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데 그 길을 걷는다고 하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오히려 가슴 속에 아로새겨지는 ‘나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훨씬 멘토 같고 감동적이다. 사람이 책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책은 얼마든지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카프카는『변신』, 「저자의 말」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책은 도끼다.’라는 섬뜩한 멘토 덕분에 책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위험의 강도가 높을수록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진짜로 위험한 책이 있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의 추천사를 쓴 정혜윤은 무슨 책을 읽든지 그 내용과 전혀 아무 상관없는 책, 소일거리로 불과한 책, 새로운 자신을 만들 수 없는 책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아무런 사건도 없다는 것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생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문제는 여자다. 독서의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위험한 책을 읽기 때문에 여자가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 보다는 여자가 책 읽는 그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백하자면 여자는 책을 읽어서는 안 되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남자는 성숙, 여자는 미성숙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독서란 지적 능력을 지닌 특정한 남자의 영역이며 여자는 계몽의 주체가 아니라 계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교육 문명은 자연스럽게 독서 태도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교양의 확대라는 결과라고 할까, 사르트가 말한 것처럼 ‘독서는 자유로운 꿈’이 되었다. 이제 책 읽는 여자는 구경꾼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다.

 

이러한 책 읽는 여자의 내밀한 욕망을 슈페판 볼만의『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그림으로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책 읽는 여자들이 주인공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독서는 여자에게는 절망적이었다. 진리는 오직 남자에게만 가능했다. 그래서 인류의 원죄가 이브의 호기심에서 생겼듯 여자에게 지적 호기심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세속적인 내용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여자의 천성을 거슬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가령, 앙투안 보두앵은 <책 읽는 여자>에서 여자에게 독서의 나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보두앵이 도덕성을 장난삼았다고 하더라도 여자에게 독서는 그만큼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고전적인 의미에서 독서는 ‘소리 내는 독서’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을 보면 그는 아주 조용한 독서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소리 내는 독서는 일종의 사회적인 통제였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문맹 퇴치로 독서의 장기적 성과로 소리 내지 않는 독서가 가능해지면서 ‘개인적 친밀함’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행동 유형이 생겨났다. 특히 양육의 속박에서 벗어난 여자들에게 새로운 자유 영역이 보다 많이 주어졌다. 그래서 실제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자는 위험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책 읽는 여자는 자신만의 자유 공간에서 독립적인 자존심을 얻게 되었다. 가령, 피터 얀센스 엘링가는 <책 읽는 여인>에서 독서에 푹 빠진 하녀를 보여주고 있다. 하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라는 궁금증하나만으로도 이 그림은 전통적이지 않다. 그녀는 ‘전통적인 모습이나 남자의 세계상과 일치하는 자기 나름의 세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고전적인 의미에서 독서는 책의 소유가 곧 소유자의 신분이나 지적 능력을 나타내는 가치 척도의 기능을 했다. 하지만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광범위하게 확대되면서 여자는 책을 더 많이 읽었으며 책에서 삶의 중요한 질문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꿈>에 나오는 ‘책 읽는 여자가 머리를 힘차게, 거의 반항적으로 치켜든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알베르토 망구엘의『독서의 역사』 표지 그림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아돌프 헤니히의 <독서하는 소녀>의 이미지는 무뚝뚝할 만큼 간결하다. 하지만 소녀의 분위기는 감수성이 예민한 내면성을 독특하게 발산하고 있다.

 

바야흐로 책 읽는 시대다. 어느 때보다 책의 황금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독서의 양과 질은 전혀 다른 양상이다. 문제는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 가에 있다. 독서의 우둔함과 현명함은 오직 독자의 몫이다.『마담 보바리』에서 엠마가 책과 현실을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불행해졌다. 즉 ‘그녀는 연애소설 때문에 자신이 실제 생활에서 고통을 느낄 정도로 간결하게 원했던 것이 성취될 수 있을 것으로 믿게 되었다.’(249쪽) 이러한 불행의 그림자는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 방>에서 우울한 여자로 표현되고 있다. 그림 속의 여자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 위협을 받는 존재다.

 

책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책 읽기는 즐거움이 아니라 치열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혜윤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말한 이미지는 ‘치마 한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신의 조각’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책을 읽는 밤마다 그 치마 속을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왜 그럴까? 우리는 하나하나 책장을 넘기며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위험한 세상과 싸우는 무기가 바로 위험한 독서’이며,  ‘책 읽는 여자는 자신의 독서가 그저 고상한 취향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대해 취하는 하나의 행동’(13쪽)이라는 것이다. 결국 책 읽는 여자는 '긍정적인 위험'이라는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 미술사에 있어 ‘괴물스러운 작품들 중에서 가장 괴물스러운 작품’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 독창적인 미학자인 진중권은『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주목하고 있다. 이유인즉 이 작품에 대한 해석 때문이었다. 작품을 놓고 2~3가지 충돌이 있어도 무려 28가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에 무게감이 실렸다. 저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해석의 바벨탑’이었다.

조르조네의 <폭풍우>가 논란에 휩싸인 까닭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풍경이 아직 독립된 장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인물보다 풍경을 부각하고 있다. 이런 탓에 서양 미술사에 있어 이 작품을 ‘풍경화’ 장르로 설정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이 ‘역사화’란 장르로 해석된다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역사화란 이주헌이『서양화 자신있게 보기』에서 말했듯 ‘엄밀히 말해서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가치와 교훈, 특별히 영웅적인 모범이나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할 바람직한 덕을 표현한 그림을 일컫는 용어’였다.

저자는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안토니어 모라시가 “도대체 제재(subjet)가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에 독창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제재는 분절된 이야기를 말한다. 제재의 유무에 따라 이 그림 속의 남녀는 역사화로 보면 성경이나 신화의 인물로 보여 질 것이다. 반면에 풍경화로 보면 현실의 인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제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제재(anti-subjet)이며 다른 하나는 비제재(not-subjet)이다. 반제재를 의도적 에니그마(enigma)라고 하는데 작품을 단 번에 이해하기 힘들도록 애매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비제재는 처음부터 작품의 제재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서양 미술의 문외한인 보통 사람들에게 예술 작품을 감성하는 데 있어 정서적 감동이 우선시될 것이다. 혹은 지각적 쾌감을 얻거나 영성의 울림을 얻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지성적 자극이 올바른 미적 체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조르조네의 <풍속화>을 명확하게 해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상상력을 발동시켜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칸트의 미적 체험인 ‘오성과 상상력의 유희’의 상태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책은 저자에게 지성적 자극을 불러일으킨 12점의 서양미술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 저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바로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였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까치에 있다. 네덜란드 속담에는 ‘까치처럼 수다를 떤다.’는 말이 있다. 결국 이 작품 속의 까치는 수다쟁이를 말하며 교수대가 권력이라고 한다면 교수대 아래서 춤추는 농부 셋의 이미지는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가? 라고 토로 했다.그래서 저자는 이 그림을 ‘상식이 통하지 않는 뒤집힌 세상, 그것의 부조리와 불합리의 무시무시한 상징’으로 브뤼헬의 고약한 블랙유머를 읽어내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읽으면서 왜 이 책의 제목이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알게 되었다. 저자는 작품은 제작된 순간에 완성되는 죽은 ‘물건’이 아니라고 한다. 그 보다는 끝없는 물음과 답변의 놀이를 통해 영원히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생물’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저자는 작품에 대한 창조적 독해를 강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개별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일반적인 해석인 ’스투디움(studium)'과 대조를 보인다.

이처럼 저자의 독창적인 그림읽기와 동행하면서 우리는 작품에 해당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전근대적 회화였다면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반성적 성격이 현대적인 회화였다. 그래서 팝아트같은 회화의 현대성에는 그린버그가 말한 ‘평면성의 원리’가 담겨져 있다. 평면성의 원리란 3차원의 공간의 환영을 포기하고 2차원 평면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덕분에 우리는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술사는 사실적 재현으로 진화해오다가 20C에 들어 유년기의 화풍으로 되돌아 갔다. 이 과정에서 피카소같이 완전히 다른 예술의지가 탄생되었다. 이것은 곧 들뢰즈가 말한 ‘창조적 역행’과 같다.

일찍이 플라톤은『필레보스』에서 지식, 지혜, 지성은 ‘즐거운 것’보다는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독창적 미학관은 우리에게 분명 ‘좋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말하는 ‘푼크툼(punctum)'은 ’좋은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