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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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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한 자루의 펜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말랄라, 유엔 연설 중에서


한강의『작별하지 않는다』는 한 권의 책입니다. 동시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한 자루의 펜입니다. 성근 눈발이 내리거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지는 소설을 읽으면서 작별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별은 삶의 연습이라는 것. 어느 누구도 작별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작별이 찾아오고, 그렇게 누군가는 떠나고, 떠나지 못한 사람에게 작별만큼 두렵고 쓸쓸함이 어디 있을까요? 그럼에도 작별의 고통을 끝내 작별하지 못합니다, 삶이니까요.


작별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마치 목공방에서 작업하다가 두 손가락이 절단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소설에서 그 주인공은 인선입니다. 제주 산속에서 홀로 지낸 그녀가 뜻밖의 사고로 병원에서 환자의 몸이 되자 그녀가 호출한 사람은 그녀의 친구이자 작가의 분신인 소설을 쓰는 경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경하는 광주 5.18을 다룬 소설을 쓰면서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악몽은 폭력을 직접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끔찍하여 살아나갈 이유를 상실한 나머지 매번 유서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인선의 전화가 없었다면 경하는 세상과 허무하게 작별했을 것입니다. 폭력의 괴물성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발가벗겨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절단된 손가락을 어떻게 봉합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절단된 손가락을 봉합하는 것으로 수술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수술보다 더 큼직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봉합된 부위를 3분마다 바늘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지 않으면 절단된 신경이 죽어 섞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삶은 고통 때문에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선에게 고통은 한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나가야 삶이 재생(再生)되었습니다. 반면에 경하는 삶을 한 순간 끝내는 것으로 고통을 재생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늘 생각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일상을 살아야 하는 경하의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경하의 자폐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선과의 접촉을 통해 3분마다 고통을 각인시킵니다. 그래야만 인생과 화해하며 다시 살 수 있으니까요.


인선의 마음 한 구석에는 커다란 과거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제주가 고향인 인선에게 커다란 과거는 바로 제주 4.3입니다. 이것은 국가가 제주 도민을 무참히 학살했던 폭력입니다. 개인이 아닌 국가의 폭력은 참혹할 수밖에 없으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최악의 상황들은 우리의 상상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는 부조리하게도 과거 속으로 쉽게 사라집니다. 


하지만 작가는 과거 속으로 침몰해가는 폭력을 끝까지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선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경하는 제주에 있는 인선의 집을 찾으러 갔다가 폭설로 인해 교통이 마비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가까스로 도착한 인선의 집에서 경하는 서늘한 충격을 받게 되는데 등신대 크기의 검은 통나무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습니다. 검은 통나무는 경하가 악몽속에서 보았던 ‘검은 나무’와 같은 이미지여서 망자들이 환생하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작가는 그중에 하나, 비극적인 제주 4.3이라는 역사적인 공간에서 살았던 인선의 엄마인 정심의 마음 속 응어리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주 4.3은 좁은 의미로 보면 죽음의 공간이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삶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정심은 실종된 가족을 찾는 노력을 반세기가 넘도록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책의 제목처럼 ‘작별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제주 4.3을 겪은 정심의 간절한 고백은 생각보다 가벼웠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고백을 듣고 있으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311쪽)를 깨달았습니다. 눈송이 같았던 슬픔, 기어이 지극한 사랑의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폭력적인 현실의 절망을 절망시키는 방법으로  비로소 유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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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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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작품의 강점은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배명훈(소설가)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이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 들어야 한다. 삶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면서 마지막 조각을 채우는 무수한 감정의 분위기. 어느 새 마음의 끝자락에 사랑이 매달렸다. 때로는 튀어 올랐다가 어느 순간 내려갔다. 그래서 사랑은 쨍하게 아름다운지 모른다. 포물선을 그리니까.

 

오랜만에 김초엽의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기이한 경험을 했다. 시공간적으로 떨어진 이야기에 쉽게 가닿을 수 없다는 막연함이 쨍하게 부서졌다. SF적 상상력이 신선하고 경이로웠다. SF가 그리는 세계는 먼 곳이며 따라서 우리 또한 먼 곳을 향하게 된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를 확대해보면 어떤 세상일까? 배명훈 소설가의 표현을 빌려보면 과학소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며 사람들 코앞으로 좀 더 가까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쨍하게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비록 흔한 포물선을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먼저 관내분실을 읽은 것은 2회 한국과학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SF가 그리는 미래사회를 둘러싼 문제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지금도 현실적인 문제이며 다가올 우리의 미래에도 여전히 불안함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미래의 도서관에서는 더 이상 책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책 대신 죽은 사람들의 정보가 데이터화 되었다. 그러니까 죽음을 저장하고 검색하는 마인드 도서관이다. 문제는 마인드로 검색이 가능한데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지금의 삶의 방식과 비슷하게 의미를 가지는 미래의 삶에서도 혼란스러움을 피할 수 없다. 만약에 혼란스러움을 야기하는 미래사회의 불투명함을 찾고자 하는 결론에 이른다면 죽음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분실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실험은 어떤 문제를 수사의 흐름 속에서 관계를 이끌어간다. 소설은 임신이라는 아주 민감한 시기에 지민이 죽은 엄마(은하)의 마인드를 잃어버린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와 관계를 깊이 파고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엄마에게 딸은 원죄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상처로 남는다. 이를 둘러싼 갈등으로 엄마의 비밀이라는 묵직한 질문을 하게 되고, “엄마는 마치 없는 사람 같았다.”(251p)는 답을 하게 된다. 엄마의 세계를 통해 우리 시대의 여성의 존재와 상처를 천천히 짚어보면서 ‘82년생 김지영이 선명하게 시선에 들어올 정도로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실존의 문제와 현대문명에 스며든 절망감 때문에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라는 단편에는 지구를 떠나 마을이라는 행성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을은 지구와 다른 세상이었다. 서로를 미워하지도 않고 간섭하지도 않으며 여성이라고,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한 행복을 누리고 산다. , 성인식을 통과해야만 한다. 바로 시초지(지구)로 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지구에는 아름다운 신인류와 그렇지 못한 비개조인으로 서로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구별 때문에 지구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순례자들이 지구로 떠나는 이유는 뭘까? 떠나는 것 못지않게 커다란 의문은 순례자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지옥을 좋아할 리 없다는 점에서 불행한 지구. 그런 만큼 순례자들이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어쩌면 순례라는 과정은 자기의 트라우마를 들여다보는 것인지 모른다. 마을에는 트라우마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행복하다. 겉만 보면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행복하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역설적인 의미에서 보면 살아 있음에도 사실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유령과도 같은 희미한 존재로 사는 게 과연 우리가 바라는 행복일까?

 

지구가 그토록 모순 덩어리라고 해도 외롭고 쓸쓸한 풍경이라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마을에서 아름다움은 절대적이다. 그러다보니 서로에게 고통이 없어야하며 어떠한 아슬아슬한 낭만적 감성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지구에서 아름다움은 상대적이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며 서로의 보이지 않는 눈물까지 헤아릴 줄 안다. 미래라고 해서 사랑이 유토피아와 같다면 거부감이 생길 것이다. 사랑은 어디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더러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보다 많이 행복할 것이다.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 사랑이 그냥 좋아진다.

 

미래에는 분명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텅 빈 우주를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문득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어느 과학자가 말했던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과학자에 따르면 태양은 오렌지 크기이며 지구는 모래 알갱이만 하다는 것. 모래 알갱이에 그 많은 생명체 살고 있으며 인간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주에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기적에 가깝다. 이러한 기적이 가능한 것은 우주가 벌레들이 파먹어놓은 구멍 뚫린 거대한 사과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구멍은 곧 우주의 공간과 공간 사이이며 이것을 연결하는 웜홀 통로의 발견으로 우주 개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웜홀 통로 이전에도 딥프리징, 워프 버블이라는 기술이 있었으나 어느 것 하나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인즉,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존재의 나약함이 훨씬 투명해졌다.

 

지구에 있는 안나가 불가능함을 모를 리 없다.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남편과 아들이 있는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에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눈물이 맴돌았다. 과학적으로 보면 그녀의 도전은 비현실적이게도 망상에 가깝다. 그러나 계속에서 망상을 듣고 있으면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 아닐까, 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숙명적인 고통을 차라리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같은 우주가 아니라 같은 하늘이라는 것, 사랑은 정확해야 한다. 그녀가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밖에도 스펙트럼, 공생가설, 감정의 물성,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단편들도 우리가 계속해서 지구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아 나선다. 특히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 나오는 판트로피(Pantropy)’가 아른 거렸다. 터널 프로젝트로 불리는데 우주 환경에 인간의 신체를 맞추는 것이다. 인간이 적응과 선택을 통해 진화해왔으니 우주 환경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얼마든지 우주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우주 환경에는 지구에 없는 것이 너무 많을 정도로 있다. 바로 무중력이다.

 

어쩌면 무중력의 삶은 인간이 바라는 환상일 것이다. 그러나 중력이 없다보니 작가의 말대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이해보려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는 게 무의미할 정도이다. 작가의 단편집을 읽고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쨍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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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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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새 작품을 시작하려는데 도저히 진전이 없을 때가 있다.……나는 일어서서 파리의 지붕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걱정하지 마. 너는 예전에도 썼고 지금도 쓸 수 있어. 네가 할 일은 단지 진실한 문장 하나를 쓰는 거야. 네가 아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하나 써봐.’ 그래서 마침내 진실한 문장 하나를 쓰고 나면 나는 거기서부터 계속 진행해나갔다.

-헤밍웨이

 

예전에 내가 자란 마을은 집집마다 소가 어슬렁거리는 시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빈 섬이 되었다. 고향이라는 인연이 차츰 사그라지면서 시골은 낯선 사람들이 잠깐씩 거주하는 빌라 단지가 되었다. 그래서 고향에 갔다 올 때마다 마음이 다쳤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더 이상 절망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골이라는 메시지는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얼마나 버티는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손홍규의『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을 곱씹어 읽으면서 자욱한 안개 속에서 흐릿했던 사연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모르게 꼭꼭 숨어 있었을 뿐 결코 사라지지 않을 사연들이었다. 만약에 사연들이 없다고 한다면 굳이 고향이라는 이야기꽃은 피지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꽃은 마음속에서 반짝반짝 핀다. 그러니 작가 말대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이 이야기들은 너무나 절망스러운데도 아름답다. 놀랍게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부 인사를 한다.


작가의 안부 인사를 받을 때마다 시골의 논밭이 떠올랐고, 가난했으나 가난을 모르며 재밌게 놀던 동네 친구들이 떠올랐고, 이른 새벽 아궁이에 불 피우며 밥상을 차리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에서야 ‘아짐찮은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될 정도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작가의 안부 인사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일상을 마주하면서 환상이 되고 만다.


그런데 아짐찮은 시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비밀이란 단순히 말하면 우리가 언제까지나 환상적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살 수도 없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환상이 아닌 일상적으로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일상은 소설이 될 수 있다. 작가의 표현을 빌려보면 ‘아름다운 소설’이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소설은 스스로 사전이 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빈틈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소설가에는 삶의 흔적들 모두가 문학과 연결되어 있다.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설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삶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들이다. 다시 말하면 삶이 곧 소설이며 소설이 곧 삶이다. 가령, ‘아짐찮다.’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사전이 아닌 삶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설은 우리네 인생을 담은 이야기꽃이다. 동시에 소설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회의하는 작가의 모습을 진솔하게 볼 수 있다.


매번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나로서는 작가 자신의 내면 고백을 들으면서 진실한 문장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제목인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었다. 살다보면 우리 몸 어딘가에는 고통이 박혀 있을 것이다. 몸이 애써 품고 있는 상처와 아픔을 들여다보면 몸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삶의 육중한 무게를 견뎌내면서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쳐 더욱 몸이 아프다는 걸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절망도 그러하다. 절망을 깊이 들여다보면 사랑에 대한 반성에 가깝다는 것이다. 해서 더욱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읽는 내내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 되어야 하는 너무 아름다운 삶의 비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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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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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믐달, 그러니까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는 세계라고 할까? 달에 관한 우리의 생각의 단순하게도 해가 지고 나면 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믐은 정반대다.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역설. 잠깐 동안이라도 이 세계를 볼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아마도 영혼을 온전히 탕진했을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기 보다는 오히려 어둠을 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믐달을 보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너무나 순수하다 못해 불안하게 된다. 장강명의『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속도감 있게 읽다보면 이러한 불안함의 정체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바로 시간의 뒤틀림 때문이다.


사실 패턴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소설 속에서 남자. 고등학교 때 학교 폭력에 시달린 나머지 동급생을 칼로 찌르고 평생을 전과자라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비록 정당방위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때 보통 가해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다름 아닌 패턴을 단순하게 하거나 느슨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달이 천천히 기울면 강물 또한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치료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은 그렇게 패턴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패턴의 결과에 대한 흔적을 조금씩 아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이렇게 패턴으로 눈이 멀어 있을 때, 작가는 덧없이 흘러가는 패턴을 흔들면서 균열을 일으킨다. 가슴에 ‘우주 알’을 품고서 말이다. 우주 알은 정체가 모호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시간의 시작과 끝이 없는 하나의 덩어리. 그런데 놀랍게도 우주 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간을 알게 된다. 지난 날 살인자에서 지금은 작가가 된 남자는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질긴 운명을 뚝뚝 끊어내지 못한다. 세상과 달리 어머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가 아님을 호소한다. 그럴수록 거짓말처럼 그것은 정당방위가 아니게 되는데…….


작가는 남자를 희생하면서 거짓말을 완성한다. 소설 곳곳에는 죄책감으로 인해 곧 폭발할 것 같지만 남자는 거짓말을 굳이 바꿀 마음도 없다. 서로를 온전히 알 수 없어 생긴 상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처는 계속되고 결국에는 또 다른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만다. 거짓말은 시간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아니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남자는 거짓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냥 마무리하려고 한다. 굳이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다.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르면 시간은 뒤틀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잘라진 걸 붙이고, 끊어진 걸 잇게 되는 그래서 고통을 멈추게 해주는 그믐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믐이 없는 삶이란 이미 굳어져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믐이 있다고 해서 과거를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만큼 되돌기보다는 새로운 모습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때는 미처 몰랐으나 지금에야 밝혀지는 진실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148).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거짓말이 누군가에게는 정당방위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정당방위가 아닌 삶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제대로 순서’가 없이 페이지가 섞이면서 말이다.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그토록 남자가 거짓말이라는 비극적 운명 앞에서도 그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사랑이란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잔인한 진실이 아니면 된다. 


도대체 이 무슨 사랑의 착시(錯視)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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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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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威風堂堂)!

삶을 둘러보면 지천벽(至天壁)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가? 만약에 이런 위풍당당함이 없다고 한다면 하늘에 닿는 다는 이름과 달리 몇 미터 높이의 절벽에 불과하다는 것에 적잖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지천벽과 절벽에서 느껴지는 것은 삶의 굴복이 아니라 오히려 지천벽이라는 곳이 왜 그렇게 특별한 장소가 되었는가라는 의뭉스러움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위풍당당함은 삶의 존재감이라고 충분히 여겨질 만하다.

 

 

모든 것이 무너지며 사라지는 시대에 성석제의『위풍당당』과 함께 봉래산 아래 강마을에 들어선 까닭은 "가족이 뭐나요? 아자씨?"라는 질문에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봉래산은 금강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즉 금강산은 봄에만 봉래산으로 불리는데 이곳 봉래산은 해발 사백여 미터에 불과한 사시사철 봉래산이다. 그런데 이곳 봉래산에 봉(鳳) 대신에 여섯 구성원들이 놀랍게도 한 가족을 이루며 산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어서 그들을 정작 가족이라 부를 수도 없다. 하지만 이곳 강마을에 들어온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더 이상 유전이나 혈연은 큰 의미가 없는 듯했다. 강(江)은 피(血)보다 강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들은 위풍당당한 식구가 되었다.

 

 

여섯 구성원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사연들은 하나하나 가족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가족은 과장된 도덕적인 굴레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부터 상처받고 병들고 시들어가는 생명을 되살려내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던 소희였으나 공개된 남편의 유언장에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이 없음을 알고 한낮 남편 인생의 ‘조화’(造花)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현주건물방화범’이 되었다. 이 소설의 사건을 만든 새미는 더욱 치명적이다. 가짜 아버지들에게서 성폭행을 당하는 욕망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밖의 소설 속 인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에게 굳이 죄목을 붙이자면 ‘가출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출범들이 정(情)을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감싸는 유사 가족이 된다는 고달픔은 일부분이다. 피가 끓도록 아픈 느낌은 밋밋할 정도다. 오히려 눈물이 날 정도로 웃음이 찐하다. 이유인즉 이 소설의 화자가 다름 아닌 ‘입담계의 아트이자, 재담계의 클래식’인 성석제이기 때문이다. 성석제만의 독특한 해학은 소설 속 사건들과 어렵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칠맛이 난다. 더구나 감칠맛의 정체가 ‘똥맛’이라고 할 정도로 꽤나 극적이다. 정말이지 똥맛을 제대로 알아야할 만큼 정신이 바짝 든다. 이러한 똥맛 때문에 강마을에 나타난 조폭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조폭이라는 위풍당당함으로 버텨온 세월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성석제는 이 소설에서 ‘운명으로서의 식구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위풍당당한 식구'일 것이다. 그러나 위풍당당하고 해서 꼭 바람(風)같은 평화를 고집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각이 생긴 느낌이라고 할까? 조폭들의 황당한 자기 모순을 희희화하면서 성석제는 '강 같은 평화'를 말하고 있다. 소리없이 흐르는 강, 이것이 강의 법도이며 진정한 위풍당당함 이다. 그래서 일까? 4대강을 파헤치는 불도저나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를 죽음의 군대라고 조롱하는 것은 또 하나의 위풍당당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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