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 종교, 신화, 미신에 속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라!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데이브 매킨 그림 / 김영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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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를 ‘눈 먼 시계공’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일까? 도킨스는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생명에 대해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가장 간결하고도 멋진 ‘지상 최대의 쇼’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시대 최고의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진화론을 근거로 하여 지적인 설계자를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것이 도킨스의 현실의 전부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도킨스의 날카로운 주장은 오히려 과학의 경이로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도킨스가 진화생물학자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이다.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놀라울 것이 너무나 많은 탓에 무감각해서 그렇다. 그러나 거꾸로 과학의 경이로움 즉, 새로운 무언가를 밝혀내는 것은 과학의 문외한들에게도 즐거운 학문이 될 것이다.

 

이번에 나온『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세대의 독자를 위해 가장 쉽고 가장 재미있게 풀어쓴 과학 입문서’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 입문서라고 해서 고통스럽게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읽는 것 못지않게 행간의 내용을 이해할 만한 시간이 감동적이어야 한다. 이 책이 어느 때보다 더 생동감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킨스의 명쾌한 문장뿐만 아니라 천재적인 일러스트 데이브 매킨의 황홀한 그림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한번쯤 고민해 볼만 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과학적인 질문에 친절하게 설명하면 데이브 매킨의 상징적은 그림은 한층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찬찬히 읽다보면 어느 순간 과학이라는 묘한 뉘앙스를 알게 된다. 단순한 흥밋거리로만 알고 있었던 현실의 모든 현상들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는데 과학은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나는 현실 세계에도 마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현실이기에 더 마법적이고, 우리가 그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에 더 마법적이다. 현실이야말로 가슴 뛰는 마법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저자의 핵심적인 주장에 따르면 현실은 다름 아닌 과학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법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과학의 경이로움은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에서 영향을 받는 가슴 뛰는 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도킨스는 왜 현실을 가슴 뛰는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게 된다. 바로 도킨스가 생각하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도킨스는 자신이 중요한 물건으로 분광기(spectrometer)를 선택했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시실은 정반대다. 분광기만큼 도킨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없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분광기는 무지개기계인데 뉴턴의 프리즘보다 세련된 물건이다. 뉴턴 이전 사람들은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를 만든다는 것을 알았지만 프리즘이 흰빛을 물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뉴턴의 생각은 달랐다. 뉴턴은 프리즘 세 개를 사용한 결정적 실험을 통해 흰빛은 여러 색의 혼합이고 프리즘은 혼합된 색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증명했다.

 

우리는 망원경에다 분광기를 달면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우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순간, 우주라는 것이 놀랍게도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우리가 현실을 아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우리의 오감으로 직접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소금은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우리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을 때 망원경이나 화석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향상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공룡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 때문에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셋은 좀 더 간접적인 방법으로 모형이다. 현실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모형을 만든 다음 그 모형이 옳다면 어떤 것의 존재를 믿어도 좋다. 가령, 유전자는 DNA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DNA에 관한 지식은 전부 모형을 통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DNA도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마법에 대해서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초자연적인 마법이다. 신화나 동화를 보면 주문에 의해 왕자가 개구리로 바뀐다. 하지만 이런 마법은 이야기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은 무대 마법이다. 무대 마법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은 저자가 주장하는 ‘시적 마법’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은 캄캄한 밤에 별들을 바라다보면서 숨 막히는 희열을 느끼는 ‘순수한 마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법은 깊이 감동하는 것, 신나는 것을 말하며 ‘내가 정말로 살아 있구나.’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도킨스는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현실과 마법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현실이고 마법인지 알게 된다. 현실이라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감각이 아는 것뿐만 아니라 아직 모르는 것들까지 현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과학은 어떤 것이 현실일 가능성을 찾는데 유용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말대로 어떤 것의 존재를 믿어도 좋은 경우는 오직 진정한 증거가 있을 때뿐이다. 진정한 증거는 우연한 과정과는 반대다. 만약에 어떤 것이 단순히 우연한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마법적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가슴 뛰는 마법은 ‘과학적 기법을 통해 이해되는 현실세계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가령, 세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라는 질문에 답하는 많은 기원신화들을 보면 신에게 매혹당하고 있다. 중국의 반고, 인도의 브라마 같은 창조 신화는 현실적인 것이 전부는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 그 너머를 상상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아름다운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쯤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창조자의 주체는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창조자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화가 삶의 다른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는 똑같지 않다는 것에 저자와 마찬가지로 실망하게 된다. 과학자의 눈으로 봤을 때 다른 의미란 곧 초자연적인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주의 시작은 과학적으로 ‘빅뱅’(Big Bang)이라는 인과(因果)의 원리로 입증할 수 있지 않은가!

 

저자는 다른 질문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현실적 상황 안에서 과학의 존재를 역설하고 있다. 먼저 현실적 상황에서 최초의 인간은 누구였을까?, 사물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지진이라 무엇일까? 기적이란 무엇일까? 이라는 질문에 대하여 ‘신화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그리고 나서 ‘정말로’, ‘어떻게’라는 강한 의문으로 과학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화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최초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다. 이유인즉 시간을 거슬러 185,000,000세대 전 할아버지의 모습은 놀랍게도 ‘네 발 달린 물고기’다. 그런가 하면 지진은 거인의 재채기가 아니다. 오히려 판구조론에 따라 대륙은 ‘덜컥’거리면서 움직인다. 끝으로 기적은 초자연적이며 순수한 픽션에 가깝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저자는 기적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반대한다. 문제는 초자연적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가장 안전한 해결 방법이라는 것이다. 즉 가장 어려운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무언가를 초자연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예 설명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그보다 더 나쁘다. 설명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구의 생명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억측과 비상식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무런 개연성이 없다. 그래서 일까? 도킨스의 마법, 종교․신화․미신에 속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라!는 과학의 마법은 옮긴이의 말처럼 얼마나 ‘이성적인 감동’인가? 앞으로도 도킨스의 가슴 뛰는 마법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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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산업혁명 - 수평적 권력은 에너지, 경제,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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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체계는 문명의 성격을 결정한다.

『3차 산업혁명』중에서

 

 

 

미래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해온 저명한 사회 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의『3차 산업혁명』은 『소유의 종말』, 『공감의 시대』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현대적(現代的)인 대작(大作)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분류된 고정된 시간이 아니라, 늘 새롭게 접근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작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 경제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인식하면서 통찰하는 새로운 관점이 대단히 진지하면서도 흥미롭게 읽히는 묘한 중독성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3차 산업 혁명』을 주목하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탐구이다. 지금,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혹은 살아야 할 문명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차 산업혁명』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세계 경제의 몰락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면서 전지구적(全地球的) 문제로 한층 더 부각시키고 있다. 앞서 설명했듯 저자의 혁신은 문명의 성격을 에너지 체계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에너지 체계가 중요한가? 1차, 2차 산업혁명은 석탄, 석유,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에 의존했다. 화석연료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에 엘리트 에너지라고 불렸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은 태양열, 지열, 풍력 같은 재생 에너지를 사용한다. 화석연료에서 재생 에너지로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단순히 지구 온난화라는 기후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엔트로피의 증가에 있다는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는 사용 가능한 형태에서 불가능한 형태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흐른다. 이것이 곧 엔트로피다. 가령, 석탄을 태우면서 생겨난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흩어진 에너지를 다시 모은다고 해서 석탄 덩어리를 만들어 재사용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런 에너지의 양이 제한되어 있어 지구의 파괴적 결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열역학 관점에서 지구는 태양과 우주에 대해서 닫힌계(系), 즉 에너지는 교환하지만 물질을 교환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구의 화석연료는 엔트로피의 증가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고갈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탄소 시대 화석연료 사람들은 산업화가 유발한 막대한 엔트로피 청구서를 간과했다.

 

 

 

그래서 저자는 3차 산업혁명의 다서 가지 핵심 요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한다.

2. 모든 대륙의 건물을 현장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미니 발전소로 변형한 3. 모든 건물과 인프라 전체에 수소 저장 기술 및 여타의 저장 기술을 보급하여 불규칙적으로 생성되는 에너지를 보존한다.

4.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여 모든 대륙의 동력 그리드를 인터넷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는 에너지 공유 인터그리드로 전환한다.

5. 교통수단을 전원 연결 및 연료전지 차량으로 교체하고 대륙별 양방향 스마트 동력 그리드상에서 전기를 사고팔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화석연료가 아닌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녹색 경제를 지양해야 한다. 1차, 2차 산업혁명은 사람들을 근면하게 했다. 각 개인의 근면함은 생산성이 높은 노동력이었으며 물질적 진보를 이뤄냈다. 아메리칸 드림에서 보듯 승수 쌓기라는 이기적인 자아를 강조한다. 하지만 3차 산업혁명에서는 ‘생명애’(biophila)에 공감하는 ‘생태학적 자아’(ecological self)다. 생명애는 생물권 의식으로 지구상의 모든 다른 종들이 공동 생물권 안에서 협동과 상호 의존함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근면함이 아니라 공감해야 한다.

 

 

 

그런데 3차 산업혁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있다. 저자 말대로 이것은 모든 역사적인 거대 경제 혁명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체제다. 즉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체제는 새로운 에너지 체계를 만들어 내는 활동의 흐름을 관리하는 매커니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령, 1차, 2차 산업혁명에서 전화나 텔레비전이라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중앙집권화된 에너지를 관리하기 위한 수직적 권력의 체제였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에서 인터넷이라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분산형 에너지를 관리하기 위한 수평적 권력이 핵심이다. 우리의 의식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 피라미드 세상에서 수평적인 세상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상생하기 위해서는 협업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 잘 보여주고 있다.

 

 

 

『3차 산업혁명』을 공감해서 그럴까? 우리는 ‘깨끗한 부자’를 간절히 희망하게 된다. 데이비드 캘러핸에 따르면 깨끗한 부자란 3차 산업혁명의 첨단 기술 정보산업을 통해 새롭게 부자가 된 사람을 말한다. 반면에 더러운 부자는 2차 산업혁명의 환경 오염적인 채굴 산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을 말한다. 문명의 위기 속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에 공감해야 한다는 제러미 리프킨의 해법은 첨예한 이익관계를 돌파하는 대단한 용기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살아있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놀이’에 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사람이 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다고 느낄 때가 있는가?’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끗한 부자는 매우 새로운 의미에서 우리의 현재이며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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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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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威風堂堂)!

삶을 둘러보면 지천벽(至天壁)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가? 만약에 이런 위풍당당함이 없다고 한다면 하늘에 닿는 다는 이름과 달리 몇 미터 높이의 절벽에 불과하다는 것에 적잖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지천벽과 절벽에서 느껴지는 것은 삶의 굴복이 아니라 오히려 지천벽이라는 곳이 왜 그렇게 특별한 장소가 되었는가라는 의뭉스러움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위풍당당함은 삶의 존재감이라고 충분히 여겨질 만하다.

 

 

모든 것이 무너지며 사라지는 시대에 성석제의『위풍당당』과 함께 봉래산 아래 강마을에 들어선 까닭은 "가족이 뭐나요? 아자씨?"라는 질문에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봉래산은 금강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즉 금강산은 봄에만 봉래산으로 불리는데 이곳 봉래산은 해발 사백여 미터에 불과한 사시사철 봉래산이다. 그런데 이곳 봉래산에 봉(鳳) 대신에 여섯 구성원들이 놀랍게도 한 가족을 이루며 산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어서 그들을 정작 가족이라 부를 수도 없다. 하지만 이곳 강마을에 들어온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더 이상 유전이나 혈연은 큰 의미가 없는 듯했다. 강(江)은 피(血)보다 강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들은 위풍당당한 식구가 되었다.

 

 

여섯 구성원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사연들은 하나하나 가족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가족은 과장된 도덕적인 굴레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부터 상처받고 병들고 시들어가는 생명을 되살려내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던 소희였으나 공개된 남편의 유언장에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이 없음을 알고 한낮 남편 인생의 ‘조화’(造花)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현주건물방화범’이 되었다. 이 소설의 사건을 만든 새미는 더욱 치명적이다. 가짜 아버지들에게서 성폭행을 당하는 욕망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밖의 소설 속 인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에게 굳이 죄목을 붙이자면 ‘가출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출범들이 정(情)을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감싸는 유사 가족이 된다는 고달픔은 일부분이다. 피가 끓도록 아픈 느낌은 밋밋할 정도다. 오히려 눈물이 날 정도로 웃음이 찐하다. 이유인즉 이 소설의 화자가 다름 아닌 ‘입담계의 아트이자, 재담계의 클래식’인 성석제이기 때문이다. 성석제만의 독특한 해학은 소설 속 사건들과 어렵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칠맛이 난다. 더구나 감칠맛의 정체가 ‘똥맛’이라고 할 정도로 꽤나 극적이다. 정말이지 똥맛을 제대로 알아야할 만큼 정신이 바짝 든다. 이러한 똥맛 때문에 강마을에 나타난 조폭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조폭이라는 위풍당당함으로 버텨온 세월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성석제는 이 소설에서 ‘운명으로서의 식구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위풍당당한 식구'일 것이다. 그러나 위풍당당하고 해서 꼭 바람(風)같은 평화를 고집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각이 생긴 느낌이라고 할까? 조폭들의 황당한 자기 모순을 희희화하면서 성석제는 '강 같은 평화'를 말하고 있다. 소리없이 흐르는 강, 이것이 강의 법도이며 진정한 위풍당당함 이다. 그래서 일까? 4대강을 파헤치는 불도저나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를 죽음의 군대라고 조롱하는 것은 또 하나의 위풍당당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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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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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참으로 걸작품이 아닌가! 이성은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은 얼마나 무한하며, 생김새와 움직임은 얼마나 깔끔하고 놀라우며, 행동은 얼마나 천사 같고, 이해력은 얼마나 신 같은가! 이 지상의 아름다움이요 동물들의 귀감이지 -헌데, 내겐 이 무슨 흙 중의 흙이란 말인가? 난 인간이 즐겁지 않아.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며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햄릿』중에서

 

왜 햄릿은 떡갈나무와 같았을까요?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뭘까요? 셰익스피어의『햄릿』에서 햄릿은 죽는 것이 자는 것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결말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잠만 자면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비로소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는 건이 꿈꾸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곧 불행의 걸림돌이 된다고 했습니다. 일찍이 괴테는 햄릿을 ‘화분에 떡갈나무를 심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햄릿은 분재가 적당했습니다. 하지만 떡갈나무가 자라면서 결국에는 화분을 깨뜨리는 비극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햄릿은 떡갈나무와 같았을까요?

덴마크 왕이었던 아버지가 독사(毒蛇)에 물려 죽은 것으로 알았던 햄릿은 어느 날 유령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유령은 바로 아버지의 혼령이었습니다. 유령은 그에게 듣고 나면 복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복수라는 것이 가볍다 가벼운 한 마디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젊은 피를 얼게 하며, 두 눈을 궤도 이탈한 별처럼 만들고, 땋아서 묶어놓은 머리채를 풀어놓고,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을 성난 고슴도치 깃털처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유령이 말한 복수의 정체는 살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유령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알고 있던 독사는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진짜 독사는 다름 아닌 지금 왕관을 쓰고 있는 클로디어스라는 그의 삼촌이었습니다. 클로디어스가 햄릿의 어머니이자 왕비를 독차기 위해 사악한 기지를 발휘해서 아버지를 독살했던 것입니다. 지옥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그는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령과 복수를 약속하며 악당이 되기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왕비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최고로 악독한 여자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죽은 지 한 달도 못 되어 최악의 속도로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느낀 정신적인 외상, 즉 트라우마는 대단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성급한 결혼 때문에 햄릿은 자기 인식에서 멀어졌습니다. 햄릿의 변신이 자신의 딸, 오필리아를 사랑한 결과라고 생각했던 플로니어스 재상에게도 정작 그것은 아무런 원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필리아가 결혼하고자 했을 때 햄릿은 그녀에게 순결한가? 라고 물었으며 당신의 순결은 당신의 아름다움에게 어떤 대화도 허락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자신은 감옥에 살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은 햄릿의 야망이 너무 좁아서 생긴 거라고 했지만 그는 호두 알 속에 갇혀 있다 해도 그의 야망은 무한 공간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악몽을 꾸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마음이 울적하여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그저 더럽고 병균이 우글거리는 증기의 집합체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이러한 난폭한 운명 앞에서 햄릿은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며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라고 고뇌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만약에 죽는다고 한다면 잠 한번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자면서도 꿈꿔야 한다면 결코 죽을 수 없었습니다. 햄릿은 불행을 견디지 못한다면 양심 때문에 비겁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결심의 붉은빛은 창백한 생각으로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름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복수의 칼날을 접는 대신에 연극을 통해 왕의 양심을 심판하고자 했습니다. 햄릿에게 연극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과거에나 현재에나 본성에 거울을 비춰주는 거울이었습니다. 미덕에게는 자기 몸매를, 경멸에게는 자기 꼴을, 바로 이 시대와 이 시절은 그 형체와 생김새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지은 인간들이 연극을 보고 있을 때 그 극적인 표현이 너무나 교묘하여 영혼을 때림에 그들이 즉각 죄상을 공표하기 때문입니다. 연극의 제목은 비엔나에서 있었던 살인을 본뜬「쥐덫」이었습니다.「쥐덫」은 악랄한 작품이었지만 죄 없는 영혼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연극을 보고 왕이 움찔한다면 오직 죄 지은 사람에게는 찔리는 게 있을 것입니다.

 

오만한 죽음이여

그래서일까요? 불안했던 왕은 햄릿을 영국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한편 플로니어스는 왕비에게 햄릿이 왕을 몹시 화나게 한 것을 꾸짖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왕비의 내실의 휘장 뒤에 숨어 왕비와 햄릿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왕비가 햄릿에게 사악한 혀로 꾸짖는 질문을 던지자 햄릿은 경박한 혀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햄릿은 휘장 뒤에 있던 플로니어스를 발견하고는 살해했습니다. 이런 피비린 나는 행위에서 햄릿은 왕비에게 나쁜 쪽은 내버리고 나머지 반쪽으로 더 순수하게 살라고 말했습니다.

햄릿이 플로니어스를 살해하자 재상의 아들 레이티즈가 폭도를 일으켜 왕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자신은 죄가 없다며 칼날의 방향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햄릿 때문에 오필리아가 실성하여 끝내 물에 빠져 죽자 이것을 복수의 원인으로 생각한 왕과 레이티즈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계책을 만들었습니다. 즉 햄릿과 레이티즈가 칼로 기량에 공식 내기를 할 때 약간의 속임수로 레이티즈 칼에 독을 바르는 것입니다. 만약 운 좋게 이것이 실패한다면 차선책으로 햄릿에게 독배가 든 술잔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햄릿 대신 왕비가 독배를 마셨고 그 찰나에 햄릿은 레이티즈의 칼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지푸라기 하나에 대한 큰 믿음

살다보면 햄릿처럼 한 방울의 악 성분 때문에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일으키는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온갖 운명과 위험에 놓였을 때 진정으로 위대함은 무엇일까요? 루소는『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이 처한 어떤 상황 속에서 그토록 불행한 것은 오직 그들 자신 때문이다. 우리가 침묵을 지키고 이성이 말하도록 내버려 두면 이성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모든 불행을 위로해준다. 그 불행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이성은 그것들을 없애 주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불행의 가장 비통한 상처는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햄릿은 불행이 닥쳐왔을 때 그것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성을 쓰지 않고 짐승 같은 망각 혹은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으로 복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큰 명분이 있고서야 행동하는 게 아니라, 명예가 걸렸을 땐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싸움을 찾아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햄릿의 생각은 반에 반만 지혜일뿐 나머지는 비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을 피할 수 없다면 불행 속으로 뛰어드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럴 때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믿음으로 그것을 견디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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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 - 영혼 있는 직장인의 일 철학 연습
배리 슈워츠 & 케니스 샤프 지음, 김선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일이 없다면 모든 인생은 부패한다. 그렇지만 일에 영혼이 없다면 인생은 질식사한다.

-알베르 카뮈-

 

베리 슈워츠· 케니스 샤프의『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 대해 궁금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답을 하기 때문이었다. 바쁜 일상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일하는 인간, 즉 ‘호모 워크스’(homo workers)와 마주 친다. 만약에 일을 하지 않는다면 카뮈 말대로 우리의 인생은 부패할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일을 하면서도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기계적인 탓에 아무런 삶의 가치도 없을 것이다. 오직 일해야 하는 규칙만 있고 대신에 일해야 하는 영혼이 없다면 앞서 카뮈가 경고한 대로 우리의 인생은 질식사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질식사의 위험에 놓여 있다. 이러한 까닭은 이 책의 제목에 나와 있듯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만족’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을 하다보면 선택을 해야 하는 수많은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업무의 규율과 목적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가령, 교사는 학생들이 카르페 디엠, 즉 오늘을 즐기면서 공부를 하도록 이끌어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학생들의 성적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최선이 아닌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결국 교사는 무력감이라는 굴레 탓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만족의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이 책의 저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phronesis)를 제시하고 있는데 충분히 고전적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추상적이거나 소수만 갖춘 재능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데 있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이론이 아닌 실천의 문제로 파악했다. 즉 분노가 좋은가, 나쁜가라는 추상적인 질문보다는 ‘누구에게 얼마나 오래, 어떤 식으로 무엇을 목표로 화를 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 따라서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똑똑함’이 아니라 ‘탁월성’을 발휘해야 한다. 탁월성

(excellences)이란 자제력, 공정성, 용기, 포용력 같은 기질을 일컬으며 달리 ‘미덕’(virtues)으로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된 탁월성, 즉 실천적 지혜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사회공동체의 미덕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먼저 ‘도덕적 자각’이 절실하다. 실천적 지혜를 실천하는 사람은 특수성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해라는 서사 구조를 지닌 존재여서 ‘도덕적 상상력’과 ‘감정이입’이 요구된다. 도덕적 상상력은 ‘다양한 상황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간파하는 능력이며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정서적 기술이다. 그러나 도덕적 자각만으로 부족하여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통찰력(자기 성찰)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우리는 행동을 조율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추구한다. 적절한 균형은 곧 ‘중용’이라고 하는데 산술적인 평균이 아니라 ‘공감과 거리감을 조율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면으로는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정함과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이 책은 실천적 지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삶을 향상시키고 있다. 그리고 삶을 향상키는 목적은 행복을 조명하는 것이다. 행복학에 있어 ‘긍정 심리학자’로 불리는 마틴 셀리그먼은 자기가 하는 활동에 빠져드는 ‘몰입’과 자신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의 삶과 연결하는 ‘의미 찾기’를 행복의 ‘대표적 강점’(signature strengths)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직업 심리학 교수 피터 워는 ‘자기 일에 만족하려면 몰두와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다채롭고, 일 처리 과정에서 재량권이 있어야 하며, 회사의 목적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심리학자 에이미 브제스니에프스키는 앞의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소명’(calling)과 ‘생업’(job)이나 ‘직업’(career)을 구분했다. 브제스니에프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재량권을 가진 자기 일을 소명으로 하는 사람들은 일에 크게 만족한다. 이것이 바로 ‘일과 지혜의 선순환’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공공기관이나 병원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제도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서는 규율과 인센티브가 원칙적으로 필요한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원칙이 바람직하다고 해서 모두 올바른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원칙에도 판단이 들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해지고 만다. 즉 규율과 인세티브가 재량권을 통제한다면 실천적 지혜를 발휘할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긴다. 저자 말대로 규율이 도덕적 기술을 없애고 인센티브가 의지를 꺾는다, 는 것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결과적 똑똑한 만큼 무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 일을 생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한계는 최소한으로 몰입하면서 최소한의 의미 때문에 만족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일과 규율의 악순환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실천적 지혜가 일과 지혜의 선순환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우리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며 더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떠한 일의 목표나 목적을 가리켜 텔로스(telos)라고 했다. 진정한 행복은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텔로스를 찾아내고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행복과 함께 친밀한 사회적 관계에서 ‘온전한 행복’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성과주의, 능력주의의 문화로 인해 공정성이 불안정하고 삭막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럴 때 실천적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살 맛 나는 세상’에 대한 만족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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