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멘쉬 -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선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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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버멘쉬에 대한 인생수업! 고개를 끄떡이게 하며 인간에게는 극복하고자 하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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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버멘쉬 -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선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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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삶을 전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프란츠 카프카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기 위해 책이라는 도끼를 들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기존의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 철학이라는 망치를 들었다. 하지만 니체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망치보다는 초인(超人)’이라는 인간의 형상이다. 지금에 와서는 초인보다는 위버멘쉬(Übermensch)’라는 말이 새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삶이 무엇인지를 갈구하던 시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위버멘쉬는 어떠한 고통에서도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위버멘쉬는 말 그대로 위버멘쉬와 함께 하는 인생 수업이다. 삶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의 연속이다. 결과적으로 문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삶은 슬픔과 고통의 바다와 같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니체는 인간의 영혼을 일깨워주고 있다. 바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독특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가령, 니체는 강한 사람을 주장한다. 강한 사람이라는 비유는 고전적이지만 매우 유효하다. 강한 사람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강한 사람은 좋은 날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날보다는 나쁜 날이 많은 사람이다. 좋은 날은 삶의 변화가 없다. 반면에 나쁜 날은 삶이 무한히 변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법이다. 비록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게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가슴 뛰는 삶이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고통을 좋아할 리 없다. 그래서 인지 고통을 앞에서도 자신의 일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위버멘쉬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극복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버티고 싸우며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이다. 또한 극복에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진보하는 용기가 바로 위버멘쉬였다. 고통 앞에서 적당히 살아온 나에게는 위버멘쉬가 정말이지 강한 사람이었다. 고통으로부터 삶을 배우는 용기 있는 영혼이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을 바라는 삶.


위버멘쉬는 진실의 힘을 믿는다. 진실은 단순히 거짓말의 반대는 아니다. 진실은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일찍이 영국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한 번의 거짓말은 스무 개의 거짓말을 더 만들어낸다고 했다. 결국 거짓말은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거짓말은 삶의 무수한 변명이다. 어디 그뿐인가. 삶에 대한 변명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말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 자신의 방향을 알아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자기 자신은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다.


되돌아보면, 나에게도 자유를 갈망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철학자들의 글을 읽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니체를 만났다. 그의 철학은 불편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의 철학은 인간의 삶에서 자유의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만들어냈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의 핵심은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자유의지를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착각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우리는 착각 덕분에 삶을 살아가는 추진력을 얻게 되고 비로소 내 의지대로 살 수 있게 된다. 자유의지는 폭포와 같다. 폭포는 물리법칙에 따라 아래로 떨어진다. 그럼에도 폭포가 만들어내는 모습은 아름답다. 만약에 자유의지가 없으면 폭포는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을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통을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믿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며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함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위버멘쉬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불투명한 삶을 걱정하고 두려워만 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다. 막연히 열심히 사는 것이나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는 단단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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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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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 되어야 한다.

-월든, 시민불복종

 

야간, 물류회사의 전등은 대낮보다 훨씬 밝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에 물건들은 쉴새 없이 바코드 센서를 통과하면서 각 라인으로 흩어진다. 전등의 용도는 물건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곳에서 몸을 쥐어짜며 일하고 보니 전등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CCTV처럼 24시간 켜져 있다. 일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추게 되면 그만큼 손해가 되는 생기는 현장이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그날 할당된 물건을 마감해야 하는 운명, 사람이 기계처럼 일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사람은 육체적으로 기계가 될 수 없다. 생수 때문에 물을 마실 수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마시는 물이 아니라 배설하는 물즉 오줌에 있다. 바삐 움직이며 일하는 중간에 화장실을 가기란 정말이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도저히 화장실에 갈 짬이 나지 않아 전전긍긍하며 참을 수밖에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화장실을 갈 권리, 즉 오줌권은 노동 3이 아니라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특권에 가까웠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나오는 특권에 대한 변론을 읽으면서 차별감수성의 사각지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차별주의자와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했다. 차별주의자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오줌권이 없이 일하는 내가 차별주의자가 될 리 없다. 오히려 차별을 당하는 자의 슬픔을 참고 견디며 살고 있다. 좀 더 고백하자면 일용직 노동자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일용직 노동자로 사는 불행의 책임을 따진다면 내 운명이 불행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용직 노동자가 받는 부당한 대우마저도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으로 여겼다.


그러나 특권에 부당한 영향력을 알면서부터 내 삶에 균열이 생겼다. 내 삶의 전화위복을 운명이 좌우하는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차별이 빅 브라더더'(Big brother)이었다. 만약에 운명이었다고 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을 수 없다. 이와 달리 차별이라고 한다면 책임을 묻을 수 있다. 헌법 제 11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 생활의 혹독한 현실은 정반대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 누구나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미치는 영역은 한계선이 있다.”(147) 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결론적으로 어떤 국민만이 평등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어떤 국민에서 실격당한 국민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약자(弱者)’이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특권이 없다. 가령,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하면 어떤가? 장애인에게는 대중교통이 아니라 지옥교통이 되고 만다. 그 순간 장애인은 대중교통이라는 특권을 강력하게 어필하게 된다. 장애인에게 특권은 그 자체로 생명이며 인간다운 생활을 한 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은 사실상 이러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차별을 당한다. 우리가 장애인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인식한다면 모든 국민은 평등해질 것이다. 진정한 평등사회에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라는 구별 없이 모두가 대중교통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평등사회는 특권 없는 사회다.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회의를 생각할 수 있다. 도대체 장애인들, 즉 사회적 약자들의 행동이 왜 불법일까? 우리가 보기에 사회적 약자들은 불법적인 행동 때문에 공공(公共)의 적이 되었다. 공공의 적에 대한 명백한 인식은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공공의 질서를 외면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지나치게 과도할 정도로 공공의 적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사회적 약자들을 단순히 공공의 적으로 혐오스럽게 바라본다면 그들의 정체성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다. 바로 사회적 약자들의 매우 절실한 형태의 말 걸기”(116)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시민 불복종에 대해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긴 하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법을 위반하는 것은 개인의 편리를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달리 시민 불복종은 부당한 법에 대해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시민 불복종이라는 뜻으로 보면 사회적 약자들의 행동은 결코 혐오스럽거나 폭력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정의로운 행동이다. 하지만 차별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과격한 방식으로 법을 위반했다는 것을 문제 삼으며 심판하려고 한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듯이 정의(正義)가 없다고 하면 그만큼 세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될 수밖에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공정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政治). 우리 모두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가져야 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비난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들이 특권을 주장할 때마다 마치 특혜을 받는다는 불편한 진실 때문이다. 이렇듯 특권을 악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차별의 정치를 정지시키려면 마음의 정치를 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임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하게 되었다. 동시에 어떻게 해서 선량한 사람이 차별주의자인지 되물어야 했다. 차별주의가 직접차별이라고 한다면 선량한 차별주의는 간접차별에 해당된다. 간접차별은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모두가 동일하다는 선량한 기준을 적용한다. 겉으로 보면 공정하지 않은가?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편향된 생각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만 하면 공정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차별이 된다.”(109)고 말했다. 예를 들면, 공무원 시험을 보는데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같은 조건으로 하는 방식은 개선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차별이 공정하다는 시각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일한 노동하면서도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한다.


이러한 차별 때문에 우리가 더욱 유의해서 살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삶의 조건들이다. 우리 사회는 놀라운 경제발전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도 경제발전의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하지만 살인적인 경쟁 속도의 부작용 때문에 경제발전이 사회발전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능력에 따라 경쟁에서 하는 것이 공정한 세상이라는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은 계층의 사다리에 오르지 못하고 잘못된 인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들은 무능력하며 부적격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같은 주장에는 성장지상주의만 있을 뿐 인간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고찰은 빠져 있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반사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 헌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불평등을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여긴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은 아주 일상적이고 구조적이며 은폐되어 왔다. 사회적 약자는 분명 법 안쪽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법 밖으로 밀려나 차별을 당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듯 이를 보여주는 사회적 지표들은 차고 넘친다. 이러한 부작용들이 결국 우리에게 국민은 평등하지 않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알게 해주었다.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가 아니라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얘기해야 진실에 가까워진다. 우리의 욕망에서 선량한 차별주의를 찾아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다움를 말할 수 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나는 인간다움을 선량한 양심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 불복종에서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유인즉, “우리는 먼저 인간이고 그다음에 국민이 되어야 한다. 법을 존경하기보다 정의를 존경하는 편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선량한 양심주의자는 우리 모두의 은유다. 모든 사람에게 양심은 인간다움의 최고 정치다. 역설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우리 모두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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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돌파하라 - 변화의 시대, 불안을 기대로 바꿔줄 43가지 지혜의 도구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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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문제투성이며 예측하기 어렵다. 이러한 삶의 두려움은 거대한 바위와 같고 바위에 맞서는 우리는 나약한 존재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절망을 버티는 힘이 있다. 바로 생각의 힘이다. 생각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다. 만약에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문제를 모를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동물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다. 책은 영화, 음악과 다르게 실물로 존재해서 언제든 읽을 수 있다. 또한 책 속에는 삶의 수많은 문제에 대한 지혜로운 답이 있다. 그중에서도 철학책을 즐겨 읽는다. 철학은 말 그대로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메시지에 담긴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삶의 다양한 감정을 얻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철학자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 시대 인기 철학 에세이스트 안광복 작가의 신간 철학으로 돌파하라에는 변화의 시대, 불안을 기대로 바꿔줄 43가지 지혜의 도구가 있다. 저자는 로마시대 가장 유명한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전략가라고 풀어내고 있다. 전술가는 눈앞에 닥친 전쟁의 승리만을 생각한다. 반면에 전략가는 전쟁의 핵심을 읽는다. 이유인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전략가적인 지혜는 철학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은 우리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삶의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철학자들이 했던 말들만 따라 할 뿐 몸소 실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삶에 비추어보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을 가짜 현실이며 가짜 영혼이라고 생각하며 외면한다.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순간, 철학이 인생을 복잡하게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령, 철학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여가시간은 노동시간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다. 여가시간을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면서 단순하게 보낼 수 있다. 그야말로 노동의 대가라고 여기고 여가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을 하기 위해 여가시간을 무료하게 보낸다.


그러나 철학자의 생각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가시간을 고민했을 정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시간을 낭비하게 되면 노예에 다를 바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말했다. 노예는 현재도 미래도 노동하는 인간으로 허무하게 끝날 뿐이다. 반면에 자유인은 고귀한 영혼의 인간이다. 고귀한 영혼이란 여가시간에 자기다움을 위한 활동을 한다. 자기다움은 영혼의 근육을 움직이게 한다.


이렇듯 철학으로 돌파하라에는 삶을 더 삶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지혜의 도구들이 담겨 있다. 지혜의 도구가 다름 아닌 철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다. 그 진리는 피해 갈 수 없다. 그럼에도 인생에 대한 무모한 사랑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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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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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봄을 여름과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가?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봄에는 어떤 감동이 피어날까요? 봄이 오고 있음을 나무는 먼저 알고 있습니다.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부풀어 올라 머지않아 꽃망울이 터질 것이고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우리가 봄에 느끼는 감동은 꽃의 향연입니다. 더구나 삶이 엉망진창일 때 꽃을 바라보는 것은 축복에 가깝습니다. 나무가 식물이라는 수동적인 자세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것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무 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배리 로페즈의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놀라운 에세이였습니다. 그의 탐구적인 시도는 우리 시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우리 시대 최고의 자연 작가라는 거대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55년간 80여 개 나라에 이릅니다. 그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간, 비인간들을 만났습니다. 비인간의 경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이 비인간이라는 발견, 이 모든 것이 삶이었습니다. 인간이나 비인간 모두 도구가 아니라 생명으로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과 닮지도 않고 비슷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비인간으로부터 지혜를 얻었습니다. 마치 하늘 위 구름 한 조각, 티끌 한 점 없이 청결한 공기, 덤불숲 회색곰 등등.


그중에서도 독특하게 장소에 대한 예찬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장소는 단순히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장소는 우리의 실존적 고독감을 해방시켜주는 곳입니다. 그가 오스트레일리아 노던 준주의 타나미 사막,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의 나미브 사막, 캐나다 북극권의 엘즈미어섬 등등 세계 끝까지 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과 장소에 대한 관계의 속성을 알려짐으로 교감하면서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느냐? 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작가라는 사회적 책임에 헌신하며 자연을 위해 선도적인 대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줄곧 자연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명을 개발하고자 하는 탐욕 때문에 자연을 스스럼없이 파괴해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당연한 권리고 자연의 당연한 희생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절박해졌습니다. 도저히 견디기만 해서는 절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상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악몽 같은 현실을 맞닥뜨린 지 오래입니다.


우리 시대의 미래는 좋은 삶의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환경으로 부터의 위협이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경각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자연의 신비로움을 되찾기 위해서는 실존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불신하는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저자의 생각은 공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화해왔습니다. 우리에게도 긍정적인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연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유인즉 너 자신이 아닌 세계에 인내심 있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184p)은 따뜻하고 평화로운 연민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연민은 자신에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의 지난 시절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의 고통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복수하고픈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 감당해야 할 또 다른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나머지 적당한 침묵으로 아픔을 버텨냈습니다. 침묵은 복수의 칼날이 자신을 겨누는 반복되는 슬픔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슬픔의 피해자라는 것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슬픔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화목하고자 했습니다. 좋든 싫든 슬픔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슬픔을 이해하면서 가해자의 악몽에 공감하는 큰 포용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조차 긍정하게 만드는 자기 존중이라는 빛을 어디에서 찾았는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무한히 용서하고 무안히 위로하는 빛이라는 중심축이 있었다.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어도비 벽돌집의 옅은 벽면과 출렁이는 수면까지,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 그 빛, 그리고 나를 하늘로, 나 자신의 바깥으로 끄집어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새들이 내 삶에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다.(32p)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천천히 읽으면서 생명에 대한 생각이 사뭇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연 앞에 경건했으며 죽음의 매커니즘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메타포를 깨달았습니다. 그의 기도(祈禱)하는 삶을 통해 너무 아름다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가 다 생명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사막이며 숲이며 강이며 북극이 다 생명이었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봄, 여름이 다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꿀벌이 사라지는 기후변화의 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꿀벌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꿀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요? 라는 나침반 같은 질문을 하다 보면 봄과 여름이라는 생명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심정으로 봄을 여름과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삶을 구원하는 배리 로페즈의 섬세하고 묵묵한 시선을 회고하면서 적어도 세상의 불공정한 경쟁에 끌려다니는 것을 반대하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꿀벌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꿀벌의 날개에는 아주 오래된 지혜가 살아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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