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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빅퀘스천 - 우리 시대의 31가지 위대한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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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과학은 얼마나 의미 있을까? 사이언스 이즈 컬처(Science is Culture)라는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오늘날의 키워드는 과학은 문화이다. 지난 10년간 과학은 정치, 경제, 예술, 지성의 지표를 바꾸어 놓았다. 과학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인식을 바꿈과 동시에 인류의 가치 체계, 그러니까 지구 그리고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현대화하고 있다. 신념, 민주주의, 자유 시장 같은 개념들도 물론 세상을 바꿔 놓은 힘이다. 그러나 과학은 가장 보편적이고 압도적인 변화의 매개체다. 오늘날 과학은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이해하는 아주 기초적인 방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정식을 풀다보면 ‘1+1=2’라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과학 지식을 알게 된다. 과학의 역사란 체계적으로 과학 지식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의 역사에서 고민해야할 문제는 과학 지식의 우열도 아니며 과학 지식이라는 그 자체 개념에 몰입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학 지식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 것인지 탐구하는 사고방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실존의 의미를 합리적으로 구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KAIST 뇌과학자 김대식이 이야기하는김대식의 빅퀘스천은 우리에게 31가지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만물의 법칙은 어디에서 오는가등등. 그런데 통찰력 있는 질문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그의 1.4 킬로그램의 뇌는 과학뿐만 아니라 신화, 철학, 문학, 영화 등을 넘나든다.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 질문에서 즉, 삶의 의미이며 정의 등에 관한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과학 지식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는 것.

 

가령,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먼저 흄과 칸트가 지적한대로 논리적으로 필요것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질문이 18세기부터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라고 바뀌는데 그 답은 아주 단순할 정도다. ,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에 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는 랜덤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생물학적 사랑, 그러니까 정자와 난자라는 생식세포가 결합하는 유성생식이다. 반면에 사회학적 사랑은 지속적인 번식에 대한 욕망이며 철학적인 사랑을 또 하나의 나를 만나는 것으로 확장한다.

 

김대식의 빅퀘스천은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봤을 질문들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질문에 대한 답이 고리타분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저자 말대로 의미라는 것이 용도라고 했을 때 주어진 용도에 맞게 인문학적 사유를 충실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영원한가에서 보듯 다음과 같이 감각적 있는 자기성찰을 펼치게 된다.

 

민주주의는 자동차도, 기차도, 배도 아니다. 민주주의 자전거이며 비행기이다. 멈추는 순간 넘어지고 추락하는, 직접민주제.대의원제.대통령제 모두 언제든 과두정치와 독재, 무질서와 카오스로 변질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확률적으로 너무나도 불완전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엄청난 새로운 정보를 어떻게 폭 넓고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사고 능력이다. 단순히 과학적인 지식만으로는 복잡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를 보면서 우리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블랙홀, 웜홀을 생각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시간은 왜 흐르는가에 관한 맥락적 지식, 융합적 지식을 얻게 된다. 그만큼 과학은 문화라는 것이며김대식의 빅퀘스천을 읽으며 또 다른 우주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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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4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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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창세기6장에는 노아의 홍수가 나온다. 150일 동안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다. , 사람들이 악()해지자 하느님이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여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사람을 심판하는 데 있어 더 이상 물이라는 비유(比喩)는 통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메슈 화이트가 말한대로 헤모클리즘(Hemocly)’, 즉 피의 홍수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간의 종교, 이데올로기 적인 갈등이 잔인하게 피의 보복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현실이 폭력으로 인해 참혹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티븐 핑거는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우리의 비관론을 뒤집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폭력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방대한 통계적인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폭력의 논리는 문제될 게 없다.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선택에 따라 우리 또한 반격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에서는 생물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폭력성은 전략적으로 진화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가지 서사를 만들어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폭력의 방향의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이 다 옳다는 식으로 자기들을 합리화하는 방향에서는 같다. 이것이 도덕화 간극(Moralization Gap)이라는 것이다. 도덕화 간극은 자기 위주 편향이 좀 더 확대된 현상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 본성이 순수한 악의 신화(myth of pure evil)’이라고 하는 이유는 도덕화 간극에서 빚어지는 폭력의 행위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입장은 도덕주의자의 관점이다. 즉 착한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고 하더라도 가해자에게는 정당하고 합리적 반응이다. 이러한 순수한 악의 신화 탓에 악은 종교에서는 악마, 일상에서는 살인범, 납치범, 강간범, 마약범으로 구체화 된다. 따지고 보면 순수한 악의 신화에서 비롯된 폭력은 동물적 충동과 다를 바 없는 비인간적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표현을 빌리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폭력을 역사적, 문화적으로 통계로 분석하면서 그래프로 나타내고 있다. 지난 세기의 폭력이 현재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자세히 다루고 있다. 우리는 폭력의 그래프를 보면서 놀랍게도 폭력의 비율이 하향 곡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근거로 6가지 경향성을 주목하게 된다. , 비국가 사회에서 국가 사회로 넘어온 평화화 과정, 사회 규범의 발달에 따른 문명화 과정, 계몽주의가 이끈 인도주의 혁명, 국가 간 교역과 민주화를 통해 전쟁이 감소한 긴 평화, 집단 살해나 테러와 같은 소규모 충돌도 꾸준히 감소한 새로운 평화, 시민권, 여성권, 아동권, 동성애자 권리, 동물권 같은 권리 혁명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흥미로운 주제는 폭력 대 비폭력을 다루는 심리가 아닐까? 앞서 말했듯 우리 본성은 악마이거나 선한 천사이다. 폭력의 구조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포식한다. 그러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보복한다. 이러한 폭력에는 5가지 경향이 있는데 포식적 폭력, 우세 경쟁, 복수심, 가학성, 이데올로기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감정 이입, 자기 통제, 도덕 감각, 이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선한 천사가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에 있어 비례(proportionality) 감각으로 도덕적 균형이 요구된다. 선한 천사라고 해도 비례 감각이 불균형을 이루다면 오히려 폭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자기 통제를 벗어나면 자기기만(self-deception)’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빌 게이츠가 내 평생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자기 통제를 벗어난 말은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우아한 미개인과는 달리 20세기는 대량살육의 시대로 알고 있는 지금, 어느 누구도 폭력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에게 폭력이 감소했다는 것을 감정 이입하고 있다. 감정 이입은 전염성이 강한 만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더 나아가 우리 본성에 깃든 선한 천사의 날개를 활짝 펼치게 하며 인간적인 사회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이제 노아의 홍수라는 낭만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만큼 우리의 이성이 희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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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 종교, 신화, 미신에 속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라!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데이브 매킨 그림 / 김영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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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를 ‘눈 먼 시계공’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일까? 도킨스는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생명에 대해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가장 간결하고도 멋진 ‘지상 최대의 쇼’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시대 최고의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진화론을 근거로 하여 지적인 설계자를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것이 도킨스의 현실의 전부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도킨스의 날카로운 주장은 오히려 과학의 경이로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도킨스가 진화생물학자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이다.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놀라울 것이 너무나 많은 탓에 무감각해서 그렇다. 그러나 거꾸로 과학의 경이로움 즉, 새로운 무언가를 밝혀내는 것은 과학의 문외한들에게도 즐거운 학문이 될 것이다.

 

이번에 나온『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세대의 독자를 위해 가장 쉽고 가장 재미있게 풀어쓴 과학 입문서’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 입문서라고 해서 고통스럽게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읽는 것 못지않게 행간의 내용을 이해할 만한 시간이 감동적이어야 한다. 이 책이 어느 때보다 더 생동감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킨스의 명쾌한 문장뿐만 아니라 천재적인 일러스트 데이브 매킨의 황홀한 그림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한번쯤 고민해 볼만 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과학적인 질문에 친절하게 설명하면 데이브 매킨의 상징적은 그림은 한층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찬찬히 읽다보면 어느 순간 과학이라는 묘한 뉘앙스를 알게 된다. 단순한 흥밋거리로만 알고 있었던 현실의 모든 현상들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는데 과학은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나는 현실 세계에도 마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현실이기에 더 마법적이고, 우리가 그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에 더 마법적이다. 현실이야말로 가슴 뛰는 마법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저자의 핵심적인 주장에 따르면 현실은 다름 아닌 과학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법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과학의 경이로움은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에서 영향을 받는 가슴 뛰는 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도킨스는 왜 현실을 가슴 뛰는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게 된다. 바로 도킨스가 생각하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도킨스는 자신이 중요한 물건으로 분광기(spectrometer)를 선택했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시실은 정반대다. 분광기만큼 도킨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없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분광기는 무지개기계인데 뉴턴의 프리즘보다 세련된 물건이다. 뉴턴 이전 사람들은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를 만든다는 것을 알았지만 프리즘이 흰빛을 물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뉴턴의 생각은 달랐다. 뉴턴은 프리즘 세 개를 사용한 결정적 실험을 통해 흰빛은 여러 색의 혼합이고 프리즘은 혼합된 색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증명했다.

 

우리는 망원경에다 분광기를 달면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우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순간, 우주라는 것이 놀랍게도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우리가 현실을 아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우리의 오감으로 직접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소금은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우리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을 때 망원경이나 화석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향상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공룡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 때문에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셋은 좀 더 간접적인 방법으로 모형이다. 현실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모형을 만든 다음 그 모형이 옳다면 어떤 것의 존재를 믿어도 좋다. 가령, 유전자는 DNA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DNA에 관한 지식은 전부 모형을 통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DNA도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마법에 대해서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초자연적인 마법이다. 신화나 동화를 보면 주문에 의해 왕자가 개구리로 바뀐다. 하지만 이런 마법은 이야기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은 무대 마법이다. 무대 마법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은 저자가 주장하는 ‘시적 마법’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은 캄캄한 밤에 별들을 바라다보면서 숨 막히는 희열을 느끼는 ‘순수한 마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법은 깊이 감동하는 것, 신나는 것을 말하며 ‘내가 정말로 살아 있구나.’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도킨스는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현실과 마법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현실이고 마법인지 알게 된다. 현실이라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감각이 아는 것뿐만 아니라 아직 모르는 것들까지 현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과학은 어떤 것이 현실일 가능성을 찾는데 유용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말대로 어떤 것의 존재를 믿어도 좋은 경우는 오직 진정한 증거가 있을 때뿐이다. 진정한 증거는 우연한 과정과는 반대다. 만약에 어떤 것이 단순히 우연한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마법적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가슴 뛰는 마법은 ‘과학적 기법을 통해 이해되는 현실세계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가령, 세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라는 질문에 답하는 많은 기원신화들을 보면 신에게 매혹당하고 있다. 중국의 반고, 인도의 브라마 같은 창조 신화는 현실적인 것이 전부는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 그 너머를 상상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아름다운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쯤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창조자의 주체는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창조자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화가 삶의 다른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는 똑같지 않다는 것에 저자와 마찬가지로 실망하게 된다. 과학자의 눈으로 봤을 때 다른 의미란 곧 초자연적인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주의 시작은 과학적으로 ‘빅뱅’(Big Bang)이라는 인과(因果)의 원리로 입증할 수 있지 않은가!

 

저자는 다른 질문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현실적 상황 안에서 과학의 존재를 역설하고 있다. 먼저 현실적 상황에서 최초의 인간은 누구였을까?, 사물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지진이라 무엇일까? 기적이란 무엇일까? 이라는 질문에 대하여 ‘신화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그리고 나서 ‘정말로’, ‘어떻게’라는 강한 의문으로 과학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화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최초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다. 이유인즉 시간을 거슬러 185,000,000세대 전 할아버지의 모습은 놀랍게도 ‘네 발 달린 물고기’다. 그런가 하면 지진은 거인의 재채기가 아니다. 오히려 판구조론에 따라 대륙은 ‘덜컥’거리면서 움직인다. 끝으로 기적은 초자연적이며 순수한 픽션에 가깝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저자는 기적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반대한다. 문제는 초자연적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가장 안전한 해결 방법이라는 것이다. 즉 가장 어려운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무언가를 초자연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예 설명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그보다 더 나쁘다. 설명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구의 생명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억측과 비상식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무런 개연성이 없다. 그래서 일까? 도킨스의 마법, 종교․신화․미신에 속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라!는 과학의 마법은 옮긴이의 말처럼 얼마나 ‘이성적인 감동’인가? 앞으로도 도킨스의 가슴 뛰는 마법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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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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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맨 먼저 만나는 것은 뭘까요? 윌리엄 윌리워즈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셀레느니.’라고 노래했지요. 이렇듯 삶을 위로해주는 것들은 일곱 색깔처럼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어떤 사람은 책을, 어떤 사람은 가족이나 연인을, 또 어떤 사람은 종교를 통해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극복해 나갑니다. 그러나 아팠던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것보다 더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답을 찾으려는 ‘질문’(question)이지 않을까요?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지 제대로 바라보게 하는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잊혀진 질문』은 무지개(舞之開) 작가로 널리 알려진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인생에 관한 절실한 질문 24가지’를 나름대로 엮은 것입니다. 질문들은 하나같이 유한한 인간, 즉 3차원적 인간의 문제를 오직 3차원적으로 몇 번이고 해결하는 것이라면 앞서 말한 절실함은 허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질문들은 사실 단숨에 이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3차원적인 우리가 무한한 존재인 신(神)에 대해 뭔가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을 변명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믿음’ 혹은 ‘체험’으로 우리의 정신을 깨닫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잊혀진 질문’은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린 것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아주 절실한 문제가 되는 셈입니다.

 

차동엽 신부는 인생에서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두 가지 질문, 즉 ‘Big Q'와 'Rael Q’를 던지면서 이 책의 부제에 나와 있듯 ‘가슴을 뛰게’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Big Q는 오랜 시간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그다음 Rael Q는 동시대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물음입니다. 저자의 질문은 고통, 기도, 신의 유무, 창조와 진화, 과학, 악인과 선인, 용서, 천국과 지옥, 지구의 종말, 꿈 등등 여러 가지 입니다. 이러한 물음의 이면에는 신앙심이 깊은 저자의 고백이 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거부감이거나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저자는 질문의 근본을 성찰하기 위한 근거로 성경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특유의 ‘난문쾌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종종 사람의 탈을 쓴 짐승 같은 악인(惡人)들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고통의 무게도 만만치 않지만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을까?” 회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는 이 세상에 악인은 없다고 하며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합니다. 악인이란 생각과 행동이 100% 악으로만 구성된 사람인만큼 가끔은 선(善)을 행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악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을 선택하는 인간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악인 히틀러’는 ‘인간 히틀러’가 됩니다. 인간이라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에게 악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자유의지’라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에 따라 어떤 사람의 운명이 선과 악으로 결정되며 혹은 바꿀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마주대할 때마다 어느 순간 일명 ‘얌체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과연 참된 기도일까? 라고 고민해봤을 것입니다. 겉만 봐서는 ‘나쁜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기도는 그 응답과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로 위로이며 보상’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가르침을 『닥터 지바고』에서 다음과 같이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리라는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교리도, 교회의 전례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내면의 음악이 필요했다. 인간은 이러한 음악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작곡할 수 없다. 리라는 삶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이러한 음악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교회로 갔다. 그곳에서 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의 참된 의미를 혼동한 채 무조건적인 긍정은 오히려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복하면 성공할 것이다.”라는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비결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말 그대로 발생되고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라든가 긍정적인 희망으로도 좌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으로 모든 것이 고통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저자의 답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사랑’이라는 뜻 깊은 기쁨 덕분입니다. 온갖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 해답은 “Do you love me?(당신은 나를 사랑하오?)”를 거듭 되묻는 것입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치유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유기농법’내지 ‘태평농법’을 권하고 있습니다. 꿈을 이루는 가장 큰 과제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버티기’와 관련된 것으로 ‘계획농법’이 아닌 ‘drift’(표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우리의 영혼에서 '하늘 냄새'가 나고 있나요? 잊혀진 질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은 괴테의『파우스트』에서 죽음을 앞에 둔 파우스트가 하나의 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된 영혼을 깨달은 후 파우스트는 ‘무지개는 인간의 노력을 비춰주는 거울’과 다르지 않다고 생의 의지를 토닥거렸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저자 말대로 "나는 영혼이다."를 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면 사람 냄새는 물론 하늘 냄새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영혼이라고 해서 저 멀리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곧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힘으로 인해 우리의 칠흙같은 마음은 무지개로 찬란하고 기쁘게 빛나면서 삶의 용기와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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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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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동물을 구분해온 지 오래다. 둘을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인간만의 특징들은 하나의 개념이 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동물의 생태보다는 인간의 문화를 증명하는 셈이다. 가령, 500만 년 전 인간과 침팬지는 공통조상으로 분화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과 침팬지의 다른 점을 찾아보면 책 한 권이 되고도 남을 정도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한다거나 육식을 한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물론 인간의 우월성은 독단적인 경향이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의미한다. 찰스 다윈이『종의 기원』에서 “언어를 제외하면 아마도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발견”은 ‘불로 하는 요리’라고 말한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인간에 관한 흥미로운 발견은 진화 생물학의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자연선택을 통한 적응의 결과라는 것이다. 리처드 랭엄이『요리 본능』에서 제시하고 있는 ‘요리하는 동물’도 진화의 구도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인간이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기계문명 사회를 이룩하는데 있어 그 시작은 불을 발견하고 소유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러나 저자는 단순한 불의 소유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행위를 강조하는데 바로 불을 사용한 요리의 발견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요리 덕분에 만물의 영장으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추천한 최재천 교수도 우리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준 요리사를 가장 인간다운,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요리하는 동물이 되었을까? 저자는 다양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인류의 진화과정을 설명하는 ‘사냥꾼 인간 가설’ 혹은 ‘육식 가설’이 불완전하다고 한다. 인류의 진화 과정은 대략적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하빌리스→직립원인’의 단계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육식가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하빌리스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반면에 하빌리스→직립원인의 진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유인즉 직립원인의 약한 구강구조 때문이다. 상당한 육식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직립원인이 육식을 하기에는 빈약한 턱과 작은 치아가 문제였다. 진화과정에서 하빌리스는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였는데 저자는 ‘불로 요리하기’를 인간적인 존재로 도약하는 요인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화식(火食)가설’, ‘요리 가설’이다.



인간에게 음식이 중요한 것은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생존을 위한 일차적인 본능 때문이다. 음식은 신체의 에너지를 활성화시키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먹는 방법이 있다. 생식(生食-날 것)과 화식(火食-익힌 것)이다. 동물들은 야생의 먹을거리를 날 것으로 먹으면서도 잘 살아간다. 사람들은 이 점을 주목하면서 생식이 건강에 좋다고 여긴다. 채식주의자 에드워드 하월은 생식이 우리 몸에 좋은 이유를 “살아 있는 혹은 활성인 효소”가 이로운 작용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에 화식은 활성인 효소를 파괴하기 때문에 건강에 좋을 리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생식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음식에 들어 있는 효소는 체내의 소화나 세포 작용에 기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화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일깨워주고 있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음식의 화학성뿐만 아니라 물리성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단순히 생화학 반응을 기다리는 영양 용액이 아니라 치아에 씹히고 장에서 분쇄되어야 하는 끈적끈적한 3차원의 근육 덩어리’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변화는 섭식 행동에 있어 ‘최적 섭이(最適攝餌) 이론의 한계를 적절하게 파악할 수 있다. 동물의 섭식 행동이 단순히 보다 많은 열량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진화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외적으로 인간의 경우는 화식을 한다는 것이다. 화식의 장점은 날 것보다 소화하기 쉬우며 화식에 적응한 결과 별도의 이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별도의 이점은 첫째, 소화관이 작다는 것이다. 인간의 소화관 무게는 체중의 60%에 불과하다. 하지만 익힌 음식 때문에 열량의 밀도가 높아지고 소화가 잘 되는 덕분에 소화하는 에너지 소모량은 대형 유인원과 비교하여 10%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화식은 우리 몸이 해야 했을 일을 대신해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전체의 에너지 이용 효율이 높다는 것이다. 화식을 하면 에너지 손실이 일어나거나 불필요한 독소가 발생하는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에너지 측면에서 얻는 전체적인 이익과 비교하면 이들의 효과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화식에 적응하면서 생긴 인간의 변화 속도는 빨라졌다. 가령, 인간의 뇌의 용량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450cc→하빌리스 612cc→직립원인 870cc으로 증가했다. 뇌의 무게는 인체의 2.5%에 지나지 않지만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인체의 기본 대사율의 약 20%에 이른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 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는데 화식이 결정적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셋째, 인간을 자유롭게 했다. 이것은 화식의 진화가 인간이 만든 사회로 확장된 것이다. 에너지 효율이 낮은 동물은 끊임없이 먹고 배설해야 한다. 하지만 에너지 효율이 높은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경제에 있어 남녀의 성별 분업이 가능해졌다. 성별 분업에 따라 경제적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가정이라는 차원의 효율적인 경제로 전환될 수 있었다. 고고학자 카트린 페를레스는 ‘요리는 개인의 자급자족에 종지부를 찍는다.’고 말하면서 요리가 필요에 의한 사회적 행동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결혼의 일차적인 요인이 경제이고 성적 관계는 부차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요리 본능』을 읽으면서 요리가 진화의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만약 요리가 없었다고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맛없는 상상에 불과할 것이다. 야생으로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딱딱하고 질긴 그래서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작은 입 유인원’(화식)이 ‘큰 입 유인원’(생식)으로 신체가 변화한다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 되었다. 진화의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코 역행한다는 것은 아니다. 소화하기 쉽고 가공된 그리고 영양소가 주된 식습관에 따라 고도의 비만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이럴 때 음식 평론가 마이클 폴란이 주장한 ‘진짜 음식’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해봐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생존에 있어 또 다른 본능이다. 건강한 요리가 건강한 신체를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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