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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신이 있다? 신이 없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것은 사회를 이루는 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에 대해 제대로,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파스칼처럼 내기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파스칼은『팡세』에서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에게 수지가 맞는지를 따져보았다. 그리고 내기라는 확률론으로 신이 있다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다. 파스칼 말대로 종교는 '존중할 만하다, 인간을 올바르게 알았으므로. 사랑할 만하다, 참된 행복을 약속하므로.' 그러나 기독교를 옹호하면서 성서학의 핵심이 되는 ‘숨은 신’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아 달갑지 않았다. 또, 하나님의 심판, 즉‘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라고 하는 따끔한 두려움은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초월적 신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삶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탓에 때로는 우리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인과의 원리로만 생각한다면 삶의 자잘한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나약한 인간의 변명에 불과하다.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이나 삶을 초월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삶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초월이라는 가능성의 힘을 이용하여 인생을 좀 더 깊은 심연에서 이해하고자 열망한다. 하지만 문제는 절대자로부터 삶의 위로와 믿음을 구하는 것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이라는 데 있다. 이것이 가장 종교적인 구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 가장 정상적인 삶의 모델은 뭘까? 필 주커먼은『신 없는 사회』에서 제목 그대로 ‘신 없는 사회’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 내리고 있다. 저자 말대로 요즘 세상이 어느 때보다 종교적이라 신이 없다, 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은 망상에 가까울 만큼 텅 빈 생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종교적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읽으면 신이 없다, 라는 것만큼 단단한 생각은 없다고 할 정도다.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는 마치 다이아몬드 같다. 다이아몬드는 가장 단단한 물체인데 놀랍게도 속은 텅 빈 상태다. 또한 무색에 가까울수록 더욱 빛이 잘 투과되어 찬란한 무지갯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물질의 가장 좋은 결과를 얻어내듯 신 없는 사회는 삶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저자는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현실 속에서 삶의 결정체가 가장 좋은 결과가 나타난 곳으로 덴마크와 스웨덴을 주목했다. 이유인즉 이 두 나라는 비종교적이다. 종교적 열정이 그다지 없기 때문에 신 없는 사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두 나라가 가장 살기 좋고 쾌적한 곳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깨닫게 해준다. 흔히 종교가 없다고 한다면 현실이 지옥 그 자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강요한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하거나 죄악으로 도덕을 지키게 한다. 하지만 두 나라를 보면 정반대다. 두 나라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도 ‘매끈하고 공정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오히려 청교도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운 가장 종교적인 미국이 종교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미국의 종교적인 갈등과 불신이 암묵적 계속 되고 있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고민이 아니라 세계적이다.
저자는 가장 종교적인 결과가 나타난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을 비교하면서 종교 없이도 세상이 안정적 잘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상식으로 종교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교회를 간다든가, 기도를 드린다, 라는 종교적 활동을 한다는 게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런 어려움을 참고 종교적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은 그런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화 되어 있는 독특한 사회다. 가령, 두 나라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심지어 구원이나 부활도 믿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들이 냉소적이거나 염세적이라 그런 것일까?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으며 그들이 ‘합리적인 회의주의자’라는 것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들의 종교적 무관심이라는 모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이 온화하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간의 좋은 점들을 믿는다. 그 좋은 점들이야말로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것, 노인을 보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야말로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다.(p 27)
돌이켜보면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될 규칙이다. 그래서 반종교적인 사람은 규칙을 어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종교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절대적인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으며 좋은 규칙은 조금은 어겨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곧 ‘초월적 종교’와 ‘문화적 종교’를 구별하게 한다. 이 책의 의도대로 죽은 뒤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인터뷰를 통해서 두 가지 종교적 믿음을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 즉 초월적 종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천국에서 두 팔 벌려 나를 기다리실 거예요.” 반면에 문화적 종교의 입장에서는 “그냥 죽는 거죠.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살아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문화적 종교가 단순히 세속주의자들이 자기 이득만 생각하면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문화적 종교는 문화적 관성으로 ‘그냥 항상 해오던 일’이다. 이러한 까닭은 문화적 종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기 정체성 또는 집단 정체성이며 다른 하나은 명목상의 종교 활동이다. 나머지 하나는 무신론자에 대한 반대다. 먼저 자기 정체성 또는 집단 정체성을 살펴보면 초자연적인 요소에 대한 믿음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명목상의 종교 활동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종교적 신앙 없이도 각종 의식과 명절, 통과의례 등에 참가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무신론자에 대한 반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뭔가 커다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저자는『신 없는 사회』에서 덜 종교적인 나라에 대한 깊은 호기심으로 종교적 모순과 한계를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일까? 그동안 종교에 대해 ‘불편한 백지상태’였다면 앞으로는 덴마크, 스웨덴 사람들처럼 ‘편안한 백지상태’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편안하다는 것은 옮긴이의 말처럼 신이 없는 사회라고 해서 정말로 신의 존재가 아예 없는 사회가 아니라 ‘종교의 힘이 약한 사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를 믿지 않아도 내 가치관이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초월적 종교에 대한 불완전한 믿음보다는 ‘문화적 종교’라는 세속주의가 가장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하겠다. 종교의 위기와 사회적인 문제가 서로 겹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과 대답은 우리에게 ‘문화적 종교’를 성찰하게 한다. 이것이 종교적인 세상에서 삶의 행복을 위한 필 주커먼의 가장 순수한 긍정이며 매혹적인 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