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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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단편『사람에게 얼마만큼 땅이 필요한가』에는 땅값이 ‘하루치 1천 루블로’라는 솔깃한 얘기가 나옵니다. 하루치란 사람이 하루 종일 걸은 만큼 땅을 드리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당일 해 떨어지기 전에 출발점까지 돌아와야 합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농부 바홈은 많은 땅을 차기하기 위해 쉬지 않고 걷고 걸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출발점까지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바홈은 죽고 맙니다. 1분도 제대로 쉬지 않고 걸었는데 1분도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한 쓸쓸한 운명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정작 필요한 땅은 3아르신(1아르신은 약 70cm)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무덤을 만들만큼만 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바홈을 가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홈은 죽어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천국으로 갔을까요, 지옥으로 갔을까요? 이 세상에 욕망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이력서를 차분히 헤아려보면 그 이면에는 욕망이 숨가쁘게 한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바홈이 이루지 못했던 욕망은 우리 앞에 던져진 삶의 한계를 짐작하게 했습니다. 바홈에게 땅은 아주 현실적이었습니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천국과 지옥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만약 바홈이 죽어서 지옥으로 간다면 세상은 정말로 공평할까요?

한 순간 바홈을 변명해보고 싶었던 까닭은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을 우연히 만난 덕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집에는 5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천국에 간 집달리」는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말리코른은 집달리라는 직업상 남의 눈물을 흘리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법(法)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이 죽으면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고 나자 천상(天上)의 재판관은 그에게 지옥으로 가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리코른처럼 가슴에 나침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고자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방향에 따라 산과 강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공평함 앞에서는 나침반은 방향을 잡기가 곤란합니다. 지난날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길 아닌 곳으로 가면 안 된다고 점잖게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마르셀 에메는 삶이 뒤죽박죽 엉켜 있는 오늘을 보면서 “악법은 악법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립니다. 꼭 길이 아닌 곳으로도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남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해서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재판관의 무지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습니다.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나오는 단편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비록 분량은 짧았지만 놀라운 삶을 다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삶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작가의 비범한 생각은 거짓말 같은 결과라는 절묘한 반전이 흥미로웠습니다. 작가는 삶의 상실감과 고통을 아주 희극적으로 그러니까 익살스럽게 드러내면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삶의 본질을 파고들면서 종횡무진 달려가는 작가의 글 솜씨로 인해 책 읽는 즐거움이 대단했습니다. 정말이지 ‘에메의 작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꼭 읽어봐야 할 소설이었습니다. 삶이 가벼워지고 통쾌해졌습니다.

사실 이 소설집을 흥미롭게 읽었던 까닭은 표제작인「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있었습니다. 얼핏 제목만으로도 이 남자가 사뭇 궁금했습니다. 이 소설은 ‘뒤티유월이라 불리던 그 남자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마치 열린 문으로 드나들 듯이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고 벽을 뚫고 나가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로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그 남자의 삶을 엿보고 싶었습니다. 벽(壁)은 단단한 고체(固體)입니다. 이런 벽을 사람이 통과하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이란 물렁물렁 하지만 비나 물같은 액체(液體)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액체화된 몸입니다. 동시에 일상의 권태를 한 순간 녹여버리는 즐거운 몸입니다.

뒤티유월의 기발한 자유스러운 모험을 보면서 호모 오피스쿠스, 즉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봤습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자신의 책상을 온전하게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하루를 보내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는 지금 보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직장에 다닌다고 위로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면 전혀 행복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백번 허망함이 밀려왔다 쏠려갔습니다. 지긋지긋한 외로움으로 가득 찬 사무실의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들 마음도 벽이 되고 맙니다. 직장 상사로부터 자존심을 건드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벽과 벽이 충돌하는 위험한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어떤 보람을 요구하는 행동’은 ‘자기 안에서 확대의 욕구, 자기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고 자기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이런 열망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는 스스로를 ‘가루가루(늑대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야생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본능은 길들여진 삶으로부터의 벗어나려는 진정한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온통 벽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분명하며 금지(禁止)가 곧 삶이라는 것을 을씨년스럽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 이름만 다를 뿐 금지의 벽이 가지고 있는 양면이지 않을까요?

또 하나 「생존 시간 카드」도 귀를 활짝 열리게 했습니다. 외면하기에는 아까운 이 단편에서는 섬뜩하게도 ‘쓸모없는 사람’은 알맞게 희생양이 되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즉 생존 시간 카드는 쓸모없는 사람들을 죽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생존 시간을 줄이자.’는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생산적인 사람들을 위해 비생산적인 소비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에 있어 어떤 사람의 무용성 정도에 따라 일수(日數)를 정해놓고 그 일수만큼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분수(分數)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라는 절박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웠습니다.

자기만의 분수에 맞는 방식으로 살면서 우리는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죽겠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내뱉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지겹고 무기력해서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분수라는 것이 얼마든지 지옥의 늪일 수도 있겠다는 불편함이 오래도록 가슴에 맴돌았습니다. 즉 불행한 사람들에게 행복은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아픔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시간에 쫓기며 허겁지겁 살면서도 남의 인생을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일찍이 오스카 와일드는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상상력 부재로 괴로워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읽으면서 그 심정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작가는 분수에 맞는 재미없는 삶을 마구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마치 조각난 삶의 퍼즐을 테두리 없이 맞추는 행복한 고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퍼즐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맞출 때마다 우리들 마음만큼이나 딱딱하고 비통한 삶이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유리창의 빗방울들이 한데 모이면서 물줄기를 만들며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꽉 막혀 있던 현실의 벽들이 한없이 잘게 부서졌습니다.

늘 세계 여행을 꿈꾸는 나에게 가고 싶은 곳은 프랑스였습니다. 파리에 세워져 있는 에펠탑의 화려한 야경을 오랫동안 사랑해왔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문학의 희귀한 보석으로 불리는 마르셀 에메를 알게 된 후 비로소 알찬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행이라고 하면 낯선 곳에 가는 것이라고 버릇처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익숙한 것을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래서 작가의 고향인 몽마르트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어느 틈엔가 작가의 생활을 엿보는 것도 나름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여행이라는 것을 습득했습니다. 그곳에는 마르셀 에메를 그리워하는「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라는 동상이 있습니다. 그 남자에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은 얼마만큼의 분수(分數)가 필요한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그 남자는 벽으로 드나들었던 것처럼 분수를 얼마든지 분수(粉水)로 액체화하면서 보다 쉽게 “불쌍한 욕망 기계에게 얼마만큼의 물이 필요한가요?”라고 특유의 위트로 반문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몰랐던 ‘몽마르트적인 삶’이었습니다. 이제 세상에는 벽을 만드는 사람보다도 벽을 드나드는 남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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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데이 2012-11-2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우아 님. 저는 문학동네 편집부의 김선희라고 합니다. 올려주시는 리뷰 늘 유익하게 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띠지를 새로 제작하면서 오우아 님의 이 리뷰 중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블로그에 등록된 이메일로 보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