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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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2008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는 “상을 받는 것은 시간을 얻는 걸 의미하며,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욕망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읽혀지기 위해 어떤 반응을 얻기 위해 글을 쓴다. 상을 받는 것은 그런 반응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작가들에게 노벨문학상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예전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이제 모든 길은 돈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돈의 즐거움이 아니다. 르 클레지오가 말했듯 작품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것이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깊은 성찰을 하면서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공감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두려움과 설렘의 도가니가 된다. 남들처럼 하루 24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말한 고전은 단순히 오랜 시간을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실존적 고통을 좀 더 어떻게 표상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생소한 작가들뿐만 아니라 생소한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삶과 작품을 보면서 열광한다. 시공(時空)에 가로막혀 난해하고 현대적(現代的)이지 않겠지만 이런 불편함에도 적어도 한번쯤은 읽어봐야 한다. 하지만 마음에 새겨둘 수 있는 애정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의 목록을 올릴 뿐이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를 엮은『16인의 반란자들』은 이런 갈증을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인식의 폭을 넓혀 주고 있다. 하나, 시간이 나올 때마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호텔 인터뷰가 아닌 점. 둘, 강렬한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삶을 흑백 사진과 함께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공통감각이 놀랍게도 반란이라는 점. 노벨문학상 작가들을 반란자라고 해서 그런지 이 책에는 어떤 불온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노벨문학상이 반란을 갈망해왔는지 모를 정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문학에 대한 집념과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이 촘촘하게 스며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정체성 즉, 반란자라는 기묘한 통증에 공감하게 된다. 부조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다루는 작가에게는 방관할 수 없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주제 사라마구의『수도원의 비망록』에 나오는 ‘블리문다’(타인의 내부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지닌 인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뇌의 흔적이 아무런 여과 없이 드러난 그들의 흑백 사진에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문학적인 본능으로 충만한 사소한 표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흑백 사진을 한순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 작가들이라 그들의 반란이 부드러운 싸움이겠지, 혹은 좀 더 격하게 이데올로기적이겠지 한다면 반란자의 열정이 희석되고 말 것이다. 반란자에게 현실의 귀환은 살아있는 생(生)의 과정이다. 이것은 주제 사라마구가 말한 것처럼 “삼라만상에는 거의 자라지 않는 나무도 있는데, 그건 그 나무가 이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 그렇다고 해서 ‘세퀘이아’가 ‘올리브나무’보다 낫다는 건 아니오. 그 반대도 아니고.”였다. 돌이켜 보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우리는 가면 같은 존재여서 가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래서 연극인 다리오 포는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하면서 대중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웃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같은 맥락으로 반란자는 현실의 빈틈을 파고드는 존재다. 노예제도의 모순을 바라보는 토니 모리슨은 자연적인 아닌 이익을 구하는 자들에 의해 형성된 인종주의에 반대한다. 그리고 문화혁명의 희생자 가오싱젠은 정치권력에 맞서 내적으로 공고한 존재를 역설하면서 "어떤 이즘이 없이 산다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저항의 형태이다.”라고 말했다. 콜롬비아의 평화를 위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나는 항상 서명자보다는 음모자였소.”라고 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종교적 통합주의에 맞서는 V. S. 네이폴은 내세에 대하여 “나는 종교인이 아니오. 내 삶은 글을 쓸 뿐, 그게 다요. 쓰는 게 종교요. 그게 존재할 수 있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요.”라고 말했다.

 

 

반란자들이 지속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 중에는『양철북』의 귄터 그라스에서 보듯 ‘치명적인 트라우마’의 역설을 빼 놓을 수 없다. 과거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되돌아온다고 했던 귄터 그라스는 나치 친위대라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인정하면서 민족의 양심이 고통을 당했다. 그의 고백은 자신이 반파시스트주의자라는 침묵을 깨트리는 것은 아니라 “나에게 적은 관념적인 이데아에 불과하다.”는 항변이었다. 이와는 달리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임레 케르테스는『운명 없는 인간들』에서 아우슈비츠에서 ‘딴은 행복했다.’고 말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홀로코스트에서 오는 정체성이었다. 즉 ‘이는 고통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지요. 살다 보면 그 이상은 위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순간들로, 그럴 때에 나오는 모든 긍정적인 자극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오히려 거대한 평온함과 안도감이 들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닫혀 있는 진실을 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근거로 하여 저자는 수상자들의 삶과 작품 세계에 굴절된 내적인 저항을 ‘반란자’라고 결정했다고 했다. 반란자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진실’이라는 정신적인 것을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만남, 어느 것 하나 값지지 않은 게 없었다.’고 느꼈다. 그들에게 이쪽/저쪽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그들의 실존적 진실은 ‘다른 쪽’을 보는 것이다. 다른 쪽은 도리스 레싱이 지적했듯 사상이 닫힌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지속적으로 나의 이데아들을 새롭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새로운 이데아에서 우리는 고통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담담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무섭도록 솔직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수상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라는 관찰자의 시각’을 알게 되었다. 바로 문학적인 본능이었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의 소리 없는 고통에서 자극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는『히로시마 노트』에서 ‘존재에 대한 도덕적 의미’를 말했는데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오르한 파묵은『이스탄불』고 했다. 문학에는 인종적인 순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데릭 월콧은 “아무것도 쓰여 지지 않은 백지 앞에 앉을 때마다, 누구든 과거를 비우고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중요해요.”라고 말했다.『순간』에서 현재성 즉 살아 있는 ‘어떤 순간’을 표현했던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모든 사물은 적어도 여섯 개의 시각, 다시 말해 네 방향과 위아래 두 방향에서 볼 수”있다고 말하면서 ‘세세한 것들에 주목하라.’고 하였다.

 

 

『16인의 반란자들』이 노벨문학상 작가들과 대화한 내용인 탓에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대화는 앞서 말한 ‘반란자’라는 이미지로 중첩된다. 그러면 앞으로 반란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것은 문학의 운명과 같은 수레바퀴다. 문학이 죽었다고 걱정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문학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문학에 대한 정도의 시각으로 문학 자체에 대한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텅 빈 실체에 불과하다. 오히려 문학은 위대한 삶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위대한 것은 결코 환영(幻影)이 아니다. 시인 페소아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잘난 체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것임을

넌 알아야 해.

알면 알수록 그건 아주 사소한 것임을

넌 알아야 해.

달은 세상의 모든 호수를 비춘다는 것을

그래서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즉 반란자들은 앞으로도 영혼을 잃어버린 삶을 비출 것이다. 그들은 가오싱젠이 말한 것처럼 ‘문학은 인간이 의미하는 것을 심오하게 일깨워 주는 도구’를 가지고 삶에 대한 고통을 휴머니즘으로 뒤바꿔놓는다. 이 책을 읽으며 반란자들에게서 달(月)을 보게 되는 것은 가장 밝은 상상력이 아닐까? 정말로 우리는 달이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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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 문학의 비밀을 푸는 18개의 놀라운 열쇠
정여울 지음 / 이순(웅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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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멘토링! 왠지 낯설다. 자기 계발에 관한 이런 저런 멘토에 귀가 닳은 것인가? 아니면 우리 시대 문학에서 실용성을 찾기 힘들다는 편견 때문일까? 그럼에도 저자는 명성에 걸맞게 낯설다는 장벽을 아주 가볍게 넘어서고 있다. 저자는『정여울의 문학 멘토링』에서 문학의 비밀을 어렵지 않게 풀고 있다. 어렵지 않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읽기가 수월하다는 것이다. 저자 말대로 이 책은 문학 참고서도 아니며 문학 이론서도 아니다. 오히려 문학 참고서와 문학 이론서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 위치에서 문학과 친구가 되는 법을 유려한 필치로 멘토링하고 있다.

 

저자에게 문학이 영혼의 피난처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문학의 힘’ 이 거부할 수 없는 매혹 덩어리이며 삶을 보다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무한경쟁의 시대에 문학은 살아남기 위한 스킬, 스펙도 아니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 흑백(黑白)이 분명해야 한다. 흑백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예/ 아니오’를 요구한다. 이러한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정답’(正答)이 바람직한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행복은 흑백이라는 단색(單色)이 아니다. 행복은 자유라는 다채로움에 있다. 문학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비밀 일기가 되는 것은 그만큼 삶의 진실을 잘 보여주는 덕분이다.

 

우리는 문학과 동행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문학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것은 문학과 ‘1대 1’의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은 우리가 영혼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섭취해야 할 ‘정신적 비타민’이다. 그래서 만남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문학 속에 숨겨진 각종 ‘코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문학이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며 멋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기법이나 내용에 관한 것을 아는 것은 친구가 되기 좋은 방법이다.

 

가령, 문학의 기법에 있어 패러디를 ‘모방’이라는 ‘보수적 충동’과 ‘차이’라는 ‘변화의 충동’으로 접근하고 있다. 모든 창조에는 원칙적으로 모방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즉 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아직 없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기법으로서의 패러디가 예술 작품의 창조적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패러디를 위한 패러디’가 아니라 ‘패러디를 통해 무엇을 창조하는가.’에 있다는 것이 궁극적이다.

 

또한, 시점의 문제에 있어 창작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해석’의 문제라는 것, 창조의 도구에 있어 은유가 ‘언어의 비료’라고 한다면 상징은 ‘문학의 보물 창고’라는 것, 반어법(verbal irony), 즉 아이러니는 단지 말 꾸밈이나 기교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 무한한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이라는 것, 은밀한 풍자 혹은 우화라고 하는 알레고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문학의 마술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문학의 내용에 있어서는 확연히 분리된 두 세계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캐릭터인 트릭스터(trickster)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신비로운 생의 가치가 존재함을 일깨우는 존재라는 것, 문학 작품에서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착한 주인공)을 방해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악한 주인공)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한계를 실험하는 리트머스지라는 것, 기억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한 자기 정체성의 표현 도구를 넘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윤리적 이정표라는 것, 인간의 생명과 생존 그 자체의 강력한 은유인 음식은 우리에게 사랑이자 사람, 그리고 삶 그 자체라는 것, 외부세계에서는 허구지만 마음속에는 진실인 환상성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힘이며, ‘얼마나 재미있는 환상을 창조할 것인가’ 보다는 그 환상의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라우마(trauma)는 어떤가?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지만 아름다운 문학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 통과의례를 겪어 낸 영웅의 제 1요건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것,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모험은 ‘~하지 마라'(Don't)가 아니라 ‘한 번 해보자'(Let' do it!)라는 것, 오만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징벌쯤으로 여기는 대재앙이 사실은 현재의 소중함,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이라는 것, 문학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은 희망이나 보답을 향한 열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부신 기적을 느낄 줄 아는 지혜라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문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을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저자의 섬세한 통찰력을 깨닫게 된다. 문학은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히 문학 작품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또 다른 얼굴은 세상의 모든 생물, 세상의 모든 사물과 교감하게 해주는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백과사전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 떠나는 끝없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문학이 이 정도로 비밀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문학의 힘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문학은 최고의 멘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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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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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 사랑이란 한숨으로 만들어진 연기인데

정화되면 연인 눈에 반짝이는 불길이고

성질내면 사랑의 눈물 먹고 자라는 바다야.

(………………………)

줄리엣: 말보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상상력은

장식이 아니라 본질을 뽐내는 법이예요.

거지들은 자기 값을 헤아릴 수 있겠지만

진실된 내 사랑은 한없이 크게 자라

그 재산의 절반도 계산할 수 없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중에서

 

달에게 사랑을 맹세하지 마세

누구나 한번 쯤 사랑의 맹세를 해봤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성실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말보다 내용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밤을 은빛으로 물들이는 달에게 맹세하는 것은 어떨까요? 세익스피어의『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둥근 궤도 안에서 한 달 내내 변하는 지조 없는 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맹세는 사랑의 관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달처럼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하겠다면 품위 있는 자신에게 맹세해요.”라고 했습니다. 또한 너무너무 성급하거나 무모 하는 것에도 반대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번개 친다.”를 말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번개와 꼭 같다고 했습니다. 줄리엣은 사랑의 새싹은 여름의 숨결로 자라나 다음 만날 땐 예쁜 꽃이 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예쁜 꽃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불행은 그들의 가문이 오래 묵은 앙숙이었는데 그들이 숙명적인 몸에서 연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몬터규 집안의 로미오가 줄리엣을 만나기 전에 그는 로잘린과 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눈가리개 하고 있는 사랑 때문에 슬픔이 짧아지지 못했습니다. 큐피트의 화살로는 로잘린의 과녁을 맞출 수 없게 되자 그는 비탄에 잠겼습니다. 한편 캐풀렛 집안에서는 줄리엣의 신랑감으로 귀족 청년 파리스 백작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캐풀렛 부인은 캐풀렛 가문의 오랜 축제가 열리는 저녁에 줄리엣에게 파리스의 젊은 얼굴 , 그 책을 읽어보고 아름답게 적어 놓은 기쁨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

그런데 그날 밤 축제에서 줄리엣에게 제본 안 된 사랑의 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로미오였습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보자 횃불보다 더 밝게 빛나는 아가씨라고 했습니다. 로미오가 값비싼 보석 같은 진정한 아름다운 줄리엣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의 조카 티볼트가 그만 격분했습니다. 티볼트가 몬터규 집안의 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작은 소동이 조용해지자 로미오는 줄리엣의 손을 잡고 성자상의 부드러운 키스로 침입 사건의 죄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미오가 키스를 하려고 하자 줄리엣은 성사상의 입술은 기도에 써야 하면서도 성자상은 기도는 허락하나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로미오는 기도하는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하면서 줄리엣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그들은 첫 키스를 하였지만 서로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후 그들의 사랑은 가혹했습니다. 과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로미오는 줄리엣의창가 아래에서 그녀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줄리엣은 “로미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라고 안타깝게 말하면서 그의 이름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이름만이 그녀의 적일 뿐 이었습니다. 몬터규는 로미오의 손도 발도 아니고 얼굴이나 사람 몸 가운데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줄리엣은 로미오가 다른 이름을 가져 그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 가지라고 했습니다. 장미가 어떤 말로도 같은 향기가 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줄리엣의 비밀을 듣고 있던 로미오는 만약 그녀가 자신을 애인이라 불러 준다면 앞으로는 절대로 로미오라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장식이 아니에요!

그들은 사랑하는 방향을 결혼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로미오는 로렌스 수사를 찾아가 줄리엣이 마음의 연인이라고 고백하면서 혼인으로 축복해주시길 부탁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젊은이의 사랑이 진실로 마음속이 아니라 눈 속에 있구나, 의심하였지만 로미오는 옛 짧은 애인 로잘린처럼 사랑에 혹 한 것이 아니라 줄리엣과는 호의를 주고받는 다고 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이 두 집안의 원한을 순수한 사랑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바라면서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렌스 수사의 암자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로미오가 기쁨에 넘쳐 줄리엣에게 상상 속의 행복을 드러내달라고 하자 그녀는 “말보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상상력은 장식이 아니라 본질을 뽐내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로미오에게 불길한 앞날이 걸쳐 일어났습니다. 로미오가 시비 끝에 티볼트를 살해하여 로렌스 수사의 암자에 숨어 지냈지만 끝내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그의 잘못은 사형인데도 죽음이 아니라 추방을 내린 것은 자비로운 일이라고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추방! 그것은 육신의 죽음보다 끔찍했습니다. 더구나 줄리엣이 사는 곳이 천국이라고 말하며 추방은 자비가 아니라 고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 수사는 역경의 달콤한 우유인 철학으로 위로하면서 로미오가 만투아로 건너가 사는 동안 사면을 요청하고 때를 봐서 그들의 결혼을 공표하겠다고 했습니다.

 

행복한 단검아, 이게 네 칼집이다

이렇게 해서 줄리엣은 로미오와 헤어졌는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리스 백작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반갑진 않으나 고맙긴 합니다, 라고 하면서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비탄에 잠긴 그녀는 로미오와 맺어 준 로렌스 수사를 찾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조언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만약 로렌스 수사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그녀는 죽음으로 심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 수사는 자결할 의지력을 가진 그녀에게 죽음과 비슷한 치유책을 알려주었습니다. 즉, 지금의 치욕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파리스와 결혼에 동의하고 죽음의 축소판이 든 약을 먹게 되어 묘지에 누워 있으면 그와 로미오가 그녀가 깨는 것을 지켜보다가 구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렌스 수사의 계획이 담긴 편지보다 로미오는 줄리엣의 죽음을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절망한 사람에게 사악한 마음이 재빨리 드는 걸까요? 로미오는 줄리엣과 함께 누워 있고자 하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약장수에게서 독약을 사고 나서 줄리엣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자궁 앞에서 파리스 백작을 만나 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죽음마저 아름다움을 정복하지 못한 줄리엣에게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고 독약이었던 슬픔의 치료제를 마셨습니다. 줄리엣이 깨어나고 나서 꿈이 좌절된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로미오의 검을 들고 “행복한 단검아, 이게 네 칼집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찌르며 죽었습니다.

 

무서운 아름다움

스무 자루 칼보다도 더 큰 위험이 줄리엣의 눈에 있다고 했던 로미오는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줄리엣은 어떤가요? 사랑은 내게 힘을, 힘은 도움을 줄 거라고 했습니다. 최종철은 『로미오와 줄리엣』,「작품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줄리엣의 자결이 보여 주는 이 슬픔 속의 기쁨, 예이츠의 표현을 빌리면 이 ‘무서운 아름다움’(terrible beauty)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비극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주된 구성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사랑의 모순어법에서 나온다. 서로 미워하는 두 원 수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로를 사랑하게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운명에 한편으로는 대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결국에는 살아 있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을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은 짓궂은 여름 바람 맞으며 한가로이 나부끼는 거미줄에 올라타도 안 떨어진다고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운명 앞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줄리엣이 말한 것처럼 유일한 내 미움이 유일한 사랑을 낳을 정도로 순수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죽은 꽃을 피웠습니다. 만약에 사랑이 마침표이거나 물음표, 그리고 느낌표라고 한다면 장식에 불과하지 모릅니다. 때로는 사랑은 죽음표여야 합니다. 죽을 정도로 사랑한다면 아낌없는 마음이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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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어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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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희생은 고깃덩어리를 땅속에 파묻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 시카고의 도살장과 같았다. 차마 참고 듣기 힘든 말들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나중에 지명만이 위엄을 갖게 되었다. 숫자나 날짜 같은 것들이 지명과 함께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었다. 영광이니 명예니 용기니 신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마을의 이름이나 도로의 번호, 강 이름, 연대의 번호나 날짜와 비교해 보면 오히려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무기여 잘 있어라』중에서

 

생각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사람마다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니시트 헤밍웨이의『무기여 잘 있어라』에서 프레더릭은 “나는 생각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사람의 품위(品位)를 이성적으로 완성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생각이 아닌 “음식을 먹도록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캐서린과 잠을 자도록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먹고 자고는 단순합니다. 단순함은 굳이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끔은 우리는 영광이나 명예를 그 밖에 인간에 부여된 정의를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인 말은 그에게 마치 빗속에서 듣는 것처럼 공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설스럽다고 적당한 착각을 했습니다.

미국인이었던 프레더릭은 건축가가 되고 싶어 이탈리아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이탈리아 군대 소속으로 앰뷸런스 부대의 장교로 참전했습니다. 전쟁이 이렇다 할 공방전 없이 잠시 안개마냥 가라않자 할 일이 없어 휴가를 가게 된 그는 군종신부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날카롭고 투명한 쾌감으로 밤낮을 반복했습니다.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군종신부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습니다. 군종신부는 아가씨가 없이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신부가 말한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었는데 영국 야전 병원에서 일하는 스코틀랜드인 미스 바클리를 만나면서부터 점차 현실이 되었습니다. 약혼한 청년이 참전하자 그녀는 간호사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청년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삶을 살다

그들은 이상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청년이 전사하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 그를 만나 사랑하게 되자 그녀는 만약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캐서린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저녁 장교 위안소에 가는 것보다 밤이 되어 그녀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뻔한 게임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카드 대신 말로 하는 브리지 게임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분간 그녀에게 친절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정말로 친절하며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또한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만나러 왔다가 막상 만나지 못하면 기분이 여간 쓸쓸하고 공허한 게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공격이 개시되어 그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영국 야전 병원을 지날 때, 잠깐만이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그를 도와주기 위해 성(聖) 안토니오 상(로마 가톨릭의 기적의 수호성인)이 새겨진 목걸이를 주면서 꼭,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운전병과 함께 참호 속에서 전쟁 이야기를 하다가 적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다리에 부상을 당하는 정도였습니다. 그가 병동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군종신부와는 전쟁 혐오증을 이야기 했습니다. 군종신부는 자신은 진짜 장교가 아니라고 하면서 장교와 사병의 차이점을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장교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들(사병)에게 전쟁을 시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내 종교예요

그래서 군종신부는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가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하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었습니다. 사랑을 하면 그 대상을 위해 뭔가 하고 싶어지고 희생하고 싶어지고 봉사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두려웠습니다. 군종신부말대로 한낱 정열과 육욕에 지나지 않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는 사랑과 별도로 행복했습니다. 군종신부는 자신의 행복은 그것과는 다르며 직접 느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군종신부가 말한 그것! 그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런 행복을 느끼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물어봤지만 군종신부의 대답은 만족할 수 없었지만 견고했습니다.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밀라노에 있는 미군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정말 꿈만 같은 캐서린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녀는 그를 간호해주면서 그가 원하는 것만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곧 그녀가 원하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는 더 이상 없으며 오직 그가 원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는 아이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나’라는 존재는 없으며 내가 바로 ‘당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행복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당신 곁을 떠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면서 “당신은 내 종교예요. 당신은 내가 가진 전부”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하지만 그들은 생리적인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불안했던 이유는 바로 아기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걱정할까 봐 얘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 꼭 말해야만 했습니다.

“덫에 걸린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나요?”“약간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 때문은 아냐.”“나 때문이라곤 하지 않았어요. 바보같이 굴지 마세요. 어쨌든 덫에 걸린 기분이 드느냐는 거죠.”

“인간이라면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그 순간, 그녀는 ‘언제나’라는 말이 듣기 싫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서로 사랑하면서 일부로 오해를 만들어서 다투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두 사람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남이며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이 우리를 잡아먹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며 당신 같은 용감한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비겁한 자는 천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단 한 번 죽을 뿐’이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비겁한 사람에 대해선 잘 알지만 용감한 사람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용감한 사람이 영리하다면 아마 이천 번은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용감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율이 2할 3푼인 타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야구에서 평범한 이류 타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상에서 몸이 회복되자 그는 캐서린을 병원에 남겨둔 채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더 이상 전쟁에서 신성이니 희생이니 하는 말들이 무의미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장 밑바닥에 있는 덫을 발견했습니다. 더구나 후퇴하는 과정에서 임무를 실패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생사의 갈림길을 빠져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부대를 이탈한 죄로 야전 헌병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문을 받는 장교들이 하나같이 총살을 당하자 그는 탈출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그는 아무런 의무도 없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캐서린이 스트레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의 동료가 그를 부끄러움도 모르고 명예도 모르고 비열한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그녀는 기쁜 마음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여서 세상 사람들에게 맞선 고독을 느낄 뿐, 결코 고독하지도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밤과 낮이 같지 않다는 것,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 밤에 겪은 것은 낮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있으면 밤이 더 유쾌하다는 것만 다를 뿐 낮과 거의 다를 게 없었습니다. 또한 혼자 있을 때는 할 일이 없는 범죄자 같았지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러한 기쁨 덕분에 그는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녀 말대로 앞으로는 그가 체포되지 않을 곳에서 멋지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네가 삶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죽는다

그들은 체포를 당할까 봐 국경을 넘었으며 마침내 스위스에 도착하자 지긋지긋한 곳을 빠져나온 것을 실감했습니다. 스위스는 멋진 나라, 훌륭한 나라였습니다. 스위스에서 그들은 출산을 기다리며 멋진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병원에서 출산하는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 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초산이라는 자연의 이치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그녀의 용기는 완전히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녀 또한 전혀 죽을 까닭이 없었지만 머지않아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사랑해서 얻게 되는 결과라고 하는 것이 거짓말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덫의 끝, 즉 인간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더구나 그것에 배울 시간이 없었습니다. 마치 경기장에 던져 놓은 뒤 몇 가지 규칙을 알려 주고는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공을 던져 잡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죽음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비열한 장난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의 종말을 그는 언젠가 캠프를 할 때 모닥불 위에 던져진 개미가 잔뜩 붙어 있는 통나무로 투영했습니다. 통나무에 불이 붙자, 개미들은 뜨겁지 않는 곳에 모여 있다가 결국에는 불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그는 얼마든지 구세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컵의 물을 통나무에 끼얹었던 것은 위스키를 마시려고 해서 그런 것이지 개미를 살려주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여야 한다

그는 그녀가 끝내 사망하자 간호사를 내보내고 문을 닫고 전등을 껐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마치 조상(彫像)에게 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이토 준이치는『민주적 공공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who)는 무엇(what)과는 다르게 공약(共約)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내가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타인에게도 귀결시킬 수 없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은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심에 의해 성립된다. (…) 타자의 현상에 흥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타자의 행위와 말을 보고 들으려고 하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을 성립시키는 것은, 타자의 세계의 한 자락이 드러나는 것, 그러한 세계 개시에의 욕구이다. 현상의 공간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세계는 그 사람 자신에 의해 보여질 수밖에 없다.

 

돌이켜 보면 그녀의 죽음은 생리적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그녀의 얼굴이 조각품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에게 사랑이라는 종교적인 감정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그는 우리와 다르게 생리적 덫의 비대칭적인 위치를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즉 사랑, 죽음이라는 무엇의 덫이 아니라 존재라는 누구의 덫에 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이천 번 죽을 용기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용기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타율이 2할 3푼 그 이상을 넘어설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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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데 그 길을 걷는다고 하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오히려 가슴 속에 아로새겨지는 ‘나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훨씬 멘토 같고 감동적이다. 사람이 책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책은 얼마든지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카프카는『변신』, 「저자의 말」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책은 도끼다.’라는 섬뜩한 멘토 덕분에 책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위험의 강도가 높을수록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진짜로 위험한 책이 있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의 추천사를 쓴 정혜윤은 무슨 책을 읽든지 그 내용과 전혀 아무 상관없는 책, 소일거리로 불과한 책, 새로운 자신을 만들 수 없는 책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아무런 사건도 없다는 것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생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문제는 여자다. 독서의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위험한 책을 읽기 때문에 여자가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 보다는 여자가 책 읽는 그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백하자면 여자는 책을 읽어서는 안 되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남자는 성숙, 여자는 미성숙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독서란 지적 능력을 지닌 특정한 남자의 영역이며 여자는 계몽의 주체가 아니라 계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교육 문명은 자연스럽게 독서 태도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교양의 확대라는 결과라고 할까, 사르트가 말한 것처럼 ‘독서는 자유로운 꿈’이 되었다. 이제 책 읽는 여자는 구경꾼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다.

 

이러한 책 읽는 여자의 내밀한 욕망을 슈페판 볼만의『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그림으로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책 읽는 여자들이 주인공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독서는 여자에게는 절망적이었다. 진리는 오직 남자에게만 가능했다. 그래서 인류의 원죄가 이브의 호기심에서 생겼듯 여자에게 지적 호기심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세속적인 내용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여자의 천성을 거슬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가령, 앙투안 보두앵은 <책 읽는 여자>에서 여자에게 독서의 나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보두앵이 도덕성을 장난삼았다고 하더라도 여자에게 독서는 그만큼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고전적인 의미에서 독서는 ‘소리 내는 독서’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을 보면 그는 아주 조용한 독서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소리 내는 독서는 일종의 사회적인 통제였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문맹 퇴치로 독서의 장기적 성과로 소리 내지 않는 독서가 가능해지면서 ‘개인적 친밀함’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행동 유형이 생겨났다. 특히 양육의 속박에서 벗어난 여자들에게 새로운 자유 영역이 보다 많이 주어졌다. 그래서 실제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자는 위험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책 읽는 여자는 자신만의 자유 공간에서 독립적인 자존심을 얻게 되었다. 가령, 피터 얀센스 엘링가는 <책 읽는 여인>에서 독서에 푹 빠진 하녀를 보여주고 있다. 하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라는 궁금증하나만으로도 이 그림은 전통적이지 않다. 그녀는 ‘전통적인 모습이나 남자의 세계상과 일치하는 자기 나름의 세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고전적인 의미에서 독서는 책의 소유가 곧 소유자의 신분이나 지적 능력을 나타내는 가치 척도의 기능을 했다. 하지만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광범위하게 확대되면서 여자는 책을 더 많이 읽었으며 책에서 삶의 중요한 질문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꿈>에 나오는 ‘책 읽는 여자가 머리를 힘차게, 거의 반항적으로 치켜든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알베르토 망구엘의『독서의 역사』 표지 그림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아돌프 헤니히의 <독서하는 소녀>의 이미지는 무뚝뚝할 만큼 간결하다. 하지만 소녀의 분위기는 감수성이 예민한 내면성을 독특하게 발산하고 있다.

 

바야흐로 책 읽는 시대다. 어느 때보다 책의 황금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독서의 양과 질은 전혀 다른 양상이다. 문제는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 가에 있다. 독서의 우둔함과 현명함은 오직 독자의 몫이다.『마담 보바리』에서 엠마가 책과 현실을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불행해졌다. 즉 ‘그녀는 연애소설 때문에 자신이 실제 생활에서 고통을 느낄 정도로 간결하게 원했던 것이 성취될 수 있을 것으로 믿게 되었다.’(249쪽) 이러한 불행의 그림자는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 방>에서 우울한 여자로 표현되고 있다. 그림 속의 여자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 위협을 받는 존재다.

 

책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책 읽기는 즐거움이 아니라 치열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혜윤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말한 이미지는 ‘치마 한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신의 조각’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책을 읽는 밤마다 그 치마 속을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왜 그럴까? 우리는 하나하나 책장을 넘기며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위험한 세상과 싸우는 무기가 바로 위험한 독서’이며,  ‘책 읽는 여자는 자신의 독서가 그저 고상한 취향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대해 취하는 하나의 행동’(13쪽)이라는 것이다. 결국 책 읽는 여자는 '긍정적인 위험'이라는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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