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데카르트를 읽으면 행복한가요?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어. 표현하려고 하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것 저런 것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 내가 제안하는 삶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을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알려 줄 수만 있다면…그건 정말 끝없는 즐거움이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행복이야. -서머싯 몸의『면도날』중에서







여기 세 종류의 면도날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인라인의 면도날(Heinleini Razor)입니다. 이 면도날은 로버트 하인라인의『스타쉽트루퍼스』에 나오는데 ‘어리석음(stupidity)으로 인한 일을 악의(malice)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사기꾼에게 속아 친구 돈마저 잃어버렸을 때 그의 잘못은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혹 그 사람을 사기꾼과 한패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입니다. 이 면도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복잡한 설명은 싹둑 잘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서머싯 몸의 면도날(Somerse Maugham’s Razor)입니다. 이 면도날은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의 가슴에 선명한 자국을 남깁니다. 서머싯 몸의 『면도날』에 나오는 래리는 삶이 단지 먹고살기 위해 살아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그럴 때 사람은 누구나 자기 확신이라는 극적이 순간과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언제 찾아오겠다고 어떻게 해서 그렇다는 것도 없이 어느 순간 불쑥 삶의 강렬한 열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조종사였던 래리는 전쟁터에서 허망하게 전사한 전우를 보고 난 후 백지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백지상태에 놓이면서 그는 세상 모든 일을 알았던 것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세상에 대해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오른 절망감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쓰디쓴 진실 때문에 고민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많은 사람의 기대감을 저버리고 그 무엇을 찾아 미지의 삶으로 외로운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그를 어느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바라보며 제발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사람은 약혼녀 이사벨이었습니다.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래리와 이사벨은 아무 걱정없이 결혼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사벨에게 모피코트를 사주기 위해 래리는 남들처럼 적당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평범한 삶이었지만 동시에 안전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평범하게 살아도 행복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래리는 이 모든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래리 말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싶었고 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보다는 공부하고자 하는 욕구가 뼛속 깊이 새겨졌습니다.

일찍이 E.F. 슈마허는『자발적 가난』에서 삶에 있어 직선의 논리와 곡선의 논리를 말합니다. 직선의 논리가 많음이 곧 많음이라고 한다면 곡선의 논리는 적음이 곧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전자가 생존의 논리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이를 부(富)가 가져오는 문제에 있어 전자가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발적 가난이었습니다.

인생의 앞날에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작가 말대로 사람이란 오로지 그 삶 자체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그 사람을 만듭니다. 돈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돈에는 개인적인 자존심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은 그래서 1분 1초를 낭비할 시간도 없는 상태에서 돈으로부터 자유는 시간을 절약하는데 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래리는 돈보다는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사랑을 열망합니다. 앞서 말했듯 래리에게 돈은 자발적 가난이라는 최소한의 버팀목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래리가 평범한 삶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을 두루두루 살피면서도 데카르트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래리는 데카르트를 읽으면서 ‘평온함, 품격, 명석함’을 배웠습니다.

어느 누구는 래리를 나약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현실감각이라고 찾기 힘들다고 쓴소리를 할 것입니다. 남들처럼 공부를 하거나 돈을 벌어야 하는데도 래리는 자신의 즐거움을 찾아 어두운 싸움을 합니다. 비록 그 싸움에서 실패한다고 해도 끝가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데카르트를 읽으며 맛보는 순수한 기쁨은 실패를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데카르트를 읽지 않는 것일까요? 데카르트를 읽으면 우리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에게는 지혜가 자유의 수단이었습니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데카르트가 골치 아픈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성공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돈인데 데카르트는 돈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데카르트를 사랑하는 래리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는 용기 있는 행동이 마냥 부러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지혜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래리 혼자만의 작은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면도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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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무엇인가?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그의 어께에 하늘의 천정을 메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 올리는 역도 선수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에서



 

일찍이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부정적 자유’와 ‘긍정적 자유’를 구분했습니다. 즉 부정적 자유는 ‘벗어나는 자유’(freedom from)입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에서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이와 달리 긍정적 자유는 ‘할 수 있는 자유’(freedom to)입니다.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자유입니다.

이 소설에서 밀란 쿤데라는 삶이 무거운 사람을 역도 선수라고 합니다. 이는 긍정적 자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역도 선수에게 신체적인 무게는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는 데 어느 정도는 체질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무게가 무거워야 합니다. 베토벤이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던 것도 귀머거리라는 절망을 희망으로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이 당신은 역도 선수가 되고 싶은가요? 라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맙니다. 물론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삶을 무겁게 사는 것은 곤란합니다. 삶의 무거움은 꼭 위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보다 가치 있게 사는 방법입니다. 축구 선수도 야구 선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는 자신의 땀방울과 눈물을 흠뻑 흘려야 아름답습니다. 축구 선수에게 현란한 발놀림과 감각적인 패스 능력은 자신을 돋보이게 합니다. 동시에 경기를 보는 사람들을 단숨에 열광하게 합니다. 이러한 흥분을 느끼면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축구 선수가 되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축구가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오로지 축구 선수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돌려보면 역도 선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눈을 돌려야 할 만큼 역도 선수는 고독합니다. 축구와 달리 비인기 종목인 탓에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지 많지 경기라고 해도 애써 외면합니다. 외면의 끝에서 역도 선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고통의 파도를 힘겹게 넘어서려는 외과의사 토마스가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지에 따른 결백’을 불안하게 바라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공산주의 체제 즉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하는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며 이 길을 용감하게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천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광신자들은 살인자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합법적 살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린 몰랐어! 우리도 속은 거야!”라고 변명합니다.  

소크라테스는『변명』에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닙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그들은 몰랐을까요? 토마스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몰랐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결백한가에 있습니다. 가령,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였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고 쓰디쓴 진실을 끄집어냅니다.

광신자들의 무지는 잘잘못을 떠나 부끄러운 것을 정말로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광신자들의 변명에 차라리 오이디푸스처럼 제대로 살아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를 이 소설에 나오는 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한 목동은 아이를 폴리보스 왕에게 데려갔고, 그 왕이 아이를 키웠습니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산 속의 오솔길에서 마차를 타고 여행 중이던 낯모르는 왕을 만납니다. 두 사람은 말다툼을 했고, 오이디푸스가 왕을 죽였습니다.

그 뒤 그는 이오카스테 여왕과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예전에 산에서 죽인 남자가 자기 아버지이고 그가 동침했던 여자가 자기 어머니였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태의 진상을 알게 되자 그는 바늘로 자기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납니다.

토마스는 광신자들에게 양심의 눈이 있다면 기꺼이 눈을 뽑아버리라고 섬뜩하게 말합니다. 광신자들이 몰랐다고 하여 용서까지 바란다는 것은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거짓 눈물입니다. 토마스가 이러한 주장을 잡지사에 투고하자 주위에서 기사를 철회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꼭, 그래야만 합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밀란 쿤데라는 무거운 것이 긍정적이고 가벼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옳고 그름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역도 선수이거나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은 돌이켜보면 자기 자신에게 가장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 가볍지 않고 무겁다는 것이 긍정적인 까닭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값진 승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까지 머리 싸매며 고민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처럼 “꼭, 그래야만 합니다.”라고 해야 옳은 삶입니다. 대중적으로 이리저리 휩쓸려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신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무겁게 고민해보는 것도 인생의 또 다른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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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기없는 나무는 나무인가요?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써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헤르만 헤세의『수레바퀴 아래서』 중에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인생이 꼭 바퀴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바퀴없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겉만 다를 뿐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수레를 굴레가게 하듯이 우리의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퀴 혼자서는 굴러갈 수 없습니다. 남의 손길이 필요한데 소가 될 수도 있고 마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레바퀴에게 소나 마음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소가 이끄는 데로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수레바퀴 같은 삶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네발 달린 동물이든 두발 달린 사림이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헤르만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되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당황한 나머지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觸手)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린다고” 불안스럽게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한스 기벤라트는 영리한 두되를 가진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장래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주(州)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신앙심이 잇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시험 결과에 달려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여정에 있어 그의 두 번째 삶이며 동시에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기대에 어긋남 없이 2등으로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는 신학교에서 출세를 위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와 같이 공부하는 하일너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일너는 반항아였고 한스는 모범생이었습니다. 또한 하일너가 호모를 좋아한 나머지 시(詩)를 낭독하며 생활했다면 한스는 학생이라는 의무감으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우정의 꽃을 활짝 피우며 신학교의 답답함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공부와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고 성적 또한 ‘수’에서 ‘가’로 형편없이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스는 행복했습니다. 하일너와 어설픈 낭만적인 우정은 불과 1~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 그는 황홀했습니다. 그는 신학교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숨가쁘게 살아왔습니다. 그가 걸어온 길은 국도(國道)였습니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갔으며 어제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하루가 다르게 터득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학의 세계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주제 영역에서 벗어나거나 주변 영역을 서성거릴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호머의 시(詩)를 배우면서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치달았습니다. 신학교에서 방황은 삶의 오솔길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오솔길에서 시의 문법을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공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호머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호머의 시 세계에 빠졌습니다. 그에게 호머는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즉 영웅이란 “단순히 이름이나 숫자로 남기를 거부하며 타오르는 눈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영웅의 시를 읽으면서 자신의 사랑과 꿈을 앗아가는 신학교 공부를 멀리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오솔길을 마음껏 걸어 다녔습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왜 해야만 하는지 고민했던 그에게 오솔길을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국도와 달리 넓은 세계를 조망해볼 수 있게 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세상보는 방법』「나를 만드는 방법」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라. 자신을 먼저 알지 않고는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얼굴을 비춰볼 거울은 있으나 마음을 비춰볼 거울은 없다. 자신의 신중한 성찰을 거울로 삼아라. 바깥의 모습이 잊혀졌을 때 마음의 심상을 생각하고 그에 의지하라.”

 

한스는 자기의 주인다운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가 바라던대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해서 목사가 되는 훌륭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 보다는 시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되찾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유넌기 때의 훌륭한 낚싯꾼을 갈망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혼자만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울타리에서 자신 만의 맑고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고자 했던 한스의 꿈은 쓸쓸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한스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사람만의 문제로 봤습니다. 그래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혹은 기분전환이라는 처방전도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등생이었던 한스가 어느 날 대장장이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사랑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겉만 번지르르한 사랑에 위로는커녕 상처를 받았습니다.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수레바퀴 위에 올라탄다는 것은 걱정이 없습니다.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몸을 의지하며 됩니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오늘이 내일이 똑같습니다. 하지만 수레바퀴 아래서는 달팽이처럼 움츠러들겠지만 삶의 주인이 바로 자기일 때 사자처럼 포효하는 용기도 있습니다. 어제는 오늘의 보물이고 오늘은 내일의 보물입니다. 그러니 제발 함부로 줄기를 자르면 안 됩니다. 앞서 말했듯 줄기 없는 나무는 결코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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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미같은 사랑은 어떤가요?

 

 어릴 때부터 나를 너무 귀여워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말이야. 또 내가 엄마 치마폭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사람은 항상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데, 난 남자보다 여자가 되고 싶어. 왜냐하면 여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거든. (…) 그러니까.. 말해 봐. 네가 남성다움이란 무엇이지? 음…그 누구에게 허풍 떨지 않는 것…심지어 권력을 쥐고 있더라도 말이야…아니야, 그것 이상이야. 허풍 떨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남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야. 그건 명령이나 팁 따위로 그 누구도 깎아 내리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네 옆에 있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또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 마누엘 푸익의『거미여인의 키스』 중에서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표범여인이 있습니다. 보통 때는 여느 여자들처럼 얌전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면 잔인한 짐승으로 변합니다. 표범여인이 되어 키스하는 남자의 얼굴을 할퀴며 끝내는 죽이고 맙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돌변하게 만들었을까요? 표범여인의 비극은 섹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섹스는 더러운 것이며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마누엘 푸익은『거미여인의 키스』에서 표범여인이 사랑 때문에 죽음이라는 벼랑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데 정작 사랑할 수 없어 생기는 병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마음과 달리 사랑이 그토록 깨지기 쉽다는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표범여인은 다릅니다. 동물원에 갇힌 표범처럼 만들어진 야성(野性)때문입니다. 사람 같은 동물이 된다는 것은 거짓을 몇 겹으로 두르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이 표범여인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녀에게 키스를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녀가 거미여인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거미여인은 아무 일 하지 않고 사랑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끈기있게 거미줄을 만들어 놓고 어느 순간 사랑이 오면 붙잡습니다. 거미여인에게 사랑은 곧 삶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거미여인으로 불리는 몰리나가 있습니다. 그는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된 동성애자입니다. 그와 함께 비좁은 감방에 수감된 발렌틴은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정치범입니다. 성격이 다른 두 남자가 평행선을 달리면서 삶에 대한 고통과 희열을 쏟아냅니다. 발렌틴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려고 한다면 몰리나는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의 환상에 빠집니다. 그중에 하나를 보면 조국의 침략자를 여자가 사랑할 수 있는가를 두고 몰리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발렌틴은 여자 게릴라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본다면 즉 젠더로 봤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발렌틴이 말 그대로 남성이라고 한다면 몰리나는 여성같은 남성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감성에 있습니다. 감성이 예민하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여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이성애(異性愛) 보다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同性愛)가 훨씬 더 예민한 감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랑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존 스튜어트 밀은 나보다 더 뛰어난 사상가, 내 생애의 영광이며 으뜸가는 축복이라고 말했던 여인은 해리엇 테일러였습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한 가지도 가지기 힘든 여러 장점을 한꺼번에 타고난 미인이요, 재치있고 자연스러운 기품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은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 하나의 종교였다. 그녀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나에게 모든 가치의 근본이요 내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표준이었다. 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몬드 보부아르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를 만나면서 자기를 능가하는 단 한 사람의 남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사랑의 가치는 작가 말대로 ‘사랑은 또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은 서로의 육체를 쳐다보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은 서로에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몰리나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흔히 거짓 섹스라고 불리는 동성애에 대해 달갑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엇갈린 사랑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몬드 보부아르는『제2의 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사실 동성애는 의식적인 배덕도 아니며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에서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를 갖는 것과 동시에 자유로이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은 다를 것입니다. 어는 누구는 표범여인이 될 것이고 어느 누구는 거미여인이 될 것입니다. 표범여인에게 사랑은 유리그릇에 담겨져 있는 물과 같습니다. 반면에 거미여인에게 사랑은 흐르는 물입니다. 고요있는 물은 소리도 없으며 흐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소리가 납니다.

모름지기 사랑은 작가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도사리라고 있는 어두운 오솔길 위에서 사랑을 얻을 때까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안에서 싹튼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몸속에는 거미줄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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