看書痴) 이덕무 선생을 만난 것이다. 책만 보는 바보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스스로를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죽 했으면 내가 나를 벗으로 삼을 정도였을까? 깨달음의 깊이에 대한 놀랐던 순간부터 오우아거사는 가슴에 새기고 싶은 명문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필명을 쓰며 나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했는데 ‘오우아’라는 필명과는 정말이지 벗으로 지낼 만큼 궁합이 잘 맞았다. 가끔씩 서평 때문에 상을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오우아라는 필명을 보고는 옆 사람들이 “오~우아!”라고 하면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기막힌 오우아의 반전이라고 해도 좋을 듯 했다.

 

돌이켜 보면 오우아의 반전은 박수밀, 송원찬이 지은『새기고 싶은 명문장』이 우리의 마음을 맑고 아름답게 때로는 단단하게 설파한 덕분이다. 저자들은 고전을 탐독하면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어떤 문장이 가슴에 확 꽂혀다, 고 했다. 명문장은 말 그대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일침(一針)이며 죽비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찾지 않으면 여전히 고전이라는 낡은 틀 속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다. 또 하나 고전의 걸림돌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읽어도 글 속에 숨은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막막함이다. 저자들은 이런 기대와 우려를 말끔히 씻어 내리며 고전의 명문장을 가려내어 사람들이 읽기에 딱 좋게 새겨 주고 있다.

 

『새기고 싶은 명문장』은 웅숭깊은 고전의 울림을 수신(修身), 결단(決斷), 태도(態度), 의지(意志), 언행(言行), 관계(關係)로 나눠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고전이라고 해서 고전 속 진리만으로 남는 게 아니라 우리들 삶으로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첫째, 수신에서는 무자기(毋自欺)의 정신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라는 세 글자는 내가 평생 동안 힘써온 바이다.

김장생,『사계유고(沙溪遺稿)』, 「시상(諡狀)」

 

수신은 모든 덕목의 시작이며 자기(自己)는 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는 자기를 아는 것(自知) 못지않게 무자기(毋自欺) 즉,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무자기는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좌우명으로 가장 즐겨 삼은 까닭은 어렵지 않다. 혼탁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 무자기만큼 고언이행(苦言利行)은 없을 것이다. 온갖 감언이설로 우리의 양심이 불편할 때 무자기는 순수한 마음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결단에서는 독서의 올바른 방법이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논어(論語)』「위정(爲政)」

 

요즘은 책을 권하는 사회다. 열심히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책만 읽고 그것으로 끝나면 우리는 백면서생을 벗어날 수 없다. 반대로 생각만 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독단자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책은 공부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백과사전이며 동시에 마음의 거울이다. 우리가 백과사전에서는 단답형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마음의 거울에서는 주관형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거울을 맑고 깨끗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사색하면서 독서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태도에서는 벽(癖)이다.

 

벽이 없는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이라는 글자는 ‘질병’과 ‘편벽됨’에서 나온 것이니, 병 가운데 지나치게 치우친 것이다. 그러나 홀로 자기만의 세계를 개척하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종종 벽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가 있다.

박제가, 「백화보서(白花譜序)」

 

누구나 완벽(完璧)해지려고 한다. 그러려면 속된 말로 미쳐야 미친다. 혹,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벽(絶壁)이다. 완벽과 절벽은 벽(癖)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벽을 가진 사람은 비정상적이며 기인(奇人)이라는 부정적인 탓에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은 벽이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기인(棄人)이지 않을까?

 

넷째, 의지에서는 지혜의 수고스러움이다.

 

사람이 후덕한 지혜와 능통한 지식이 있는 것은 항상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맹자(孟子)』「진심상(盡心上)」

 

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너무 적으면 몰라서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는 것이 너무 많으면 잡념과 망상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아는 것이 병’이라는 숨은 의미는 지혜 그 자체가 병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혜를 얻는 일이 병을 앓는 것처럼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만약에 약(藥)으로 처방된 지혜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병(病)일 것이다. 그러나 고(苦)에서 얻어진 지혜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약(藥)이 될 것이다.

 

다섯째, 언행에서는 멈춤이다.

 

대저 이른바 지지(止止)라는 것은, 능히 멈춰야 할 곳을 알아 멈추는 것을 말한다. 멈춰야 할 곳이 아닌데도 멈추면, 그 멈춤은 멈출 곳에 멈춘 것이 아니다.

이규보, 「지지헌기(止止軒記)」

 

주마간산(走馬看山), 앞만 보는 인생은 달리는 말과 같아 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무한 경쟁 때문에 남보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 그러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경주가 아니라 멈춤이라 하겠다. 삶을 직선으로만 달리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지만 삶의 곡선은 쉬어 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멈출 곳이 아닌데도 멈추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욕망보다는 미련에 가까워 부끄럽다.

 

여섯째, 관계에서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세상에 백락이 있은 후에야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과 같은 사람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한유,「마설(馬說)」

 

모든 일에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령, 말을 잘 보는 백락(佰樂)과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천리마(天裏馬)가 있다고 하면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일까? 앞서 말한 대로 ‘백락이 있은 후에야 천리마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천리마가 있다고 한들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이 없다고 한다면 천리마는 여느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백락의 안목과 백락을 알아보는 안목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떨까? 굳이 우리가 어려운 선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법구경(法句經)』 중에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있다.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최상의 진리를 모른다면 그 같은 진리를 알고 사는 그 하루가 훨씬 낫다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삶의 올바른 긍정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고전의 단단한 가르침은 백년을 살아온 지혜이다. 이것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도 충분하다. 그러나 배움에 있어 뛰어난 명문장은 뛰어난 명문가와 같다는 생각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길주는『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에서“저 사람이 배운 것은 모두 내가 읽은 것이고,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내가 아는 것이다. 어찌 저 사람만 우뚝 뛰어나고 나라고 하지 못할 법이 있겠는가?”라고 전혀 뜻밖의 생각을 펼치면서 ‘망연자실이란 자신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사람의 수준을 따라가려고 분발하는 마음’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삶이 힘들고 외로울 때 고전의 명문장을 벗 삼아 망연자실하는 것도 또 다른 오우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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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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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가사 중에서

 

 

이 세상을 숨 가쁘게 살아가는 방식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는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즐겨 불렀다. 하지만 삶의 박자를 전혀 맞추지 못하며 기대에 못 미쳤다. 무엇을 하고 싶은데 나는 한 박자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빨랐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타 들어가는 느낌이라는 게 이거구나 싶을 정도로 거짓말로 살아야만 했다. 거짓말은 지금의 삶이 초라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변명과 다르지 않았다. 이럴 때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거짓말이라는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것이다.

 

 

헤밍웨이의 단편집 제목과 같은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해리는 자신이 거짓말로 살아왔기 때문에 ‘거짓말로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비극적인 삶을 끌어안고 있다. 누구에게나 재능이 있다고 하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해리의 직업은 작가였다. 그러나 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불행하게도 그의 재능의 파괴자였다. 사랑하면 더 완전한 인간에 가까워지리라 믿었는데 오히려 그는 ‘등뼈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물어버린 어떤 뱀’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이 더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돌이켜보면 거짓말로 산다는 것은 자기 삶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유쾌한 방법일 것이다.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고 거짓말만 하게 되었을 때 돈값을 훨씬 잘할 수 있다는 해리의 절망을 공감하게 된다. 돈값은 우리의 영혼을 콜레스테롤로 가득 채우기 때문에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죽음 앞에서 딱딱해질 정도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혼란스러워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통증을 소진하는 것은 어떨까? 거짓말을 파괴하는 아주 단순한 방법은 다른 영혼이 되는 것인데 킬리만자로에 올라가는 것은 아주 좋은 파괴이지 싶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빛과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

 

 

그러면 왜 킬리만자로를 일까?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킬리만자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들이 마치 ‘온 세상처럼 넓고, 크고, 높고, 햇빛을 받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거나’(「킬리만자로의 눈」), 반대로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나 자신을 놓아버리면 내 영혼이 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잠을 자지 않고 누워 있으면서 뭔가에 정신을 파는 방법’(「이제 내 몸을 뉘며」)이었다. 그래서 평행한 길은 놔두고 근육이 아플 정도로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것은 ‘모든 걸 가질 수도 있었는데, 매일 우리는 그것을 더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하얀 코끼리 같은 산」) 피곤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 즉 ‘생각할 의무, 써야 할 의무, 다른 의무들을 등 뒤에 뒤에 버리고 왔다’(「심장이 둘인 큰 강 1부」)는 행복이 아닐까?

 

헤밍웨이의 단편집『킬리만자로의 눈』은 아주 단순하게 거짓말을 파괴하는 소설 같았다. 어느 순간 삶에 의욕을 잃고 죽음 혹은 허무에 빠진 우리에게 사냥을 하거나 스키를 타거나 송어 낚시를 하라고 한다. 사소하다고 하면 너무 사소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아주 ‘좋은 파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 매일 맞고 꺽이며 사는’(「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 두려움에서 벗어나 ‘댐이 터진 것 같은 절대적 흥분상태’를 느낄 것이다.

 

 

일찍이 단편소설의 거장 레이먼드 카버는 문학이란 삶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삶에 충실하고, 삶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의 중심인물은 움직이는 캐릭터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헤밍웨이의『킬리만자로의 눈』을 읽는 내내 마음이 어디론가 쏜쌀같이 움직였다. 낮보다는 밤이 더 강렬하여 잠들지 못하는 밤에 불을 켜두어야만 했다.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빛이 아주 좋고 정말 아름답다’(「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혹, 거짓말로 들리겠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느 누구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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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신이 있다? 신이 없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것은 사회를 이루는 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에 대해 제대로,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파스칼처럼 내기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파스칼은『팡세』에서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에게 수지가 맞는지를 따져보았다. 그리고 내기라는 확률론으로 신이 있다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다. 파스칼 말대로 종교는 '존중할 만하다, 인간을 올바르게 알았으므로. 사랑할 만하다, 참된 행복을 약속하므로.' 그러나 기독교를 옹호하면서 성서학의 핵심이 되는 ‘숨은 신’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아 달갑지 않았다. 또, 하나님의 심판, 즉‘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라고 하는 따끔한 두려움은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초월적 신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삶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탓에 때로는 우리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인과의 원리로만 생각한다면 삶의 자잘한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나약한 인간의 변명에 불과하다.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이나 삶을 초월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삶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초월이라는 가능성의 힘을 이용하여 인생을 좀 더 깊은 심연에서 이해하고자 열망한다. 하지만 문제는 절대자로부터 삶의 위로와 믿음을 구하는 것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이라는 데 있다. 이것이 가장 종교적인 구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 가장 정상적인 삶의 모델은 뭘까? 필 주커먼은『신 없는 사회』에서 제목 그대로 ‘신 없는 사회’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 내리고 있다. 저자 말대로 요즘 세상이 어느 때보다 종교적이라 신이 없다, 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은 망상에 가까울 만큼 텅 빈 생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종교적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읽으면 신이 없다, 라는 것만큼 단단한 생각은 없다고 할 정도다.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는 마치 다이아몬드 같다. 다이아몬드는 가장 단단한 물체인데 놀랍게도 속은 텅 빈 상태다. 또한 무색에 가까울수록 더욱 빛이 잘 투과되어 찬란한 무지갯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물질의 가장 좋은 결과를 얻어내듯 신 없는 사회는 삶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저자는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현실 속에서 삶의 결정체가 가장 좋은 결과가 나타난 곳으로 덴마크와 스웨덴을 주목했다. 이유인즉 이 두 나라는 비종교적이다. 종교적 열정이 그다지 없기 때문에 신 없는 사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두 나라가 가장 살기 좋고 쾌적한 곳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깨닫게 해준다. 흔히 종교가 없다고 한다면 현실이 지옥 그 자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강요한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하거나 죄악으로 도덕을 지키게 한다. 하지만 두 나라를 보면 정반대다. 두 나라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도 ‘매끈하고 공정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오히려 청교도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운 가장 종교적인 미국이 종교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미국의 종교적인 갈등과 불신이 암묵적 계속 되고 있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고민이 아니라 세계적이다.

 

 

저자는 가장 종교적인 결과가 나타난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을 비교하면서 종교 없이도 세상이 안정적 잘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상식으로 종교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교회를 간다든가, 기도를 드린다, 라는 종교적 활동을 한다는 게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런 어려움을 참고 종교적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은 그런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화 되어 있는 독특한 사회다. 가령, 두 나라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심지어 구원이나 부활도 믿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들이 냉소적이거나 염세적이라 그런 것일까?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으며 그들이 ‘합리적인 회의주의자’라는 것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들의 종교적 무관심이라는 모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이 온화하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간의 좋은 점들을 믿는다. 그 좋은 점들이야말로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것, 노인을 보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야말로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다.(p 27)

 

 

돌이켜보면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될 규칙이다. 그래서 반종교적인 사람은 규칙을 어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종교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절대적인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으며 좋은 규칙은 조금은 어겨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곧 ‘초월적 종교’와 ‘문화적 종교’를 구별하게 한다. 이 책의 의도대로 죽은 뒤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인터뷰를 통해서 두 가지 종교적 믿음을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 즉 초월적 종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천국에서 두 팔 벌려 나를 기다리실 거예요.” 반면에 문화적 종교의 입장에서는 “그냥 죽는 거죠.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살아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문화적 종교가 단순히 세속주의자들이 자기 이득만 생각하면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문화적 종교는 문화적 관성으로 ‘그냥 항상 해오던 일’이다. 이러한 까닭은 문화적 종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기 정체성 또는 집단 정체성이며 다른 하나은 명목상의 종교 활동이다. 나머지 하나는 무신론자에 대한 반대다. 먼저 자기 정체성 또는 집단 정체성을 살펴보면 초자연적인 요소에 대한 믿음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명목상의 종교 활동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종교적 신앙 없이도 각종 의식과 명절, 통과의례 등에 참가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무신론자에 대한 반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뭔가 커다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저자는『신 없는 사회』에서 덜 종교적인 나라에 대한 깊은 호기심으로 종교적 모순과 한계를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일까? 그동안 종교에 대해 ‘불편한 백지상태’였다면 앞으로는 덴마크, 스웨덴 사람들처럼 ‘편안한 백지상태’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편안하다는 것은 옮긴이의 말처럼 신이 없는 사회라고 해서 정말로 신의 존재가 아예 없는 사회가 아니라 ‘종교의 힘이 약한 사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를 믿지 않아도 내 가치관이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초월적 종교에 대한 불완전한 믿음보다는 ‘문화적 종교’라는 세속주의가 가장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하겠다. 종교의 위기와 사회적인 문제가 서로 겹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과 대답은 우리에게 ‘문화적 종교’를 성찰하게 한다. 이것이 종교적인 세상에서 삶의 행복을 위한 필 주커먼의 가장 순수한 긍정이며 매혹적인 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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