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고 적었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째 바쁘다는 핑계로 텃밭에 가지 못했다. 사실인즉 텃밭에 심었던 고추, 토마토 등등 작물들이 가을의 문턱에서 더 이상 수확물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창 수확물이 나올 때는 발걸음이 바빴는데 지금은 작물들의 앙상한 뼈대만이 사람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먹고 사는 일은 다름 아닌 삶의 우선순위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내 삶의 우선순위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반복하는 처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보다 밥벌이를 잘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마음 한구석에 또 다른 삶의 우선순위가 참을 수 없는 존재를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김애란의 『그랬다고 적었다』에는 삶의 우선순위를 나타내는 두 가지 단어가 나온다. 바로 ‘밥과 꿈’이다. 밥과 꿈은 삶에 있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밥에만 신경쓰다 보면 꿈을 잃어버리고 꿈만 꿈꾸면 밥을 먹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때로는 밥과 꿈, 둘 다를 잃을 수도 있다. 밥과 꿈의 적절한 균형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한 덧셈, 뻴셈으로 삶의 답을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통이면 밥과 꿈은 업(業)이 되는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언제나 밥과 꿈은 불투명하다. 밥만으로는 체면을 세울 수 없으며, 혹은 꿈만으로는 몸을 버티지 못하는 아픔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겪는 업을 작가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업을 견뎌내지 못할 때 작가는 “삶에 대한 큰 조망이자 지향, 성찰과 이해를 모두 품은 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내가 되지 않는 꿈’이라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내가 되는 꿈’을 자신의 몫으로 생각한다. 꿈을 위해서 나는 내가 되어야 하고, 기필코 내가 되어야만 한다. 내가 되는 일을 잘해야만 내가 될 수 있다는 논리. 문제는 내가 되는 꿈이 꿈을 초과할 때, 더 이상 버텨낼 수 없는 꿈이 될 때 오히려 내가 되는 꿈이 참 치졸하고 지긋지긋해진다. 내가 되는 꿈을 절반으로 줄인다고 해서 고통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내가 되어야 할까? 내가 되는 꿈은 단단할 정도지만 불안한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꿈을 가지고 살라고 하는데 결코 꿈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이 오히려 꿈을 쪼그라들게 한다. 내가 되는 꿈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이 있다고 계속해서 강요하는 목소리를 참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럴수록 네 의지와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울부짖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작가가 말하는 ‘내가 되지 못한 꿈’은 나를 외면하거나 소모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깨달은 느낌은 ‘무아(無我)’였다. 무아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사건”이다. 삶은 온통 꿈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꿈을 만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내가 나를 증명해야지 모색해야 한다. 꿈의 부조리에 체념했던 나와는 달리 작가는 “나의 농도를 조금씩 옅게” 만든다고 적었다. 가령, 자아실현이라는 일을 노동으로, 자아성취이라는 일은 삶의 기예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삶은 꿈으로 고단하다. 꿈의 방향으로 삶을 몰아세우는 일은 어떤 면에서 ‘비아(非我)’가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무아와 비아의 경계에서 삶을 덤벙덤벙, 혹은 대충대충 보내고 싶지 않은 나의 소소한 마음이 내가 되는 꿈인지 음미해본다. 조금 더 나를 나답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은영의 산문집 『백지 앞에서』를 읽었다. 작가는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그녀가 이번에 소설이 아닌 산문집을 낸 까닭을 살펴보니 이야기에 있었다. 돌이켜보면 소설도 이야기이긴 마찬가지다. 작가 말대로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다. 이와 달리 산문은 허구가 아닌 자기자신의 이야기다.

 

그러나 소설과 산문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 바로 ‘어리석음’을 존재의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 소설은 허구의 인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반면에 산문은 어떤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낸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과 사고가 낱낱이 간파당하는 두려움과 압박감 앞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시그리드 누네즈는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 작가에게 어리석음이라는 기질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걸 갖고 있다.

 

작가에게 어리석음은 글쓰기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뜻한다. 어리석음은 작가의 감정에 균열을 일으키는 동시에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단단한 마음이기도 하다. 만약에 어리석음이 없다고 하면 작가의 글쓰기는 일기처럼 될 것이다. 일기는 이야기가 있지만 감정이 없는 다른 글쓰기니까.

 

평소에 책읽는 것을 좋아했고 좀 더 나아가 리뷰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을 쓰면서 오늘까지 왔다. 그렇다고 해서 유명한 소설가나 에세이스트가 된 것은 아니다. 근사한 글을 써보겠다는 마음이 없지 않지만 글을 쓰면서 내 삶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행복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늘 백지 앞에서 불안하다. 작가의 표현대로 ‘초심자’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오랫동안 글을 많이 쓰면 이제는 글쓰는 두려움에 대한 백신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데 현실은 정반대로 어긋났다. 백지 앞에서 마주치는 지친 마음과 결핍을 생각할수록 실패감이 몰려왔다. 실패감은 곧 자기 연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작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삶에 대해 귀 기울일 수 있었다. 글은 말할 수 없는 용기이며 아픔의 결과물이다. 혼자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비록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써야 한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지 않는 삶이란 죽음의 출발이며 도착이라는 사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글을 쓰는 삶은 지극히 나의 모든 것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일상주의자의 감각 -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소한 기적들에 대하여
김이나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여름은 역대급으로 무더위다. 숨이 막힐 정도다. 이럴 땐 계곡의 흐르는 물에 발 담그고 있으면 최고의 휴식이다. 더위에 지친 일상의 무거움이 한순간에 가벼워져 어느 순간 말끔히 사라져 버린다. 문제는 날씨가 덥다고 해서 그럴 때마다 계곡에 갈 수 있는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럴 땐 여름을 제대로 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짧은 책을 읽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더군다나 무수한 책 중에서 내 취향의 작품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김이나의 『일상주의자의 감각』을 읽으면 두근거림이 분수처럼 솟구쳐 오른다. 그녀는 히트곡만 300곡이 넘는 작사가이다. 보통 이 정도의 작사가라면 뭔가 특별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바에 따르면 그녀의 감각은 제목에 나와 있듯 일상적이며 사소해서 오히려 매력적이라는 데 놀라게 된다.

 

생각은 절대 생각을 구원할 수 없다.

생각을 지우는 건 행동이다.

 

세상에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료하게 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신만의 속도로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적어도 다람쥐와 비교해 후자에 속한다. 그렇다고 언제나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상대방과 비교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남들과 다르다는 자부심도 있는 반면에 행복의 고도 너머에서 불가피하게 혼자라는 느낌은 견디기 힘들다. 그럴 때마다 잡생각이 많아지고 결국에는 번뇌에 휩싸인다.

 

오랫동안 생각이 생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잔잔하게 나를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도저히 생각만으로는 생각을 구원할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생각을 진정으로 구원하는 것은 작가 말대로 ‘행동’이 아닐까? 우리 몸은 늘 행동하니까. 때로는 목적이 없는 행동, 이를테면 가벼운 운동을 통해서 또 다른 일상을 맞이하는 시작이 된다. 결국 마음만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그녀는 왜 일상주의자가 되었을까? 일상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매일매일의 보통의 날이다. 이와 달리 완벽은 말 그대로 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완전하다. 작가의 생각을 빌려보면, 일상은 꿈이며 완벽은 계획이라는 점에서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우리는 되도록 계획적으로 살려고 한다. 계획을 통해 하루하루를 실천하다 보면 언젠가 완벽해지는 순간을 굳게 믿는다. 계획이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완벽은 삶의 미덕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완벽에 대한 스트레스를 몸에 지니고 있다. 그러니 사소한 일은 그저 사소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열망도 없다. 완벽의 반대말이 불완벽이라는 마음이 앞서기 마련인데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면 ‘만족’이라는 단어를 마주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일상을 만족하는 사람이 완벽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작가의 에세이를 거듭 읽을수록 묘한 위안을 얻는다. 작가의 목소리는 마치 ‘별이 빛나는 밤’에 듣는 라디오 같다. 하잖은 시절을 보내는 날들도, 첫사랑통에 시달린 날들도, 벅차게 행복했던 날들도 자칫 일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반대로 어디까지 기적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우리 인생은 한 번 머물고 떠나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별이 되어 반짝인다는 발견은 우리의 일상을 더욱 삶답게 한다. 누군가도 이러한  아름다움을 느끼면 얼마나 좋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산곡미풍 -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위화 지음, 백도라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발 끈이 풀린 삶은 느슨함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산곡미풍 -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위화 지음, 백도라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신발 끈이 풀려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산란해진다. 사람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안쓰러움, 잘못했다가는 금방이라도 신발 끈을 밟아 사고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인지 신발 끈에 대한 미안함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위화의 『산곡미풍(山谷微風)』에는 풀려져 있는 신발 끈을 보고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발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에게 신발 끈이 풀린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비밀의 정체는 삶의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진심이었다.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긴장과 이완이라는 감정은 웅덩이처럼 고여있지 않다. 긴장 때문에 두렵더라도 이완이라는 마음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렇기에 신발 끈을 묶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마치 신발 끈을 단단히 묶는 것처럼. 그러니 신발 끈을 풀고 산다는 것은 산전수전 겪은 사람이 고통에 맞서는 굉장히 개성적인 모습이다. 세상을 살면서 죽을 만큼 힘든 상황에서 신발 끈을 풀면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래서 산곡미풍, 즉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라는 제목에는 단순한 의미만 담겨 있지 않다. 산들바람은 세익스피어의 표현대로 “바람처럼 자유롭게”와 다르지 않다. 자유롭게 부는 산들바람은 너무 갑작스럽거나 세차게 부는 바람이 아니다. 이러한 산들바람을 맞으면서 작가는 천당풍(穿堂風)을 느꼈다. 천당풍은 겸손하다. 동시에 기분 좋게 스쳐 가는 시원한 바람이다.

 


작가의 산문집을 읽고 있으면 우리 대부분이 잊으면서 지낸 과거의 시간을 좀 더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과거의 자신과 만나는 우리는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고통이 위로이자 선물로 다가왔다. 가령, 그에게 베이징이 좋은 이유를 묻자 겨울날 집에 난방기가 있다는 대답을 한다. 예전의 우리도 그랬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며 살았으니까. 오늘날 우리는 도시의 삶에 익숙해졌다. 도시에 집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정확하다. 정확한 삶을 위해 우리에게 집이 필수품목이 되었다.

 

그런데 작가의 고백을 듣고 있으면 천당풍처럼 마음이 한결 겸손해진다. 비록 집이 없었지만 청춘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집이 있지만 청춘은 없다는 경험을 외면할 수 없다. 덕분에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서 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청춘이라는 시간이 많은 줄 알고 저 자신을 소모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