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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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여행자를 5등급으로 나눠 이야기합니다. 그중에서 5등급의 여행자는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인생의 문제는 권태로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해결책 또한 권태로운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마치 백과사전을 보면서 맞춤형 지식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민이라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라는 굴레 때문에 어느 순간 이방인이 되어 제자리를 맴돌고 맙니다. 


하지만 에릭 와이너의『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새로운 여행입니다. 에릭 와이너는 5등급의 여행자의 시선으로 인생의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것을 유쾌하면서도 명쾌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지혜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철학은 그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철학자행 특급열차를 타고 14명의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14명의 철학자들을 만나는 순간은 인생의 단계에서 머무르는 간이역입니다. 만약에 간이역에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지나간다면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명제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으로 소크라테스와의 여행이 끝났다고 하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오래된 지혜를 오늘날 ‘미친 지혜’로 대화를 이어나갑니다. 미친 지혜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합니다.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질문왕’이 되었습니다. 질문왕이 되려면 질문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좋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순간 놀랍게도 침묵하게 됩니다. 침묵은 발화의 부재가 아닙니다. 저자의 발칙한 생각에 따르면 ‘인정사정없는 자기 심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간디처럼 싸워야 합니다. 간디의 이름을 떠올려보면 싸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간디는 어느 누구보다도 비폭력을 주장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은 폭력에 맞서 비폭력으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저자는 간디를 예찬하는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큰 싸움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싸우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티아그라하(진리의 힘)’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힘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능동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의명분을 위해서 자신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의명분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결코 죽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좋은 싸움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밖에도 루소처럼 걷고 소로처럼 보고 쇼펜하우어처럼 듣습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처럼 즐기고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으며,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며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다가 삶의 종착역에 이르러 몽테뉴처럼 죽는 법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한평생 잘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선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최악을 견디는 게 99%입니다. 이럴 때 에릭 와이너와 여행할 수 있는『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동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철학은 우리 삶의 꼭 필요한 GP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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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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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한 자루의 펜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말랄라, 유엔 연설 중에서


한강의『작별하지 않는다』는 한 권의 책입니다. 동시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한 자루의 펜입니다. 성근 눈발이 내리거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지는 소설을 읽으면서 작별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별은 삶의 연습이라는 것. 어느 누구도 작별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작별이 찾아오고, 그렇게 누군가는 떠나고, 떠나지 못한 사람에게 작별만큼 두렵고 쓸쓸함이 어디 있을까요? 그럼에도 작별의 고통을 끝내 작별하지 못합니다, 삶이니까요.


작별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마치 목공방에서 작업하다가 두 손가락이 절단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소설에서 그 주인공은 인선입니다. 제주 산속에서 홀로 지낸 그녀가 뜻밖의 사고로 병원에서 환자의 몸이 되자 그녀가 호출한 사람은 그녀의 친구이자 작가의 분신인 소설을 쓰는 경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경하는 광주 5.18을 다룬 소설을 쓰면서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악몽은 폭력을 직접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끔찍하여 살아나갈 이유를 상실한 나머지 매번 유서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인선의 전화가 없었다면 경하는 세상과 허무하게 작별했을 것입니다. 폭력의 괴물성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발가벗겨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절단된 손가락을 어떻게 봉합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절단된 손가락을 봉합하는 것으로 수술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수술보다 더 큼직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봉합된 부위를 3분마다 바늘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지 않으면 절단된 신경이 죽어 섞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삶은 고통 때문에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선에게 고통은 한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나가야 삶이 재생(再生)되었습니다. 반면에 경하는 삶을 한 순간 끝내는 것으로 고통을 재생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늘 생각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일상을 살아야 하는 경하의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경하의 자폐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선과의 접촉을 통해 3분마다 고통을 각인시킵니다. 그래야만 인생과 화해하며 다시 살 수 있으니까요.


인선의 마음 한 구석에는 커다란 과거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제주가 고향인 인선에게 커다란 과거는 바로 제주 4.3입니다. 이것은 국가가 제주 도민을 무참히 학살했던 폭력입니다. 개인이 아닌 국가의 폭력은 참혹할 수밖에 없으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최악의 상황들은 우리의 상상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는 부조리하게도 과거 속으로 쉽게 사라집니다. 


하지만 작가는 과거 속으로 침몰해가는 폭력을 끝까지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선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경하는 제주에 있는 인선의 집을 찾으러 갔다가 폭설로 인해 교통이 마비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가까스로 도착한 인선의 집에서 경하는 서늘한 충격을 받게 되는데 등신대 크기의 검은 통나무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습니다. 검은 통나무는 경하가 악몽속에서 보았던 ‘검은 나무’와 같은 이미지여서 망자들이 환생하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작가는 그중에 하나, 비극적인 제주 4.3이라는 역사적인 공간에서 살았던 인선의 엄마인 정심의 마음 속 응어리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주 4.3은 좁은 의미로 보면 죽음의 공간이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삶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정심은 실종된 가족을 찾는 노력을 반세기가 넘도록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책의 제목처럼 ‘작별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제주 4.3을 겪은 정심의 간절한 고백은 생각보다 가벼웠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고백을 듣고 있으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311쪽)를 깨달았습니다. 눈송이 같았던 슬픔, 기어이 지극한 사랑의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폭력적인 현실의 절망을 절망시키는 방법으로  비로소 유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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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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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게 세상을 뒤집자.

-페트라 켈리


페트라 켈리는 ‘녹색의 잔다르크’로 불린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여성, 환경, 인권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열정적으로 했다. 그녀는 참여와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그녀의 정곡을 찌르는 말은 얼마든지 부드럽게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삶을 되새겨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는 가장 개인적이며 정치적으로 각인되었다.


이길보라의『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보면서 ‘코다의 잔다르크’를 떠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은 낯설은 경험을 통해 코다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코다(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 의 약자로 농인 부모의 자녀를 말한다. 저자는 코다에게 주어진 역경과 고난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러면서 눈물대신 “나는 코다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비장애인 세상이다. 결과적으로 장애인은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장애인에 대한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 장애인들을 받아들이기에 현실의 벽은 너무 거칠고 높다. 원하는 학교에 가는 것도 그렇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도 그렇고,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는 게 힘든 것도 그렇다. 장애인에 대한 권리를 마치 혜택으로 주는 관행이 계속되는 한 이러한 모순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코다의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 책임에 비례해서 삶의 의미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고 한다. 저자는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가 한국과 일본에서 개봉했을 당시의 경험을 통해 실질적인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한다. 가령, 한국에서 장애인용 복지 카드는 등급에 따라 영화표의 비용을 감면하거나 할인해준다. 반면에 일본은 장애 수당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장애를 증명해야 하는 반면에 일본은 장애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부드럽게 바꾸기 위해서는 장애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장애극복이 아닌 ‘장애해방’이라는 것.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눈물겹다. 그러니 도와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장애 해방은 장애인을 나와 같은 동등한 권리로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몸속에 깊숙이 뿌리박힌 고정관념을 버리고 ‘나’가 ‘너’가 되는 일이다. 장애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타인이다. 이런 점진적인 변화 없이 제도적으로 장애인의 권리를 말하는 것은 공정하면서도 불평등하다.


만약에 당신의 몸이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부끄러워야 할까? 이런 질문에 저자는 청각장애인 어머니가 당신의 수화언어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것을 보여준다. 청각장애인들에게 듣는 언어는 무용지물이다. 이전까지 언어는 듣는 것이 전부라 여겼다. 하지만 청각장애인들의 수화언어를 보면서 언어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수화언어, 즉 시각 언어는 청각장애인들에게 당연한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때 장애인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 부끄러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돌직구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할 주제로 확대된다. 그래서 저자는 어머니를 이어 재차 삼차 장애해방을 거듭 말하는 것이다. 


코다 이외에도 저자의 이미지는 로드스쿨러(road schooler: 학교가 아닌 길거리에서 삶을 배우는 사람), 페미니즘, 영화감독, 작가 등등 다양하다. 다양한 이미지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우리 사회의 왜곡되고 은폐된 속살을 거침없이 파고든다. 그녀의 생각은 무모하고 과감한 경험에서 기억되고 발견된 것이고, 굴곡 많았던 자신의 삶에 절망하지 않고 거대한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열린 질문’을 듣고 있으면 답답했던 가슴이 펑 뚫린 느낌이다.


그녀가 세상에 던지는 열린 질문은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닫힌 질문은 말 그대로 폐쇄적이다. 가령, 여성영화감독이라는 차별을 받으면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예’, ‘아니오’라는 이분법적 답변에서 끝나고 만다. 하지만 열린 질문은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즐겁게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가 감독의 상상력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쯤 되면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없는 세상이다. 


새로운 물결은 주류의 입장에서 보면 자꾸만 발목을 잡아 위험하다. 하지만 비주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만약 당신이 비주류 즉,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서 그녀의 생각에 등을 돌린다면 우선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봐야 한다. 비주류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악순환이기 때문이다. 비주류는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을 일시적으로 대면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계속해서 차별 없는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동참하게 된다.


그래서 일까? 그녀의 정치적인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에 공감하게 된다. 국민들이 당리당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 정치를 보면서 실망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녀가 정치적인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비평하고 있는 것은 세상을 각자 방식대로 ‘볼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볼 권리에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사회적인 ‘소수자’가 되며 차별을 당하더라도 침묵하고 말 것이다.


그녀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침묵하지 않고 행동했다. 남들이 볼 때 그녀의 행동은 무모하고 때로는 ‘개고생’이라는 쓴 소리를 들을 정도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어떤 일이든지 과정을 생략하면 문제를 정의할 수 없다. 경험은 그녀를 단단하게 보호하고 행동하게 했다. 직설적인 여러 갈래의 목소리를 하나하나를 들을수록 그녀의 정체성이 뚜렷해졌다. 그녀는 ‘아티비스트(Artivist)’로 시각화되었다. 그녀는 예술가이며 활동가였다. 


우리는 활동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이유는 간단한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배움은 얼마나 부드러운 활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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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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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해답이 아니라 주제다.

그것은 소란의 실마리가 되리라.

·- 티머시 스나이더,『피에 젖은 땅』중에서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하면 불편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체 살아있는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사람들. 그들의 핏빛 없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분노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죽음을 비참하게 만들었을까요?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정체불명의 죽음을 굳이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가장 알려진 ‘악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죽음을 나체화(裸體化)했습니다.


그런데 티머시 스나이더의『피에 젖은 땅』을 읽으면서 홀로코스트를 좀 더 논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처참한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홀로코스트는 죽음의 해답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동안 홀로코스트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사는 것만으로도 삶의 무게를 버텨내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이런 침묵의 상태에서『피에 젖은 땅』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폭로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을수록 거의 탈진의 감각에 빠지고 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무적으로 폭로를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20세기 가슴 아픈 대량살인의 현장으로 기억되는 ‘블러드랜드(bloodlands)’는 지형학적으로 유럽 대륙의 중앙부입니다.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에 이릅니다. 정치적으로 스탈린주의와 국가사회주의(1933~1938), 독소의 합동 폴란드 침공(1939~941), 독소전쟁(1941~1945)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의 최악의 살육전이 펼쳐진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1933부터 1945년까지 1400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학살되었습니다.


도대체 12년 동안 블러드랜드에서 왜 그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요? 미국 예일대 홀로코스트의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는『피에 젖은 땅』에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1400만 명의 죽음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습니다. 학살의 숫자가 1400만 명으로 늘어날수록 인간성 말살의 무게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읽는 내내 학살의 숫자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든 정체는 바로 “서로 다른 두 철학”(248p)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철학을 이끈 악명 높은 독재자는 소련의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였습니다. 


스탈린의 공산주의(계급)과 히틀러의 나치주의(인종)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유토피아였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해내야 했는데 농업이 핵심적인 무제였습니다. 농업 문제를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스탈린은 농업을 집단화했으며 많은 농민들이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습니다. 반면에 농업 문제를 외부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히틀러는 제국의 곡창지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동유럽의 곡창지대로 불리며 젖과 꿀이 흐르던 우크라이나는 스탈린과 히틀러 때문에 ‘피에 젖은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식량 문제 때문에 피에 젖은 땅이 되었다면 폴란드는 전혀 상황이 달랐습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폴란드에게 방아쇠를 당겨 피에 젖은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그 출발점은 블러드랜드에서 일어난 비극과 관련이 있습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블러드랜드의 공범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의 체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를 박멸하려는 ‘극좌’였다면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배격한 ‘극우’였습니다. 더구나 공산주의를 유대인의 음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펼치게 되었으며 소련을 제국의 식민지로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피에 젖은 땅』으로 찬찬히 들어가면 그들의 동맹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프랑수아 퓌레가 말한 ‘적대적 공모(belligerent complicity)’입니다. 그들의 동맹이 필연적이며 정상적이었던 것은 공통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전체주의는 국가의 권력으로 개인을 통제하려는 국가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개인이나 민족은 곧 국가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전체주의 최고의 독재자인 스탈린과 히틀러는 국가의 적을 인간이하 이거나 노예로 생각한 나머지 예외 없는 죽음으로 학살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숨겨진 역사인 블러드랜드에서 살육이 일상화되었던 것을 보면서 절반의 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절반의 진실은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라는 것은 목적의 정당성이 수단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희생자의 규모가 클수록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그들의 유토피아가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절반의 진실은 한나 아렌트가『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입니다. 아이히만처럼 멀쩡한 정신을 가진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절반의 진실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도덕적 덫”(704p)에 걸리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저자는 공포정치의 주역인 스탈린과 히틀러를 “고결한 이상주의자”이며 “이상에 심취한 범죄자”라고 하면서 “악마의 다른 이름”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악마의 정체를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로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705p)


우리는 스탈린과 히틀러를 살인마로 알고 있습니다. 같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끔찍한 살인기계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비인간이며 인간 이하라는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도 분명 양심이라는 게 있었는데 문제는 양심의 방향이 크게 어긋나면서 인간 이하가 되었고 그렇게 살인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심신미약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인간 이하의 여부를 다른 맥락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인간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최선의 이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블러드랜드의 주제는 선과 악의 양심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생긴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은 무의미한 핏빛에 불과한 것일까요? 블러드랜드의 모습은 참혹한 학살이 반복되고 있으며 무려 1400 만 명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림자의 정체는 유령에 가까우며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숫자에 가려진 개인의 죽음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피에 젖은 땅이라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살아남으려는 생존의지도 있으며 오히려 죽음으로써 강요된 폭력을 거부하거나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묵직한 슬픔이 흐릅니다. 어느 순간 슬픔 때문에 숨이 막힙니다.


일찍이 수잔 손택은『타인의 고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대담한 정신을 통해 블러드랜드에 대한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읽는 내내 소름이 돋으며 무겁게 진실을 따라가는 동안 비윤리적인 악마 때문에 비윤리적인 죽음이 일어났다는 불편한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일어났다, 라는 목소리의 무게감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불편한 역사를 외면하면 어떻게 될까요? 기어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피에 젖은 땅이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의 가슴은 바보가 될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무거움도 아닌, 죄책감이나 괴로움도 모르는, 바보는 기계처럼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바보에 가려지는 진실. 그러니 진실에 다가서려는 사람이라면 바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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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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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는 기묘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면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상의 파편적인 이야기들은 울분을 자극한다. 사랑, 광기, 죽음이 서로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감정은 몹시 서글프다. 이미 지나간 순수한 추억들, 그래서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시절에 대한 북받치는 눈물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백일몽처럼 이어졌다. 작가는 백일몽에다 죽음과 공포의 분자들을 흩어지게 하며 삶의 비밀을 혼란스럽게 한다. 한편으로 비극적 결말은 진실을 위태롭게 한다

 

사랑의 계절의 남자에게 사랑은 제목 그대로다. 첫사랑에 대한 불안한 내면이 사계의 선율을 타고 흐른다. 오로지 그녀만을 사랑하고픈 마음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사랑은 핏줄이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었으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랑은 사회적 통념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과 동시에 환상이 깨졌을 때 생겨나는 동정에서 눈물이 아니라 삶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사랑에 대한 변명이 아닌 마지막 사랑의 불꽃을 터뜨릴 만한 열정이 티끌만큼도 남아있지 않을 때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결코 단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은 허무함이 전부가 아니다. 저 멀리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는 눈물샘이 미칠 듯이 쏟아졌다. 뇌막염에 걸려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그들의 관계는 모호하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닌 불분명한 작은 기억밖에 없다. 문제는 작은 기억이더라도 뇌막염에 걸리면 큰 기억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되고 만다. 어쩌면 뇌막염에 걸린 여자의 병은 사랑의 온도가 41도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맴돌았다. 남들은 사랑 때문에 가슴이 타들어간다고 하는데 여자는 놀랍게도 뇌가 타들어갔다. 뇌막염 때문에 사랑이 변했다. 남자는 사랑을 고백하고 여자는 사랑을 묻는다. “더 이상 착란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도지금처럼 절 사랑하실 건가요?”

 

한편 사랑의 마지막 반전은 사랑의 가능성에 있다. 가능성을 자꾸만 돌아본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사랑의 균형이 깨지고 어느 순간 광기에 휩싸인 무서운 존재가 된다. 엘 솔리타리오에 나오는 보석세공사 카심에게 보석은 사치스러운 몸을 장식하는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보석에 투사된 아내의 욕망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욕망을 죽여 가며 사랑을 쓸쓸하게 마무리 한다. 목 잘린 닭에서 백치로 태어난 네 명의 아이들은 애정이 식어버린 부모에 대한 반발력으로 그들의 여동생을 마치 닭의 목을 잘라 죽이는 듯 하면서 잔인한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깃털 베게에서는 신혼의 꿈이 사라진 여자는 상실감이 증폭되면서 끝내는 괴물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 괴물은 정체가 불문명한 흡혈귀이다. 여자가 사랑을 소화하지 못할수록 인생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작가의 열여덟 편의 단편 소설집에는 사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이 복잡한 사슬로 이어져 있다. 죽음은 때때로 일사병, 가시철초망, 야구아이에서 보듯 동물의 몸을 통해서 전달된다. 이런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는 사뭇 다르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적인 죽음이라고 할까? 죽음의 애잔함이 없지 않으나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의 죽음은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에서 보듯 허풍에 가깝거나 내 손으로 만드는 지옥에서 보듯 뼛속까지 마약에 중독된다. 이러한 죽음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으면 약간은 불쾌하면서도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은 두렵게 느낀다. 비록 죽음 그 너머의 이야기에 대해 알 수 없어도 말이다.

 

돌이켜보면 사랑, 광기, 죽음의 경계선은 없다. 모두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존심이 걸린 문제"(245쪽)여서 그런지 모른다. 사랑이든 광기든 죽음이든 자존심 때문에 아프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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