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돌파하라 - 변화의 시대, 불안을 기대로 바꿔줄 43가지 지혜의 도구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은 문제투성이며 예측하기 어렵다. 이러한 삶의 두려움은 거대한 바위와 같고 바위에 맞서는 우리는 나약한 존재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절망을 버티는 힘이 있다. 바로 생각의 힘이다. 생각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다. 만약에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문제를 모를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동물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다. 책은 영화, 음악과 다르게 실물로 존재해서 언제든 읽을 수 있다. 또한 책 속에는 삶의 수많은 문제에 대한 지혜로운 답이 있다. 그중에서도 철학책을 즐겨 읽는다. 철학은 말 그대로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메시지에 담긴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삶의 다양한 감정을 얻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철학자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 시대 인기 철학 에세이스트 안광복 작가의 신간 철학으로 돌파하라에는 변화의 시대, 불안을 기대로 바꿔줄 43가지 지혜의 도구가 있다. 저자는 로마시대 가장 유명한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전략가라고 풀어내고 있다. 전술가는 눈앞에 닥친 전쟁의 승리만을 생각한다. 반면에 전략가는 전쟁의 핵심을 읽는다. 이유인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전략가적인 지혜는 철학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은 우리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삶의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철학자들이 했던 말들만 따라 할 뿐 몸소 실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삶에 비추어보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을 가짜 현실이며 가짜 영혼이라고 생각하며 외면한다.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순간, 철학이 인생을 복잡하게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령, 철학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여가시간은 노동시간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다. 여가시간을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면서 단순하게 보낼 수 있다. 그야말로 노동의 대가라고 여기고 여가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을 하기 위해 여가시간을 무료하게 보낸다.


그러나 철학자의 생각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가시간을 고민했을 정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시간을 낭비하게 되면 노예에 다를 바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말했다. 노예는 현재도 미래도 노동하는 인간으로 허무하게 끝날 뿐이다. 반면에 자유인은 고귀한 영혼의 인간이다. 고귀한 영혼이란 여가시간에 자기다움을 위한 활동을 한다. 자기다움은 영혼의 근육을 움직이게 한다.


이렇듯 철학으로 돌파하라에는 삶을 더 삶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지혜의 도구들이 담겨 있다. 지혜의 도구가 다름 아닌 철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다. 그 진리는 피해 갈 수 없다. 그럼에도 인생에 대한 무모한 사랑은 아름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득 삶이 불 꺼진 밤의 창문처럼 공허할 때가 있다. 공허는 검은빛이다. 공허라는 말이 주는 아득한 미로 속으로 들어가면 지나고 나서 후회했던 순간들과 다시 마주한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되풀이되었다. 지금과는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하자면, 참 많은 세월을 맨몸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이것이 삶의 이유가 아니라는 두꺼운 벽()을 마주할 줄 몰랐다. 벽을 깨뜨릴수록 수많은 파편이 온몸으로 파고들었고 그리하여 인생을 끝까지 사랑하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세상 곳곳이 전쟁터여서 슬픔을 막을 수 없지만 사랑을 선택하고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때로 삶이 밤하늘의 별처럼 은은히 빛날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나오는 펄롱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 숨이 막혔다. 사소한 삶에서 느끼는 감정과 자기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사람들에게 삶은 사소하거나 사소하지 않다. 사소함은 사람을 살아가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석탄과 목재를 팔면서 다섯 딸을 키우는 그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딸들은 각자 자기에게 필요한 일을 하고 그의 아내 또한 지극히 현실적이며 시퍼런 직감으로 살림을 꾸려나간다. 그의 가족들은 각자 만의 방식으로 사소한 일상을 삶 그 자체로 여긴다. 다시 말하면 사소한 인간은 사소한 일상을 사소롭게 생각한다. 그래서 은유 작가의 표현대로 사소한 인간은 가족 인간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가족 인간은 다름 아닌 가족에게만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가족 인간만 있는 게 아니다. 소설에 나오듯 한겨울에도 먹을 것이 없고 땔감이 없어 힘들게 지내는 불행한 인간들이 있다. 펄롱은 석탄을 배달하면서 불행한 사람들을 본 이후로 가족 인간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얼핏 보면 불행한 인간은 운이 없다고 해도 할 수 있으나 그가 느끼기에는 가족의 결여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불행한 인간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떠올라 어째서 우리는 불행한 인간을 도와주지 못할까? 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그가 반가웠다. 가족 인간인 듯 하면서도 조금은 덜 가족 인간이어서 대화가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불행한 인간을 보면서 저마다의 감정을 자아낸다. 불행이라는 단어는 긴 설명이 없어도 가슴에 와닿는 슬픔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어느 누구는 그와 같이 불행한 인간을 모른 척하며 지나갈 수 없어 남몰래 도와주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의 아내처럼 우리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어.’라고 하며 발길을 돌리기 마련이다. 불행한 인간을 걱정하거나 도와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나름대로 핑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의 아내가 무심하게 말했던 말이 내 머릿속에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차별주의자라는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어느 누구도 차별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이중적인 잣대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얼굴이다. 다섯 딸을 부족함 없이 키우면서 남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누구에게 물어봐도 선량한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선량함이란 당연한 일이니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선량함이라는 말이 오히려 부당한 차별로 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든 운 나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라며 잠잠히 넘기곤 한다. 정말 그들을 스스로 제 무덤 판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부분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게 망설여졌다. 소설에 나오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보수적이었다.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이상적으로만 살려고 해서 그런지 모른다. 하지만 선량한 차별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더 이상 다정함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게 되었다. 그것은 정말 걱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차별이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든 일종의 무시였다.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는 관계만 유지하면서 불행한 그들의 삶에는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는 펄롱이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다행히 사람들의 무관심에 벗어나 자신의 소명을 지키려 했다. 그는 사소한 일상이 끌어당기는 아픈 현실에 대해 외면하지 않았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얼핏 담담해 보이면서도 배어나오는 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지 물으면 우리는 서로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원의 손길을 알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앞만 보고 스쳐 지나갈 뿐이다. 때로는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올 때는 도망가려는 마음뿐이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덜어줄 순 없고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연약했지만 멈춰서 생각하고 뒤돌아보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점점 더 힘들어져서 안간힘을 써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은 후회와 허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그토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의 선량함은 진실이었다.


어느 날 그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수녀원의 온갖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대한 깊숙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부끄러웠던 일이 떠올라 일요일에 미사를 보고 도무지 잠들 수 없을 정도로 고민에 빠졌다. 그저 크리스마스가 이름만 그럴듯한 축제가 아닐까 의심했다. 수녀원의 아름답지도 않은 부조리한 모습에 남들처럼 침묵하며 쉬쉬하며 그냥 살아도 되는지 묻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그가 할 수 없는 일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해서 수녀원에 있는 소녀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소녀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어쩌면 예전보다 최악의 시련과 싸워야 하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안타까운 체념에서 벗어나 참회의 용기를 냈다. 만약 그의 선량한 마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선물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기적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그의 마음은 크리스마스처럼 따뜻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내 마음 어딘가에 그의 절실한 말이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묘한 안도감이 생겼으며 내 마음을 부끄럽게 했다. 동시에 그에게 힘내라는 말도 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줄 때가 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결코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만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사소하더라도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괜찮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다름 아닌 최선이었다.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했다.


클레이 키컨의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천천히 읽었다. 그의 소설은 뭔가 뚜렷한 이야기나 주제는 없어 보였다. 대신 사소한 일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담담한 시선 속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사소한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사소한 일상을 몇 번이고 되돌아보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담담함에는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었다.’라는 미세하면서도 강렬한 울림을 준다. 앞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돌아보는 시간이 우리의 살아 있음을 선명하게 한다.


우리는 까마귀 울음소리로 추악한 세상이 금방이라도 망해버렸으면 하는 섬뜩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어째서 지옥 같은 세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 것일까? 에 대해서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작가의 물음은 아득한 일상의 체념이 아니라 변화로 읽혔다. 우리를 멈추고 또 돌아서게 하면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가장 좋은 부분을 빛나게 하였다. 겨울밤에 켜지는 불빛처럼 춥고 배고픈 세상을 어둡게 하지 않았다. 나는 작가에게 답할 것이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선량한 관심으로 삶의 부드러움이 확장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말이다.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드러움은 다른 존재를 향한 깊은 감정적 관심이다. 부드러움은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유대감을 인식하게 하며 또 우리에게 존재하는 유사성과 동일성을 인식하게 한다.”


이 소설은 사랑을 뒤돌아보게 한다. 부드러운 사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전벽해(桑田碧海). 풀이하면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고사성어이다. 보통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어떻게든 변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문화적 충격을 보면서 사람은 어떻게 될까? 라는 것이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변화의 속도를 거창하게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은 어떤 한 시대를 지배하는 우리의 인식이나 사고를 뜻한다. 패러다임에 따라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변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목숨을 바친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내일을 상상하며 메시아적 희망을 꿈꾸기 때문이다.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60세 김이섭이 자서전을 쓰는 내용이다. 자서전에는 해방 30주년 전후의 혼란스러운 현대사가 격동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하여 한국전쟁, 박정희 독재 정권 등의 사건들이 배경으로 잡혀 있다.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역사적 사건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라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의 자서전 역사적 사건을 고발하는 울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신 역사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격동의 물결에서 김일성은 싫지만 사회주의자가 지금도 옳다고 믿는 지식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수배자가 되었고 평생을 빨갱이라는 주홍글자를 달며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살 수 없었다. 권력자들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이념과 사상으로 민족을 와해시키고 분단의 상처를 치료하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반공(反共), 사회안전법이라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강요했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은 원고지 스물 두 장에서 미완성으로 멈추고 말았다. 이때가 그의 딸 지형의 나이 15세이었다. 그로부터 40년 지나도록 그녀의 묵직한 슬픔은 흉터로 남았다. 이러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녀는 그를 애도하였고, 퍼즐 조각마냥 흩어진 그의 삶을 하나하나 완성하였다. 그의 자서전의 제목대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유령의 시간이었다. 이중삼중으로 고립된 삶, 이 땅 어디에서도 그는 존재하지 못했으니까.


작가는 무엇 때문에 지금에 와서 김이섭의 비극적인 삶을 복원하는 것일까? 단순히 국가와 사회의 역사가 어떻게 개인의 역사를 망가뜨렸는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서둘러 달려온 한국 현대사가 흘린 남겨진 진실에 눈을 뜨면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진실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한 대가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가혹했다. 소설을 읽어보면 그의 불행한 가족사에 대한 책임이 오로지 그 자신에게 있는 듯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얼마나 다행이지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가족은 물론 친족까지 위험에 빠뜨렸다. 그들은 신원조회라는 바늘구멍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원망 때문에 가혹한 운명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이중적인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국가는 그가 그토록 믿었던 사회주의를 개인의 문제로 외면해버렸다. 그러면 국가는 책임져야 할 부분에서 은근쓸쩍 물러나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장인이 말한 것처럼 어떤 사상도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다. 절대적 믿음은 적대적 관계로 파생된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게 더 인간적인 제도냐의 문제인지 모른다.


정말로 인간적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나는 인간적이라는 것을 조금 오래 생각해 보았다. 그가 공평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믿었던 이념도 인간적이었고, 이념 때문에 월북했지만 이쪽에서 내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더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때문에 다시 가족이 있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인간적이었다. 그의 삶을 바라보고 있으면 참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얼굴에는 삶에 대한 비극과 찬가가 혼재되어 있었다. 결국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욕망이 철저히 통제된 세계와 욕망이 지나치게 과잉된 세계의 경계선에서 희망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유령의 시간은 역사적 소용돌이를 겪은 사람들의 상처를 주목하고 있다. 그들의 상처는 한 번 지나고 나면 사그라지는 별거 아니라는 냉소적인 말과 달랐다. 오히려 아주 오래도록 가슴속에 새겨져 있어 완전히 상처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망상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최선은 아니었다. 유령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존재와 같았다. 이러한 유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기꺼이 과거를 소환하고 대화하였다. 작가에게 과거는 고통인 동시에 부적(符籍) 같았다.


소설 속에서 그는 유령 같았던 삶을 회고하면서 딸에게 뭐든지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돼. 공부를 해도 마음을 다 바쳐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의무감만 남고 사는 게 재미없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를 몽상가’, ‘이상주의자라고 부르며 실패한 삶을 증명하였다. 마치 물 밖에 나온 새우의 모습처럼 투항의 자세처럼 보였다. 만약 그가 의무감으로 자신의 신념대로 살았다면 영원히 비극 속에서 외롭게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후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그는 세상을 절망했으나 삶을 살았다, 실패한 인간이 아니라 뜨거운 인간으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10-31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31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의 봄을 여름과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가?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봄에는 어떤 감동이 피어날까요? 봄이 오고 있음을 나무는 먼저 알고 있습니다.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부풀어 올라 머지않아 꽃망울이 터질 것이고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우리가 봄에 느끼는 감동은 꽃의 향연입니다. 더구나 삶이 엉망진창일 때 꽃을 바라보는 것은 축복에 가깝습니다. 나무가 식물이라는 수동적인 자세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것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무 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배리 로페즈의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놀라운 에세이였습니다. 그의 탐구적인 시도는 우리 시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우리 시대 최고의 자연 작가라는 거대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55년간 80여 개 나라에 이릅니다. 그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간, 비인간들을 만났습니다. 비인간의 경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이 비인간이라는 발견, 이 모든 것이 삶이었습니다. 인간이나 비인간 모두 도구가 아니라 생명으로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과 닮지도 않고 비슷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비인간으로부터 지혜를 얻었습니다. 마치 하늘 위 구름 한 조각, 티끌 한 점 없이 청결한 공기, 덤불숲 회색곰 등등.


그중에서도 독특하게 장소에 대한 예찬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장소는 단순히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장소는 우리의 실존적 고독감을 해방시켜주는 곳입니다. 그가 오스트레일리아 노던 준주의 타나미 사막,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의 나미브 사막, 캐나다 북극권의 엘즈미어섬 등등 세계 끝까지 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과 장소에 대한 관계의 속성을 알려짐으로 교감하면서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느냐? 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작가라는 사회적 책임에 헌신하며 자연을 위해 선도적인 대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줄곧 자연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명을 개발하고자 하는 탐욕 때문에 자연을 스스럼없이 파괴해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당연한 권리고 자연의 당연한 희생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절박해졌습니다. 도저히 견디기만 해서는 절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상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악몽 같은 현실을 맞닥뜨린 지 오래입니다.


우리 시대의 미래는 좋은 삶의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환경으로 부터의 위협이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경각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자연의 신비로움을 되찾기 위해서는 실존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불신하는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저자의 생각은 공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화해왔습니다. 우리에게도 긍정적인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연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유인즉 너 자신이 아닌 세계에 인내심 있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184p)은 따뜻하고 평화로운 연민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연민은 자신에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의 지난 시절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의 고통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복수하고픈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 감당해야 할 또 다른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나머지 적당한 침묵으로 아픔을 버텨냈습니다. 침묵은 복수의 칼날이 자신을 겨누는 반복되는 슬픔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슬픔의 피해자라는 것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슬픔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화목하고자 했습니다. 좋든 싫든 슬픔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슬픔을 이해하면서 가해자의 악몽에 공감하는 큰 포용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조차 긍정하게 만드는 자기 존중이라는 빛을 어디에서 찾았는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무한히 용서하고 무안히 위로하는 빛이라는 중심축이 있었다.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어도비 벽돌집의 옅은 벽면과 출렁이는 수면까지,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 그 빛, 그리고 나를 하늘로, 나 자신의 바깥으로 끄집어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새들이 내 삶에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다.(32p)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천천히 읽으면서 생명에 대한 생각이 사뭇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연 앞에 경건했으며 죽음의 매커니즘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메타포를 깨달았습니다. 그의 기도(祈禱)하는 삶을 통해 너무 아름다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가 다 생명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사막이며 숲이며 강이며 북극이 다 생명이었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봄, 여름이 다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꿀벌이 사라지는 기후변화의 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꿀벌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꿀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요? 라는 나침반 같은 질문을 하다 보면 봄과 여름이라는 생명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심정으로 봄을 여름과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삶을 구원하는 배리 로페즈의 섬세하고 묵묵한 시선을 회고하면서 적어도 세상의 불공정한 경쟁에 끌려다니는 것을 반대하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꿀벌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꿀벌의 날개에는 아주 오래된 지혜가 살아있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자의 후반생 - 새로운 도약을 위한 인생 화두
정진홍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는 매년 6월 16일 블룸스데이(Blooms day)라는 축제가 열립니다. 블롬은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사람들이 제임스 조이스를 기념하고자 소설 속 주인공처럼 더블린 시내를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행적을 따라 하거나『율리시스』를 낭독합니다.


그런데『율리시스』가 어떤 책인가요? 영문학사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난해한 소설입니다. 오죽했으면 ‘싫은 사람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라는 악명 높은 소리까지 들었을까요?『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하루 동안 아일랜드 더블린을 무대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단 하루, 좀 더 시간을 확인해보면 6월 16일 오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2시 반까지 되는 19시간여 동안 일어난 소설입니다. 한편, 6월 16일은 제임스 조이스가 평생의 반려자인 노라를 만난 첫날을 기억하는 영원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제임스 조이스를 보면서 미스터리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단 하루,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이 곧『율리시스』입니다. 단 하루 만에 방대한 분량의 『율리시스』를 쓰는 일도 놀라운데 위대한 작품이라는 영광은 더욱 놀라운 사실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떠오릅니다.


이와는 다르게 정진홍의『남자의 후반생』은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율리시스』는 하루 만에 쓴 이야기이지만 하루 만에 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반면에『남자의 후반생』은 작가가 40대 시절에 걸쳐 쓴 이야기이지만 하루 만에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인생 화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 화두라는 주제는 감당하기가 어렵고 무겁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시공을 초월한 다양한 사례와 경험들은 쉽고 흥미롭습니다. 그럼에도 죽비소리가 가득 넘쳐납니다. 놀랍게도 죽비소리를 들을 때마다 ‘후반생(後半生)’을 생생하게 깨달았습니다.


무릇 삶을 전반생(前半生)과 후반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생은 정해진 운명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반생은 “더는 이따위로 살지 않겠다.”라고 각성하며 흔들립니다. 문제는 사람마다 인생의 후반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생이 축구 경기라고 한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반전과 후반전이 명확합니다.


이런 까닭에 인생의 딜레마는 후반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삶을 선택하는 결연한 의지라고 하더라도 선택에 따른 수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 후반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끝까지 갈 수 있을까요? 어느 것 하나 불확실한 상황에서 한 인간이 감당해야 할 후반생을 패배하지 않고 갈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우선적으로 ‘마음의 굳은살’을 떼어내야 합니다. 보통 굳은살이라고 하면 긍정적으로 여깁니다. 굳은살이 생기는 과정을 보면 반복적인 고통을 참아 내거나 노력을 한 결과물이라 그렇습니다. 이로 인해 굳은살은 마음의 창이 아니라 든든한 방패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굳은살의 선한 영향력은 안타깝게도 체념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굳은살이 박일수록 우리의 마음은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무감각해집니다.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고 쉽게 지치고 맙니다.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어왔던 삶의 가치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저자는 마음의 굳은살이 일으키는 부작용을 경계하며 인생의 후반생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련(鍛鍊)하라고 합니다. 단련이라는 한자를 풀이해보면 그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단(鍛)은 일천 번의 일을, 연(鍊)은 일만 번의 일을 말합니다. 마음을 단련해야 비로소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한 것처럼 녹슨 ‘쇠붙이’가 아니라 날선 ‘면도날’로 살아가게 됩니다.


바야흐로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너무나 절실한 세상입니다. 정진홍의『인생의 후반생』을 읽어보면 송곳 같은 질문이 많습니다. 하나같이 절문(切問)이기 때문입니다. 절문 즉, 절실한 질문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후반생의 절문은 정신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