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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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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전체를 바라볼 때 누구에게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언제 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때로는 몰랐다는 것을 핑계 삼아 너무 당연하게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진정으로 내 삶을 살고 있을까, 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으로 인해 삶이 바뀌는 기구한 운명 같은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결혼식 날에 형의 장례식이 거행되어야 하는 비현실적인 슬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애도가 끝나고 나서는 ‘가장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가장 경이로운 세계에서는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왔던 가치들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진실은 ‘골드버그 장치’와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일들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세계 3대 미술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곳입니다. 하루 만에 미술관을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작가는 그곳에서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경비원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뉴욕커>에서 일한 화려한 커리어를 생각한다면 경비원은 비효율적인 직업으로 보입니다. 형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경비원이라는 모순을 선택했으리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쁜 일상에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번아웃에 빠져 살아갈 길을 잃어버린 채 그저 삶을 견디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삶의 고단함과 무게감에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존재감이 없을 때마다 공허한 실망감을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상처를 경험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면서 다시 돌파구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보면서 예전과는 다른 아름다운 삶을 사는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매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경비원은 그가 일하고 싶었던 정말이지 단순한 일입니다. 문제는 단순한 일을 한다고 해서 삶을 단순한 자세, 즉 수동적인 자세로 하는 것은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비록 경비원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바운더리 이상은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며 시간을 흘려보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작가가 메트로미술관에서 예술작품과 씨름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경비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예술작품을 눈으로 마주하면서 흡수합니다. 남들에게 없는 예술작품을 향한 특별한 열정과 애정이 가득합니다. 그는 평범한 경비원이었지만 예술에 대한 통찰력으로 메트로미술관의 예술작품을 두루 살핍니다. 예술이 던지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며 예술을 가까이에서 이해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고차원적입니다. 문제는 예술의 문외한들에게는 예술적인 분석보다는 예술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이해하는데 있습니다. 때로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바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에 맞는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의 예술에 대한 메시지를 곱씹으며,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지니는 가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켈란젤로의 걸작<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유명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걸작을 단편적인 정보와 지식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예술이 말하고자 의미를 배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이 조르나타 (giornata)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탈리어로 조르나타는 ‘하루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하루하루가 마치 모자이크처럼 모여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단순합니다. 하지만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고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인생이란 팍팍한 현실을 버티는 용감한 방법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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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2-20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 자신의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위대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찜해 둔 도서인데, 도서 내용을 이미 상당 읽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해주네요. 감사합니다.

오우아 2024-02-25 22:58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님, 감사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조르나타 기법을 여러번 생각했습니다^^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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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근본적인 입장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타오르는 질문』에서 여성의 권리를 변호했다. 그러면서 거듭 자신은 ‘나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고백했다. 그녀의 고백을 떠올리면 세상에는 두 가지 페미니스트가 있는 것 같다. 좋은 페미니스트와 나쁜 페미니스트다. 좋은 페미니스트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라면 나쁜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권리를 오히려 은근슬쩍 억압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나쁜 페미니스트는 우리가 원하는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비언 고닉의『사나운 애착』을 읽으면서 또 하나의 페미니스트를 생각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좋거나 나쁘다는 양가적인 감정으로 너무나도 쉽게 공감한다. 공감의 기준은 양심에 있다. 양심이 허락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좋은 페미니스트가 된다. 하지만 ‘사나운 애착’은 다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나운 페미니스트’여서 그렇다. 사나운의 사전적 정의는 획일적이지 않다. 성질이나 행동이 모질고 억세기 때문이다. 결코 좋다거나 나쁘다는 감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함이 스며있다.


이 책에서 사나운 애착을 갖고 선택한 인물은 비비언 고닉의 엄마와 그녀다. 그들은 두 여인이면서 동시에 모녀(母女)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녀라는 애증이다. 모녀가 단순히 가족이라는 애착의 굴레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모녀는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관계다. 그들은 사소하거나 특별해 보이는 여러 가지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하니까. 때로는 커다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엄마와 같이 있으면 불편하면서도 안전하다고 말한다. 끝내는 엄마를 “가장 오랜 친구”라고 여긴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사나운 애착의 실마리는 이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이 아니라고 해서 방향이 달라지지 않았다. 실마리의 방향은 “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그녀의 외침이었고 그것을 좀 더 가까이 듣고 싶다는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이 살아오면서 부대낀 거리를 동행하게 되었다. 생각하건데 거리를 걷는데 감사해야 했다. 만약에 공원에 앉아 그녀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면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생각하는데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불순분자’가 되는 데는 엄마의 영향력이 없지 않았다. 그녀를 낳고 온 몸으로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동시에 엄마의 억척스러움, 당당함 그리고 고통과 우울도 함께 그녀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엄마 또한 각자 삶을 살 권리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가 말한 그 권리의 내면에는 그녀 자신이 ‘몸’으로 배운 게 최선이었다. 문제는 몸이 감당해야 할 의무에는 정작 ‘자기 삶’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녀는 단단하리라 믿었던 엄마의 몸이 어느 순간 산산조각 부서지는 것에 실망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없고 오로지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녀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욕망이 아닌 ‘영혼의 환상’을 가지고 결혼하였다. 그런데 결혼한 순간부터 영혼은 사라지고 여자라는 역할만 더 커졌다. 40년 동안 남편을 위해 음식을 하는 등 집안일을 하는 것에 대해 회의하면서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가사노동이 힘들다거나 불편해서 생기는 뾰쪽한 감정은 아니다. 가사노동을 누가 하느냐가 걸림돌이었다. 그녀는 집안일을 여자 혼자서 하는 것을 미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 책의 제목처럼 ‘사나운 애착’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사랑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남편이라고 해서 여자가 의무적으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고통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삶. 두 여자가 걸어온 시간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두 여자의 삶과 여전히 평행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계속해서 걸을 것이다. 단순히 그녀들을 더 알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두 여자의 삶과 만나는 지점에서 사나운 페미니스트가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사나운 페미니스트는 삶과 사랑의 불완전한 조각을 다시 맞추며 우리를 인간으로 타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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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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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몰랐으면 어땠을까? 앞도, 뒤도, 옆도 바라보지 않는 시에 대한 궁극을 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의 즐거움이 곧 삶의 행복이며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평범한 삶을 나는 견딜 수 없었고 방황의 그림자를 끝내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행히 고통 속에서도 불타오르는 시의 의지가 있었기에 이 세계를 단단히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시가 우리 몸 밖으로 내 몰린 삭막한 풍경에서 막상스 페르민의『눈』에는 하염없이 시를 쓰는 남자, 유코가 나온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삶을 본능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시인이 하나의 직업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 시는 직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삶의 잣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였으니까.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그는 마음속에 눈을 품고 사는 존재였다. 눈은 시이며, 시는 눈이었다.


그는 눈의 깃든 아름다움을 말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최고의 시인이었다. 이것으로도 얼마든지 시인의 길을 걸어가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의 시에 색(色)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생겨났다. 순백색이라고 믿었던 눈의 아름다움은 빛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빛과 색을 똑같이 받아들이지만 놀랍게도 빛이 우리 몸 밖에 있는 것이라면 색은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시가 빛난다고 해서 특별하지 않은 일이고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망적으로 하얗기만” 하는 절망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도의 길을 떠난다. 어쩌면 한 편의 시에 색이 있다면 그 색이 시가 될 것이라는 자각은 눈의 여섯 가지 특징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상은 색채의 대가 소세키 선생의 예술을 통해 가능해졌다. 이제까지 무채색이었던 그의 순백의 시는 무지개 색으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막상스 페르민의『눈』은 ‘한 편의 소설이면서 한 편의 시’가 되는 이야기라 쉽게 읽힌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세키 선생의 예술을 읽는 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소세키 선생이 예상과는 달리 눈먼 화가여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예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의 강도는 오히려 낮은 편이다. 그 보다는 “사랑이란 가장 어려운 예술”은 매우 친숙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소세키 선생과 곡예사의 사랑은 내가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작가는 낭만적인 보통의 시간에다 죽음으로 슬픔의 무게를 더하는 것이나 멈추지 않고 사랑을 확장시킨다. 글을 쓰는 것, 춤을 추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들의 결정적인 진실은 사랑의 투사라는 것. 그러면서 예술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둘러싼 비밀 하나를 펼쳐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곡예사의 예술’이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100p)


돌이켜보면, 예술가들은 특별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특별한 운명을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말하고 있듯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를 곡예사처럼 아름다움의 줄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만 한다. 


시를 몰랐으면 좋았을까? 아니다. 시를 몰랐으면 아름다움을 끝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예술이며 꿈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팽팽한 줄 위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사람과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사랑과 예술은 닮을 수밖에 없다. 사랑은 눈부시게 빛나는 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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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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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작은 죽음이다. 죽음은 큰 고통이다.

-하이데거


황시운의『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페이지 한 장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마침표가 아니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삶의 최전선이라는 게 있다.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또 하나의 시작이 없다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허무하게 마침표로 끝났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불행을 몸소 마주하게 된다. 마주하는 순간이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슬픔이 택배’로 오거나 이 책의 저자의 말처럼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날에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니 더욱 믿을 수 없었다. 하반신이 마비되고 그것으로도 가혹한 운명은 부족했는지 신경병증성 통증에 시달린다고 하면 거짓말이 마치 진실과 뒤엉키기도 한다. 그러나 통증 때문에 사납게 비명을 지르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악취 나는 몸뚱아리 신세라는 작가의 고백을 듣고 나면 차라리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했다. 당신을 몰랐기에 더욱 그랬다.


어디 그뿐인가? 하반신이 마비된 체 ‘반쪽짜리’ 인생이 감당해야 할 수치심과 분노는 매번 곪아터졌다. 장애 때문에 남들과 같은 일상생활은 어렵다.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야 할 턱과 틈을 생각하면 당신을 모르는 나 또한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채 사라지기 전에 차별과 혐오라는 타인의 무례한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이 아닌 ‘시한폭탄’같은 존재라는 죄책감을 끌어안고 버텨야만 했다. 슬픔이 빼곡해질수록 눈동자는 침묵할 수 없었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의 무게만큼이나 고통이 사라진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당신은 세상에는 울어도 해결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프지 않길 마냥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애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적처럼 물러설 리가 없으며 제 살을 긁어내는 통증이 한바탕 눈물로 사라질 리가 없다. 장애는 삶의 불편한 조건이며 이러한 불편함을 선택하기까지 그만큼의 눈물겨운 시간을 지나왔을 테니까. 당신은 이것 밖에는 아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신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우리의 심장과 맥박을 뛰게 하는 걸 보면 참 괜찮은 방법이었다.


돌이켜보면 장애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한다는 좌절은 절망이 흘러가는 아픈 종착지다. 통증이 신체적인 고통이라고 한다면 좌절은 정신적인 고통이다. 고통 때문에 삶의 의지가 여지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며 쓸쓸하다. 작가에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버티며 지내왔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작가는 통증과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맑은 정신’으로 다시 살고 싶었다. 맑은 정신은 견딜 수 있는 경계이며 살고 싶은 의지였다. 


그러니 작가의 생존에 가까운 글을 읽고 다시 봄을 맞이했으면 한다. 아프고 다친 몸은 불편한 것이지 불행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져도 좋을 마땅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불행 때문에 자주 뒷걸음치는 이유에서다. 불편한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면서 죽을힘으로 버텨야낼 때 비로소 슬픔이 완성되는 것이다. 결코 슬픔의 미화(美化)가 아니다. 이러한 다짐은 우리의 삶을 더욱 삶답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는 수많은 장애를 결국 극복하며 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기어이 믿고 싶어졌다.


당신을 몰랐던 우리는 이제 당신을 알게 되었다.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 무료해서 고쳐지지 않고 뾰족했던 마음이 조금씩 무너졌다. 눈을 감으니 낙엽처럼 메마른 가슴에 온기가 가득해졌다. 그리하여 오로지 이 세상을 끝내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맑은 정신을 끝까지 움직이고 싶었다. 최소한으로 아주 가볍고도 촘촘하게 움직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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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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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사랑' '', 이 세 단어의 유사성을 토대로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이기주, 언어의 온도

 

온도(溫度)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물체의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를 말합니다. 기온에 따라 우리 몸의 온도는 본능적으로 싹둑싹둑 오르고 내립니다. 그런데 살아오는 동안 마음에 담겨지는 온도는 어떤가요? 체감온도라고 해서 마음속에서 흩어지거나 부서집니다. 가슴 한 편에서 희노애락의 투명한 감정들이 생겨납니다. 그런가하면 이름 모를 감정도 있습니다. 기쁜 일들을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마냥 그렇지 않습니다. 늘 슬픔이 하나 둘 따라다니기 마련이니까요. 때로는 슬픔의 밑바닥에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 이상으로 그리움으로 뭉클해집니다.

 

한지혜의 산문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으면서 괜찮다라는 온도를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온도계로는 체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괜찮다, 라는 혼잣말을 하려면 지구를 몇 바퀴 돌고 돌아야 합니다. 살아온 과거를 애틋하게 기억하면서 내뱉는 그 말에 담긴 온도는 정말이지 괜찮다, 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맙고 미안한 지난날을 위로하는 것은 삶의 지문(指紋)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미생(未生)과 완생(完生)의 팽팽한 슬픔을 견디며 다시 살아보겠다는 삶의 가장 긍정적인 순간에 가장 긍정적인 말, 괜찮다는 말은 과거도 현재도 아니며 미래처럼 들렸습니다.

 

작가의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알게 됩니다. 괜찮다는 말은 삶이 간직할 만한 소중한 감정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삶을 지탱하는 부드러운 리듬이 되기도 합니다. 가령, 삶이 도통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 작가로서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출발을 하기도 전에 한 아이의 엄마가 짊어져야 할 가사노동이라는 현실이 역주행하면서 자신에게 무섭게 달려왔습니다. “아이는 어쩌고?”라는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자신의 무력함을 쉽게 원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상은 작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외칠 수밖에 없다는 울분이 너무나 부조리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고민하는 순간을 생략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작가로서의 의무와 권리라는 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고민하는 순간, 작가의 감정이 무너지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달리 앞으로 달린다고 해서 삶의 어떤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비록 답을 못 찾았다거나 모를 수 있더라도 더 이상 원망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일단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해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괜찮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시포스의 불행이 아니라 시시포스의 행복이라는 에너지로 충만해졌습니다.

 

작가의 골목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가 내리고 단풍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붑니다. 모르는 사람이 내 앞에서 말을 걸면 낯선 느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눈은 친숙한 사람이 말을 건네는 듯해서 오히려 온기(溫氣)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사람에게서 받지 못한 위로를 아낌없이 받아서일까요? 마음껏 울고, 웃고 싶었습니다. 살아온 날들의 씨줄과 살아갈 날들의 날줄이 아픈 마음에 수를 놓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괜찮은 마음이 부드럽게 꽃을 피우며 삶을 견디게 합니다.

 

오늘을 사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나의 온도는 몇 도인가? 라는 물음과 같은 골목에 서 만나게 됩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에 따라다닙니다. 적어도 차가운 사람은 아니길 바라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누군가에게 온기를 조금이라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온기가 곧 사랑이며 삶이니까요. 작가의 소박하고 담백한 생활언어에서 인간의 문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문법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다보면 운명이라는 커다란 그림이 완성됩니다. 이 책을 통해 작가는 인생의 토정비결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참 괜찮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운명은 사주에도 타로에도 없습니다. ‘발열(發熱)하는 인간참 괜찮은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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