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고 싶은 명문장 - 흔들리는 나를 세우는 고전의 단단한 가르침
박수밀.송원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시험 삼아 내 입으로 읽으니, 이를 듣는 것은 나의 귀였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이를 감상하는 것은 내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거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랴!

이덕무,『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옛 지식인 이덕무 선생을 만난 것은 뜻밖의 기쁨이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사뭇 만족했지만 정작 마땅한 필명 하나 못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간서치(看書痴) 이덕무 선생을 만난 것이다. 책만 보는 바보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스스로를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죽 했으면 내가 나를 벗으로 삼을 정도였을까? 깨달음의 깊이에 대한 놀랐던 순간부터 오우아거사는 가슴에 새기고 싶은 명문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필명을 쓰며 나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했는데 ‘오우아’라는 필명과는 정말이지 벗으로 지낼 만큼 궁합이 잘 맞았다. 가끔씩 서평 때문에 상을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오우아라는 필명을 보고는 옆 사람들이 “오~우아!”라고 하면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기막힌 오우아의 반전이라고 해도 좋을 듯 했다.

 

돌이켜 보면 오우아의 반전은 박수밀, 송원찬이 지은『새기고 싶은 명문장』이 우리의 마음을 맑고 아름답게 때로는 단단하게 설파한 덕분이다. 저자들은 고전을 탐독하면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어떤 문장이 가슴에 확 꽂혀다, 고 했다. 명문장은 말 그대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일침(一針)이며 죽비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찾지 않으면 여전히 고전이라는 낡은 틀 속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다. 또 하나 고전의 걸림돌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읽어도 글 속에 숨은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막막함이다. 저자들은 이런 기대와 우려를 말끔히 씻어 내리며 고전의 명문장을 가려내어 사람들이 읽기에 딱 좋게 새겨 주고 있다.

 

『새기고 싶은 명문장』은 웅숭깊은 고전의 울림을 수신(修身), 결단(決斷), 태도(態度), 의지(意志), 언행(言行), 관계(關係)로 나눠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고전이라고 해서 고전 속 진리만으로 남는 게 아니라 우리들 삶으로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첫째, 수신에서는 무자기(毋自欺)의 정신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라는 세 글자는 내가 평생 동안 힘써온 바이다.

김장생,『사계유고(沙溪遺稿)』, 「시상(諡狀)」

 

수신은 모든 덕목의 시작이며 자기(自己)는 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는 자기를 아는 것(自知) 못지않게 무자기(毋自欺) 즉,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무자기는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좌우명으로 가장 즐겨 삼은 까닭은 어렵지 않다. 혼탁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 무자기만큼 고언이행(苦言利行)은 없을 것이다. 온갖 감언이설로 우리의 양심이 불편할 때 무자기는 순수한 마음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결단에서는 독서의 올바른 방법이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논어(論語)』「위정(爲政)」

 

요즘은 책을 권하는 사회다. 열심히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책만 읽고 그것으로 끝나면 우리는 백면서생을 벗어날 수 없다. 반대로 생각만 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독단자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책은 공부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백과사전이며 동시에 마음의 거울이다. 우리가 백과사전에서는 단답형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마음의 거울에서는 주관형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거울을 맑고 깨끗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사색하면서 독서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태도에서는 벽(癖)이다.

 

벽이 없는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이라는 글자는 ‘질병’과 ‘편벽됨’에서 나온 것이니, 병 가운데 지나치게 치우친 것이다. 그러나 홀로 자기만의 세계를 개척하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종종 벽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가 있다.

박제가, 「백화보서(白花譜序)」

 

누구나 완벽(完璧)해지려고 한다. 그러려면 속된 말로 미쳐야 미친다. 혹,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벽(絶壁)이다. 완벽과 절벽은 벽(癖)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벽을 가진 사람은 비정상적이며 기인(奇人)이라는 부정적인 탓에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은 벽이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기인(棄人)이지 않을까?

 

넷째, 의지에서는 지혜의 수고스러움이다.

 

사람이 후덕한 지혜와 능통한 지식이 있는 것은 항상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맹자(孟子)』「진심상(盡心上)」

 

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너무 적으면 몰라서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는 것이 너무 많으면 잡념과 망상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아는 것이 병’이라는 숨은 의미는 지혜 그 자체가 병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혜를 얻는 일이 병을 앓는 것처럼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만약에 약(藥)으로 처방된 지혜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병(病)일 것이다. 그러나 고(苦)에서 얻어진 지혜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약(藥)이 될 것이다.

 

다섯째, 언행에서는 멈춤이다.

 

대저 이른바 지지(止止)라는 것은, 능히 멈춰야 할 곳을 알아 멈추는 것을 말한다. 멈춰야 할 곳이 아닌데도 멈추면, 그 멈춤은 멈출 곳에 멈춘 것이 아니다.

이규보, 「지지헌기(止止軒記)」

 

주마간산(走馬看山), 앞만 보는 인생은 달리는 말과 같아 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무한 경쟁 때문에 남보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 그러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경주가 아니라 멈춤이라 하겠다. 삶을 직선으로만 달리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지만 삶의 곡선은 쉬어 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멈출 곳이 아닌데도 멈추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욕망보다는 미련에 가까워 부끄럽다.

 

여섯째, 관계에서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세상에 백락이 있은 후에야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과 같은 사람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한유,「마설(馬說)」

 

모든 일에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령, 말을 잘 보는 백락(佰樂)과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천리마(天裏馬)가 있다고 하면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일까? 앞서 말한 대로 ‘백락이 있은 후에야 천리마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천리마가 있다고 한들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이 없다고 한다면 천리마는 여느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백락의 안목과 백락을 알아보는 안목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떨까? 굳이 우리가 어려운 선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법구경(法句經)』 중에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있다.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최상의 진리를 모른다면 그 같은 진리를 알고 사는 그 하루가 훨씬 낫다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삶의 올바른 긍정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고전의 단단한 가르침은 백년을 살아온 지혜이다. 이것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도 충분하다. 그러나 배움에 있어 뛰어난 명문장은 뛰어난 명문가와 같다는 생각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길주는『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에서“저 사람이 배운 것은 모두 내가 읽은 것이고,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내가 아는 것이다. 어찌 저 사람만 우뚝 뛰어나고 나라고 하지 못할 법이 있겠는가?”라고 전혀 뜻밖의 생각을 펼치면서 ‘망연자실이란 자신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사람의 수준을 따라가려고 분발하는 마음’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삶이 힘들고 외로울 때 고전의 명문장을 벗 삼아 망연자실하는 것도 또 다른 오우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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