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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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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사랑' '', 이 세 단어의 유사성을 토대로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이기주, 언어의 온도

 

온도(溫度)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물체의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를 말합니다. 기온에 따라 우리 몸의 온도는 본능적으로 싹둑싹둑 오르고 내립니다. 그런데 살아오는 동안 마음에 담겨지는 온도는 어떤가요? 체감온도라고 해서 마음속에서 흩어지거나 부서집니다. 가슴 한 편에서 희노애락의 투명한 감정들이 생겨납니다. 그런가하면 이름 모를 감정도 있습니다. 기쁜 일들을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마냥 그렇지 않습니다. 늘 슬픔이 하나 둘 따라다니기 마련이니까요. 때로는 슬픔의 밑바닥에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 이상으로 그리움으로 뭉클해집니다.

 

한지혜의 산문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으면서 괜찮다라는 온도를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온도계로는 체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괜찮다, 라는 혼잣말을 하려면 지구를 몇 바퀴 돌고 돌아야 합니다. 살아온 과거를 애틋하게 기억하면서 내뱉는 그 말에 담긴 온도는 정말이지 괜찮다, 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맙고 미안한 지난날을 위로하는 것은 삶의 지문(指紋)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미생(未生)과 완생(完生)의 팽팽한 슬픔을 견디며 다시 살아보겠다는 삶의 가장 긍정적인 순간에 가장 긍정적인 말, 괜찮다는 말은 과거도 현재도 아니며 미래처럼 들렸습니다.

 

작가의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알게 됩니다. 괜찮다는 말은 삶이 간직할 만한 소중한 감정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삶을 지탱하는 부드러운 리듬이 되기도 합니다. 가령, 삶이 도통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 작가로서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출발을 하기도 전에 한 아이의 엄마가 짊어져야 할 가사노동이라는 현실이 역주행하면서 자신에게 무섭게 달려왔습니다. “아이는 어쩌고?”라는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자신의 무력함을 쉽게 원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상은 작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외칠 수밖에 없다는 울분이 너무나 부조리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고민하는 순간을 생략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작가로서의 의무와 권리라는 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고민하는 순간, 작가의 감정이 무너지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달리 앞으로 달린다고 해서 삶의 어떤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비록 답을 못 찾았다거나 모를 수 있더라도 더 이상 원망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일단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해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괜찮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시포스의 불행이 아니라 시시포스의 행복이라는 에너지로 충만해졌습니다.

 

작가의 골목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가 내리고 단풍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붑니다. 모르는 사람이 내 앞에서 말을 걸면 낯선 느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눈은 친숙한 사람이 말을 건네는 듯해서 오히려 온기(溫氣)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사람에게서 받지 못한 위로를 아낌없이 받아서일까요? 마음껏 울고, 웃고 싶었습니다. 살아온 날들의 씨줄과 살아갈 날들의 날줄이 아픈 마음에 수를 놓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괜찮은 마음이 부드럽게 꽃을 피우며 삶을 견디게 합니다.

 

오늘을 사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나의 온도는 몇 도인가? 라는 물음과 같은 골목에 서 만나게 됩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에 따라다닙니다. 적어도 차가운 사람은 아니길 바라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누군가에게 온기를 조금이라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온기가 곧 사랑이며 삶이니까요. 작가의 소박하고 담백한 생활언어에서 인간의 문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문법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다보면 운명이라는 커다란 그림이 완성됩니다. 이 책을 통해 작가는 인생의 토정비결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참 괜찮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운명은 사주에도 타로에도 없습니다. ‘발열(發熱)하는 인간참 괜찮은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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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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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이제 10년은 너무 긴 세월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변하는 세상을 볼 때마다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러니 격변하는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더구나 거대한 변화의 역사를 겪은 이야기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경제 성장이라는 불행한 현실 구조에서 살고 있다. 국민 소득이 적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 성장이 물질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다고 해서 세상이 좀 더 행복하거나 좀 더 정의로워졌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대화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상황에서 왜 우리는 소설가 위화의『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어야만 하는지 궁금하다. 위화의 삶에는 마오쩌둥의 흑백 시대부터 등소평의 컬러 시대까지 지난 30년의 중국의 일상적 모습에 담긴 역사적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다. 흑백 시대에는 정치논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컬러시대에는 경제논리였다. 사회적 변화의 속도에 발생하는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날카로워지면 개인은 국가의 운명에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작가의 실천적 삶은 현재 우리 사회가 참으로 뼈아프게 요청하는 ‘공공 지식인의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인민(人民), 영수(領水),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등 10 개의 키워드를 통해 중국의 고통을 들려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작가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알 수 없었을 산채(山寨), 홀유(忽悠) 등 낯선 단어를 생각한다면 중국의 고통은 만만치 않은 주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의 무게에 눌리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세태 한탄이라고 한다면 모를까, 10개의 단어는 그 시대의 신산한 풍경을 마주하게 했으며 중국의 고통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 보게 했다.

 

그 다른 각도 중에 있어 무엇보다도 삶과 글쓰기는 끝없이 나뉘는 갈림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353p)

 

남의 고통은 나의 고통과 어느 정도 상관성이 있는지 모호하다. 그럼에도 남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공감하게 되면 그 순간 남의 고통과 나의 고통은 투명하게 된다.  이 책에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우리들과 나누려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중국의 고통이 그의 고통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은 참혹하다고 해도 작가의 글쓰기는 버릴 수 없거나 버려서도 안 되는 희망이다 . 삶이 곧 글쓰기가 되며 그런 순간 또 다른 고통과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소통의 언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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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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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때문이었을까? 먹는 것을 볼 때마다 당장에라도 먹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알려진 맛집을 굳이 찾아나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꿀맛’도 부족해 ‘핵꿀맛’이라고 하지 않은가? 우리는 배고픔을 참을 만한 용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만큼 먹는 것은 삶의 시작이기 때문다. 어디 그뿐인가. 음식을 먹었던 그 시간만큼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먹방의 시대에서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꿀맛나는 음식을 먹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 그렇다.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이 먹는 게 비슷비슷하다. 먹방은 살아갈 방법이 아니다. 단지, 그냥 먹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황석영이 담아 낸 음식이야기『황석영의 밥도둑』은 요새 유행하는 먹방이 아니었다. 먹방의 관심사는 앞서 말했듯 꿀맛에 있다. 꿀맛이 아니면 ‘노맛’. 지금의 입맛으로 따지면 이 책은 분명 노맛에 가깝다. 하지만 노맛은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영영 식지 않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돌이켜보면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음식을 만든 사람들은 요리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음식의 낭만성을 찾고자하는 것은 궁핍한 삶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한지 모른다. 그러니 궁핍하고 절박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음식은 ‘밥맛’을 소박하게 채워주었을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특별한 밥맛을 가지고 있다. 특별함은 곧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움이 생각날 때마다 맨 먼저 우리 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추억이 앞선다. 혹 떠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떠나갈 사람에 대한 추억이다. 바로 추억의 존재는 어머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어 그때를 생각하며 음식을 만들어보아도 그 밥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눈물을 감출 수 없어 결국에는 ‘눈물맛’을 먹고야 만다. 그렇게 눈물맛을 먹고 나서도 또 무슨 그리움을 만들어줄 것처럼 멈추지 않는 눈물맛을 만들고 만다.

 

 

한편, 눈물맛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준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보면, 외로울 때, 힘들 때, 아플 때, 슬플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정든 가족들과 함께 나누었던 음식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음식들은 저자가 견뎌온 아픈 시간을 위로해주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삶의 한 소절씩 간절한 입맛을 내는 음식을 더욱 감사해한다. 비록 지금은 먹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음식이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먹지 않는 시간은 시간이 아니다.

 

 

이 책이 밥도둑이야기라고 해서 단순히 먹거리에 대한 여행에서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좀 더 애틋한 음식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까. 저자의 굴곡진 인생에 비한다면 나의 생활은 얼마가 될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런 만큼 저자의 음식에 대한 감정은 특별하다. 더구나 이런 음식에 대한 감정들이 장소 그리고 사람으로 이어지는 정서적인 유대감을 생각하면 내가 모르는 아득한 또 따른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홍어, 돼지 삼겹살, 김치 세 가지를 합쳐 별미가 되는 ‘홍탁삼합(洪濁三合)’처럼 음식, 장소, 사람의 절묘한 조합이 곧 ‘음식삼합(飮食三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황석영의 산문은 딱히 목적을 정하지 않고 발길이 이끌리는 대로 걷다가 문득 발견하게 되는 음식의 흔적들이다. 평범함 음식을 이야기하면서 그것들을 향해 발휘하는 감정선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골똘히 짚어보게 한다. 작가는 음식으로 세상과 교감하고 이해하면서 ‘무엇보다도 음식은 사람끼리의 관계이며, 시간에 얹힌 기억들의 촉매’라고 말한다. 그래서 작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자꾸만 새로워지는 느낌은 음식과 사람의 공통점은 ‘밥도둑’이라는 것이다. 음식과 사람이 밥도둑이 아니라고 한다면 더는 사랑할 수 없지 않을까?

 

 

인상파 거장 폴 세잔은 “자연은 표면보다 내부에 있다”라고 말했다. 일례로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위해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고 한다. 우리 문학의 거장 황석영도 음식이 썩을 때까지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음식을 먹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생생하여 먹방으로 굳어버린 꿀맛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음식의 가치를 ‘밥도둑’즉, 밥을 함께 나눠 먹는 것에서 찾는다. 이유인즉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은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음식적이면서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밥도둑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더할 수 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밥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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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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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니 때때로 나 자신이 낯설어지는 날이 있지요.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을 정도이면 외로움을 탓할 수만 없게 됩니다. 어느 순간 지친 어깨 위로 내려앉은 단단해진 무력감을 싹둑싹둑 잘라내고 싶어도 오히려 절망감을 키우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궁핍한 삶에서 배운 것이 있으니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우리 자신의 참 좋은 감정입니다. 참 좋은 감정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이 행복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못 견딥니다. 그래서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법륜 스님의 행복』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행복하려고 야단법석인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왜 행복 때문에 몹쓸 병을 앓는 건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행복이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무섭기도 합니다. 그만큼 행복해야만 하는 조급함 때문입니다. 행복하길 원하면서 생겨나는 또다른 문제는 행복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깊이가 없는 행복, 즉 단순한 행복은 욕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지 모릅니다.


스님의 즉문즉설(卽問卽說)에 따르면 단순한 행복이라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더라도 행복이 단순해지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자리(自利)’에서 비롯됩니다. 자기에게만 좋다는 이기심 때문에 행복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면에서 행복을 보면 자리와 이타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진실로 행복할 수 없으며, ‘자리리타(自利利他)’여야 비로소 온전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돕는 것이 나한테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행복은 남을 자기처럼 여길 때 가슴이 뿌듯하며 감동을 안겨줍니다.


『법륜 스님의 행복』을 읽으면 읽을수록 몸에 좋다는 것을 느낍니다. 스님의 맑고 담백한 목소리는 '온전한 행복'을 지니고 있어 까맣게 타 들어간 마음이 회복됩니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입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도 입맛이 좋다는 것만 먹은 사람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작 입맛이 없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입맛이 없을 때 스님은 말합니다. 행복은 입맛이 아니라 몸이 중심이라는 것을. 좀 더 말하자면 우리는 성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어제 행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마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삶은 무한반복 됩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으며 오늘은 내일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행복을 저버릴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행복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는 행복해야만 합니다. 삶은 영원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겸손함으로 오늘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해맑은 미소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두 가지 감정을 깨달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내 마음이 더 잘 보였습니다. 바로 ‘내려놓음’과 ‘20%’입니다. 부끄럽게도 내려놓음을 마치 현실회피인양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내려놓음은 마음의 집착을 비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현실회피는 마음의 집착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착의 질량은 가볍고 무겁습니다. 질량의 가벼움은 곧 ‘원(願)’이며, 질량의 무거움은 곧 ‘욕심(慾心)’입니다. 그리고 하루의 20%는 자기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비록 80%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더라도 20%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보람되고 재밌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일찍이 버트런드 러셀은 “객관적으로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만 행복하다고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혼자만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때 그것은 치유의 시간인 동시에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스님의 말씀처럼 행복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스님은 행복을 안내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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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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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는 왜 보는 것만으로 안 되는 걸까요? 언제나 뭔가를 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진심을 알 수 없습니다. 진심이 3차원이라고 한다면 지금 여기는 1차원입니다. 그러니까 1차원에서 3차원을 보기 위해서는 2차원을 거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우리는 1차원만으로는 진심을 볼 수 없습니다. 2차원에서 1차원을 보면서 느낌과 의미를 찾아낼 때 비로소 우리가 진심이라고 부르는 세계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진심은 상식의 반대편이 아니라 상식을 절실히 껴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김영하의보다를 읽으면 잘 설계된 우회로를 걸었다는 느낌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이 밝고 투명해지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정확한 생각을 한다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를 좀 더 살펴보면 독일의 사상가 크라카우어가 말한 대기실의 사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보편적 진실이 맨 끝이라고 했을 때 역사, 문학은 끝에서 두 번째, 즉 대기실입니다. 생각해보면 대기실은 이쪽에서 궁극의 진실이라는 저쪽으로 가기 위한 중간쯤이라 곧바로 철학으로 직행하고자 했다면 굳이 우리가 대기실에 머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중간이 없다고 했을 때 문자 그대로 진심을 알기가 막막하다는 것이 문제로 남겠지요.

 

그렇기에 우리가 대기실에 머문다고 해서 그 시간이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대기실에 들어오기 전의 어떤 경우들이 순간입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순간들이 생각되지 않거나 기록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대기실의 사유는 곧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는 순간들을 제대로 보기 위한 영원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삶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분명 어떤 순간은 진심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놓쳐버렸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된다면 후회스러운 얄미운 감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고 해서 생각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또 다른 모순입니다. 동시에 생각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살았던 것을 고백하면서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라고 확신을 보여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생각이 보이는 것에서 안 보이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면 글은 보이는 것에서 안 보이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과 맞닿은 진심의 경계, 그 속에서 찾아내는 작가의 독특한 산문은 생각의 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대화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우리 가슴 속에 불러일으킵니다.

 

작가에 따르면 insightoutsight의 차이는 무지에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 때 군중들을 격분시켰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을 들어보세요.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지"라는 말! 아웃사이트에서 보자면 가난을 조롱하는 것 같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가난에 대하여 무지했는지를 인사이트해보면 정말 쓸쓸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가에게도 어린 시절 부유한 친구로부터 이렇게 작은 집에도 슬리퍼가 필요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이란 지금에 와서야 순수한 호기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순수한 호기심이 어떤 진실을 위한 여닫이쯤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에 갇혀 버리는 무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아주 간단해보입니다. 삶이 지나치게 기계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 오히려 인간적이라고 하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요? 하나, 작가는 박훈정 감독의 영화 <신세계>을 봅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부자 아빠가난한 아빠를 모두 죽일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집니다. 이러한 의식은 곧 윤리적 생존이 아니라 생존의 윤리 때문입니다. , 작가처럼 정신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옷을 입는 감각이 아니라 옷을 입지 않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패스트패션으로 사라집니다. , 라캉이라고 하면 히스테리자라고 불렀을 것인데 자신의 욕망이 만족되지 않는 상태로 타인의 욕망으로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 말대로 인간이라는 작은 지옥을 보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 걸까요?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가 작은 지옥이라는 것을 모른 체 살다가 이제야 블랙홀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작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가 난데없이 불가능한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착시가 아닙니다. 엉뚱한 방법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p185)

 

이렇듯 작가는 5년 만의 독특한 산문집에 걸맞게 우주를 떠돌던 정신적 무중력 상태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력이 존재하는 지구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가 아니라 누구에게 본 것을 진심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단지 생각의 끝이 아닌 또 다른 대화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작가의 눈으로 진심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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