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없는 나무는 나무인가요?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써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헤르만 헤세의『수레바퀴 아래서』 중에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인생이 꼭 바퀴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바퀴없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겉만 다를 뿐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수레를 굴레가게 하듯이 우리의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퀴 혼자서는 굴러갈 수 없습니다. 남의 손길이 필요한데 소가 될 수도 있고 마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레바퀴에게 소나 마음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소가 이끄는 데로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수레바퀴 같은 삶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네발 달린 동물이든 두발 달린 사림이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헤르만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되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당황한 나머지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觸手)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린다고” 불안스럽게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한스 기벤라트는 영리한 두되를 가진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장래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주(州)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신앙심이 잇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시험 결과에 달려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여정에 있어 그의 두 번째 삶이며 동시에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기대에 어긋남 없이 2등으로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는 신학교에서 출세를 위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와 같이 공부하는 하일너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일너는 반항아였고 한스는 모범생이었습니다. 또한 하일너가 호모를 좋아한 나머지 시(詩)를 낭독하며 생활했다면 한스는 학생이라는 의무감으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우정의 꽃을 활짝 피우며 신학교의 답답함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공부와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고 성적 또한 ‘수’에서 ‘가’로 형편없이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스는 행복했습니다. 하일너와 어설픈 낭만적인 우정은 불과 1~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 그는 황홀했습니다. 그는 신학교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숨가쁘게 살아왔습니다. 그가 걸어온 길은 국도(國道)였습니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갔으며 어제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하루가 다르게 터득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학의 세계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주제 영역에서 벗어나거나 주변 영역을 서성거릴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호머의 시(詩)를 배우면서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치달았습니다. 신학교에서 방황은 삶의 오솔길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오솔길에서 시의 문법을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공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호머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호머의 시 세계에 빠졌습니다. 그에게 호머는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즉 영웅이란 “단순히 이름이나 숫자로 남기를 거부하며 타오르는 눈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영웅의 시를 읽으면서 자신의 사랑과 꿈을 앗아가는 신학교 공부를 멀리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오솔길을 마음껏 걸어 다녔습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왜 해야만 하는지 고민했던 그에게 오솔길을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국도와 달리 넓은 세계를 조망해볼 수 있게 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세상보는 방법』「나를 만드는 방법」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라. 자신을 먼저 알지 않고는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얼굴을 비춰볼 거울은 있으나 마음을 비춰볼 거울은 없다. 자신의 신중한 성찰을 거울로 삼아라. 바깥의 모습이 잊혀졌을 때 마음의 심상을 생각하고 그에 의지하라.”
한스는 자기의 주인다운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가 바라던대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해서 목사가 되는 훌륭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 보다는 시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되찾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유넌기 때의 훌륭한 낚싯꾼을 갈망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혼자만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울타리에서 자신 만의 맑고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고자 했던 한스의 꿈은 쓸쓸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한스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사람만의 문제로 봤습니다. 그래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혹은 기분전환이라는 처방전도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등생이었던 한스가 어느 날 대장장이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사랑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겉만 번지르르한 사랑에 위로는커녕 상처를 받았습니다.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수레바퀴 위에 올라탄다는 것은 걱정이 없습니다.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몸을 의지하며 됩니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오늘이 내일이 똑같습니다. 하지만 수레바퀴 아래서는 달팽이처럼 움츠러들겠지만 삶의 주인이 바로 자기일 때 사자처럼 포효하는 용기도 있습니다. 어제는 오늘의 보물이고 오늘은 내일의 보물입니다. 그러니 제발 함부로 줄기를 자르면 안 됩니다. 앞서 말했듯 줄기 없는 나무는 결코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