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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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諸子百家)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학자가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 강신주다. 일찍이 그는 인간의 본성을 ‘벌너러빌리티(vulnerability)’, 즉 ‘상처받기 쉬움’이라고 했다. 그래서 참다운 인문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상처가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생겨난다고 하면 우리는 참다운 인문정신을 통해 현실의 맨얼굴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왜 제자백가에서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일까? 제자백가라고 한다면 춘추전국시대(春秋全國時代)의 사상가들이거나 서양철학에 맞서는 동양 인문정신쯤 간과하는 현실에서 오히려 저자는 <제자백가의 귀환>을 총 12권으로 기획하면서 강한 지적 희열을 역설하고 있다. 제자백가는 패권을 다투는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전쟁과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과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하면서 찬란한 사유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즉 ‘제자백가의 사상이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한 결과’이며 그들의 생생한 통찰력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되지 않았던가?

이번에 나온『철학의 시대』는 시리즈 1권이다. 간단하게 보면 제자백가를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자의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기존의 방식이 한 갈래의 직선의 논리였다면 저자의 방식은 여러 갈래의 곡선의 논리다. 전자가 단편적이고 구조적인 사실을 전달한다면 후자는 사상적이고 문화적 맥락으로 역사와 소통하는 것이다. 곡선의 논리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떻게 그런 사실이 생겨났는지? 주관적으로 확인이 가능해야 한다.

저자는 곡선의 논리, 즉 ‘우회로’를 선택하면서 제자백가를 둘러싼 임의적 해석에 대한 허(虛)를 파고든다. 만약 저자의 학문적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런 기회마저 없었을 것이다. 가령, 위민(爲民)의 실체다. 위민은 ‘백성(百姓)을 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백성은 성씨(姓氏)를 가진 지배계층이었다. 반면에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피지배계층이었다. 결국 저자에 따르면 위민이란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옹호하는데 이용한 수사학에 불과했던 것’이며 민중의 삶 자체를 배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위민을 놓고 두 가지 정치체계가 있는데 ‘동’(同)과 ‘화’(和)다. 동이 군주 일인 지배체계라고 하면 화는 군신 상호 견제 체제를 말한다. 공자는 화의 논리를 토대로 자신의 사유를 펼쳤는데 화의 논리에 반대하고 동의 논리를 추종하는 사상가를 ‘소인’(小人)이라고 폄하하였다. 공자는 군주와 기득권 세력 사이의 분권 체계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 모델이었다. 그러니 관중(管仲)과 같은 동을 지향했던 현실주의적 사상가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제자백가라는 분류의 계보학이다. 흔히 유가, 묵가, 도가, 법가라는 학파 구분은 제자백가들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漢) 제국의 역사가들에 이루어졌다. 한 제국 초기에는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하여 태평성태를 이루었는데 공신 관료나 제후들은 자신들의 지방분권적 이념을 도가 사상으로 정당화했다. 당시의 도가사상은 ‘황로사상’(黃老思想)을 말하는데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인 황제(黃帝)와 도가 사상의 창시자 노자(老子)를 말한다. 특히 노자의 무위(无爲)는 최고 통치자가 관료나 제후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무제(武帝)는 동중서의「천인삼책(天人三策)」이라는 상소문을 통해 중앙집권 정책을 정당화한다. 중앙집권 정책은 유위(有爲)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제는 유가들을 기용하였고 결과적으로 무제의 개혁 정책이 승리하면서 유가는 중국 역사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즉 진(秦)나라 여불위의『여씨춘추』에서는 노자의 사상이 제1의 철학으로 등장한다.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 즉 사마담이 제가백가를 논한 「태사공자서·논육가요지」에서는 유가가 ‘학설은 없지만 요점이 적고 수고스럽지만 효과는 적다.’고 한 반면에 도가는 ‘학설은 간단하여 적용하기 쉽고, 일은 적지만 효과는 크다.’고 했다.

사마담은「논육가요지」을 통해 유가보다는 도가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은 달랐다. 표면적으로 사마담의 견해를 따르는 것 같지만『사기』의 편재를 보면 그 속내를 알 수 있다. 노자를「노자한비열전」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달리 공자는「공자세가」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공자를 ‘최고의 성인’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반고의 『한서』「예문지」에서 유가의 학설은 ‘다양한 학설들 중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사기』와『한서』의 제자백가를 분류하는 방법 ‘유가 학파’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데 문제는『회남자』와 달리 역사성이나 사상성이 배제된 ‘구조적인 접근법’이라는 것이다.

『철학의 시대』를 읽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모든 것은 제대로 된 배경하에 두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법’을 새삼 확인했다. 공자는『시경』300여 편에 사악함이 없다고 했다. 낯 뜨거운 남녀 간의 애정사가 실린 것을 보고도 그랬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공자는 이것을 군주와 신하 사이의 메타포로 해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 제가백가의 사상을 유가, 묵가, 도가 등으로 압축하는 것은 단지 명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관중의 사상, 공자의 사상, 맹자의 사상’등으로 제자백가의 사상을 각각 ‘고유명사’로 이해하길 바란다. 이것이 제가백가가 객관성이 아닌 주관성으로 귀환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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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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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名醫)의 대명사인 편작(扁鵲)이었지만 정작 그의 집안에서는 하수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편작은 병이 극심하게 진행된 환자들을 치료하여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편작보다 고수라고 한다면 불치병을 훨씬 더 많이 고쳤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정반대다. 편작의 작은 형은 병의 초기단계를 치료하는 아마추어 의사였다. 그리고 작은 형보다 더 고수인 큰 형은 병이 걸리기 전, 즉 미병(未病)단계에서 치료를 하여 굳이 의사라고 불리지 않았다.

고미숙의『동의보감』을 읽었다. 고미숙은 앎의 고수다. 앎의 고수가『동의보감』을 읽고 리라이팅을 했다는 것은 앎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비록 고전이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무관한 고전이라면 여전히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고미숙은 그 경계에서『동의보감』을 놀라운 텍스트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편작의 형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미병단계, 초기단계이며 우리의 일상에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건강하게 살려고 한다. 쉽게 말하면 건강이란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精神)은 어떤가? 마음은 건강해야지 하면서도 몸은 그대로다. 그런가하면 몸만 생각한 나머지 정신을 소홀히 한다.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다. 그러나 동양 사상에서 정신은 원래 하나였다. 정은 생명의 물질적 토대, 신은 물질을 움직이는 무형의 벡터였다. 정신 차려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은 생명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취지를 살펴보면 ‘사람의 질병은 모두 섭생을 잘 조절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것이니 수양이 최선이고 약은 그 다음이다.’라고 했다.『동의보감』은 단순히 질병과 처방을 다루는 임상서가 아니라 수양과 섭생을 우선으로 하는 양생서(養生書)였다. 그래서 저자는 내경(內徑)-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로 이어지는 5편 106문 목 차는 다른 어떤 의서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분류학의 결정판이라고 했다.

이러한 분류에서 인간의 몸은 우주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이 곧 우주이다. 「내경편」의 신형(身形)을 보면, 

하늘의 형은 건(乾)에서 나오니,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가 있다. 태역은 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고, 태초는 기가 시작하는 것이며 태시는 형이 시작하는 것이고, 태소는 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형은 몸의 형태라는 것인데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부터 시작하고 있다. 우주는 기-형-질의 순서에 따라 구체화된다. 그리고 사람의 몸 역시 기를 바탕으로 해서 생명의 원천인 정·기·신이 만들어진다.

한편으로 기·형·질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질병도 함께 탄생한다. 즉,

형기가 갖추어진 다음에 아(痾)가 생긴다. 아란 채(瘵)이고, 채란 병(病)을 말하는 것으로 병이 이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태역으로부터 생기고 병은 태소로부터 생긴다.(「내경편」, 신형)

『동의보감』이 말하는 질병의 진행과정은 아-채-병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아는 원초적 불균형을, 채는 스트레스와 과로에 가까운 피곤한 상태를, 병은 피로함이 심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질병은 특수한 고통과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선 반드시 수반해야 할 필연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결국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병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살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파야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양생을 할 수 있을까? 양생의 규칙을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태과불급 (太過不及)이 아니어야 한다. “기가 실하면 형도 실하고, 기가 허하면 형도 허한 것이 정상이다. 이것과 반대면 병이다.”(「잡병편」, 변증) 형과 기는 서로 어울러야 한다. 그런데 태과, 즉 넘치는 것인데 좋은 기운(정기)이 나쁜 기운(사기)가 된다. 불급, 즉 모자라는 것인데 정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통즉불통(通則不痛)이다. 통하면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통의 경계는 몸과 마음, 몸과 몸, 몸과 사회, 몸과 우주 등등 무궁무진하다.

수승화강(水昇火降)도 간과할 수 없다. 오장육부는 음양오행이자 사계이며 상생이자 상극이다. 오장육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심장과 신장이다. 심장은 군주지관이며 오행으로는 화(火)다. 신장은 정을 저장하며 오행으로는 수(水)다. 자연계에서는 불은 올라가고 물은 내려간다. 하지만 우리 몸은 대대(待對)의 원리에 따라 그 반대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곧 수승화강이다. 만약 수승화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음허화동(陰虛火動)이 된다. 심장의 불이 제멋대로 망동하게 된다.

이렇듯 저자는『동의보감』을 재해석하면서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았다. 몸과 우주는 앞서 말했듯 동양사상의 키워드다. 몸과 우주는 상생 혹은 상극으로 순환한다. 모든 것은 관계의 서사다. 그러면 삶의 비전은 뭘까? 그것은 바로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는 것, ‘내 안의 타자들을 긍정하는’ 것,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조율하는 자기수련’이다. 병이 있다고 해서 치료에만 의존하는 것은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새롭게 ‘호모 큐라스’가 되는 것이다. 한 번쯤 ‘자기 몸의 연구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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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1-01 18:19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
 
 
 
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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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동물을 구분해온 지 오래다. 둘을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인간만의 특징들은 하나의 개념이 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동물의 생태보다는 인간의 문화를 증명하는 셈이다. 가령, 500만 년 전 인간과 침팬지는 공통조상으로 분화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과 침팬지의 다른 점을 찾아보면 책 한 권이 되고도 남을 정도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한다거나 육식을 한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물론 인간의 우월성은 독단적인 경향이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의미한다. 찰스 다윈이『종의 기원』에서 “언어를 제외하면 아마도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발견”은 ‘불로 하는 요리’라고 말한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인간에 관한 흥미로운 발견은 진화 생물학의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자연선택을 통한 적응의 결과라는 것이다. 리처드 랭엄이『요리 본능』에서 제시하고 있는 ‘요리하는 동물’도 진화의 구도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인간이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기계문명 사회를 이룩하는데 있어 그 시작은 불을 발견하고 소유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러나 저자는 단순한 불의 소유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행위를 강조하는데 바로 불을 사용한 요리의 발견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요리 덕분에 만물의 영장으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추천한 최재천 교수도 우리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준 요리사를 가장 인간다운,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요리하는 동물이 되었을까? 저자는 다양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인류의 진화과정을 설명하는 ‘사냥꾼 인간 가설’ 혹은 ‘육식 가설’이 불완전하다고 한다. 인류의 진화 과정은 대략적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하빌리스→직립원인’의 단계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육식가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하빌리스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반면에 하빌리스→직립원인의 진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유인즉 직립원인의 약한 구강구조 때문이다. 상당한 육식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직립원인이 육식을 하기에는 빈약한 턱과 작은 치아가 문제였다. 진화과정에서 하빌리스는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였는데 저자는 ‘불로 요리하기’를 인간적인 존재로 도약하는 요인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화식(火食)가설’, ‘요리 가설’이다.



인간에게 음식이 중요한 것은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생존을 위한 일차적인 본능 때문이다. 음식은 신체의 에너지를 활성화시키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먹는 방법이 있다. 생식(生食-날 것)과 화식(火食-익힌 것)이다. 동물들은 야생의 먹을거리를 날 것으로 먹으면서도 잘 살아간다. 사람들은 이 점을 주목하면서 생식이 건강에 좋다고 여긴다. 채식주의자 에드워드 하월은 생식이 우리 몸에 좋은 이유를 “살아 있는 혹은 활성인 효소”가 이로운 작용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에 화식은 활성인 효소를 파괴하기 때문에 건강에 좋을 리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생식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음식에 들어 있는 효소는 체내의 소화나 세포 작용에 기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화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일깨워주고 있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음식의 화학성뿐만 아니라 물리성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단순히 생화학 반응을 기다리는 영양 용액이 아니라 치아에 씹히고 장에서 분쇄되어야 하는 끈적끈적한 3차원의 근육 덩어리’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변화는 섭식 행동에 있어 ‘최적 섭이(最適攝餌) 이론의 한계를 적절하게 파악할 수 있다. 동물의 섭식 행동이 단순히 보다 많은 열량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진화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외적으로 인간의 경우는 화식을 한다는 것이다. 화식의 장점은 날 것보다 소화하기 쉬우며 화식에 적응한 결과 별도의 이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별도의 이점은 첫째, 소화관이 작다는 것이다. 인간의 소화관 무게는 체중의 60%에 불과하다. 하지만 익힌 음식 때문에 열량의 밀도가 높아지고 소화가 잘 되는 덕분에 소화하는 에너지 소모량은 대형 유인원과 비교하여 10%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화식은 우리 몸이 해야 했을 일을 대신해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전체의 에너지 이용 효율이 높다는 것이다. 화식을 하면 에너지 손실이 일어나거나 불필요한 독소가 발생하는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에너지 측면에서 얻는 전체적인 이익과 비교하면 이들의 효과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화식에 적응하면서 생긴 인간의 변화 속도는 빨라졌다. 가령, 인간의 뇌의 용량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450cc→하빌리스 612cc→직립원인 870cc으로 증가했다. 뇌의 무게는 인체의 2.5%에 지나지 않지만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인체의 기본 대사율의 약 20%에 이른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 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는데 화식이 결정적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셋째, 인간을 자유롭게 했다. 이것은 화식의 진화가 인간이 만든 사회로 확장된 것이다. 에너지 효율이 낮은 동물은 끊임없이 먹고 배설해야 한다. 하지만 에너지 효율이 높은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경제에 있어 남녀의 성별 분업이 가능해졌다. 성별 분업에 따라 경제적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가정이라는 차원의 효율적인 경제로 전환될 수 있었다. 고고학자 카트린 페를레스는 ‘요리는 개인의 자급자족에 종지부를 찍는다.’고 말하면서 요리가 필요에 의한 사회적 행동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결혼의 일차적인 요인이 경제이고 성적 관계는 부차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요리 본능』을 읽으면서 요리가 진화의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만약 요리가 없었다고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맛없는 상상에 불과할 것이다. 야생으로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딱딱하고 질긴 그래서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작은 입 유인원’(화식)이 ‘큰 입 유인원’(생식)으로 신체가 변화한다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 되었다. 진화의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코 역행한다는 것은 아니다. 소화하기 쉽고 가공된 그리고 영양소가 주된 식습관에 따라 고도의 비만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이럴 때 음식 평론가 마이클 폴란이 주장한 ‘진짜 음식’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해봐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생존에 있어 또 다른 본능이다. 건강한 요리가 건강한 신체를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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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한 줄
강명석.고재열.김화성 외 지음 / 북바이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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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먼 영은『책은 죽었다』에서 책을 ‘기능적인 책’과 ‘안티 책’(anti book, 나쁜 책) 그리고 ‘책’으로 나눈다. 기능적인 책이란 흔히 말하는 교과서 같은 책을 말한다. 안티 책이란 상업적인 책으로 사상이 담겨 있지도 않고 사고를 촉발하지도 못하는 책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책이란 좋은 책을 의미하는데 깊은 사고를 통해 깊은 대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어록(語錄)의 시대다. 새로운 미디어, 즉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누구나 어록족(語錄族)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어록이란 위인들의 짤막한 말을 모은 기록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은 ‘누구누구’의 말이다. 여기서 누구누구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스타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트위터 스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트위터 스타와 팔로워하고 리트윗(RT)하면서 소통하고자 한다. 소통의 목적은 간단하다. 설득이 아니라 공감이다.




그러면 거꾸로 트위터 스타들은 어떻게 대중들과 공감하는 것일까? 강명석 외 25인이 공동집필한『공감의 한 줄』은 ‘트위터 멘토’라고 충분히 부를 만 했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어록을 쓰는 것 못지않게 선택하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자신이 선택한 어록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보다는 사실에 대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필이 꽂혀서 들뜬 기분이 되는 것은 이렇다. ‘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당신이 그것을 기가 막히게 표현을 해주는군.’




그들의 기가 막히게 표현에는 뭔가 마음을 흔드는 것이 있다. “큰 을乙 하는 것보다 작은 갑甲 하는 게 저는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인이니까요.” 시골의사 박경철은 스스로를 ‘소갑주의자’小甲主義者 라고 하며 삶의 주인공이 되라고 했다. “3등은 괜찮다. 삼류는 안 된다.” 로커 김태원은 경쟁사회에서 패배주의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격려한다. “항상 갈망하고, 끝없이 무모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 혁신의 아이콘(iCon) 스티브 잡스는 삶의 비전을 제시한다. “산이란 인간의 의지만으로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악인 엄홍길은 산 앞에서 겸손함을 말한다.




그런가 하면 사회정치적 메시지라고 할 만큼 현실에 대한 냉소주의도 다반사다. 정치 없는 정치라든가 말로만 하는 정치는 불편한 소음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대신 나랑 밥이나 한번 먹자.” 연기자 김여진은 ‘하라’고 하지 않고 ‘하자’라고 말한다. “웃기는 데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사회사司會士 김제동은 웃음은 불법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천장에서 비가 새고 있는데 디자인 좋은 벽지로 도배할 것인가?” 현실 정치인 노회찬은 군더더기 없이 분노한다. “‘미안해. 하지만…’은 사과가 아닙니다. 진심어린 사과는 변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과학자 정재승은 사과할 줄 모르는 시대에 직격탄을 날린다.




이 책에서 보듯 어록에는 좋은 말이 많다. 좋은 말이란 ‘힘 있는 말이며 힘 있는 움직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만큼 자기희생과 책임감이 따른다. 트위터를 읽다보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더구나 남들한테는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정작 자신은 이렇게저렇게 하지 않으면 끝내 그런 말은 ‘안티 트위터’(나쁜 트위터)가 되지 않을까? 조국 교수 말대로 ‘이념’을 떠나 ‘품성’이 왜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품성은 곧 진정성이다. 진정성은 소설가 이외수가 말한 ‘마음’으로 공감해야 한다. 즉 ‘흥부가 다리 부러진 제비를 보고 불쌍해 못 견디는 건 마음이다. 그것을 보고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한몫 잡아야겠다는 게 생각이다.’




이 책을 기획한 한기호 소장은 어록을 ‘대낮의 글쓰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낮의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브리콜라주bricolage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한다. 브리콜라주는 개인이 즉각 동원할 수 있는 것들로 필요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지식, 바로 역량을 말한다. 그리고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쓰기와 읽기가 항상 순환론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즉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록의 과잉시대! 어록에 대한 착각은 <시사IN> 문화팀장 고재열이 말한 ‘어록만 따먹는 것으로는 정신을 살찌우지 못한다.’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다시 반복하자면 그들의 ‘저작으로 들어가 맥락을 찾고 철학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에 관하여 공병호는 “로마에 가면 돌멩이만 보인다. 모르면 그냥 돌멩이다. 그 역사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 단순한 돌멩이가 아닌 것이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본문은 그냥 본문이 아니다. 좋은 어록은 다름아닌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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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기술 - 불확실한 삶이 두려운 이들을 위한 철학 연습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방황은 죄일까? 기술일까? 이러한 난해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생각 실험을 할 수 있다. 가령, 세상에서 제일 빠른 사람과 거북이가 경주를 한다면 누가 이길까? 사실상 이것은 경주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거북이가 약자(弱者)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 그래서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거북이 먼저 100미터 앞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사람이 거북이를 추월하려면 100미터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하지만 그 사이 거북이는 몇 미터 갔다. 다시 사람이 거북이를 추월하려고 해도 거북이는 그만큼 다른 지점에 있다. 이렇듯 논리적일 때는 사람이 거북이를 추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어떤가? 사람이 거북이를 얼마든지 추월할 수 있다. 때로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인생이 호기심 있고 매력적인 이유는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은 우리를 낯선 세계에 초대하면서 한계 상황에 도전하라고 한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어에 파르마콘(pharmakon)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약(藥)이자 동시에 독(毒)을 말한다. 예측 불가능이 삶의 방향을 찾는 긍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방향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우리는 방황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굳이 불안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 방황은 불안 그 자체다. 방황은 불안한 사람에게 죄라는 그림자를 따라붙게 만든다.

 


그러나『방황의 기술』의 저자 레버카 라인하르트는 우리의 생각과 낯설다. 저자는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방황의 기술’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저자에게 방황은 인생의 장애물이 아니라 멋진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추천하면서 철학자 강신주는 방황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행인가?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에게 인간은 왜 방황해야만 하는지, 왜 방황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방황이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려고 한다. “낯선 것, 예측할 수 없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 세계에서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성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10쪽)

 


이 책에서 말하는 방황의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 번째는 방황을 가로 막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방황을 위한 도구다. 방황을 가로 막는 것에는 ‘불확실성 시대의 확실성, 나르키소스 2.0, 과도한 이분법적 사고, 모든 것이 당연해진 일상’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방황을 위한 도구에는 ‘지름길 이해하기, 경계 넘나들기, 연속성 느끼기, 죽음 만나기, 기계 전원 끄기, 인생의 규칙 벗어나기, 일상 철학자 되기’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에서 눈여겨 볼 것은 모든 것이 당연해진 일상이다. 우리의 일상은 분주하다. 이런 저런 퍼즐을 맞추기 위해 우리는 기계적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수록 삶은 공허하고 부조리해진다. 무력하고 무의미한 삶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인하르트는 시시포스에 답을 찾고 있다. 시시포스는 불손(hybris)의 죄를 졌다. 불신이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오만을 말한다. 그래서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 정상에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여기서 벌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꼭대기에 오르자마자 바위는 도로 굴러 떨어져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밀고 올라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시포스에 대하여 절망하는 동안 카뮈는『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바위의 결정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산의 광물 하나하나가 오직 그것만으로 그에게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제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뮈의 사유는 놀랍다. 삶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절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자살을 한다거나 권태롭게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시포스를 가엾게 생각하는 것이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정작 시시포스 스스로는 불행하지 않았다. 시시포스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자신이 고통을 초래했던 지식은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뮈가 말한 ‘행복한 시시포스’는 행복한 상상력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불행한 시시포스가 아니다.

 


두 번째에서 눈여겨 볼 것은 지름길 이탈하기다. 지름길 이탈하기에서는 ‘가치를 계산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방향감각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제 갈 길을 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모험이다. 어느 정도는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에 따라 방향은 바뀌기도 한다. 방향은 목표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방향이 안개에 가려질 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안개 때문에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은 혼돈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식인 괴물 폴리페모스에게 벗어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마음껏 취한 폴리페모스는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을 묻자, 오디세우스는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우데이스Udeis)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아무도 아닌 자’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영웅이 된 것일까?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를 신화적 인물이 아닌 ‘계몽된 인간’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즉,

 


신화적 운명, 숙명은 입으로 나온 말과 하나였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이용하는 것이 꾀다. 사람들은 사물을 바꾸기 위해 말에 매달린다. (…)우데이스라는 이름이 ‘영웅’과 ‘아무도 아니다’ 둘 다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우데이스는 이름이라는 마력을 부술 수 있다. (…)그는 “아무도 아니다.”라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사라지게 만들어 자신의 생명을 구한다.

 


『방황의 기술』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방황의 의미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방황은 ‘자발적 여행’이라는 것이다. 소심한 사람들에게 자발적 여행은 쓸데없는 고통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타율적인 여행만 하는 것은 허무하다. 이런 허무함의 경계를 넘어서면 우리는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을 알게 된다. 니체는 ‘존재의 가장 큰 수확과 가장 큰 즐거움을 거둘 수 있는 비결이다. 위험하게 살아라!’고 했다. 위험하게 산다는 것은 낭만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는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낯설게 깨닫게 된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정상적인 두 가지 문명 때문에 삶이 안정되고 편리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삶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자발적 여행도 예외는 아니다. 방황은 여전히 부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은 없을까?『방황의 기술』의 통찰은 아주 유효하다. 방황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고 있다. 그것도 용기와 호기심으로 과감히 선택하라고 한다. 그래야 노발리스가 말했듯 ‘삶이란 주어진 소설이 나이라 우리가 만든 소설’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발적 여행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낯선 만큼 흥미진진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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