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은 해답이 아니라 주제다.

그것은 소란의 실마리가 되리라.

·- 티머시 스나이더,『피에 젖은 땅』중에서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하면 불편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체 살아있는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사람들. 그들의 핏빛 없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분노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죽음을 비참하게 만들었을까요?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정체불명의 죽음을 굳이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가장 알려진 ‘악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죽음을 나체화(裸體化)했습니다.


그런데 티머시 스나이더의『피에 젖은 땅』을 읽으면서 홀로코스트를 좀 더 논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처참한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홀로코스트는 죽음의 해답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동안 홀로코스트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사는 것만으로도 삶의 무게를 버텨내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이런 침묵의 상태에서『피에 젖은 땅』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폭로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을수록 거의 탈진의 감각에 빠지고 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무적으로 폭로를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20세기 가슴 아픈 대량살인의 현장으로 기억되는 ‘블러드랜드(bloodlands)’는 지형학적으로 유럽 대륙의 중앙부입니다.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에 이릅니다. 정치적으로 스탈린주의와 국가사회주의(1933~1938), 독소의 합동 폴란드 침공(1939~941), 독소전쟁(1941~1945)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의 최악의 살육전이 펼쳐진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1933부터 1945년까지 1400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학살되었습니다.


도대체 12년 동안 블러드랜드에서 왜 그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요? 미국 예일대 홀로코스트의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는『피에 젖은 땅』에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1400만 명의 죽음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습니다. 학살의 숫자가 1400만 명으로 늘어날수록 인간성 말살의 무게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읽는 내내 학살의 숫자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든 정체는 바로 “서로 다른 두 철학”(248p)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철학을 이끈 악명 높은 독재자는 소련의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였습니다. 


스탈린의 공산주의(계급)과 히틀러의 나치주의(인종)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유토피아였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해내야 했는데 농업이 핵심적인 무제였습니다. 농업 문제를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스탈린은 농업을 집단화했으며 많은 농민들이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습니다. 반면에 농업 문제를 외부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히틀러는 제국의 곡창지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동유럽의 곡창지대로 불리며 젖과 꿀이 흐르던 우크라이나는 스탈린과 히틀러 때문에 ‘피에 젖은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식량 문제 때문에 피에 젖은 땅이 되었다면 폴란드는 전혀 상황이 달랐습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폴란드에게 방아쇠를 당겨 피에 젖은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그 출발점은 블러드랜드에서 일어난 비극과 관련이 있습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블러드랜드의 공범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의 체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를 박멸하려는 ‘극좌’였다면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배격한 ‘극우’였습니다. 더구나 공산주의를 유대인의 음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펼치게 되었으며 소련을 제국의 식민지로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피에 젖은 땅』으로 찬찬히 들어가면 그들의 동맹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프랑수아 퓌레가 말한 ‘적대적 공모(belligerent complicity)’입니다. 그들의 동맹이 필연적이며 정상적이었던 것은 공통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전체주의는 국가의 권력으로 개인을 통제하려는 국가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개인이나 민족은 곧 국가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전체주의 최고의 독재자인 스탈린과 히틀러는 국가의 적을 인간이하 이거나 노예로 생각한 나머지 예외 없는 죽음으로 학살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숨겨진 역사인 블러드랜드에서 살육이 일상화되었던 것을 보면서 절반의 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절반의 진실은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라는 것은 목적의 정당성이 수단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희생자의 규모가 클수록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그들의 유토피아가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절반의 진실은 한나 아렌트가『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입니다. 아이히만처럼 멀쩡한 정신을 가진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절반의 진실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도덕적 덫”(704p)에 걸리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저자는 공포정치의 주역인 스탈린과 히틀러를 “고결한 이상주의자”이며 “이상에 심취한 범죄자”라고 하면서 “악마의 다른 이름”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악마의 정체를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로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705p)


우리는 스탈린과 히틀러를 살인마로 알고 있습니다. 같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끔찍한 살인기계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비인간이며 인간 이하라는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도 분명 양심이라는 게 있었는데 문제는 양심의 방향이 크게 어긋나면서 인간 이하가 되었고 그렇게 살인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심신미약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인간 이하의 여부를 다른 맥락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인간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최선의 이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블러드랜드의 주제는 선과 악의 양심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생긴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은 무의미한 핏빛에 불과한 것일까요? 블러드랜드의 모습은 참혹한 학살이 반복되고 있으며 무려 1400 만 명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림자의 정체는 유령에 가까우며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숫자에 가려진 개인의 죽음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피에 젖은 땅이라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살아남으려는 생존의지도 있으며 오히려 죽음으로써 강요된 폭력을 거부하거나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묵직한 슬픔이 흐릅니다. 어느 순간 슬픔 때문에 숨이 막힙니다.


일찍이 수잔 손택은『타인의 고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대담한 정신을 통해 블러드랜드에 대한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읽는 내내 소름이 돋으며 무겁게 진실을 따라가는 동안 비윤리적인 악마 때문에 비윤리적인 죽음이 일어났다는 불편한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일어났다, 라는 목소리의 무게감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불편한 역사를 외면하면 어떻게 될까요? 기어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피에 젖은 땅이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의 가슴은 바보가 될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무거움도 아닌, 죄책감이나 괴로움도 모르는, 바보는 기계처럼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바보에 가려지는 진실. 그러니 진실에 다가서려는 사람이라면 바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사에 대한 생각 - 세계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우리의 식탁은 왜 갈수록 가난해지는가
비 윌슨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낵화된 일상을 경고한다. 그래서 현명하고 건강한 식사에 대한 13가지 생각은 영양가 높은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그 비결은 휴머니즘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사에 대한 생각 - 세계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우리의 식탁은 왜 갈수록 가난해지는가
비 윌슨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 윌슨이 예측한 진실이 도래하였다. 스낵화된 일상을 경고한다. 그래서 현명하고 건강한 식사에 대한 13가지 생각은 영양가 높은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궁극적으로 좋은 음식이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 그 비결은 휴머니즘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덕일의 고금통의 1 - 오늘을 위한 성찰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머피의 법칙(Murphy’ law)이 있다. 1949년 항공 엔지니어 에드워드 머피가 충격완화장치 실험이 실패로 끝나자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항상 잘못된다”고 말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는 머피의 법칙을 생각할 때마다 재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잘못될 가능성이 항상 잘못 일어날 확률은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는 나쁜 상황에서는 일어날 확률이 1퍼센트라고 하더라도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는 것을 머피의 법칙에 따라 재수가 없다고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덕일의 『고금통의』를 읽었다.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춘 역사학자(오마이뉴스)’, ‘역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해럴드경제)’는 추천사에 걸맞았다. 저자는 1000여개의 광범위한 역사적인 순간을 다시 읽으면서 불멸의 지혜를 생각한다. 또한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책임감 있게 사회비평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읽다보면 제목이 말해주듯 ‘고금통의’를 하게 된다. 고금통의(古今通義)는 『사기(史記)』「삼왕세가(三王世家)」에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관통하는 의(義)는 같다’는 의미다.

 

온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눈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분노했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서로 간의 이권(利權)으로 설전(舌戰)을 펼치고 있다. 이익(利益)에 눈 먼 사람들에게서 도덕심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할 짓이 못될 정도로 부끄러울 지경이다. 소통을 해야 하는 관계에서 도덕심을 배제하고 그 빈자리를 이익으로 채우고 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경계하기는 마찬가지다.

 

이(利)가 편법이라고 한다면 의(義)는 원칙을 뜻한다. 『고금통의』를 통해 견리사의(見利思義)를 궁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먼저 편견이 확고한 역사 인식에 대한 근거를 밝힌다. 즉, ‘석기 시대 문명은 국가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한다. 석기 시대는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고정 관념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남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잉카 제국, 마야 제국 등을 보면 우리의 역사 인식은 방향감각을 잃고 만다. 잉카 제국, 마야 제국 등은 석기 시대에 대제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세계사의 상식이 우리나라에서만 통하지 않고 있다. 누가 봐도 거대한 역사적 오산이지만 ‘청동기 시대=국가 성립’이 역사적인 공식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일제 식민 사학의 고정된 틀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관피아에 대한 충고도 빼놓을 수 없다. 관피아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사회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와 마피아가 결합한 관피아는 청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기의『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와 있듯 ‘낮도적(晝賊)’이라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관피아는 우리 사회에서 업종을 불문하고 다양한 형태로 검버섯처럼 퍼져있다. 정약용은『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지금 도둑질로 재물을 얻는 데 무릇 도둑질로 얻은 만금(萬金)은 정당하게 얻은 일글(一金)을 당할 수 없다’고 했다. 관피아를 볼 때마다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리고 공직자 후보들의 인사청문회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사람’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라는 걱정이 앞선다. 일찍이 공자도 ‘그 사람이 있을 때 정치가 일어서고 그 사람이 없으면 정치가 주저않게 된다’고 말했다. 최한기도『인정(人政)』에서 ‘만 마디 말로써 백성에게 선(善)을 권하는 것은 한 사람의 현인(賢人)을 천거해 선을 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공직자 후보들은 하나같이 ‘신상털기식’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하고 말았다. 자격 검증에서 신상털기도 통과하지도 못한다고 딴죽을 걸겠지만 인품과 실력을 갖춘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그래야 민심(民心)을 얻을 수 있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역사를 앞선 수레바퀴라는 뜻으로 전철(前轍)이라고 했다. 때로는 수레바퀴가 엎어진다고 해서 복거(覆車)라고 했으며 이를 경계하는 의미로 ‘복거지계(覆車之戒)’라고 했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언젠가는 금(今)의 사(事)를 고(古)에 비춰서 의(義)를 찾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을 산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만든 역사적 구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는 머피의 법칙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역사와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 한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재수가 있고 없고는 아니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기고 싶은 명문장 - 흔들리는 나를 세우는 고전의 단단한 가르침
박수밀.송원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시험 삼아 내 입으로 읽으니, 이를 듣는 것은 나의 귀였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이를 감상하는 것은 내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거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랴!

이덕무,『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옛 지식인 이덕무 선생을 만난 것은 뜻밖의 기쁨이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사뭇 만족했지만 정작 마땅한 필명 하나 못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간서치(看書痴) 이덕무 선생을 만난 것이다. 책만 보는 바보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스스로를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죽 했으면 내가 나를 벗으로 삼을 정도였을까? 깨달음의 깊이에 대한 놀랐던 순간부터 오우아거사는 가슴에 새기고 싶은 명문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필명을 쓰며 나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했는데 ‘오우아’라는 필명과는 정말이지 벗으로 지낼 만큼 궁합이 잘 맞았다. 가끔씩 서평 때문에 상을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오우아라는 필명을 보고는 옆 사람들이 “오~우아!”라고 하면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기막힌 오우아의 반전이라고 해도 좋을 듯 했다.

 

돌이켜 보면 오우아의 반전은 박수밀, 송원찬이 지은『새기고 싶은 명문장』이 우리의 마음을 맑고 아름답게 때로는 단단하게 설파한 덕분이다. 저자들은 고전을 탐독하면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어떤 문장이 가슴에 확 꽂혀다, 고 했다. 명문장은 말 그대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일침(一針)이며 죽비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찾지 않으면 여전히 고전이라는 낡은 틀 속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다. 또 하나 고전의 걸림돌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읽어도 글 속에 숨은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막막함이다. 저자들은 이런 기대와 우려를 말끔히 씻어 내리며 고전의 명문장을 가려내어 사람들이 읽기에 딱 좋게 새겨 주고 있다.

 

『새기고 싶은 명문장』은 웅숭깊은 고전의 울림을 수신(修身), 결단(決斷), 태도(態度), 의지(意志), 언행(言行), 관계(關係)로 나눠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고전이라고 해서 고전 속 진리만으로 남는 게 아니라 우리들 삶으로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첫째, 수신에서는 무자기(毋自欺)의 정신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라는 세 글자는 내가 평생 동안 힘써온 바이다.

김장생,『사계유고(沙溪遺稿)』, 「시상(諡狀)」

 

수신은 모든 덕목의 시작이며 자기(自己)는 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는 자기를 아는 것(自知) 못지않게 무자기(毋自欺) 즉,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무자기는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좌우명으로 가장 즐겨 삼은 까닭은 어렵지 않다. 혼탁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 무자기만큼 고언이행(苦言利行)은 없을 것이다. 온갖 감언이설로 우리의 양심이 불편할 때 무자기는 순수한 마음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결단에서는 독서의 올바른 방법이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논어(論語)』「위정(爲政)」

 

요즘은 책을 권하는 사회다. 열심히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책만 읽고 그것으로 끝나면 우리는 백면서생을 벗어날 수 없다. 반대로 생각만 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독단자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책은 공부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백과사전이며 동시에 마음의 거울이다. 우리가 백과사전에서는 단답형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마음의 거울에서는 주관형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거울을 맑고 깨끗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사색하면서 독서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태도에서는 벽(癖)이다.

 

벽이 없는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이라는 글자는 ‘질병’과 ‘편벽됨’에서 나온 것이니, 병 가운데 지나치게 치우친 것이다. 그러나 홀로 자기만의 세계를 개척하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종종 벽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가 있다.

박제가, 「백화보서(白花譜序)」

 

누구나 완벽(完璧)해지려고 한다. 그러려면 속된 말로 미쳐야 미친다. 혹,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벽(絶壁)이다. 완벽과 절벽은 벽(癖)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벽을 가진 사람은 비정상적이며 기인(奇人)이라는 부정적인 탓에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은 벽이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기인(棄人)이지 않을까?

 

넷째, 의지에서는 지혜의 수고스러움이다.

 

사람이 후덕한 지혜와 능통한 지식이 있는 것은 항상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맹자(孟子)』「진심상(盡心上)」

 

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너무 적으면 몰라서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는 것이 너무 많으면 잡념과 망상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아는 것이 병’이라는 숨은 의미는 지혜 그 자체가 병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혜를 얻는 일이 병을 앓는 것처럼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만약에 약(藥)으로 처방된 지혜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병(病)일 것이다. 그러나 고(苦)에서 얻어진 지혜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약(藥)이 될 것이다.

 

다섯째, 언행에서는 멈춤이다.

 

대저 이른바 지지(止止)라는 것은, 능히 멈춰야 할 곳을 알아 멈추는 것을 말한다. 멈춰야 할 곳이 아닌데도 멈추면, 그 멈춤은 멈출 곳에 멈춘 것이 아니다.

이규보, 「지지헌기(止止軒記)」

 

주마간산(走馬看山), 앞만 보는 인생은 달리는 말과 같아 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무한 경쟁 때문에 남보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 그러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경주가 아니라 멈춤이라 하겠다. 삶을 직선으로만 달리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지만 삶의 곡선은 쉬어 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멈출 곳이 아닌데도 멈추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욕망보다는 미련에 가까워 부끄럽다.

 

여섯째, 관계에서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세상에 백락이 있은 후에야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과 같은 사람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한유,「마설(馬說)」

 

모든 일에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령, 말을 잘 보는 백락(佰樂)과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천리마(天裏馬)가 있다고 하면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일까? 앞서 말한 대로 ‘백락이 있은 후에야 천리마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천리마가 있다고 한들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이 없다고 한다면 천리마는 여느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백락의 안목과 백락을 알아보는 안목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떨까? 굳이 우리가 어려운 선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법구경(法句經)』 중에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있다.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최상의 진리를 모른다면 그 같은 진리를 알고 사는 그 하루가 훨씬 낫다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삶의 올바른 긍정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고전의 단단한 가르침은 백년을 살아온 지혜이다. 이것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도 충분하다. 그러나 배움에 있어 뛰어난 명문장은 뛰어난 명문가와 같다는 생각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길주는『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에서“저 사람이 배운 것은 모두 내가 읽은 것이고,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내가 아는 것이다. 어찌 저 사람만 우뚝 뛰어나고 나라고 하지 못할 법이 있겠는가?”라고 전혀 뜻밖의 생각을 펼치면서 ‘망연자실이란 자신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사람의 수준을 따라가려고 분발하는 마음’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삶이 힘들고 외로울 때 고전의 명문장을 벗 삼아 망연자실하는 것도 또 다른 오우아이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