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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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든 시인이든 음악가이든, 예술가는 숭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장식물로써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심미감이란 성 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술가는 그러한 점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 만다. 그 비밀은 불가해한 우주처럼 해답을 주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것일까? 그리고 연 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달과 6펜스』중에서

 



살다보면 삶을 바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습니다. 서머싯 몸의『달과 6펜스』에 서 찰스 스트릭랜드는 갑자기 삶을 전환했습니다. 증권 거래소에 다니는 마흔 살의 스트릭랜드는 문학 방면에 전혀 교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술계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그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훌륭한 시민,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 정직한 중개인일 수는 있겠지만 사교에는 재능이 없어 그에게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범하게 살면서 흐릿한 그림자 같았던 그가 결혼한 지 17년이 지난 평균적인 가정을 버리고 파리로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만한 나이에 어떤 여자와 연애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었습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지금 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그가 돌아오기만 하면 만사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작중화자)에게 그를 만나서 그의 동정심에 호소하여 돌아오게 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작가였던 나는 이번 여행이 걱정되기 보다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반감한 느끼기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파리에서 만난 그는 명예와 의무를 저버리고 이름 모를 소녀와 죄스러운 호사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싸구려 호텔에서 가난하게 혼자 지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당황함과 달리 그가 말할 때의 냉당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설득도 하고 충고도 하고 필요하다면 화를 낼 작정이었는데 그는 자기 죄를 순순히 고백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대답이 더할 나위 없이 경멸스럽고 태연했습니다. 사람들이 미워하고 멸시해도 상관없다고 하여 지극히 당연한 내 질문이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싶소.’라는 그의 목소리에는 열정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내가 잘해야 삼류 이상이 되지 못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지 질문하자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무심한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의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권태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화가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단조로운 삶에 한 번도 초조감을 내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어떤 창조 본능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창조 본능이 그동안 삶의 여러 정황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치 암이 생체 조직 속에서 자라듯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마침내 존재를 모두 정복하여 급기야는 어쩔 수 없는 행동으로 몰아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를 상대로 양심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들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봤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며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 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입니다. 문명인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敵)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입니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가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고 맙니다.

그는 인습 따위에 붙잡혀 있지 않아 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누렸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되든 정말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뻐꾸기 같은 그의 이기적인 행동은 나의 친구 더크 스트로브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단한 화가는 아니지만 미술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지닌 스트로브는 그를 위대한 화가라고 하며 적지 않은 희열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그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번은 병이 난 그를 자신의 집에서 간호하려고 하자 스토로브 부인이 반드시 끝이 좋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이었습니다. 그녀가 정성스럽게 돌봐준 덕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와 함께 집에 나간다고 하자 스트로브는 자기가 대신 집에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나버리자 그녀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공기만 마시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고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직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붙잡으려는 일념에 다른 것은 다 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격렬한 개성을 쏟아 붓고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열정을 소진시키고 나면 그는 그것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고 맙니다. 나는 그들이 사랑에 빠졌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의 감정에는 다정함이 있으며 사랑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마는데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병’이었습니다. 그의 진짜 생활은 꿈과 그리고 잠시도 않는 그림 작업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까지 희생시켰습니다.

그는 오랜 방황 끝에 타히티에서 자신의 꿈을 완벽하게 실현시켰습니다. 마치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머무를 곳을 찾아 방황하다가 타히티에서 육체의 옷을 거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고의 삶이 그대로였던 타히티는 그가 찾고자 했던 고향이며 에덴동산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그를 사로잡은 열정은 미를 창조하려는 열정이었으며 그게 그를 신령한 향수(鄕愁)에 사로잡힌 영원한 순례자로 만들었습니다. 가령, 과일들이 수북하게 담겨 있는 그의 정물화에는 열대의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마법에 걸린 과일 같았습니다. 그래서 맛을 보면 신만이 아는 영혼의 비밀과 상상의 신비로운 궁전으로 통하는 문이 열릴 것 같았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선악과(善惡果)처럼 미지의 것을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그림은 가장 대수롭지 않은 것조차 기이하고 복잡하고 고뇌에 찬 개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야성적인 관능성은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고 할까요? 바슐라르는『꿈꿀 권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반 고흐의 황색은 연금술적인 황금이며,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과 같이 만들어진 황금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밀이나 불꽃이나 밀짚 의자의 황금빛이 아니다. 천재의 한없는 꿈에 의해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재산, 한 인간의 마음, 전 생애를 통한 응시(凝視)속에서 발견된 근원적인 진실이다.

그는 예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술가의 가장 힘겨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회의에 부딪혀도 완고하도 끈질긴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위대성은 진짜였습니다. 나 자신의 즐거운 어떤 것을 위해 산다는 것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개성화된 황금빛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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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중학교때 읽고 감동받았던. 그래서 나도 그래야지 했는데..어느덧..근데 그런 결심이 쉽지가 않군요.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고 산다는 결심을 하는 것 말이죠.

오우아 2011-12-05 09:10   좋아요 0 | URL
네..쉽지 않죠~~
그래도 그 마음은 소중히 간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