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0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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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즐긴다는 것은 지불한 값어치만큼 얻어 내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그것을 얻었을 때 얻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누구든지 돈을 지불한 값어치만큼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무언가를 구입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건 아주 멋진 철학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5년만 지나면 내가 일찍이 알고 있던 모든 훌륭한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 역시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진실은 아닐지 모른다. 아마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를 알아낸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연히 알게 되리라.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중에서

 

삶을 철저하게 사는 것

삶은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래서 누구나 삶을 철저하게 살고자 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신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제이크는 투우사야말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여름마다 스페인에 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 로버트 콘은 투우사에게 흥미가 없었습니다. 로버트는 파리 생활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남아메리카에 여행가고 싶었습니다. 제이크는 로버트에게 다른 나라에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닌다고 해서 자신한테서 달아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파리에서 새로 인생을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지? 거듭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로버트는 남아메리카에 가면 어떻게든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며 파리가 싫다고 했습니다.

로버트에게는 유대인답게 완고하고 고집불통인 기질이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느끼게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학생과 다르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학 시절에 유대인 취급을 받으며 느낀 열등감은 착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더욱 뼈저리게 사무쳤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철저하게 권투를 배웠습니다. 누구든지 건방지게 굴면 때려눕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투로 울분을 달래던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결혼했지만 아내와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하여 매력 없는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아내와 이혼하려고 벼르면서도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아내가 먼저 그의 곁을 떠난 것은 충격이었지만 아주 기분 좋은 충격이었습니다.

 

모욕적인 말을 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

그 후 로버트는 문인들과 어울리며 잡지를 창간하였는데 막대한 비용 때문에 폐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그의 고민은 잡지를 발판으로 삼아 출세하려고 하는 프랜시스라는 여자한테 꽉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잡지가 성공할 가망이 없어 보이자 프랜시스는 그를 싫어하면서도 무엇이든 이용할 것이 남이 있는 동안 얻어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유럽에 가면 글을 쓸 수 있다고 끈질기게 졸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파리에 머물렀습니다. 유럽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그도 미국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걸하고 생각할 때를 빼놓고는 꽤 행복한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버트는 장편소설을 발표하고 나서부터 세상을 보는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직도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은 없지만, 자기가 여자들에게 매력 있는 남자라는 사실과 또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고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단순히 기적 같은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프랜시스가 결혼하자고 하였지만 그는 울면서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굳이 반대하지 않는 대신에 영국에 가려고 했습니다. 영국에 가는 비용으로 그가 100파운드 밖에 주려고 하자 그녀는 오히려 그가 인심이 좋다고 하면서 200파운드를 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을 모욕적이었는데 그는 모욕적인 말을 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말을 하면 금방 세계가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지금 바로 눈앞에서 파멸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참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문학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을 감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결혼하게 되면 로맨스가 끝장나기 때문일까요?

 

반어와 연민

하지만 로버트의 새로운 로맨스의 연인은 공교롭게도 제이크의 옛 애인이었던 브렛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부상한 당한 제이크를 브렛이 간호해 주었습니다. 어떤 부상이나 불구가 당사자에게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지만 농담의 소재도 될 수 있었습니다. 제이크의 부상은 다름 아닌 성기(性器)에 상처를 입은 탓에 그런 꼴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제이크의 해묵은 우스꽝스러운 상처가 브렛에게는 지상에서 겪은 지옥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렛은 전쟁 중에 애슐리와 결혼했지만 애슐리가 이질에 걸려 죽자 돈 많은 마이크 캠벨과 결혼할 예정이었습니다. 제이크는 그녀를 좋아한 나머지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하면서 자꾸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로버트에게 모욕적으로 “지옥에나 가버려.”라고 말했습니다.

제이크는 미국에서 건너온 작가 빌 고턴과 함께 스페인에 가서 낚시를 하고 팜블로나 축제를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제이크의 친구들도 즉 로버트, 브렛 그리고 마이크도 축제에서 만나자고 하며 떠났습니다. 그들이 낚시하기 위해 머문 숙소에서 어느 날 아침, 제이크가 일찍 일어나 낚시 도구를 챙기자 빌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반어와 연민’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빌은 “반어와 연민……. 기분이 내킬 때는. 아, 그들에게 반어를 안겨 주고 또 연민을 안겨 주라. 아, 반어를 그들에게 안겨 주라……. 기분이 내킬 때는. 약간의 반어를. 약간의 연민을…….”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제이크가 반어와 연민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자 빌은 그를 최악의 국적 상실자라고 했습니다. 즉 모든 시간을 일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지껄이는 데 허비하는 국적 상실자라는 것입니다.

 

거세된 소가 되면 살맛나지 않겠지

그들이 팜플로나에 도착하여 몬토야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제이크는 이 호텔의 단골 손님이이라 몬토야가 제이크의 친구들이 도착하여 투우장에 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몬토야는 제이크에게 빌이 ‘투우 아파시오나도’인지 물었습니다. ‘아파시온’이란 말은 스페인어로 열정을 말하며 아파시오나도는 투우에 열정에 보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이크는 아파시오나도답게 빌에게 투우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황소들을 풀어놓은 울타리에 거세한 소들을 같이 넣는 이유는 서로 싸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황소들이 거세한 소들을 향해 덤벼들지만 거세한 소들은 아무 반항도 않으며 그저 친구가 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직접 본 로버트는 거세된 소가 되면 살맛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로버트가 브렛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긴 마이크는 로버트가 마치 거세된 소가 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거세된 소처럼 아주 조용하게 살며 늘 붙어 다니는 로버트가 왜 불청객이 된 줄도 모르는 것이 옳은 행동인지 비난했습니다. 이런 광경을 직접 본 로버트는 거세된 소가 되면 살맛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로버트가 브렛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긴 마이크는 로버트가 마치 거세된 소가 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거세된 소처럼 아주 조용하게 살며 늘 붙어 다니는 로버트가 왜 불청객이 된 줄도 모르는 것이 옳은 행동인지 비난했습니다. 마이크와 로버트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지켜 본 제이크는 마이크가 로버트에게 그렇게 끔찍하게 대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마이크는 술버릇이 나빴으며 로버트는 결코 술에 취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마이크는 어느 정도 지나면 스스로 불쾌해졌는데 그것은 제이크가 살면서 배운 부도덕이라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대신 믿는 것

드디어 축제가 시작되고 호텔에서 제이크는 몬타야의 소개로 페드로 로메로라는 투우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이크는 이제까지 무척 초연하고 품위가 있는 로메로처럼 잘생긴 투우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이크는 몹시 흥분했는데 로메로의 투우가 끝난 뒤 브렛은 그의 초록색 바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투우는 그야말로 로메로의 독무대였으며 브렛은 다른 투우사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투우사들이 가짜 몸짓으로 불쾌감을 주었다면 로메로의 투우는 진실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더구나 로메로는 잘 생겼습니다. 젊은 투우사에게 마음을 빼앗긴 브렛 때문에 마이크는 화가 치밀어 올랐으며 로버트는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녔습니다.

그러자 브렛은 제이크에게 그들처럼 고약하게 굴지 않는다고 하며 그가 자신이 사귄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브렛은 스스로를 성격 파탄자라고 했습니다. 로메로라는 청년을 좋아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망가진 기분 때문에 그것은 옳은 일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투우사와 함께 도망을 갔고 이러한 사실을 안 마이크는 로버트가 그녀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자 “지옥으로나 꺼져 버려.”라고 말하면서 참아 왔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그렇게 축제는 끝났고 모두들 상처를 가슴에 아로 새기며 떠났습니다. 스페인에 혼자 남은 제이크는 해변에서 수영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브렛으로 부터 전보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곤궁에 빠져 있으니 찾아와 달라는 것입니다. 제이크를 다시 만난 브렛은 로메로가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로메로가 누구하고도 같이 살아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메로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그녀가 좀 더 여자다워진 다음에야 가능했습니다. 로메로가 그녀의 외모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흐느끼며 마이크한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이크가 아주 지독한 데가 있어도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더 이상 ‘화냥년’이 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하면서 그녀의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녀 말대로 하느님 대신 믿는 것이었는데 그녀에게는 하느님이 별로 효험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정복할까

제이크는 브렛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끈기 있게 둘러붙어 있기만 하면 참된 사랑이 모든 것을 정복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러셀은『행복의 정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근본적인 행복은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에 대한 따듯한 관심은 사랑의 일종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 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제이크와 브렛은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제이크는 ‘길 잃은 세대’(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방향 감각을 상실한 젊은 세대)와 달리 견고했습니다. 제이크는 삶을 즐겼습니다. 그것은 지불한 값어치만큼 얻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삶의 절망보다는 소망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어쩌면 사랑의 정복, 혹은 행복의 정복은 태양이 다시 떠오른 것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견고한 믿음이야말로 자신에게 효험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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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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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더구나 그건 죄악이거든.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죄가 아니라도 생각할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 맡기면 돼.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노인과 바다』 중에서

 

라 마르

당신은 바다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노인과 바다』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던 산티아고는 바다를 ‘라 마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곳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 때 사용하는 스페인 말입니다. 산티아고는 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으며,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무엇이라고 말했습니다. 설령, 바다가 무섭게 굴거나 재앙을 끼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달이 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어부들은 가운데 몇몇은 바다를 ‘엘 마르’라고 남성형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팔아 번 큰돈으로 모터보터를 사들인 부류들로 바다를 두고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인은 84일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도 낚지 못했습니다. 처음 40일 동안은 고기 잡는 법을 배우며 그를 무척이나 따랐던 마놀린 소년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40일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이제 노인이 살라오가 되었다고 하며 소년을 다른 배로 옮겨 타게 했습니다. 살라오는 스페인 말로 ‘가장 운이 없는 사람’입니다. 부모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배는 첫 주에 큼직한 고기를 세 마리나 잡았습니다. 노인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소년은 아버지 말을 따라야 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신념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노인에게 다시 고기잡이를 같이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만약 소년이 친아들이라면 노인은 소년을 데리고 멀리 나가는 모험을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자들 꿈을 꾸다

노인에게 85는 재수 좋은 숫자였습니다. 내장을 빼고도 450킬로그램이 넘는 고기를 잡아 가지고 돌아올 신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부모가 있었고 지금 운 좋은 배를 타고 있어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기잡이만큼이나 야구에도 관심이 많은 노인에게 소년은 가장 훌륭한 감독에 견줘 가장 훌륭한 어부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고맙다고 하면서 너무 큰 고기가 걸려서 소년의 생각이 틀리다는 게 입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생각만큼 그렇게 힘이 세지 않을지 몰라도 요령을 많이 알고 있고 배짱도 있다고 노인은 거듭 말했습니다. 이제 노인의 꿈에는 폭풍우도, 여자도, 큰 사건도, 큰 고기도, 싸움도, 그리고 죽은 아내의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여러 지역과 해안에 나타나는 사자들 꿈만 꿀 뿐입니다.

노인은 혼자 먼 바다까지 노를 저어나갔습니다. 그는 어떤 어부보다도 낚싯줄을 똑바로 드리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어두운 해류의 층마다 정확히 그가 바라는 수심에다 미끼를 놓고 그곳을 헤엄쳐가는 고기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그는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로 여겨 오히려 빈틈없이 일을 해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노인은 굉장히 큰 고기가 미끼를 입에 물고 도망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기한테 끌려가면서 낚싯줄을 어딘가에 단단히 잡아맬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몸이 밧줄 걸이가 되었습니다. 서로가 필사적인 상태에서 고기가 선택한 방법은 온갖 올가미나 덫이나 계책이 미치지 못하는 먼 바다의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모든 사람이 다다르지 못하는 그곳까지 쫓아가서 고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디마지오 못지않은 사람이 되어야지

노인은 고기를 형제 사이마냥 끔찍이도 좋아하고 존경하였지만 고기를 꼭 잡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왼손에 쥐가 났습니다. 쥐가 나는 건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건 자신의 몸한테 배신을 당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고기가 다이빙 선수처럼 온 몸을 물 위에 드러냈다가 유연하게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노인은 자신의 배보다 60cm도 넘는 고기가 왜 뛰어올랐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치 자기가 얼마나 큰지 자랑이라도 하려고 솟아오른 것 같다고 생각한 노인은 고기한테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비록 고기가 자신보다 더 기품이 있고 힘이 세지만 다행스럽게도 고기는 자신보다는 똑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자신의 의지와 지혜로 고기와 맞서 싸웠습니다. 또, 얼마나 고통을 참고 견뎌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틀이 지나도록 결과를 모르는 상황에서 노인은 양키스의 디마지오를 생각하며 그에 못지않은 사람처럼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디마지오는 발뒤꿈치에 뼈돌기(발꿈치에 잘 생기는 돌기)가 박혀 있으면서도 그것을 참고 최후까지 멋지게 승부를 겨뤘습니다. 노인은 고통 같은 건 참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기는 고통 때문에 미쳐 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노인은 머리를 맑게 하려고 했습니다. 머리를 맑게 해서 인간답게 고통을 견디려고 했습니다. 마침내 노인은 모든 고통과 마지막 남은 힘, 그리고 오래 전에 사라진 자부심을 총동원해 고기의 마지막 고통에 작살을 꽂았습니다. 그렇게 싸움은 끝났고 이제 노예처럼 뼈 빠지게 일해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파멸을 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상어는 우연히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자 노인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인에게는 단호한 결의가 있었지만 희망은 별로 없었습니다. 상어가 공격해 오는 걸 막을 수 없더라도 혹시 해치울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노인은 상어의 습격을 받아 몸뚱이가 30kg쯤 뜯겨져 나간 고기를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기가 습격을 받을 때마다 마치 자신이 습격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고기를 공격한 상어를 죽이고 나서 노인은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인간은 파멸을 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희망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죄악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죽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상어에게 최악의 사태를 당하자 노인은 고기한테 정말 미안했습니다. 고기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멀리 나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고기를 죽인 것은 다만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부라는 자존심 때문에 고기를 죽인 것입니다. 그는 고기가 살아 있을 때도 사랑했고 고기가 죽은 뒤에도 사랑했습니다. 고기를 죽인 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 아닌 게 없었습니다.

 

백절불굴의 정신

바다에서 돌아와 침대에서 깊은 잠에서 깬 노인은 마놀린에게 자신이 고기한테 지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노인이 고기한테 진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김욱동은『노인과 바다』「작품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언뜻 보면 ‘패배’와 ‘파멸’ 사이에 이렇다 할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실제로 사전을 보아도 전자는 어떤 대상과 겨루어서 지는 것을 뜻하고. 후자는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파멸’은 ‘패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헤밍웨이는 산티아고의 입을 빌려 물질적 승리와 정신적 승리를 엄밀히 구분 짓고 있다. 즉 ‘파멸’은 물질적 ․ 육체적 가치와 관련된 반면, ‘패배’는 어디까지나 정신적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

노인은 육체적으로 파멸을 당해도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운 때문만은 아닙니다. 노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자 꿈을 꿀 정도로 사자를 사랑했습니다. 사자 꿈! 그것은 패배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백절불굴의 정신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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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전집 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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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 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에서

 

우리 생각에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뭘까요? 밀란 쿤데라는『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아틀라스가 그의 어깨에 하늘의 천정을 메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 올리는 역도 선수라고 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했다면 베토벤은 무거운 것은 긍정적이라고 간주했습니다. 베토벤은 4중주의 마지막 악장을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으로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마지막 악장 첫 부분에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라고 써넣었습니다. 그것은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베토벤의 음악을 신념으로 했던 외과의사 토마시는 어떤 결정을 신중하게 내릴 때마다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된 것처럼 ‘그래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테레사가 그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만남은 여섯 우연이 만들어냈습니다. 그녀가 술집 여종업원이라는 것, 그 술집에 그가 있었다는 것, 그가 테이블에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였던 책을 펼친 것, 저쪽 세계의 이미지였던 베토벤 음악이 흘러나온 것 등등 그녀는 그가 미래의 운명임을 알아챘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부인과 이 년 남짓 살고 이혼한 그는 사랑의 부적격자라는 생각에 여자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과 갈망 사이에서 ‘에로틱한 우정’이라는 타협점을 찾았는데 누구도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한 독점권을 내세우지 않는, 감상이 배제된 관계만이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에로틱한 우정의 불문율을 깨트리면서 그녀를 돌봐주었습니다. 그에게 동정은 ‘고통’(passio)이 아니라 ‘감정’(sentiment) 때문에 무거웠습니다. 즉 타인의 고통을 차가운 감정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동정(sentiment)에 굴복한 그는 화가였던 그의 애인 사비나에게 부탁해 그녀를 출판사의 사진부에서 일하게 해줬고 결국에는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삶에 열정적이었던 그녀는 그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진기사가 되어 소련군의 침공 이후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사진을 수백 통 찍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에 끌려갔던 툽체크가 돌아와 정복자의 타협안을 낭독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그녀는 소련군에 대한 증오의 축제가 이제 끝났다는 모욕감으로 그와 함께 스위스로 망명했습니다.

 

스위스에서 그녀는 자신의 사진에는 관심도 없는 것에 놀랐습니다. 더구나 선인장이나 장미 같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허영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사진을 포기하고 집에 있는 것에 만족하려고 하자 누군가 그녀에게 그것은 시대착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극복할 수 없는 추락 욕구라는 현기증을 느꼈으며 자신의 허약에 도취되어 그것에 저항하기 보다는 투항하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예고도 없이 프라하로 떠나자 그녀와 칠년 동안의 사랑이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했던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마술적 공간 속에 들어가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동정에 굴복하여 이번에는 반대로 그가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병원 일을 하면서도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문제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공산주의는 범죄자들의 창조물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그는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어째든 나라의 불행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은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도 몰랐다고? 그래서 결백하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그들이 알고 그랬는가? 아니면 모르고 그랬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그는 ‘오이디푸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쳤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자기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나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그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처럼 ‘공산주의자들의 눈을 뽑아야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토마시는 오래전부터 공격적이고 엄격한 ‘그래야만 한다!’에 회의를 느껴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따라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무거운 의무였던 그래야만 한다!라는 것이 너무 강렬하여 그래서 더욱 강하게 반항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래야만 한다!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은 욕망이라고 할까요?

 

한편 그의 애인 사비나는 공산주의를 미학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사비나에게 여자로 사는 것은 부조리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녀의 삶을 유혹한 것은 정조가 아니라 배신이었습니다. 정조가 청교도적 이었다면 배신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미술대학 당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사회적 리얼리즘을 의무적으로 그려야했지만 피카소처럼 그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낭만적 향기가 빠져버린 추한 단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녀에게 공산주의 세계의 추함은 공산주의가 뒤집어쓰고 있는 아름다움의 가면, 달리 말하자면 공산주의라는 키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격분해서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라고 했습니다.

 

사비나가 토마시를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토마시는 모든 점에서 키치와 정반대였습니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토마시는 괴물이며 미국 영화나 소련 영화에서 그와 같은 사람은 파렴치한 역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비나는 자신을 좋아하는 프란츠 교수에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프란츠는 소련의 탄압을 받았던 모든 나라에 대해 이상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리에서 공부한 프란츠는 재능이 뛰어나 스무 살 때부터 과학자의 출셋길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는 대학 연구실, 공공 도서관 같은 벽 안에서 일생을 보내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책에 파묻힌 그의 삶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현실적인 삶, 다른 남자들, 혹은 다른 여자들과 나란히 걸으며 느끼는 접촉, 그들의 환호 소리를 희구했습니다.

 

프란츠는 사비나의 조국을 좋아했습니다. 더구나 삶이 위험, 용기, 죽음의 위협 같은 웅장한 규모로 판가름 나는 그런 나라에서 온 사비나는 그에게 인간 운명의 위대성에 대한 신뢰를 주었습니다. 그녀 모습에서 그녀 나라의 고통스러운 드라마가 투명하게 드러났기에 그녀는 한결 아름다웠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의 육체보다도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시위 행렬에 참여했습니다. 뭔가를 기념하고, 뭔가를 욕구하고, 뭔가에 대한 항의하고, 혼자 있지 않고 밖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군중은 유럽과 그 역사의 이미지로 보였습니다. 그것은 혁명에서 혁명으로, 전투에서 전투로 이어지며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대장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며 그것을 포기하는 자도 괴물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했던 이런 까닭에 그녀는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주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공허를 느꼈습니다. 이렇듯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습니다.

 

토마시는 히틀러나 아인슈타인 사이나, 브레즈네프와 솔제니친 사이에서는 차이성 보다는 유사성이 훨씬 많았다고 하면서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했는데 그들 간에는 100만분의 1의 차이성과 99만 9999의 유사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100만분의 1의 차이성은 뭘까요? 니체는『권력에의 의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위대한 사람은 (…)어느 사람보다 더 차갑고, 더 거칠고, 주저하는 일이 더 적고, 남들의 생각에 겁내지 않는다. 그는 존경과 체통을 따지는 미덕, 곧 떼거리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는 앞장설 수 없으며 혼자 간다. (…)그는 남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길든다는 것의 비속함을 안다. (…)자신에게 말할 때가 아니면 가면을 쓴다. 그의 내면에는 칭찬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토마시는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번은 중요하지 않으며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고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비록 인간의 존재가 깃털처럼 가볍다고 하더라도 가벼움을 참을 수 없을 때 우리가 위대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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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1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잘쓰시는군요..오래전에 읽어서 가물한데..환기가..고맙게 읽고 가요 ^^

오우아 2012-01-09 09:48   좋아요 0 | URL
손님님..감사합니다^^
 
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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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런저런 인간이 되는 건 다 우리한테 달렸어요. 우리 몸은 정원이고 우리 의지는 정원사와 같은 거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쐐기풀을 심거나 상추씨를 뿌리거나, 한 가지 약초로 정원을 채우거나 여러 가지를 마구 심어놓거나, 또는 태만을 부려서 불모로 만들거나 부지런히 비료를 주거나 간에 글쎄, 그렇게 할 힘과 바로잡을 권한은 우리의 의지에 있다 이겁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저울에서 한쪽의 이성이 다른 쪽의 욕정과 균형을 맞춰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저급한 본능 때문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시도를 하게 될 거란 말씀이죠. 하지만 우리에겐 이성이란 게 있어서 발광하는 충동, 색욕의 자극, 무절제한 욕망 따위를 식혀주는 거라고요.

『오셀로』중에서

 



당신은 푸른 눈의 괴물을 알고 있나요? 셰익스피어의『오셀로』에서 이야고는 그것은 희생물을 비웃으면서 잡아먹는 ‘질투심’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고는 베니스의 장군 오셀로에게 오쟁이 진 자가 운명을 확신하고 죄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더없는 행복 속에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의심하고 수상히 여기지만 강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저주받는 시간을 헤아리겠습니까? 라고 반문했습니다. 또한 가난하나 만족하면 넉넉한 부자지만 가난해질까봐 항상 두려운 사람에게 끝없는 재산은 겨울처럼 가난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고는 전장에서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오셀로의 기수밖에 못 되었습니다. 반면에 전술은 직녀만큼도 모르는 카시오는 오셀로의 부관이 되었습니다. 오래된 연공제가 아니라 추천과 정실로 승진되는 군복무의 저주라고 하더라도 이야고는 무어인 오셀로를 질투를 했습니다. 겉으로는 사랑과 복종을 하면서도 속마음은 자신의 실속을 두둑하게 챙기려고 자기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고는 로데리고와 함께 그의 기쁨에 독약을 뿌리기 위해 한밤중에 브라반시오를 깨웠습니다. 이유인즉 당신 딸(데스데모나)이 무어인(오셀로)에게 도둑을 맞아 당신은 영혼의 반쪽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몰래 결혼을 했다는 것은 브라반시오에게 나쁜 짓이었습니다.

화가 난 브라반시오에 따르면 데스데모나는 절대로 대담하지 않았고 너무나 잠잠하고 조용하여 조금만 움직여도 얼굴을 붉히던 처녀였습니다. 브라반시오는 그녀가 본성과 연령과 나라의 차이와 평판과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숯검정의 가슴과 사랑에 빠져는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셀로를 붙잡고는 완벽했던 그녀가 모든 본성의 법칙을 여기고 그렇게 빗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불완전한 판단이며 마법 없인 불가능하다고 하며 불쾌했습니다. 하지만 오셀로가 누군가요? 데스데모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자유를 속박하는 일 따위는 바닷속 보물을 다 준대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에게 간교한 지옥의 술책을 하지 않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만약 강한 욕정을 일으키는 모종의 합성 약물 또는 비슷한 효능을 가진 마법의 극약으로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빼앗아 다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오셀로는 솔직하게 사랑의 가장 큰 마법을 말했습니다. 즉, 그녀가 제가 겪은 위험 때문에 절 사랑했고 전 그녀가 그 위험을 동정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데스데모나도 지금까지는 아버님의 딸이었지만 이제는 오셀로가 제 남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운명의 여신을 조롱했고 그의 용맹스런 자질에 제 영혼과 운명을 헌납하면서 오셀로에게 최대의 기쁨을 드릴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라의 당면 문제 때문에 공작과 원로원들이 회의를 했습니다. 터키 함대가 키프로스를 향해서 접근하고 있어 그들은 황급히 오셀로 장군을 급파하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비탄에 쌓인 브라반시오는 공작에게 도움을 얻어 오셀로를 감옥에 넣으려고 했으나 전쟁 때문에 오히려 상처 입은 속마음을 귀를 통해 치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작은 오셀로의 아름다움을 듣고는 브라반시오에게 당신의 사위는 검기보단 훨씬 희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데스데모나는 사랑의 부재를 뼈아프다며 자신도 남편과 함께 전장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오셀로도 공작이 그녀의 부탁을 찬성하기를 바랐습니다. 만약 큐피드가 경박한 희롱으로 업무를 썩히고 망친다면 주부더러 제 투구를 냄비로 쓰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야고는 이번 일이 성사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오셀로는 운수가 대통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고는 오셀로에게 복수심을 채우기 위해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이중의 악행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카시오가 데스데모나와 지나치게 친하다는 것으로 오셀로의 귀를 속이려는 것입니다. 심한 태풍이 터기 함대를 무참히 강타하면서 공교롭게도 전쟁에서 승리하자 오셀로는 잔치를 벌었습니다. 그날 밤 이야고는 카시오에게 포도주 한 잔을 권했습니다. 술에 아주 약하고 마시면 실수를 하는 결함이 있어서 카시오는 자신의 약점을 더 이상 시험해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분수를 모르는 술잔은 모두 저주받은 것이고 그 내용물은 악마였습니다. 그러나 카시오는 악마에게 자리를 내주며 자제력을 잃은 나머지 난동을 부려 그만 자신의 불멸이었던 명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고는 카시오를 보면서 오셀로 사이에서 악덕으로 어긋난 관절을 맞춰달라고 그의 부인에게 간청해보라고 했습니다. 카시오에게는 이것이 좋은 충고였지만 이야고에게는 그녀 자신의 덕행으로 그들 모두를 얽어맬 그물이었습니다. 그물에 걸린 데스데모나는 카시오를 만나 남편과 이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진 카시오를 우연히 본 오셀로에게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몰래 도망가는 것 같아 이야고가 안 좋다고 말하자 혼돈에 빠졌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질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만약 엉터리없이 불어터진 억측을 내 영혼의 본분으로 삼는 일이 생긴다면 날 염소와 교환하라고 했습니다.

이야고는 카시오와 데스데모나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고 하면서 오셀로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사랑의 증표인 손수건이 카시오에게 있는 것을 보자 오셀로의 위험한 상상은 유황불처럼 타 올랐습니다. 오셀로는 검은 복수여, 텅 빈 동굴에서 나오너라! 고 말하면서 피를 보고야 말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부하와 사악한 행동을 한 그녀 때문에 오셀로는 정신을 잃어버려 그녀를 창녀, 악마라고 불렀고 그녀의 눈물방울은 악어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죽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안 그러면 더 많은 남자를 배신할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오셀로는 그녀의 목을 졸랐습니다.

오셀로는 그녀가 물처럼 지조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셀로는 불처럼 급하지 않았을까요? 루소는『신(新)엘로이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만큼 우리에게 강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열정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이 격렬할수록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너무도 부드러운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 채 현재의 감정을 미래로 투사하는 것이죠. 이처럼 지속적인 사랑에는 끝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지요. 사랑을 파괴하는 것은 사랑의 격렬함 그 자체입니다.

데스데모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죽이는 죽음은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슬픔에 대하여 오셀로는 진정 사랑하기 때문이며 미움이 아니라 명예로 모든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질투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랑의 격렬함 그 자체는 스스로 생기고 스스로 태어나는 한 마리 괴물입니다. 마치 질투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질투를 격렬하게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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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5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음에 드는군요. 전 이거 오페라보면서 울었었는데. 읽은지 오래되서..다시 한번 읽고 싶군요. 책이 있나 모르겠네요.

오우아 2011-12-12 09:10   좋아요 0 | URL
kingfisher님...감사합니다^^
질투심을 다시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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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든 시인이든 음악가이든, 예술가는 숭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장식물로써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심미감이란 성 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술가는 그러한 점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 만다. 그 비밀은 불가해한 우주처럼 해답을 주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것일까? 그리고 연 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달과 6펜스』중에서

 



살다보면 삶을 바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습니다. 서머싯 몸의『달과 6펜스』에 서 찰스 스트릭랜드는 갑자기 삶을 전환했습니다. 증권 거래소에 다니는 마흔 살의 스트릭랜드는 문학 방면에 전혀 교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술계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그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훌륭한 시민,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 정직한 중개인일 수는 있겠지만 사교에는 재능이 없어 그에게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범하게 살면서 흐릿한 그림자 같았던 그가 결혼한 지 17년이 지난 평균적인 가정을 버리고 파리로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만한 나이에 어떤 여자와 연애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었습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지금 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그가 돌아오기만 하면 만사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작중화자)에게 그를 만나서 그의 동정심에 호소하여 돌아오게 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작가였던 나는 이번 여행이 걱정되기 보다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반감한 느끼기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파리에서 만난 그는 명예와 의무를 저버리고 이름 모를 소녀와 죄스러운 호사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싸구려 호텔에서 가난하게 혼자 지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당황함과 달리 그가 말할 때의 냉당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설득도 하고 충고도 하고 필요하다면 화를 낼 작정이었는데 그는 자기 죄를 순순히 고백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대답이 더할 나위 없이 경멸스럽고 태연했습니다. 사람들이 미워하고 멸시해도 상관없다고 하여 지극히 당연한 내 질문이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싶소.’라는 그의 목소리에는 열정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내가 잘해야 삼류 이상이 되지 못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지 질문하자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무심한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의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권태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화가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단조로운 삶에 한 번도 초조감을 내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어떤 창조 본능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창조 본능이 그동안 삶의 여러 정황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치 암이 생체 조직 속에서 자라듯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마침내 존재를 모두 정복하여 급기야는 어쩔 수 없는 행동으로 몰아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를 상대로 양심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들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봤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며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 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입니다. 문명인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敵)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입니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가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고 맙니다.

그는 인습 따위에 붙잡혀 있지 않아 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누렸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되든 정말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뻐꾸기 같은 그의 이기적인 행동은 나의 친구 더크 스트로브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단한 화가는 아니지만 미술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지닌 스트로브는 그를 위대한 화가라고 하며 적지 않은 희열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그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번은 병이 난 그를 자신의 집에서 간호하려고 하자 스토로브 부인이 반드시 끝이 좋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이었습니다. 그녀가 정성스럽게 돌봐준 덕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와 함께 집에 나간다고 하자 스트로브는 자기가 대신 집에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나버리자 그녀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공기만 마시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고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직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붙잡으려는 일념에 다른 것은 다 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격렬한 개성을 쏟아 붓고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열정을 소진시키고 나면 그는 그것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고 맙니다. 나는 그들이 사랑에 빠졌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의 감정에는 다정함이 있으며 사랑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마는데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병’이었습니다. 그의 진짜 생활은 꿈과 그리고 잠시도 않는 그림 작업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까지 희생시켰습니다.

그는 오랜 방황 끝에 타히티에서 자신의 꿈을 완벽하게 실현시켰습니다. 마치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머무를 곳을 찾아 방황하다가 타히티에서 육체의 옷을 거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고의 삶이 그대로였던 타히티는 그가 찾고자 했던 고향이며 에덴동산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그를 사로잡은 열정은 미를 창조하려는 열정이었으며 그게 그를 신령한 향수(鄕愁)에 사로잡힌 영원한 순례자로 만들었습니다. 가령, 과일들이 수북하게 담겨 있는 그의 정물화에는 열대의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마법에 걸린 과일 같았습니다. 그래서 맛을 보면 신만이 아는 영혼의 비밀과 상상의 신비로운 궁전으로 통하는 문이 열릴 것 같았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선악과(善惡果)처럼 미지의 것을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그림은 가장 대수롭지 않은 것조차 기이하고 복잡하고 고뇌에 찬 개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야성적인 관능성은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고 할까요? 바슐라르는『꿈꿀 권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반 고흐의 황색은 연금술적인 황금이며,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과 같이 만들어진 황금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밀이나 불꽃이나 밀짚 의자의 황금빛이 아니다. 천재의 한없는 꿈에 의해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재산, 한 인간의 마음, 전 생애를 통한 응시(凝視)속에서 발견된 근원적인 진실이다.

그는 예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술가의 가장 힘겨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회의에 부딪혀도 완고하도 끈질긴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위대성은 진짜였습니다. 나 자신의 즐거운 어떤 것을 위해 산다는 것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개성화된 황금빛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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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중학교때 읽고 감동받았던. 그래서 나도 그래야지 했는데..어느덧..근데 그런 결심이 쉽지가 않군요.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고 산다는 결심을 하는 것 말이죠.

오우아 2011-12-05 09:10   좋아요 0 | URL
네..쉽지 않죠~~
그래도 그 마음은 소중히 간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