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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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당신이든 누구든 자기를 넘어선 삶이 있고, 또는 그런 삶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만약 내가 이 지상의 것이야만 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무엇일까?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나는 그 일부분으로 생각되지도 않을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폭풍의 언덕』중에서

 

사랑하는 영혼은 같은 것

어떤 사람의 영혼이 달빛이거나 불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에밀리 브론테의『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은 제목만큼이나 사랑하는 방법이 폭풍 같습니다. 그녀는 서로가 사랑한다면 서로의 영혼이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사랑하는 영혼은 같은 것이야 합니다. 만약에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영혼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던 것은 그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 말대로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캐서린이 사랑했던 히스클리프는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어릴 때부터 버려진 아이였는데 캐서린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여행 중에 자신이 사는 ‘위더링 하이츠’에 데려왔습니다. 시커먼 악마 같은 두 눈을 가진 히스클리프를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말광량이였던 캐서린만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힌들리 오빠의 히스클리프에 대한 학대가 문제였습니다. 학대란 성인(聖人)도 악마로 만들기에 족한 것입니다. 캐서린 이런 현재만을 생각해서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히스클리프를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히스클리프는 예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소중했습니다.

 

오만한 사람의 이상한 쾌감

정말로 마음씨가 착하면 얼굴도 선해지는 걸까요? 치장한 인형 같았던 에드거와는 달리 촌뜨기였던 히스클리프가 크고 푸른 눈과 번듯한 이마를 원했습니다. 캐서린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악마 같은 두 눈을 천사 같은 눈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하지만 힘든 일과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멸시를 받으면서 점차로 이러한 우월감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무뚝뚝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품게 하는 이상한 쾌감을 느끼며 오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 슬픈 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마침내 폭풍이 치던 어느 날 밤, 히스클리프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자 캐서린은 불같은 성미를 억누르지 못해 사랑의 열병에 걸렸습니다. 열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캐서린의 마음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마치 가시나무가 인덩덜굴 쪽으로 휘어진 것이 아니라 인동덩굴이 가시나무를 감은 격으로 말입니다.

 

에드거와 결혼한 캐서린은 폭발하는 불이 가까이 없었기 때문에 이따금 우울했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히스클리프가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그녀의 영혼에 폭풍이 불었습니다. 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달라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서로의 기쁨에 열중하자 에드거는 반대로 불쾌감으로 점점 창백해졌습니다. 히스클리프와 그는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히스클리프와 있으면 가장 훌륭한 사람도 악에 물들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히스클리프가 워더링 하이츠에서 지내는 동안 힌들리는 노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걱정거리는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가 갑자기 히스클리프를 좋아하게 된 예지치 않은 불행이었습니다. 캐서린은 겉모습과 달리 히스클리프의 속은 사나운 늑대라고 하며 반대했지만 이사벨라는 훌륭하고 진실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캐서린의 이기심일까요? 이사벨라의 질투일까요? 그러나 진짜 정답은 히스클리프의 복수심에 있었습니다. 지독하게 대접을 받았던 삶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벨라와 결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복수를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결국 이사벨라는 비참해질 정도로 바보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캐서린을 지금까지 잊지 않았던 건은 에드거처럼 어떤 의무감이나 인정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삶은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에드거가 팔십 년 동안 캐서린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의 하루 동안 사랑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캐서린이 에드거를 한 번 생각하는 동안에 자신을 천 번이나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 왜 당신 마음을 배반했는지 격정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자기 마음을 죽이 것이며, 당신은 나를 사랑했는데도 무슨 권리로 자신을 버리고 갔느지, 에드거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는지,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는데…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 것이며,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 놓은 거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당신 같으면 마음 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고도 살고 싶겠어? 말했습니다. 캐서린이 괴로운 나머지 흐느끼면서 용서해달라고 하자 히스클리프는 나는 나를 죽인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라고 하면서 용서했습니다.

 

유령의 존재를 믿으며

그러나 캐서린이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지만 편안하게 천국으로 갔다고 하자 히스클리프는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하면서 했습니다. 지난 18년 동안 밤낮으로 자신을 괴롭혀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캐서린 언쇼!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찾아오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인 사람에게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면서?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아! 견딜 수가 없어! 내 생명인 당신 없이는 못 산단 말이야! 내 영혼인 당신 없이는 난 살 수 없단 말이야!

 

히스클리프는 유령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는 교회 묘지의 머슴에게 부탁하여 캐서린의 관 뚜껑을 열고는 조금 느슨하게 하고는 흙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캐서린에 옆에 묻힐 때 자신의 관도 한쪽을 조금 느슨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서로의 영혼이 넘나들기 위해서 입니다. 캐서린이 죽은 뒤 그는 미치광이처럼 밤낮으로 내게 돌아오기를 빌었습니다. 적어도 영혼이라도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유령이라는 게 있을 있다면 그런 것이라는 의심이 아니라, 유령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하며 그는 유령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다시 한 번 캐시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에 관 두껑을 뜯어냈는데 그때 그 귓전에서 진눈깨비를 몰고 오는 바람을 물리치는 따뜻한 숨결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캐서린이 땅속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걸 느끼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온몸으로 퍼졌습니다.

 

영혼 자신은 아직 만족하지 못하네

히스클리프의 악마적인 성격은 비참함을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파멸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가 훨씬 비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악마 같은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으며, 이로 인해 외롭고 더욱 상실감이 클 뿐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가까워진 그의 고백을 들으면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는 죽음이 두렵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을 성취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꿋꿋하게 그 소원의 성취를 열망했던지 그는 그것이 꼭 성취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소원이 성취되리라는 기대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는 고백한다고 해서 어떤 구원을 받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이 오랜 싸움에 대한 자신의 성격의 설명할 수 없는 면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만을 위한 생활을 하며 신자답지 않은 생활을 했습니다. 아마 그동안 성경이란 것에 한 번도 손도 대지 않은 탓에 그는 틀림없이 성경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도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걸 뒤적거릴 여유도 없습니다. 만약 이제라도 돌아가기 전에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도저히 성경 말씀에 나오는 천국에 갈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뉘우칠 게 없으며 너무 행복하지만 아직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영혼의 행복이 자신의 육체를 죽이고 있지만 영혼 자신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남들이 바라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는 자신이 바라는 천국에 거의 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궤도

히스클리프는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의 유령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랑과 욕망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사랑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소유란 우리의 궤도를 돌던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욕망은 그 대상을 얻는 순간 없어진다. 반대로 사랑은 불완전하고 영원한 어떤 것이다. 욕망은 수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원하게 된다. 이때 나는 중력의 한 가운데에 서서 그 대상들이 내게로 빨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대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유일한 시련일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괴상하다고요? 어쩌면 괴상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멸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무모한 노력은 행복인 동시에 고뇌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사랑의 궤도는 사랑의 유령을 불러낼 정도로 영혼을 넘나듭니다. 한 번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어떤 궤도를 타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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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3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오우아님, 오랜만에 리뷰 보니 반가워요.
저는 저 위의 두 문장만으로도 기분이 상당히 좋아지네요.
그럼에도 자신만을 생각하는 연약하고 한심한 사랑도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