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목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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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위한 고민으로 어떻게 하면 낙타형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처럼 탈바꿈할 수 있을까?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낙타형 인간은 ‘짐깨나 지는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낙타는 사막에서 훌륭한 짐꾼이다. 낙타는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낙타는 짐이 무겁다고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 이보다 힘겨운 노동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문제는 이것이 낙타의 강인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낙타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을 묵묵히 ‘예’라고 하면서 거부하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이 무료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낙타의 어리석음보다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니오’라는 용기에 감탄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의 ‘아니오’라는 용기 덕분에 우리는 불을 인간답게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

 

어둠을 밝히는 불을 보면서 깨닫는다. 불은 어둠을 싹둑싹둑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스며들면서 타오른다는 것을. 그래서 니체는『즐거운 지식』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이 사람을 보라'고 했던 것이다. 즉,

 

이 사람을 보라

 

그렇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불꽃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는 나는

타오른다, 나를 탕진해버리기 위해.

내가 손에 쥔 것들은 빛이 되고,

내가 방치한 것은 재가 된다.

나는 확실히 불꽃이기 때문이다!

 

2011년 스테판 에셀이라는 불꽃같은 혁명가를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분노하라』를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분노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를 주목하게 된 것은 우리가 삶의 부조리 앞에서 침묵해온 지 오랜 탓이다. 그래서 분노하라는 메시지는 잠든 영혼을 깨울 정도로 강렬하였다. 하지만 분노가 분노에서 끝난다고 하면 그것은 감정의 폭발이지 싶다. 진정한 분노라고 하면 뭔가를 창조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런 그가『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자서전(自敍傳)을 마지막으로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스테판 에셀이 죽었다.”라는 짧은 부음(訃音)에는 한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안타까움 못지않게 완벽한 믿음에 대한 찬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란 어려웠다. 비록 그는 저 세상에 있지만 완벽한 믿음은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 불꽃처럼 더 타올랐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확신한다. 루소의『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사슬에 묶여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가? 우리는 거꾸로 사슬에 묶여 있는 체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면서 태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제어’가 요구된다. 자기 제어는 오만의 반대말인데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법에 반하는 꿈을 종결짓는 다시 말해 ‘법률에 의한 욕망의 제어장치’라는 것이다. 더구나 양심에 의한 자기 제어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한낮 공상에 불과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세계인권선언문에 참여하면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법 앞에서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인간의 존엄성과 법이 같은 운명체라고 역설하면서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복!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행복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행복이 끊임없는 패배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얼마나 조화롭게 할 수 있는가에 있다. 더불어 개인의 행복이 개인만의 행복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야한 하는 사회적 소명과 함께 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즉, 행복은 우리가 상호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그를 행복한 혁명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행복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 3단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면서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고 한다. 먼저 1단계는 앞서 말한대로 ‘분노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2단계는 ‘희망하라’는 것이다. 희망은 혼란에 맞서 다시 도약하는 ‘용기’와 절망을 극복하는 ‘회복 탄련성’에 있다. 그리고 3단계는 ‘사랑을 사랑하라, 감탄을 감탄하라’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사랑하고 감탄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탈바꿈이 없다고 한다면 행복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인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잡는 문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행복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 시(詩)를 낭송했다. 그의 애송시 중 하나가 페르난두 페소아의『뱀의 길』이다.

 

진실을 진실로서 인정하는 것, 동시에 실수를 인정하는 것, 순응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살아가는 것, 모든 방법을 통해 모든 것을 느끼는 일은 결국 모든 것에 지성을 갖는 일이다. 사람이 하나의 정상에 우뚝 섰을 때, 그는 모든 정상들로부터 자유롭다. 마치 하늘의 한 점에 모인 모든 정상들 위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그러나 인간은 결코 하늘의 한 점에 모이지 않는다. 모든 정상에 서 있는 자들이 그런 것처럼.

 

그는 시를 낭송하면서 타인과 소통하였고 더 나아가 삶을 찬미할 줄 알았으며 행복을 전파했다. 이 책을 옮긴 목수정의 말대로 그는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 지치지 않는 낙관주의, 행복에 대한 변함없는 취향을 이 지닌 사내’였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좋은 인생’을 살았다. 좋은 인생이란 우리가 쌓아온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다. 그러니 우리는 좋은 인생의 정상에 홀로 서 있는 이 사람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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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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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페르페투움 모빌레(perpetuum mobile)이라는 기묘한 기계 장치가 있다. 이 기계 장치는 스스로 움직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다. 즉, 운동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새로운 에너지가 투입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페르페투움 모빌레는 모든 물리학자들에게 꿈의 기계 장치였다. 꿈은 희망인 동시에 환상이다. 희망이 많다고 하면 꿈은 실현 가능하다. 하지만 꿈이 환상적이라고 하면 실현이 불가능하여 기묘한 상태가 된다. 그런데 물리학에서는 그토록 어려웠던 문제도 사회학에서는 가능한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러한 고민 때문에 사회학을 다루는 넓고 깊이 있는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액체 근대』,『유동하는 공포』라는 망각하기 쉽지 않은 책을 통해 알게 된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고는 근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탐색한다. 바우만은 근대를 20세기 근대와 21세기 근대로 나눈다. 20세기 근대를 근대라고 했을 대 21세기 근대는 이차 근대, 탈근대 등등 여러 가지 용어로 쓰여 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저자는 감각적이면서도 쉽게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고체 근대가 견고해서 무거운 근대라고 한다면 액체 근대는 유동적이어서 가벼운 근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액체 근대의 주체는 자유를 누리는 듯 보이지만, 바로 그 대가로 개인의 불안, 불행에 대해 홀로 무한책임을 지도록 강요당한다.

 

그래서『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다루고 있는 통찰력 있는 사회적인 이슈들은 하나같이 주목할 만하다. 앞서 고민했던 문제에 대해 바우만은 사회적 삶은 물리학이 다루는 현상이 아니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치면서 열역학 제 2법칙(엔트로피)가 적용되지 않는 힘을 지닌 놀라운 기계장치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엔트로피를 모든 과학의 제 1법칙이라고 했다. 간략하면 엔트로피는 열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르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에너지가 손실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제러미 러프킨은『엔트로피』에서 엔트로피를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혹은 이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또는 질서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 고 지적했다. 결국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액체가 되는 것이며 무질서의 상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고독은 액체일까? 고독은 단단하다. 결코 유연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독한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이다. 고독을 저울질하는 생각의 정도에 따라 고독은 얼마든지 유연해질 수 있다. 이것이 곧 고독의 액체화이며 고독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고독이 유동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일분일초라도 손 안에 스마트폰이 없다고 하면, 트위터와 카카오톡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답답함은 고독보다 더 단단하다. 어쩌면 그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립에서 오는 불안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트위터의 속성상 새들처럼 지저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우리의 생명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바우만이 지적하는 것처럼 140글자의 유행이라는 것이다. 유행이 단순히 모방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더 이상 어떤 해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우만은 물리학 용어를 사용하면서 유행이라는 운동에너지는 소멸되지 않는 ‘잠재적인 에너지’ 즉, 그 자신의 운동량만으로도 계속해서 무한정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우만의 견해에 따르면 유행이야말로 사회학적으로 가능한 페르페투움 모빌레가 된다.

 

유행은 두 가지 인간의 욕구와 열망이라는 운동 에너지에 의해 움직인다. 인간의 욕구는 ‘개성이나 독특성을 추구하려는’ 것이며 인간의 열망이란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이고자 하는’ 것이다. 좀 더 살펴보면 ‘무언가에 소속되어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꿈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꿈, 또한 사회적인 지원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자율성에 대한 강한 욕망, 모방하려는 충동과 동시에 구분되려 애쓰는 충동’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안전’과 ‘자유’다. 안전과 자유는 서로 모순된다. 그래서 안전과 자유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코스트 최소화(cost minimization)가 중요한 목적이 된다. 하지만 코스트 최소화는 불확실하고 위태로워 오히려 자신을 고갈시키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있다. 유행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창조적인 에너지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이면을 보면 개성의 상실이라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유행을 소비할수록 인간 상실이라는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동하는 세상에서 ‘보여지는 존재’에 대한 욕망은 프라이버시를 해체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프라이버시를 개인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사적이며 닫힌 공간이 된다. 만약 누군가 내 비밀을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주권(sovereignty)이 없게 된다. 주권은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다. 하지만 우리는 네트워크된 사회에서 끊임없이 접속해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공적이며 열린 공간에서 프라이버스를 해체 당하고 있다. 겉만 보면 네트워크는 인간들 상호 간의 강력한 유대를 형성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밀이 없는 유대 관계는 오히려 인간들 상호 간의 우대들이 모두 약화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개인은 집단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잠시 인터넷을 차단하고 휴대 전화도 끄는 등등 디지털 도구에서 자유로워지면 완전한 고독을 만끽할 것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의사소통의 기술은 환상에 불과할 뿐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인터넷으로 일상화된 의사소통의 기술의 단념과 절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유동하는 근대를 산책하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44개의 편지를 보냈다. 44개 편지에 담긴 사유의 주체는 고독, 세대차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질병 권하는 사회, 공포에 대한 공포, 경계 긋기, 운명과 성격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저자는 유동하는 근대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어떻게 얄팍하게 하는지 규명하고 있다. 가령, 유동하는 근대에서 플렉서블(flexible) 존재로 사는 방식은 하나의 질서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가『순수와 위험』에서 말한 것처럼 질서란 바로 ‘적절한’ 사물들이 그 어떤 다른 자리가 아니라 바로 정확히 있어야 하는 그 ‘제자리’에 위치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물들의 적절한과 제자리를 판단하는 것이 ‘경계’라는 것이다. 경계는 ‘질서를 보전하거나 복구하는 일’을 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것들을 제거해야만 하는 ‘청소’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계의 양면성에 따라 ‘바람직한 사람’이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직한’에 대해 반항하게 된다. 반항의 본질은 카뮈의『시지프 신화』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보게 된다. 즉,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통해 자신만의 구원하고 싶어 한다. 행복한 시지프는 부조리한 운명에 맞선 자기애이며 자긍심이다. 행복한 시지프는 자신의 고통을 자신이 짊어지고 가면서도 강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바우만은 반항하는 인간으로 행복한 시지프보다는 프로메테우스을 주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는 벌로 고통을 받는 존재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얼마든지 돌과 불의 문제에 부딪칠 수 있다. 돌이 자신을 위한 문제라고 한다면 불은 타인을 위한 문제다. 이때 우리가 유동하는 세상에서 선택해야 할 것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유동하는 삶의 위기에서『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여러모로 한 평생의 지식이 될 만큼 놀랍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장석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의 껍질이 아니라 진리의 낟알들을 찾고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인데 완전히 고독한 순간까지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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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협력자 - 세상을 지배하는 다섯 가지 협력의 법칙
마틴 노왁.로저 하이필드 지음, 허준석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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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노왁과 로저 하이필드가 함께 쓴『초협력자』를 읽은 이유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때문이었다. 죄수의 딜레마는 당신과 당신의 공범이 경찰에 잡혀 있을 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하나, 당신이 자백하고 상대방이 자백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1년 형을, 상대방은 4년형이 구형된다. 둘, 이번에는 반대로 당신이 자백하지 않고 상대방이 자백한다면 당신은 4년 형을 상대방은 1년 형이 구형된다. 셋, 둘 다 서로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둘 다 2년 형이 구형된다. 넷, 둘 다 서로를 자백한다면 둘 다 3년 형이 구형된다. 이중에서 당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은 상대방의 선택과 상관없이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최상의 선택이 배신이라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놀랍게도 다윈의 진화론도 배신의 논리다. 자연선택의 이면에는 자연이 선택한 ‘적자’(The Fittest)만이 그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는 것이다. 다윈적인 사고에 따르면 경쟁자에게 협력하는 것은 진화론에 역행하는 것이다. 즉 자연선택은 죄수의 딜레마에서 협력에 반하여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다양한 본질을 탐구하다보면 자연선택의 한계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 대하여『초협력자』는 ‘생물계의 양지’라는 주장을 펼친다. 즉 자연선택이 생물계의 음지라고 한다면 협력은 생물계의 양지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인간을 최고의 협력자라고 말한다. 단순히 협력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협력자는 경쟁이 아닌 협력하기 위해 다섯 가지 메커니즘을 모두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직접 상호성, 간접 상호성, 공간 게임, 집단 선택, 혈연 선택 등이다. 다섯 가지 매커니즘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직접 상호성은 ‘팃 포 탯’(Tit for Tat:TFT)이다. 협력의 진화에 있어 TFT는 ‘항상 배신하는 전략’보다 우월하다. TFT는 상대가 배신했을 때만 나도 배신하게 된다. 이보다 나은 전략은 ‘너그러운 팃 포 탯’(GenerousTFT)이다. 그러나 최상의 전략은 ‘이건 승리하면 그대로, 패배로 바꾸기’(WSLS:Win Stay, Lose Shift)이다.

 

간접 상호성은 평판의 힘을 말한다. 데이비드 헤이그는 “직접 상호성을 위해서 당신은 얼굴이 필요하다. 간접 상호성을 위해서 당신은 이름을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 이름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뭘까? 바로 이 부분에서 언어의 빅뱅, 즉 언어의 협력이 요구된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언어를 창출했다고 믿고 있는데 저자들의 생각은 정반대로 언어가 우리을 창출했다고 한다. 수다 떠는 재주를 가진 인간이 동물을 추월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가 우리의 유연한 뇌를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어를 통한 협력으로 수많은 생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화해온 것이다.

 

공간 게임은 생명의 체스판이다. 우리가 설탕이나 우유를 얻을 때 아무에게나 부탁하는 대신에 이웃에게 다가가는 것이 왜 더 편한 것일까?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배신자가 언제나 협력자보다 우월하다. 하지만 지리적 요소를 추가했을 때 상황은 달라진다. 생명의 공간 게임에서는 협력자와 배신자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 만약에 협력자들이 배신자들에게 둘러싸인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

 

집단 선택은 부족전쟁이다. ‘다수준 선택’(multilelevel selection)으로 불리는 집단 선택은 의미 있는 사회 규범을 지닌 집단은 그렇지 않은 다른 집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간접 상호성은 집단 선택과 협력하여 인간다움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마지막으로 혈연 선택은 혈연주의다. 생물학에서 적합도는 생존과 번식의 목적으로 활용되는 개체의 능력 수준, 한 개체가 타자들에 비해 다음 세대에 더 많은 자손을 남길 확률을 말한다. 그러나 포괄 적합도을 적용하면 개체보다는 친족을 통해서 작동한다. 가령, 개미나 벌 같은 사회성 곤충들은 ‘진사회성’(eusociality)으로 협력하며 자식을 양육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진화의 또 다른 법칙을 알게 된다. 전통적인 진화론에 따르면 선택(selection)과 변이(mutation)라는 두 개의 원칙이 강조되었다. 선택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합한 개체들을 솎아 내는 것이며 변이는 유전적 다양성을 일으킨다. 하지만 진화의 제 3 법칙으로 협력을 제시하면서 협력이 진화의 가장 능숙한 설계자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주목한 것은 자연 선택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죄수의 딜레마가 한 번으로 끝난다고 한다면 자연 선택은 배신자를 이롭게 한다. 그러나 죄수의 딜레마가 반복적이라면 협력의 메커니즘으로 인하여 자연 선택은 가장 낮은 적합도를 지니게 된다. 저자들 말대로 생물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죄수의 딜레마에서 ‘값비싼 처벌’(costly punishment)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가능한 두 개의 전략은 앞서 말한 대로 ‘협력과 배신’이다. 그러나 처벌도 가능한 수가 된다. 값비싼 처벌은 다른 이들이 비용을 치르게 하기 위해 나도 비용을 치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값비싼 처벌의 비용은 3:1인데 상대방이 3달러를 잃는다면 내가 1달러를 잃어도 좋다는 식이다. 연구자들은 처벌이 협력의 메커니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으로 ‘이타적 처벌’을 제안되기도 했다. 하지만『초협력자』에서는 처벌이 협력의 메커니즘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대로 “처벌을 두려워하고 보상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만 사람들이 착해진다면, 사실 우리는 불쌍한 것이다.”라는 것이 처벌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지 않을까?

 

우리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빨리 가려고 한다. 이럴 때 혼자 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며 함께 가는 것이 좋을까? 아마도 혼자 가는 것이 정직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더 멀리 가려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세상에 온전한 승자는 없는 법이다. 비록 협력자와 배신자가 서로 공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협력자가 최고의 포괄 적합도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초협력자다.’라는 말이 우리가 우주에서 살아남게 될 가장 좋은 진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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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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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힐티가『행복론』에서 말했던가요? 사람이 의식에 눈뜬 최초의 순간부터 의식이 사라질때까지 가장 열심히 찾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행복의 감정이라고.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바랍니다.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행복을 손에 넣을 수는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합니다. 행복의 방정식에 있어 행복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행복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은 행복으로 역전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사실상 행복은 나중에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이켜보면 불행이 불행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상중의『살아야 하는 이유』는 고민의 흔적이 뚜렷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좌절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더욱 고민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스포츠화하면서 고민꺼리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인 잣대에서 ‘베스트 원’이 되고자 합니다. 이런 경쟁에서 이제 우리에게 호모 사피엔스는 유효하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호모 파티엔스’(home patiens) 즉, 고민하는 인간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생각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불투명하게 한다면 고민은 투명하게 합니다. 문제는 투명함의 정도에 따라 고민은 양날의 칼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고민은 진짜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것인 반면에 지극히 사적이고 지나치다 싶으면 ‘자기추방’내지 ‘자기비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을 독파하면서 근대의 병인(病因)인 고민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돈, 사랑, 가족, 자아의 돌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절망입니다. 돌이켜보면 다섯 가지는 지금의 고민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기법을 빌리자면 그만큼 ‘사생’(寫生)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민에 휩싸인 사람은 겉만 보면 얼마든지 문제적인 인간이라고 속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윌리엄 제임스가『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말한 ‘거듭나기’(twice born)을 언급하면서 고민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임스에 따르면 거듭나기는 ‘병든 영혼’의 소유자가 하는 것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 인생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건전한 마음’의 소유자는 ‘한 번 태어나는 형’(once born)으로 인생에 대한 이런 저런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살아갈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거듭나기’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요? 저자는 빅터 프랑클이 말한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로 분류’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 질문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는 창조, 경험, 태도입니다. 이중에서 프랑클은 인간의 가치 중에서 태도를 가장 중요시 했습니다. 뭔가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경험하는 것도 아닌 뭔가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도 인간다운 업적을 하는 것이 곧 태도라는 것입니다. 가령, 톨스토이의『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고통 때문에 힘겨워하는 가족들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구원받지 못한다는 태도를 깨닫고는 ‘죽음은 끝났다!’라고 하면서 비로소 행복했습니다.

 

우리들은 유한한 존재여서 행복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라는 고민에 항상 쏠립니다. 무엇이 행복의 시작과 끝이라고 여기며 모두들 미래를 바라보며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눈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살아야 하는 고민에 대해 언제든지 “예”라고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거듭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나 경험이 아닌 태도를 통해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비하면 어쩌면 소극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을까,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태도에는 ‘진지함’과 ‘사랑’이 책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만약에 진지함과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한 번 태어나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고민하는 예리한 통증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행복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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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전집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7년 4월
평점 :
절판


예전에는 누군가 자살했다고 하면 그 놀라움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몹시 시렸는데 지금은 죽음의 유혹이라고 할 정도로 변해버렸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자살하게 하는 것일까? 누구나 살면서 절박한 문제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이럴 때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혹은 더 이상 삶을 감당할 수 있다는 긍정과 부정의 갈림길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만의 고백, 즉 자살을 하게 되지 않을까? 장 아메리는『자유죽음』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뛰어내리기 직전 상황’에 주목하면서 죽음이 ‘없음’이라고 한다면 자유죽음은 ‘없음을 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유죽음은 자기부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썸네일그런데 알베르 카뮈(1913~1960)는 반항한다. 카뮈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실존주의 작가 중 한 명이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얼굴만큼이나 그의 작품들은 우리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의 눈 속으로 날카롭게 파고 들어온다. 이렇게까지 자신만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가는 드물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인지 카뮈 탄생100년이 지날 즈음 최근에 『이방인』을 읽으면서 비로소 카뮈를 주목하게 된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다.

『이방인』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라는 카뮈의 깊이 있는 성찰 덕분에『시지프 신화』를 연달아 읽었다. 뭐랄까,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판단과 통찰이 어느 순간 삶의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을 깨닫게 되어 죽기 전에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살아가면서 꼭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시니컬하고 신랄할 비판이 차고 넘칠 정도다. 이 모두가 부조리한 감정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살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뜻밖의 절박한 문제다. 이유인즉, 카뮈가『시지프 신화』에서 말한 것처럼 자살이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진리다. 삶에 대한 이런 모욕, 삶을 수렁에 빠뜨리는 이런 부정(否定)은 과연 삶의 무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시지프 신화』중에서

 

희망,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일이 있다는 것이며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어 내일은 인생의 빈 공간을 채우는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것은 우리 삶이 오늘에 끝나지 않을 거라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틀리지 않지만 이러한 사실에는 일종의 삶의 모순이 있다.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 장치의 절연(絶緣)’이 곧 부조리다. 삶이 부조리하다는 차가운 현실에서 이방인(異邦人)이 된 그는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으로 인생이 부식되고 만다. 그래서 인간적인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비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자살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그가 자살한다고 해서 현세의 부조리함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죽음, 그 너머 에도 부조리함이 있다. 자살과 부조리함이 서로 적절하게 타협한다고 해서 자살이 부조리를 죽인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조리함을 견뎌내야 할까? 앞서 말했듯이 자살은 궁극적인 답썸네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세계가 바라는 대로 통속적으로 살아야 할까? 이러한 권태로움에 카뮈는 또 따른 통찰력을 보여준다. 바로 절망의 깊이에 빠진 우리를 ‘시지프 신화’로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신화의 인물인 시지프(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에 굴러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런데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졌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그렇다고 끝이 보이는 것도 아닌 시지프의 고통!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시지프의 끔직한 삶을 생각하면 삶의 아무런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카뮈는 달랐다. 부조리한 인간에서 부조리한 영웅의 반전(反轉)! 그의 생각은 단단해서 구원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카뮈가『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 즉,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지프 신화』중에서

 

불행한 시지프 이후의 삶의 궤적을 그려내는 카뮈의 ‘행복한 시지프’는 정말이지 바위보다 더 옹골차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한 시지프에게 자살은 삶을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불행하다. 때로는 부조리함에 맞서 술과 노래로 자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행복한 시지프에게 부조리하다. 우리가 부조리라는 낯선 감정으로부터 요구되는 것은 상상이나 비약 같은 비논리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럴수록 부조리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행복한 시지프는 아주 논리적인 사고로 맞서며 불행에 매몰되지 않았다. 행복한 시지프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한 것은 다름 아닌 ‘반항’이다. 즉 시지프는 반항 때문에 더 인간적이며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카뮈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반항의 역설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랐다. 자살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을 끝내는 것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투신(投身)이 아니라 자신(自身)있게 사는 것! 거듭 말하지만 자살한다고 해서 부조리함이 끝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반대로 반항은 죽음을 거부한다. 그래서 반항적인 인간은 최대한 반항하면서 최대한 많이 산다. 반항은 자신의 열정이며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뮈는 행복한 시지프에서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삶의 디테일을 찾아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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