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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뜨겁고 고결한 자신의 영혼을 느끼는 것이요, 치욕스럽고 어리석은 것들에 대한 경멸을 유감없이 온몸으로 살아내는 것이다..내가 오늘 무엇인가에 쓸모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내가 홀로 서 있기 때문이요, 증오하기 때문이다.

 - 에밀 졸라, [나의 증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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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파리. 반갑지 않은 해충이다. 소나 말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다. 그래서 소나 말에게 여간 성가신 존재다.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쇠파리처럼 귀찮은 사람이라고 비유했다. 말 그대로 사람들을 귀찮게 해서 그랬다. 사람들에게 , 자신을 알라!”고 계속해서 말하니 듣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귀찮은 존재였을지 짐작이 간다. 나라면 쇠파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무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을 얼마쯤 가지고 있으니까.

 

밀란 쿤테라의 불멸을 읽는 도중에 귀찮은 쇠파리라는 말을 다시 들었다. 작가는 인생의 어느 순간을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인생의 3단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에 따르면 인생의 어느 순간은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 모두에게 해당되는 현상이다. 인생의 1단계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신경쓰고 근심할 필요가 없다. 죽음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가장 행복하다.

 

그러나 인생의 2단계에 이르면 죽음이 보인다. 때로는 죽음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 죽음 때문에 인생을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을 지경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3단계에 이르면 죽음에 무감각해진다. 예전처럼 죽음에 대해 전망도 사그라든다. 죽음을 너무 잘 아는 탓에 오히려 죽음에 대해 피로를 느낀다. 피로에 지친 나머지 죽음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3단계는 새로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죽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음이다. 일종의 마음이 건강해지는 자기 돌봄이다. 자기 돌봄이 풍부하고 깊어질수록 우리는 순수한 자유를 느낀다. 그래서 활력적인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당한 매력을 느끼면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만끽하며 귀찮은 쇠파리라고 말하게 된다.

 

나는 소크라테스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 탓에 스스로를 귀찮은 쇠파리라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대신에 긴 세월 동안 공부(工夫)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독서는 내게 귀찮은 쇠파리라는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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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무수히 흘리는 땀, 그중에서도 마음에 와닿는 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인생에 커다란 땀이 있다.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盡千毫)’라는 말이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가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풀이하면, “벼루에 먹을 가느라 10개 정도의 벼루가 가운데가 뚫렸고 모지랑이 붓이 다 닳아 없어진 붓이 1,000개 되었네라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추사 김정희가 글씨를 쓰기 위해 얼마나 힘든 노력과 땀을 흘렸는지 말해준다. 추사라는 이름을 되뇔 때마다 몸과 마음이 시렸다. 그의 숨막히는 절대고독함으로 뭉클해졌다.


생각해보니, 지금도 여전히 글쓰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내 땀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려는 내게 이 글은 큰 힘이 되었다. 글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아 숨 막혀 답답할 때 글쓰기의 좌표로 삼기엔 안성맞춤인 가르침이었으니까.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을까?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런 막막한 물음 앞에서 10개의 벼루와 1,000개의 붓은 부지런함의 대명사이다. 마음을 확고하게 잡아야 부지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지런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함이 막힌 것을 통()하게 한다.


만약 이것으로도 부지런하지 못하다면 2,000번의 실패는 어떨까? 에디슨은 전구를 만들 때 2,000번이나 실패를 거듭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기자가 2,000번이나 실패를 했는데, 어떻게 극복했느냐? 고 질문을 하자 에디슨은 실패가 아니라 단지 2,000번의 과정(process)을 거쳐 전구를 발명했다고 말했다. 만약에 에디슨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촛불을 켜며 살아가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독일의 역사학자 에밀 루트비히는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발견한 이후 인류는 두 번째 불을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에디슨은 발명왕의 대명사이다. 무려 1,093개의 특허권을 가져 다고 하니 발명왕이라고 불러도 명성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발명왕보다는 다른 이름이 좀 더 특별히 다가왔다. 노력왕이다. 노력왕이라는 타이들은 ‘99%의 땀으로 만들어진 결정체이다. 에디슨은 천재는 1% 영감과 99% 노력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이 말의 전문을 보면 내 발명 중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충족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요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험하고 또 실험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1%의 영감과 99% 땀이다라는 것이다.


에디슨의 말을 생각해보면 99% 땀에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 지금과 다른 이미지일 것 같은 자신감이 스며들어 있다. 99% 땀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험하고 또 실험하는 것이며 1%가 아닌 99%이다 보니 그만큼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99% 땀의 수치가 높다고 해서 1% 영감이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다고 하여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노력 하나만으로는 뭔가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1% 영감은 99% 땀의 시작이자 방향이다. 이런 방향이 없다면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노력했다는 허탈감으로 끝나고 만다. 반대로 1% 영감이 있다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1% 영감은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세상에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노력만 하면 만사형통하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노력을 하는 데도 거짓말처럼 이기지 못한다. 죽도록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헛된 노력으로 되돌아온다면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이러한 죽을 맛은 99% 땀만 잔뜩 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작 99% 땀을 흘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면서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99% 땀을 흘려야 에디슨처럼 성공할 수 있을까?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심리학 교수이자, 일명 천재에게 주는 상으로 유명한 맥아더 펠로상을 수상한 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GRIT)에서 성취의 패러다임을 말했다. 성취는 기존에 가진 성공이라는 기준을 바꿔 볼 만큼 의미가 남달랐다. 그녀는 재능과 노력에 좌우되는 성취(성공과 같은 맥락)의 공식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성취= 재능× 노력²

위의 공식을 풀어보면,

 

기술=재능 × 노력, 성취=기술× 노력

 

재능과 노력으로 기술자가 될 수 있다. 여기까지 노력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부문에 있어 성취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과 함께 다시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무조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연습(deliberate pratice)’을 수천, 수만 시간 동안 하라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그녀가 말하는 노력의 결정체이다. 노력은 당신의 잠들어 있어 잠재력을 춤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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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아지트에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책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한 눈에 봐도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뜻한 눈빛에 믿음이 가고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살면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너무나 반가워 헤어지기가 아쉽습니다. 반면에 그런 사람은 걱정과 안타까움을 마구 쏟아내면서 후회하는 듯한 말투와 표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눈빛이 굳어지고 숨이 막혀 답답할 지경입니다.


사람을 아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람,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런 사람은 ‘일루미네이터 Illuminator’입니다.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분하게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 말을 건성 건성으로 하고 남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스스럼없이 늘어놓는 그런 사람은 ‘디미니셔Diminisher’입니다. 상대방에게 겉도는 말을 해서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합니다. 자꾸만 아픈 데를 콕 짚어낼 뿐이어서 오히려 상처로 얼룩집니다.


우리 삶이 좀 더 행복해지고 싶으면 서로가 일루미네이터가 되어야 합니다. 일루미네이터는 불빛이 되어 당신에게 가고, 당신의 마음을 열고 움직이게 합니다. 움직이면서 당신이 미처 몰랐던 자존감을 밝게 비춥니다. 비로소 자존감이 폭발하게 되면 당신은 스스로를 괜찮은 존재라고 느끼게 됩니다. 일루미네터는 당신을 빛나는 존재, 최고의 존재로 만듭니다. 일루미네이터는 당신을 먼저 생각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디미니셔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척 합니다.


일루미네이터는 당신을 변화시켜 주는 좋은 인연입니다. 좋은 인연에는 분명 삶의 거대한 힘이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이며 왜 사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당신의 암호를 풀어주는 조용하지만 카리스마(Charisma)가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라고 하면 비상한 힘과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매료시키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카리스마의 가치를 알고 있기에 우리는 늘 카리스마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보통 카리스마에 대한 기준으로 부와 명예를 가진 성공한 사람이라 믿고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생각해보면 아무나 성공할 수 없다는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공이라는 가치는 카리마스가 있어야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드 브룩스의『사람을 안다는 것』을 읽다가 ‘뒤집힌 카리스마’ 라는 유명한 단어를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소설가 E.M.포스터의 전기를 쓴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포스터와 대화를 나누면서 뒤집힌 카리스마에 사로잡히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내 말에 얼마나 집중하는 지 나 자신이 가장 정직하고 예리하며 최상의 인물이 되는 기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포스터가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로 인해 작가는 무척이나 행복해서 인생의 특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특별한 즐거움이 바로 뒤집힌 카리스마이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책방아지트에 와서 격려와 응원을 해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이웃들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카리스마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카리스마는 부와 명예가 아니라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처럼 부드럽습니다. 모난 데 없이 둥글게 사는 아름다운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리스마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밝은 표정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요즘에도 책방아지트에 있으면 마음에도 없는 쓴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책방으로 밥 먹고 살 수 있냐?’고 묻는 말을 듣게 되면 그걸 헤아리느라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애써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될 리 없습니다. 무기력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면 습관적으로 마음이 캄캄해져 어두운 얼굴을 하게 됩니다.


뒤집힌 카리스마를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요? 카리스마가 됩니다. 내가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뒤집힌 카리스마를 주기 위해서 입니다. 내가 선물해주고 싶은 카리스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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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24절기 중에 입춘(立春)이 첫 번째입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의 시작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입춘이 오면 집 앞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한자를 붙여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봄의 기운이 뭔지 몰랐으나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봄이 왔으니 좋은 일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소원을 바랐습니다. 봄의 힘으로 비로소 인생이라는 꽃이 필 것 같으니까요.


책방아지트의 문을 열고 난 후 두 번의 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입춘대길이라는 글자를 가게 건물 벽면에 붙이지 않았습니다. 일이 바쁘다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입춘대길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좋아하지만 생각해보니 오래된 믿음이라는 게 발목을 잡았습니다. 오래되었으니 그냥 지나쳐도 괜찮겠지, 라며 무감각해진 것이지요.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는 아무 탈이 없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보다는 입버릇처럼 손쉽게 하는 말을 자주 하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 아무 때나 할 수 있으니 신통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수리수리 마수리라는 주문을 외우는 것입니다. 수리수리 마수리라고 주문을 넣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놀라운 마법이 생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릅니다. 비록 내가 무엇을 원한다고 해서 100% 되지는 않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갈망이 있어 답답한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 어디선가 크게 부서지는 느낌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뒤늦게 알고 보니, 수리수리 마수리라는 주문은 틀렸습니다. 원래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입니다. 영화에서나 마술 공연을 보면 마술사들이 수리수리 마수리하며 주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덩달아 수리수리 마수리라는 즐거운 리듬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속아 넘어가고야 맙니다. 만약 마술사의 주문대로 우리가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면 마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마술사가 만든 주문이 아니라 불교경전천수경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천수경은 불자들이 독송(讀誦)으로 쓰는데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으로 시작합니다. 풀이하자면, 입으로 지은 업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참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정구업진언에 나오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는 마법사가 주문하는 대로 수리수리 마수리가 아니라 스님의 염불하는 소리였습니다. 이것을 세 번 외워야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데 아마도 마법사는 한 번 하는 것마저 많다고 생각했는지 수리수리 마수리로 줄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입춘대길, 수리수리 마수리 같은 말들을 쓰고 있을까요? 물론 세상에는 좋은 말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얼핏 마술사들이 사용하는 망토 같기도 합니다. 망토를 걷어내면 그 속에는 우리가 바라는 단단한 희망이 자리를 잡고 놓여 있습니다. 희망은 간절한 너머까지 가보는 일, 과거가 아닌 미래를 생각하는 일, 미래는 우리를 자유롭게 때로는 행복하게 하는 기적 같은 일. 그러고 보니 기적 같은 말입니다. 기적이 생겨날 때까지 기적을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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