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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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여행자를 5등급으로 나눠 이야기합니다. 그중에서 5등급의 여행자는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인생의 문제는 권태로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해결책 또한 권태로운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마치 백과사전을 보면서 맞춤형 지식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민이라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라는 굴레 때문에 어느 순간 이방인이 되어 제자리를 맴돌고 맙니다. 


하지만 에릭 와이너의『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새로운 여행입니다. 에릭 와이너는 5등급의 여행자의 시선으로 인생의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것을 유쾌하면서도 명쾌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지혜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철학은 그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철학자행 특급열차를 타고 14명의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14명의 철학자들을 만나는 순간은 인생의 단계에서 머무르는 간이역입니다. 만약에 간이역에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지나간다면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명제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으로 소크라테스와의 여행이 끝났다고 하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오래된 지혜를 오늘날 ‘미친 지혜’로 대화를 이어나갑니다. 미친 지혜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합니다.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질문왕’이 되었습니다. 질문왕이 되려면 질문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좋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순간 놀랍게도 침묵하게 됩니다. 침묵은 발화의 부재가 아닙니다. 저자의 발칙한 생각에 따르면 ‘인정사정없는 자기 심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간디처럼 싸워야 합니다. 간디의 이름을 떠올려보면 싸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간디는 어느 누구보다도 비폭력을 주장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은 폭력에 맞서 비폭력으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저자는 간디를 예찬하는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큰 싸움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싸우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티아그라하(진리의 힘)’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힘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능동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의명분을 위해서 자신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의명분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결코 죽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좋은 싸움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밖에도 루소처럼 걷고 소로처럼 보고 쇼펜하우어처럼 듣습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처럼 즐기고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으며,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며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다가 삶의 종착역에 이르러 몽테뉴처럼 죽는 법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한평생 잘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선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최악을 견디는 게 99%입니다. 이럴 때 에릭 와이너와 여행할 수 있는『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동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철학은 우리 삶의 꼭 필요한 GP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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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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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려버리면 얼마나 통쾌할까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걱정을 하다 보니 심리적인 부담감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놀 때 놀아야 하는데 제대로 놀지 못하고 있지요. ‘놀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라고 합니다. 어쨌든 무슨 일이든지 즐겁게 해야 하는데, 정작 오늘내일이 지루하고 답답할 지경입니다.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편히 자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가슴이 숨 막히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찌근거리고 아픈 나머지 제대로 잘 수도 없습니다. 불면의 고통을 참아내려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최후로 버텨 봐도 속수무책입니다. 끝내는 이불을 발로 확 걷어차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번 당하고 마는 ‘이불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이불킥을 하지 않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먼저 이불킥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불킥을 하게 되는 과정은 아주 단순합니다. 몸에 난 상처는 눈에 보이니까 약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마음이란 게 워낙 복잡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의 병이 자신도 모르게 쌓이고 쌓입니다. 어떻게 아프냐고 대답을 요구하더라도 왜 아픈지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이불킥의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이야기하다보니 몸을 조심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합니다. 몸이 추우면 이불을 덮다가도 몸이 뜨거워지면 이불을 걷어차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이 마음의 온도에 따라 얼마든지 차가워지고 뜨거워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민을 가지고 이불킥의 심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불킥의 대부분이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5단계’로 올라갑니다. 바로 생리 욕구, 안전 욕구, 애정. 소속 욕구, 자기 존중 욕구, 자기실현 욕구입니다. 앞 단계의 낮은 욕구에서 다음 단계의 높은 욕구로 올라가게 되는 모양으로 피라미드와 같습니다. 높은 욕구일수록 성공 가능성이 낮습니다. 이러다 보니 욕구에 대한 불만이나 회의가 생겨나며 부족한 것을 꼭 획득하려고 합니다. 매슬로의『존재의 심리학』따르면 ‘결핍동기’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결핍동기에 집착할수록 두려움과 의심으로 ‘흐릿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시각각 감정이 바뀔 때마다 이불킥을 날리며 감정을 토해내는 것은 흐릿한 렌즈를 깨뜨리는 것일 뿐 결코 건강한 치료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슬로가 주장하고 있는 ‘성장동기’입니다. 성장동기는 결핍동기와 달라서 뭔가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흐릿한 렌즈가 아닌 선명한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흐릿한 렌즈는 우리의 이성을 혼란스럽게 해서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하지만 선명한 렌즈 덕분에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을 더욱 효율적으로 지각하고 현실과 더욱 편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불편한 관계를 가진다고 하면 우리가 자아실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현실과 편안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행복해보입니다. 이렇듯 성장동기는 우리가 가지고 있으나 드러낼 수 없는 잠재력을 최고로 빛나게 하기 때문에 ‘경이로운 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인생이 허무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금세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누군가 삶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니 실패하더라도 끝가지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어떻게든 살면서 버텨야 하니까요.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실망이 커지고 최선은 줄어든다는 것,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낮에도 우울하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삶의 무거움으로 죽음이 가벼워지는 이 시대. 이왕이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침’과 ‘죽음’을 서로 나눠보면 그리 좋아할 사이는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연옥을 통과하다 보면 왜 좋을까? 라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김영민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앞서 말한 경이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침없이 ‘죽음킥’을 날리기 때문에 삶이 ‘확’ 달라지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답답한 속이 한바탕 시원해지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죽음이라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죽음으로 선택하는 것이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그 쓸쓸한 마음 한 구석에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무의미하게 사는 고통을 끝내겠다는 것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 죽음에 대한 연민이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더라도 고통의 탈출구로 여기는 방법을 한 번쯤 고민하게 됩니다. 과연 죽음이란 이런 것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이유인즉,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 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p8).

 

죽음이 오히려 삶의 기반이 되는 감각이라는 문장을 되새겨보았습니다. 인생을 한 순간 사라지게 하는 죽음이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절망했는데, 저자의 버티는 삶을 통해 절망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삶의 또 다른 열정을 되찾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매일매일 어느 한 순간 내가 죽음을 생각하게 된 절박한 이유입니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거침없이 죽음킥. 죽음도 더 이상 과거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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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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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왜 피부색이 다를까요? 과학적으로 피부의 어두운 물질인 멜라닌 세포(melanocyte) 때문입니다. 피부는 햇빛 속에 포함된 자외선에 약합니다. 그래서 피부의 멜라닌 세포가 자외선을 차단하는 일종의 보호막을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자외선의 양이 많을수록 피부색은 검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자외선의 양이 적을수록 피부색은 하얗게 됩니다. 문제는 피부색에 따라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인종(人種)은 주변 환경에 적응한 결과입니다.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피부색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부색으로 하나만으로 인종을 구별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 사회역학의 관심을 대중적으로 불러일으킨 김승섭은『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앎’에 질문하며 새로운 현재적인 가치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다 보면 환원주의(還元主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환원주의는 어떤 현상에 대한 여러 원인 중에 어느 하나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령, 피부색이 검다고 해서 모두 흑인종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피부색이더라도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인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몸에 새겨진 인종에 대한 지식을 사회역학으로 전복하고 있습니다.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은 어떤 문제에 대한 사회적 원인을 해독하는 것입니다. 인종을 피부색으로 구별하는 것도 모자라 ‘한 방울의 법칙(One drop rule)’은 인종이 사회학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사실을 당혹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방울은 ‘피(blood)’를 말합니다. 이 책에는 오랫동안 자신이 백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여행을 갈 목적으로 여권을 만들다가 출생증명서에 흑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여성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유인즉, 그녀의 몇 세대 부모에게 흑인 피가 32분의 1이상 섞여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도 흑인 피가 32분의 1이상 흐른다는 근거에 있었습니다. 정작 그녀의 몸에 32분의 29에 해당하는 백인 피는 무시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인종에 대한 계산은 비과학적이며 사회적으로 ‘인종차별’이라는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하게 되면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차별을 당한 사람 스스로 미래가 없는 열등한 사람,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계속적으로 차별을 당하게 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올라가면서 우리 몸 또한 비정상이 됩니다. 인종에 대한 콤플렉스, 트라우마와 같은 모든 부정적인 사실들은 사회적 폭력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몸에 둘러싼 문제를 ‘몸’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의 바깥이 아닌 안쪽에만 찾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몸의 상처를 몸 내부에서 찾아 치유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픈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픈 몸을 치료하면 건강한 몸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몸속의 암을 수술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는 ‘암’이라는 결과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암의 발생 원인을 제대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나쁜 습관으로 인해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자는 몸에 각인된 불편한 진실을 다양하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과학의 언어’로 질문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언어는 경험에서 얻어졌다고 하더라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상식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경험을 판단의 언어라고 한다면 과학의 언어는 데이터에 있습니다. 판단의 언어는 경험에 따라 직관적이며 틀릴 수 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언어는 데이터에 따라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표현을 따라가다 보면 판단의 언어는 천동설(天動說)이며 과학의 언어는 지동설(地動說)이라는 견해를 알게 됩니다. 즉,

 

그래서 더욱, 오늘날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이론이나 직접 경험했다는 이유로 확신하는 사실들 역시 우리 시대의 천동성일 가능성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어야 한다. 지금 내 생각이 틀린 것일 수 있다는 비판적 사고는 인류가 과거의 상식과 맞서 싸우며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던 거대한 원동력이었습니다(p 317).


<언스플래쉬>


그렇습니다. 지동설은 과거 천동설과 맞서 싸우며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하려는 원동력에서 나왔습니다. 저자는 인간(몸)과 사회의 역학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지식이나 상식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실제로는 이것이 마치 천동설과 다르지 않아 인간의 감각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弱者)들에게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차별적인 지식에 대해 수많은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지식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아픈 몸을 예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더더욱 어제 없던 것이 오늘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몰랐을 뿐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을 차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는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불편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과연 정상적인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정상적인 사회는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정의롭고 평등해야 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법과 제도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정의롭고 평등한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사회역학을 공부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절박한 문제를 연구하는 지식인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이야기하다보니 자신마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고뇌를 저자는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식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화려한 스펙이 아니라 진정한 열정과 용기가 아닐까요?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지식인의 표상』에서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양심을 말했습니다. 지식인의 표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문가적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아마추어적 양심입니다. 전문가적 태도는 지식인이 권력이나 권위에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마추어 양심은 권력이나 권위에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또한 전문가적 태도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라면 아마추어 양심은 해야 할 일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누구에게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저자는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들과 아픔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합니다.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그들의 고통을 결코 쉽지 않는 과학의 언어로 꺼내고 있습니다. 이유인즉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구가 계속해서 도는 것처럼 그의 아마추어적 양심이 한순간에도 멈추질 않길 바랍니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꼭 필요한 관심과 열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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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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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 대결은 결국 알파고의 승리로 끝났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신의 한수는 통하지 않았다. 대신에 신의 한수를 보여준 것은 알파고였다. 알파고의 알고리즘의 수는 인간의 상상력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러면서도 인공지능의 묘수였다. 좁게는 인간 대 인공지능의 바둑 대결을 흥미롭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둑판을 벗어나면 인공지능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깨닫게 된다. 당장 우리는 인공지능과 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만 한다. sf 영화에서나 가능했던 일이 점차로 현실화되고 있다. 그 순간, “과학은 장례식만큼 진보한다”는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이 말이 떠올랐다.

 

알파고의 시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시대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유발 하라리의『호모 데우스』는 호모 사피엔스의 장례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장례식을 치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쓸모없는 계급’이라는 잉여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날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의 지배자가 될 정도로 쓸모있는 계급이었다. 농업혁명으로 동물들을 침묵시킨 동시에 신을 믿었다. 그리고 과학혁명으로 신을 침묵시키고는 인본주의를 믿었다. 이제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기우제를 지낼 필요는 없다. 과학은 신성을 넘어섰다. 문제는 인간마저 넘어서면서 미래에 인간이 쓸모없는 계급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본주의의 제1계명은 ‘무의미한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좀 더 말하면 과거에는 신이 맡았던 역할을 인본주의에서는 인간이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 영혼,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 생명과학, 뇌과학은 호모 사피엔스가 더 이상 신비한 블랙박스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어떤 결정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도 자유의지가 아니라 유전자, 호르몬이라는 전기화학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유의지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도 불투명하다. 개인의 사전적인 의미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몸이 약 37개조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인간은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호모 데우스는 나눠질 수 없는 존재에 가깝다. 신이 된 인간을 과학적으로만 설명하다보니 적지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인간의 비밀을 해독한다고 해도 인간이 산소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도스토옙스키의『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지하인’이 2×2=4가 꽤 괜찮은 녀석이라면, 2×2=5는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호모 데우스는 종교적이다. 저자는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그리고 비유기체 합성을 말했다. 여기서 비유기체 합성은 바로 신성(divinity)을 획득하는 것이다.

 

미래에 호모 데우스가 신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놀랍다. 호모 사피엔스는 기독교, 힌두교, 불교 등 종교와 계약을 맺고 예수, 알라, 부처라는 그들의 이름을 창조했다. 하지만 호모 데우스에게는 유일신 같은 이름이 없다. 대신에 정보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호모 데우스에게 새로운 종교는 ‘데이터 교(敎)’다. 다시 말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인본주의 종교를 통해 영적 여행을 했지만 호모 데우스는 기술 종교를 통해 데이터를 처리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재설계하는 것이다. 데이터 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정보의 흐름이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호모 데우스가 ‘만물인터넷(Internet-of-All-Things)’가 되는 것이다.

 

인류의 미래를 데이터의 처리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것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지식이다. 지식은 석유, 태양 같은 에너지와 차원이 다르다. 보통 에너지는 사용하면 고갈되는데 지식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늘어나는 성장하는 자원이다. 하지만 우리의 뇌가 막대한 지식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떠한 지혜나 정보다 얻을 수 없다. 오히려 정보의 흐름이 막혀 버려 우리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이럴 때 데이터는 정보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면서 정보를 자유롭게 하고는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할 수 있게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지식이나 지혜 같은 생화학적 알고리즘보다는 데이터라는 전산 알고리즘을 신뢰하게 된다.

 

저자가 호모 데우스(신이 된 인간)의 정체를 광범위하게 파악하려는 것도 여기에 있다. 21세기 첨단과학으로 펼쳐지는 삶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다. 즉,

 

이 책이 현시점에 우리가 처한 조건화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그 얽매임에서 벗어나 다르게 행동하고, 미래에 대해 훨씬 창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목표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시나리오를 예측함으로써 우리의 지평을 좁히는 대신, 지평을 넓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542~543p).

 

“역사에는 공백이 없다.”는 저자의 주장처럼 4차 산업혁명의 지각변동으로 지구촌이 들썩거리고 있다. 경험이나 감정이 아닌 데이터를 처리하는 능력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호모 데우스가 우리의 미래이며 가능성이다. 삶의 모든 권위가 ‘나’가 아닌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미가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좀처럼 답할 수 없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얽매임 때문일까?『호모 데우스』를 읽으면서 호모 사피엔스의 장례식을 고민하고 성찰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틀린 것이 아니다. 저자의 지식 생산은 역사의 공백을 없앴는데 탁월했다.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가 사랑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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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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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물보다도 말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은 질문을 합니다. 뭔가에 대한 호기심 내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질문이란 무엇일까요? 언어학자 촘스키는『촘스키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서 질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미스테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풀 수 있는 질문입니다. 반면에 미스테리는 인간이 풀 수 없는 질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너무나 분명하고도 단순합니다. 질문이 원인이라고 한다면 문제나 미스테리는 그 결과로 보입니다. 혹은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삶의 지혜를 듣게 됩니다. 질문보다는 상대적으로 대답이 인생을 더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어떻게 질문을 할 것인가』는 생각의 차원이 다릅니다. 비록1.4kg 불과한 뇌이지만 우리의 모든 고민은 질문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즉, 대답에 앞서 질문을 찾아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말합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질문하는 것은 가짜 질문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질문을 하면서 동시에 질문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할 수 있는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질문은 ‘깊은 생각(Deep Thought)'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질문은 쉽게 잊히지만 어떤 질문은 잊히지 않습니다. 잊히는 듯하다가도 어떤 순간에 다시 떠오릅니다. 말하자면 다시 떠오르는 질문은 사실상 우리 주위를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의 내용에 따라 다시금 우리의 생각 속으로 파고들어옵니다. 깊은 생각은 다시 떠오르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만으로 질문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럴 때 깊은 생각은 보거나 들었던 것을 상상하면서 본래의 그것과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저자는 다시 떠오르는 질문을 책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 박학다식해진다는 생각에 몰두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탐서주의(耽書主義)는 아주 일상적이며 깔끔합니다. 명쾌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책은 배터리가 필요 없다. 언제나 ‘켜 있고’ 인터넷도 필요 없다. 원하는 페이지로 바로 이동할 수 있고, 무게도 가볍다. 거기다 가격도 저렴하니 말 그대로 최고의 사용자 경험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책은 또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인간의 뇌가 몰입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책을 펴면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눈은 글을 읽지만, 뇌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 읽는 자에게 새로운 만들어 줄 수 있는 책.(74p)

 

 

뇌과학자가 책을 선택한 이유는 책의 물리적 특성이 사용자들에게 최고라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굳이 책이 아니라도 사용자들에게는 정보를 얻는 다양한 채널들이 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이용하여 정보를 쉽고 빠르게 검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배터리가 없다면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맙니다. 그 순간, 우리는 어둠처럼 막막한 막힘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책은 다릅니다.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아도 언제나 깨알 같은 글씨들이 정확하게 빈틈없이 살아있습니다. 살아있으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저 그런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합니다.

 

책의 존재 목적은 다른 것들도 많겠지만 책은 말의 재단사입니다. 그중에서도 저자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질문을 할 것인가’를 말하면서 질문을 찾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32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문학, 과학, 철학, 예술을 넘나드는 질문의 경계는 없습니다. 단 하나의 경계, 그것은 바로 세상을 발견하며 자시만의 언어로 의심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질문할 수 없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민도 없이 쓰여진 문장들은 단순한 자음과 모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 이것은 소통이 아닌 불통이며 희망이 사라진 문장을 고민하게 합니다.

 

 

저자의 질문을 다시 한 번 훑어보게 되면 ‘함께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먹는 혼밥과 혼술의 문화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남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번거로움은 어느 새 사르트르가『닫힌 방』에서 말했듯 지옥으로 변합니다.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것. 더구나 인생을 경제적인 교환의 가치로만 본다면 지옥은 그만큼 몇 곱절로 늘어나게 지요. 하지만 인생 전체를 본다면 ‘나 홀로’ 문화는 개인적인 이기심의 최대화이며 인간답게 잘 살고 싶다는 것도 해묵은 논리가 되고 맙니다. 오히려 삶의 가치를 고민하다 보면 나 홀로를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새로운 확신이 생겨납니다. 이유인즉, 인생은 외롭지 않을 정도로 함께 하면서도 결국 나 홀로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미래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인공지능(AI), 로봇기술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을 발전시키면서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 스마트인류)'로 진화했습니다. 스마트인류의 핵심은 기술의 인간화입니다. 가령, 미국 시애틀에 생긴 무인(無人) 대형마트 ‘아마존 고(Amazon Go)'에는 점원도 계산원도 없습니다. 스마트한 인류가 될수록 기계 또한 스마트한 기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계와 융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계와 경쟁하면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유발 하라리가『호모데우스(Homo Deus』에서 지적하고 있듯, 미래에 신과 같은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기술의 힘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인간성입니다. 비약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성 없는 인간은 스마트한 기계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변모해 갈 수 있습니다.

 

 

고야의 판화 『변덕』 43번의 제목을 보니「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입니다. 제목 그대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대식의『어떻게 질문을 할 것인가』의 8번 제목은「대답에 앞서 질문을 찾아라」는 것입니다. 질문을 잘 모른다면 대답은 엉뚱해집니다. 삶의 관념으로 볼 때 고야의 이성과 김대식의 질문은 지적인 아름다움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데 있습니다. 때로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겠지요. 그러나 책을 통해 인생을 다시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를 궁리하게 합니다. 세계가 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질문은 우리의 맥박을 되살아나게 합니다. 질문은 질문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질문에 또 다른 질문을 더함으로써 더 많은 질문을 만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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