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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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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게 세상을 뒤집자.

-페트라 켈리


페트라 켈리는 ‘녹색의 잔다르크’로 불린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여성, 환경, 인권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열정적으로 했다. 그녀는 참여와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그녀의 정곡을 찌르는 말은 얼마든지 부드럽게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삶을 되새겨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는 가장 개인적이며 정치적으로 각인되었다.


이길보라의『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보면서 ‘코다의 잔다르크’를 떠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은 낯설은 경험을 통해 코다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코다(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 의 약자로 농인 부모의 자녀를 말한다. 저자는 코다에게 주어진 역경과 고난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러면서 눈물대신 “나는 코다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비장애인 세상이다. 결과적으로 장애인은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장애인에 대한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 장애인들을 받아들이기에 현실의 벽은 너무 거칠고 높다. 원하는 학교에 가는 것도 그렇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도 그렇고,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는 게 힘든 것도 그렇다. 장애인에 대한 권리를 마치 혜택으로 주는 관행이 계속되는 한 이러한 모순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코다의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 책임에 비례해서 삶의 의미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고 한다. 저자는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가 한국과 일본에서 개봉했을 당시의 경험을 통해 실질적인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한다. 가령, 한국에서 장애인용 복지 카드는 등급에 따라 영화표의 비용을 감면하거나 할인해준다. 반면에 일본은 장애 수당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장애를 증명해야 하는 반면에 일본은 장애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부드럽게 바꾸기 위해서는 장애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장애극복이 아닌 ‘장애해방’이라는 것.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눈물겹다. 그러니 도와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장애 해방은 장애인을 나와 같은 동등한 권리로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몸속에 깊숙이 뿌리박힌 고정관념을 버리고 ‘나’가 ‘너’가 되는 일이다. 장애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타인이다. 이런 점진적인 변화 없이 제도적으로 장애인의 권리를 말하는 것은 공정하면서도 불평등하다.


만약에 당신의 몸이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부끄러워야 할까? 이런 질문에 저자는 청각장애인 어머니가 당신의 수화언어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것을 보여준다. 청각장애인들에게 듣는 언어는 무용지물이다. 이전까지 언어는 듣는 것이 전부라 여겼다. 하지만 청각장애인들의 수화언어를 보면서 언어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수화언어, 즉 시각 언어는 청각장애인들에게 당연한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때 장애인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 부끄러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돌직구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할 주제로 확대된다. 그래서 저자는 어머니를 이어 재차 삼차 장애해방을 거듭 말하는 것이다. 


코다 이외에도 저자의 이미지는 로드스쿨러(road schooler: 학교가 아닌 길거리에서 삶을 배우는 사람), 페미니즘, 영화감독, 작가 등등 다양하다. 다양한 이미지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우리 사회의 왜곡되고 은폐된 속살을 거침없이 파고든다. 그녀의 생각은 무모하고 과감한 경험에서 기억되고 발견된 것이고, 굴곡 많았던 자신의 삶에 절망하지 않고 거대한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열린 질문’을 듣고 있으면 답답했던 가슴이 펑 뚫린 느낌이다.


그녀가 세상에 던지는 열린 질문은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닫힌 질문은 말 그대로 폐쇄적이다. 가령, 여성영화감독이라는 차별을 받으면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예’, ‘아니오’라는 이분법적 답변에서 끝나고 만다. 하지만 열린 질문은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즐겁게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가 감독의 상상력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쯤 되면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없는 세상이다. 


새로운 물결은 주류의 입장에서 보면 자꾸만 발목을 잡아 위험하다. 하지만 비주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만약 당신이 비주류 즉,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서 그녀의 생각에 등을 돌린다면 우선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봐야 한다. 비주류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악순환이기 때문이다. 비주류는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을 일시적으로 대면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계속해서 차별 없는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동참하게 된다.


그래서 일까? 그녀의 정치적인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에 공감하게 된다. 국민들이 당리당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 정치를 보면서 실망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녀가 정치적인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비평하고 있는 것은 세상을 각자 방식대로 ‘볼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볼 권리에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사회적인 ‘소수자’가 되며 차별을 당하더라도 침묵하고 말 것이다.


그녀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침묵하지 않고 행동했다. 남들이 볼 때 그녀의 행동은 무모하고 때로는 ‘개고생’이라는 쓴 소리를 들을 정도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어떤 일이든지 과정을 생략하면 문제를 정의할 수 없다. 경험은 그녀를 단단하게 보호하고 행동하게 했다. 직설적인 여러 갈래의 목소리를 하나하나를 들을수록 그녀의 정체성이 뚜렷해졌다. 그녀는 ‘아티비스트(Artivist)’로 시각화되었다. 그녀는 예술가이며 활동가였다. 


우리는 활동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이유는 간단한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배움은 얼마나 부드러운 활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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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한 안내서
김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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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하지 말고 분노하라.

-누스바움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를 알리는 포스터에 나오는 말이다. 1960년대 우주선을 쏘아 올린 나사(NASA)의 숨은 인물을 그린 영화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숨은 인물들이 캐서린, 도로시, 메리라는 세 명의 흑인이라는 것. 이들이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나사, 아니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종, ()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일까? 이 영화에서 캐서린이 흑인 여성 전용 화장실을 가기 위해 다른 건물을 향해 비를 맞으며 800미터를 달려가는 장면이 애틋하게 남아있다

 

그런가 하면 방 안에 코끼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면 여러모로 불편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방 밖으로 내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쫒을 방법이 없을 때 뜻밖에도 가장 좋은 방법을 김지윤의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마치 코끼리는 존재하지 않은 듯 살아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이렇듯 방 안의 코끼리는 누구에게나 뚜렷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커다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모른 척 외면하는 상황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두 가지 계층으로 나뉜다.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류(主流)이며 반대로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은 비주류(非主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통해 정체성을 모색한다.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내 안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부자(富者)의 경우 그 사람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주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가 성소수자라고 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별과 혐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주류 사회에서 멀어지면서 비주류가 되고 만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에게 주류와 비주류라는 권리의 사각지대가 있다. 주류의 권리는 눈에 잘 보이는 반면에 비주류의 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설령 보인다고 해도 애써 외면하기 일쑤다. 하지만 주류의 권리는 어떤가? 오죽했으면 주류의 권리는 특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특권이라고 해서 뭔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너무나 평범한 나머지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방 안에 코끼리가 있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며 무시할 수 있다는 건 만큼 안전한 것은 없다. 제도적으로도 주류는 평등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평등은 차별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차별을 덜 인식하면서 한편으로는 비주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성의 권리가 현재진행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절반이라는 물리적인 숫자로 보면 여성은 당연히 소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성이라는 이름만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으며 사회적인 소수자가 되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과거보다 여성의 권리는 발전했다. 투표도 할 수 있고 능력만 되면 얼마든지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만큼 성평등의 지표도 높아지는 게 이상적인 사회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여성에게 불리하다. 사회적인 차별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만큼 참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

 

점차로 성차별이 사회 문제로 가시화되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성의 권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구체척인 감각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권리라고 하면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회적인 약자이며 비주류인 사람들에게 권리는 희망사항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힘들더라도 희망을 가져보라는 것이다. 듣기에는 사회적 약자들을 격려하는 메시지 같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희망에 문제를 제기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빼앗긴 권리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를 찾아 나서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불행을 당연시하는 것은 공정할까? 차별일까? 저자는 오에 겐자브로의 개인적인 체험에 나오는 중증 장애아를 책임져야 할 버드의 생각과는 달랐다. 이 소설에서 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분명히 이건 나 개인에게 한정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야.”

 

사회적인 약자의 문제는 어렵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사회적인 약자는 괴롭힘, 왕따, 성폭력 등 수많은 사건들에서 보듯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공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불편한 방향으로 사건의 진실을 왜곡한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사건의 원인을 따지고 묻는다. 사회적인 약자들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라는 의심을 먼저 하면서 말이다. 침묵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침묵은 또 다른 침묵을 만들어낸다. 그럴수록 차별이 당연시되는 불합리한 세상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 선량한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약자의 불행을 불행의 당사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인 약자를 다시 한 번 차별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사회적 약자들이 물리적으로 사회 안에 있다고 해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거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권이라는 영역에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들 같다. 인간으로서 권리를 잃어버려 투명인간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사회적인 약자의 권리가 더 이상 희생되지 않아야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들이 안전하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사회적 체험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생활이 가능하도록 사회적인 인식이 필요하며 사회는 공정한 세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차별금지법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차별을 없애자는 기본원칙을 제정했다고 해서 그 결과로 차별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간에 동등한 권리를 희생하지 않아야 우리가 바라는 차별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차별은 전염병이 강한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를 대응하기 위해 예전에 없던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 전염병의 결과로 보면 사람이 바이러스의 전파자 되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당연시함을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를 통해 의심해보는 것도 좋은 예방법이 될 것이다. 차별이 전염병이라면 권리는 면역력이기 때문이다. 면역력이 취약한 원인은 놔두고 전염병의 결과만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게 되면 사회적 고립이라는 불치병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늘 연결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동안 외면되었던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 이슈화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약자들의 무력해 보이는 현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사회적 연결 고리가 얼마가 느슨하며 허약한지 깨닫게 된다. 침묵은 차별이며 또 다른 침묵을 불러일으킨다. 침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정의로운 세상이다. 그리고 침묵에 맞서 사회적 연결이 강할수록 면역력이 좋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가 권리를 희생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으면 얼마든지 방 안에 어슬렁거리는 코끼리를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공정한 세상은 서로가 차별하지 말고 연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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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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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이다.

- 아도르노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화제의 명강의를 선보인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읽으면서 새삼 불행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보니 불행의 일상화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불행은 전염병 같았습니다. 전염병의 특성상 감염되기 쉽고 치명적입니다. 문제는 전염병에 대한 사전 관리가 소홀하다보니 사후 관리가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헬조선’, ‘탈조선을 외치며 이상한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할까요?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통해 세계인이 놀랄만한 경제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심정으로 한강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악몽으로 인해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굴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상한 나라에서 불행하게 살고 있을까요? 이상한 나라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날수록 이상한 나라가 정말로 지옥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첫 번째, 이상한 나라는 사람들은 가장 모순적으로 자기 착취를 당연시 합니다. 그럼에도 마치 자유인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는 착각에 빠져 소외또한 당연시 합니다. 소외는 흔히 왕따라는 정도로 일상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소외의 좀 더 명확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 ‘삶이 뒤집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필요로 해서 돈을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 돈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돈 없는 사람에 대한 차별 때문에 이백충’(한달에 200만원 이하의 소득으로 사는 벌레 같은 사람) 이란 말을 끔찍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상한 나라는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 공화국입니다. 이상한 나라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세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은 촛불처럼 타오르며 민주주의를 외치며 불의에 저항했습니다. 그리고는 정권 교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럴 정도로 이상한 나라는 광장 민주주의가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광장이 아니라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서 하는 모습들을 보면 지옥을 보는 듯합니다. 권위주의, 가부장주의, 꼰대 문화, 갑질 문화, 비정규직, 성차별, 성폭력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민주주의의 천국처럼 여긴 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상한 나라에서 일상 민주주의가 여전히 제자리걸음만 할뿐 성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상한 나라는 약한 자아의 사회입니다. 아도르노가 지적한대로 약한 자아는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입니다. 약한 자아는 자신감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약한 자아를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기는 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인즉 약한 자아는 사회의 고질적인 병()의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약한 자아의 바이러스는 놀랍게도 승자독식을 위한 교육이 슈퍼전파자라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백년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할 교육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되어 불행을 감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이 왜 이상한 나라가 되었는지 객관적인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지구적인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안팎을 두루 살펴봐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한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날수록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편 한다고 해서 외면만해서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좀 더 현명하게 한계를 의식하고 반성해야 대한민국이 이상한 나라라이며 볼품없는 나라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에서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을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독일을 모델로 하며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나라가 되는 것을 통찰하고 있습니다. 독일하면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떠올리는 과거 파쇼적인 전쟁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180도 달라져 복지국가로 대한민국과 전혀 다른 정상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나라, 실업 상태여도 취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이러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독일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독일을 대안으로 본 것은 당연합니다. 독일처럼 통일만 되면 경제발전과 함께 국민이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장미 빛 희망. 대한민국처럼 분단국가에서 최선의 선택은 통일을 통해 사회 변화를 도모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의 통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현상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을 하게 됩니다. 한 나라가 통일이 되었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의 자유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통일을 하는 것은 좋을 리 없습니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통일이 되어야만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을 관심 있게 연구하면서 ‘68혁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68혁명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사회변혁운동으로 기성세대의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습니다.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68세대들이 새로운 독일을 만들었습니다. 과거청산을 성공적으로 했으며 대학생에게 생활비를 주는 바퓍제도를 시행하면서 교양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노사 갈등이 아닌 노사공동결정체로 경제 민주화를 완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일 헌법1조는 인간 존엄은 불가침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높은 시민정신으로 사회적 정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확고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에서는 어떤 일어나고 있나요? 68혁명의 이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30-50 클럽에 가입되어 있으며 한편으로는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촛불혁명 등 위대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모두들 불행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머지 이상하게도 불행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사회적 갈등을 폭발시키는 무서운 의식에서 벗어나 제대로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모든 국민이 행복을 당연시해야 합니다.

 

일찍이 68세대의 정신적 지도자인 허버트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노예 상태는 지배자의 논리를 미화하는 것입니다. 지배자는 자본의 야수성을 가진 결코 좋은 괴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본에 대한 기대감으로 우리 삶이 좀 더 편안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게 하니까요. 자본에 적응하며 사는 우리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의 노예를 마치 삶의 이치인양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비현실적인 꿈이 되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이상한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때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통의 생각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한경쟁의 민낯을 보세요? 너무나 살인적인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상한 나라에서 여전히 일차원적 인간으로 사는 게 올바른 것인지 같은 인간으로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명쾌한 주장을 듣고 있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일차원적 인간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에 공감하게 됩니다. 오직 일차원적인 경쟁만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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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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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법(法)을 수학으로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려운 수학 문제라고 해도 숫자와 공식으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법도 충분히 그럴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세상 문제라고 해도 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곧 법의 올바른 정신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의문으로 넘쳐난다. 법이 있음에도 오히려 무법천지 같다. 이유인즉 법전의 법과 현실 속의 법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법전의 법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현실 속의 법은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이어야만 하는 법이 ‘편한 진실’만을 추구한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권석천의 칼럼을 담아낸『정의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편한 진실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알게 되었다. 저자 말대로 편한 진실이란 정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편한 진실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대신에 추상적, 관념적으로 의심하여 사건의 진실을 불투명하거나 왜곡한다. 이러한 편한 진실 때문에 우리는 분노하게 된다. 억울하다고 하며 법의 심판자에게 양심에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일 수밖에 상황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양심에 호소해야만 하는 걸까?

 

 

그래서『정의를 부탁해』는 불편하다. 우리 사회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대한 진실의 이면에는 정의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보수와 진보의 양대 산맥으로 분열된 싸움이 피곤할 정도로 반복될 뿐이다. 지금 이 시각 국정교과서에 대한 찬반 논쟁도 마찬가지다.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면 무조건 종북(從北)이 되고 마는 불평등하고 불합리적인 사회. 이렇게 진실이 민주화에 역행하거나 은폐되거나 사상 통제에 갇혀 버린 것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복잡해졌다. 무엇보다도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며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을 더 이상 애기한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누구도 정부의 공권력(公權力)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이든 국가 일을 하는 정부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권선천의 시각은 다르다. 즉,

 

 

나는 공권력이란 말이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權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公)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私)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p75).

 

 

결코 공(公)이 민(民)을 아래에 두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 제1조 제2항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이런 시대에 정부의 공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또한 일상적으로 사회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정부의 권위주의적인 발상은 삼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하여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을 만큼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한다. 세상이 지랄 같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숨길 수 없다. 그러면서 ‘정의를 부탁해’ 한다. 단지 우리가 바둑판의 미생(未生)처럼 아직 살아있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저자 말대로 ‘사춘기 불변의 법칙’ 때문이다. 정의를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나이만을 따져서 사춘기가 아니라고 말할 까닭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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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 / 동아시아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움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에 분노했다. 정부의 무능력함 때문에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고 있다. 수많은 생명을 담보로 할 정도로 우리 사회 안전망이 이렇게까지 허술했는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의 구조 능력이 이 정도로 비민주적이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울리히 벡은『위험사회』에서 사회가 발전할수록 위험이 발생하는 것도 그만큼 많아진다고 경고했다. 그리고는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능력마저 비민주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위험은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평등하게 일어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위험에 따른 사고를 어느 개인만의 불행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질병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적 질병을 정부가 비민주적인방법으로 치료한다고 하면 우리는 더 이상 정부를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게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투표로 선택한 정부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에 실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정부의 주인(主人)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 순진하거나 바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가지고 오구마 에이지의『사회를 바꾸려면』을 읽었다. 저자는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행동하라!고 소리 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행진한다. 행동하라!는 말을 오래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데모 혹은 시위하는 행동으로 우리의 생존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인재(人災)가 날 때마다 정부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조용히 있으라는 완고한 주장만 되풀이 해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고 입 다물고 있기가 어렵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내보내면서 묵묵히 참고 사는 데도 인내심이 바닥을 훤히 드러낼 정도로 불편하다.

 

우리가 사회를 바꾸려는 목적은 간단하다. 지금 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러면 저자의 주장대로 사회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대의민주주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위기’는 간과할 수 없다. 투표를 통해 우리의 대표를 뽑았으나 우리의 희망이란 그 한 순간에 불과해졌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투표가 끝나고 나면 노예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데모를 하면 사회가 바뀌게 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데모의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되다보니 대중의 참여마저도 회의적이다. 투표도 안 되고 데모도 안 되었을 때 제3의 선택, 즉 무관심하면 그만이지 싶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행동하라!를 실천전략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말한 행동은 투표보다는 데모인데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데모를 풀이하면 ‘피플즈 파워’(people' power)이다. 저자가 민주주의의 역사를 분석하고 유용성을 재검토하는 것은 정치적 구호내지 행동만을 요구하는 사회현실에서는 데모의 성격이 결여되었다는 반증이다. 대중의 참여 없이는 사회를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한다. 하지만 데모의 성격이 ‘관계론’이 아닌 ‘개체론’이라고 한다면 사회를 바꿀 수 없다. 개체론에 따르면 나와 너는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관계론에 따르면 나와 너는 서로가 만들고 만들어진다. 즉,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행위와 관계와 역할의 연결체’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정치가와 관료는 악마가 아니며 그렇다고 신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데모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분명 상대방이든 자신이든 저마다 한계가 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상대방을 이해하며 대화하면서 공동으로 만들어나간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데모라는 운동에서도 이와 같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개별적인 차이를 넘어 더욱 더 관계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데모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힘이 생기며 활기가 뿜어져 나와 ‘나’를 넘어선 ‘우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단순히 정부를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데모를 벌이는 것은 생생하지도 않고 호소력도 없는 불행한 의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보다는 사회 전반의 체질을 바꿔나가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그래서 일까? 우리 또한 어느 순간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데모할 수 있는 사회를”, “대화를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화할 수 있는 사회를”, “참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참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바꾸려는 저자의 새로운 가능성과 행동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바뀔 수 있는지?를 예측해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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