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4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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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창세기6장에는 노아의 홍수가 나온다. 150일 동안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다. , 사람들이 악()해지자 하느님이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여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사람을 심판하는 데 있어 더 이상 물이라는 비유(比喩)는 통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메슈 화이트가 말한대로 헤모클리즘(Hemocly)’, 즉 피의 홍수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간의 종교, 이데올로기 적인 갈등이 잔인하게 피의 보복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현실이 폭력으로 인해 참혹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티븐 핑거는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우리의 비관론을 뒤집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폭력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방대한 통계적인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폭력의 논리는 문제될 게 없다.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선택에 따라 우리 또한 반격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에서는 생물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폭력성은 전략적으로 진화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가지 서사를 만들어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폭력의 방향의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이 다 옳다는 식으로 자기들을 합리화하는 방향에서는 같다. 이것이 도덕화 간극(Moralization Gap)이라는 것이다. 도덕화 간극은 자기 위주 편향이 좀 더 확대된 현상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 본성이 순수한 악의 신화(myth of pure evil)’이라고 하는 이유는 도덕화 간극에서 빚어지는 폭력의 행위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입장은 도덕주의자의 관점이다. 즉 착한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고 하더라도 가해자에게는 정당하고 합리적 반응이다. 이러한 순수한 악의 신화 탓에 악은 종교에서는 악마, 일상에서는 살인범, 납치범, 강간범, 마약범으로 구체화 된다. 따지고 보면 순수한 악의 신화에서 비롯된 폭력은 동물적 충동과 다를 바 없는 비인간적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표현을 빌리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폭력을 역사적, 문화적으로 통계로 분석하면서 그래프로 나타내고 있다. 지난 세기의 폭력이 현재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자세히 다루고 있다. 우리는 폭력의 그래프를 보면서 놀랍게도 폭력의 비율이 하향 곡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근거로 6가지 경향성을 주목하게 된다. , 비국가 사회에서 국가 사회로 넘어온 평화화 과정, 사회 규범의 발달에 따른 문명화 과정, 계몽주의가 이끈 인도주의 혁명, 국가 간 교역과 민주화를 통해 전쟁이 감소한 긴 평화, 집단 살해나 테러와 같은 소규모 충돌도 꾸준히 감소한 새로운 평화, 시민권, 여성권, 아동권, 동성애자 권리, 동물권 같은 권리 혁명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흥미로운 주제는 폭력 대 비폭력을 다루는 심리가 아닐까? 앞서 말했듯 우리 본성은 악마이거나 선한 천사이다. 폭력의 구조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포식한다. 그러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보복한다. 이러한 폭력에는 5가지 경향이 있는데 포식적 폭력, 우세 경쟁, 복수심, 가학성, 이데올로기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감정 이입, 자기 통제, 도덕 감각, 이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선한 천사가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에 있어 비례(proportionality) 감각으로 도덕적 균형이 요구된다. 선한 천사라고 해도 비례 감각이 불균형을 이루다면 오히려 폭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자기 통제를 벗어나면 자기기만(self-deception)’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빌 게이츠가 내 평생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자기 통제를 벗어난 말은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우아한 미개인과는 달리 20세기는 대량살육의 시대로 알고 있는 지금, 어느 누구도 폭력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에게 폭력이 감소했다는 것을 감정 이입하고 있다. 감정 이입은 전염성이 강한 만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더 나아가 우리 본성에 깃든 선한 천사의 날개를 활짝 펼치게 하며 인간적인 사회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이제 노아의 홍수라는 낭만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만큼 우리의 이성이 희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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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 인문학자 8인의 절망을 이기는 인문학 명강의
강신주 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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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다보면 어떤 순간 숨이 멈춰 버릴 때가 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인재(人災)들이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의 통증은 심하다. 슬픔으로 치유할 수 없는 분노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만 현실을 벗어나 환상을 보게 된다. 적어도 환상에서는 인재는 일어나지 않겠지, 절망보다는 희망적으로 숨 쉴 수 있겠지, 라는 기대감이 없지 않다. 한편 현재에서는 인문(人文)이라는 시대정신을 찾아 나서고 있다. 흔히 인문이라고 하면 문(), (), ()을 말한다. 물리학이나 생태학이 사실적 차원을 다룬다고 한다면 인문학은 사실적 이해와 진실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쉽게 인문(人文)을 풀이하면 인간()이 만든 무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8인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를 읽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성난 얼굴이 뭔가 돌직구를 던져 줄 것만 같았다. 적어도 인문학자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이란 현재의 상태에서 어떤 불만족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최후의 인간에게는 모든 게 적당하면 그만이지 싶다. 하지만 인문학자는 성난 얼굴의 인간에 가깝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로 분노한다. ‘말할 수 없다(unsayablue)’라고 침묵하지도 않는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은 성난 얼굴에 대해 진보적이라고 너무 빨리 이해를 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진실을 숨기기 위한 성급한 주장이 아닐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정여울이 말한 대로 성난 얼굴은 사악하지 않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한 자들의 폭력에 맞서 사악하게 맞서는 것은 사악한 얼굴이지 결코 성난 얼굴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에 맞서 악으로 되갚는 것은 사악한 얼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악에 맞서는 선의와 용기와 실천이다. 이쯤에서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원이나 해경은 세월호 참사라는 악에 맞서 선의와 용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구조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책임을 회피했다. 이유인즉 그들은 에픽테토스가엥케이리디온에서 말한 외모, 평판, 재산 같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에 골몰했다. 그 때 그들이 지혜, 용기, 우정, 신념이라는 나에게 달린 것을 실천했다고 한다면 오디세우스가 되었을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을 승리한 영웅이다. 그렇다고 이현우가 지적한 대로 우리가 오디세우스의 분신이 되려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욕구와 달리 끝이 없다. 결과적으로 무한한 욕망은 불안하다. 오늘날에도 오디세우스가 매력적인 인간으로 불리는 것은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겪는 시련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오디세우스는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했다. 놀랍게도 운명에 대한 고미숙의 접근은 신체적이다. 고미숙은 운명이란 신체에 새겨진 욕망의 지도라고 했다. 욕망의 계보학에 있어 신체와 존재의 간격을 고민하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신체에 무지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앞서 말했듯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이 대단했던 만큼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기성세대들에 대하여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또렷했다. 그런데도 기성세대들은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싸움판을 벌이고 있다. 정말이지 인간다운 감정보다는 허망함이 다시금 몰려와 우리를 산산조각 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강준만이 권력 중심적인 인정투쟁 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그 말이 너무도 생생했다. 권력 중심적인 인정투쟁 문화가 일으키는 증오의 소용돌이가 이 세상을 얼마나 각박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초강력 일극주의, 승자독식, 속도주의, 연고주의, 미디어 당파주의라는 병폐는 우리 사회를 시스템적으로 부패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일상이 사각(死角)이다. ()진 세상에서는 절망(切望)뿐이다. 희망()을 끊어()버린다. 절망은 지옥이라는 머릿속의 관념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의 고통이다. 이런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이렇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사각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고 있다. 처음에는 사각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위험을 해결하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이 절망감으로 역류하여 결과적으로 프로이트가 문명속의 불안에서 표현한 대로 망망대해에 있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럴 때 성난 얼굴로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으로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난 얼굴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성난 얼굴은 너무나 정직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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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1 - 오늘을 위한 성찰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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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의 법칙(Murphy’ law)이 있다. 1949년 항공 엔지니어 에드워드 머피가 충격완화장치 실험이 실패로 끝나자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항상 잘못된다”고 말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는 머피의 법칙을 생각할 때마다 재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잘못될 가능성이 항상 잘못 일어날 확률은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는 나쁜 상황에서는 일어날 확률이 1퍼센트라고 하더라도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는 것을 머피의 법칙에 따라 재수가 없다고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덕일의 『고금통의』를 읽었다.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춘 역사학자(오마이뉴스)’, ‘역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해럴드경제)’는 추천사에 걸맞았다. 저자는 1000여개의 광범위한 역사적인 순간을 다시 읽으면서 불멸의 지혜를 생각한다. 또한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책임감 있게 사회비평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읽다보면 제목이 말해주듯 ‘고금통의’를 하게 된다. 고금통의(古今通義)는 『사기(史記)』「삼왕세가(三王世家)」에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관통하는 의(義)는 같다’는 의미다.

 

온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눈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분노했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서로 간의 이권(利權)으로 설전(舌戰)을 펼치고 있다. 이익(利益)에 눈 먼 사람들에게서 도덕심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할 짓이 못될 정도로 부끄러울 지경이다. 소통을 해야 하는 관계에서 도덕심을 배제하고 그 빈자리를 이익으로 채우고 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경계하기는 마찬가지다.

 

이(利)가 편법이라고 한다면 의(義)는 원칙을 뜻한다. 『고금통의』를 통해 견리사의(見利思義)를 궁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먼저 편견이 확고한 역사 인식에 대한 근거를 밝힌다. 즉, ‘석기 시대 문명은 국가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한다. 석기 시대는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고정 관념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남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잉카 제국, 마야 제국 등을 보면 우리의 역사 인식은 방향감각을 잃고 만다. 잉카 제국, 마야 제국 등은 석기 시대에 대제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세계사의 상식이 우리나라에서만 통하지 않고 있다. 누가 봐도 거대한 역사적 오산이지만 ‘청동기 시대=국가 성립’이 역사적인 공식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일제 식민 사학의 고정된 틀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관피아에 대한 충고도 빼놓을 수 없다. 관피아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사회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와 마피아가 결합한 관피아는 청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기의『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와 있듯 ‘낮도적(晝賊)’이라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관피아는 우리 사회에서 업종을 불문하고 다양한 형태로 검버섯처럼 퍼져있다. 정약용은『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지금 도둑질로 재물을 얻는 데 무릇 도둑질로 얻은 만금(萬金)은 정당하게 얻은 일글(一金)을 당할 수 없다’고 했다. 관피아를 볼 때마다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리고 공직자 후보들의 인사청문회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사람’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라는 걱정이 앞선다. 일찍이 공자도 ‘그 사람이 있을 때 정치가 일어서고 그 사람이 없으면 정치가 주저않게 된다’고 말했다. 최한기도『인정(人政)』에서 ‘만 마디 말로써 백성에게 선(善)을 권하는 것은 한 사람의 현인(賢人)을 천거해 선을 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공직자 후보들은 하나같이 ‘신상털기식’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하고 말았다. 자격 검증에서 신상털기도 통과하지도 못한다고 딴죽을 걸겠지만 인품과 실력을 갖춘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그래야 민심(民心)을 얻을 수 있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역사를 앞선 수레바퀴라는 뜻으로 전철(前轍)이라고 했다. 때로는 수레바퀴가 엎어진다고 해서 복거(覆車)라고 했으며 이를 경계하는 의미로 ‘복거지계(覆車之戒)’라고 했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언젠가는 금(今)의 사(事)를 고(古)에 비춰서 의(義)를 찾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을 산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만든 역사적 구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는 머피의 법칙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역사와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 한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재수가 있고 없고는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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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6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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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는 양 이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래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최근에 가진 경험과 공포를 고려하여 인간 조건을 다시 사유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사유의 문제이다. 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이라 생각된다.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정민의『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공허한 진리를 반복하지 않았다. 18세기 한(朝鮮) 지식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북학파(北學派)로 불리는 몇몇을 아는 정도라고 답할 수 있다. 화이(華夷)의 명분론에 맞서 북학은 실학(實學)이었다. 하지만 18세기 한중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상당히 멀어져 허학(虛學)에 가까워진다. 18세기 중(靑代) 지식인에 관해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18세기 한중 지식인들의 필담(筆談)과 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드넓은 세계를 담론이 아닌 팩트(fact)로 다양하게 쏟아내면서 접근하고 있다. 이유인즉 팩트의 학문은 어느 순간 비월(飛越)하기 때문이다.

 

 

문예공화국(Republic Letters)의 운명! 저자가 보여주는 이러한 학문적 결실은 몸으로 쓴 결과다. ‘무엇을 말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는가’에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문예공화국이란 ‘라틴어를 공통 문어로 나라와 언어의 차이를 넘어 인문학자들이 편지와 책으로 소통하던 아름다운 지적 커뮤니티를 일컫는 상상 속의 공화국’(p5)이다. 저자는 한문을 공통 문어로 쓰는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에 관심을 가지고 지난 1년간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저자는 후지쓰카 지카시의 구장(舊藏) 도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저자에게 후지쓰카는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을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출발점이었다. 당시 조선의 학문이 송명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편견에 맞서 그는 ‘청조학으로 가는 우주정거장’이라는 학문적 엄정함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이 책을 통해 후지쓰카의 학문적 자존감을 엿볼 수 있었다. 저자도 고백하고 있듯이 그는 쓰기보다는 읽기를 사랑한 학자였다. 어디 그뿐인가? 빨간 펜 선생으로 불렸던 그의 메모벽은 미련할 정도여서 일종의 책속의 지휘관이라는 범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잘 정리된 그의 방대한 소장서를 빌려보는 것이 감동스럽다는 저자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다. 오죽 했으면 독서망양(讀書亡羊)을 깨닫는다고 말했을까? 하지만 이 책을 좀 더 읽으면 책이 책을 부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을 불러내는 그 풍요로움과 다채로움을 알았을 때, 화려한 학문의 꽃을 빨리 피우기보다는 지루한 학문의 뿌리를 오래 다지려고 했을 때, 그의 붓끝은 특별한 진실을 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저자에게 후지쓰카는 끊임없이 살아있는 지식인이었다. 후지쓰카를 말하면서 과거와 현재라는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저자에게 그는 언제나 현재이다. 그래서 그들의 학문적 인연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문예공화국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한중 지식인들이 필담과 편지를 통해 서로 간의 그리움과 애틋함, 안타까움을 남겼다. 그들의 사귐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천애지기(天涯知己)였다. 지기는 ‘비아관아(非我觀我)’였다. 즉 나를 넘어서 안목으로 나를 객관화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들에게 지(知)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문벌(文伐)공화국이라는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북학(北學)이 아니라 북벌(北伐)로 첨예하게 대립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소통망 즉 문예공화국을 복원하면서 ‘문화는 선(線)’이라고 표현한다. 저자의 문화관은 간결하면서도 명쾌하다. 하지만 결코 단순하지는 않다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문화가 선이라고 하면 방향성을 있을 것인데 단선적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문화는 소통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화는 그들만의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는 모든 방향에서 선이 교차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문화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교차하는 리듬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19세기 문예공화국이 어떤 리듬인지 더욱 기다려진다. 그 기다림 동안에 이 책을 몇 백 년 소장하기 위해서 책 속에다 은행잎을 넣어두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싶다. 충분히 사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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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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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관문(關門)을 마주하게 된다. 일반적인 선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문(門)을 통과해야만(關) 한다. 가령,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놓아야 하는지, 마는지 절박한 현실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만약에 손을 놓는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렇게 사는 것보다 죽음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안간힘으로 절벽에 매달려 있으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렇게 어렵사리 관문을 통과하게 되면 박수를 받게 될 것이다. 관문은 우리가 ‘큰 일’을 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뜬금없이 들리게 될 지도 모른다. 즉,

 

석상 화상이 말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또 옛날 큰 스님은 말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록 어떤 경지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아직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가야, 시방 세계가 자신의 전체 모습을 비로소 드러내게 될 것이다.”

『무문관』 46칙, ‘간두진보(竿頭進步)’

 

무문관. 글자 그대로 ‘문이 없는 관문’이다. 관문이 미로(迷路)하고 한다면 문이 없으니 관문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문이 없다고 한다면 굳이 문을 찾을 까닭이 없으니 쉽게 통과하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이 없는 관문을 통과하기가 용이한 것은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오히려 문이 있는 게 쉽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의 상식으로 한 번 무문관에 다가섰다가는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이 될 것이다. 무무관을 우리의 상식으로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유인즉, 무문관은 거대한 화두(話頭)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두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스님들이다. 즉, 화두는 스님들이 부처가 되기 위한 불교적 관문이다.

 

강신주는『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에서 통찰력이 돋보이는 질문을 하고 있다. 저자는 대학 강단이 아닌 거리에서 동서양을 넘나드는 철학적 지식인이다. 이 책은 저자가 『무문관』을 새롭게 해석하여 엮은 것이다. 아마도 저자의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무문관』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한 평생을 업(業)으로 살았을 것이다.『무문관』은 1228년 무문 스님이 가장 압축적인 화두를 48개 선별해서 해설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무문관』이라는 화두집을 풀어 쓰며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러면 이 책 또한 『무문관』처럼 성불(成佛)하기 가르침일까?

 

흔히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조주 스님은 ‘개(犬)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당혹스러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개가 중생이라고 하면 앞뒤가 맞지 않다. 그러나 개에게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당혹감이 일체 사라지고 만다. 업식성은 일종의 ‘알라야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업식성이란 집착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평범한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면 업식성은 불성과 반대가 된다. 우리가 불성이 있다, 혹은 없다는 맥락에서 접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업식성을 고민해보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유를 찾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부처가 되었다고 관문을 통과한 것은 아니다. 이제야말로 무문관을 통과해야 한다. 즉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라!’라는 임제 스님의 사자후를 통과해야 한다. 임제 스님의 화두는 자기가 부처(싯다르타)가 되었다고 한다면 싯다르타의 페르소나에 불과하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싯다르타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 즉, 단독자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단독자를 남의 마음이라기보다는 나만의 마음, 단독적인 마음이라고 본다.

 

강신주가 풀어 쓴 이 책의 48개 화두는 과거를 지향하지 않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무문 스님이 말한 ‘무(無)’라는 글자를 뚫어야만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무문 스님이 말한 무는 부정을 위한 부정도 부정을 위한 긍정도 아니었다. 무는 곧 긍정을 위한 부정이었다. 이로 인해 무라는 말이 얼마나 거대한 화두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상식파괴자여서 그런 것은 아니라 사자의 위엄과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아울러 가진 단독자를 비로소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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