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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넌 얼음이야. 정말이지 넌 도미니카 여자 같지가 않아.
차라리 내가 더 도미니카 사람 같아.”
『염소의 축제』중에서
얼음을 물끄러미 생각해봤다. 단단한 차가움이 앞섰다. 세상은 얼마든지 얼음이 되거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에 ‘얼음 같은 여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런데 다시 그 말을 되새겨 볼 때 뭔가 강렬함이 새겨졌다. 단순히 얼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얼음보다 더 단단한 그러면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염소의 축제』에서 우라니아의 통증은 얼음 같았다. 그것은 절망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이라고 해서 우중충한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오히려 우라니아는 얼음 같은 여자를 변명하면서 우리의 생을 혼란스럽게 했다. 절망이라는 것이 질병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얼음을 조금씩 깨뜨리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2010년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답게 이 소설에서 얼음도 하나의 열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즉 자신의 존재감의 결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의 욕망을 더 단단하게 얼음이 될 때까지.
『염소의 축제』는 가혹했다. 독재자는 왜 살해되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은 답답했고 참을 수 없었다. 독재자에 대한 불안한 감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더구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경하면서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독재자가 즐기는 축제인지 모른다. 독재자는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킨다. 비록 그것이 권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불과할지라도 독재자는 나쁜 영웅이다. 독재자는 그가 바라던 세계를 열었음에도 결국에는 조롱을 당한다. 조롱을 당하는 그 순간부터 독재자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야멸찬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 소설을 보면 독재자에 얼룩진 역사의 방향은 어긋나지 않았다. 도미니카 공화국 트루히요의 독재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소설에서 트루히요는 ‘조국의 아버지’, ‘자선가’라는 호칭으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트루히요는 거짓과 위선으로 몰락했다. 뿐만 아니라 ‘염소’라는 최악의 질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염소일까? 트루히요는 철저한 규율과 훈련 덕분에 193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영웅과 신비주의자가 지닌 무자비한 규율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는 4시에서 1분도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고 정확하게 일어났다. 그런가하면 무더운 여름에도 그가 원하지 않으면 땀을 흘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강박관념은 특히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외모는 영혼의 거울이네.”라고 엄격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아마도 그의 강한 남성성은 이때부터 단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비판에 노출될수록 혹은 자신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염소’라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반면에 그만큼 피곤한 것이다. 그래서 권력이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달콤한 성욕으로 위로했다. 동시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쾌락을 받쳤다.
도미니카 사람들이 트루히요를 우상화하는 것은 권력의 중독성과 닮았다. 하지만 권력을 넘어서면 어떤 당혹스러움이 가슴을 할퀴면서 나아갔다. 그것은 곧장 사람들의 잠재적 콤플렉스 즉 잠자던 야수성이라는 모순된 힘을 깨웠다. 그러니까 그들의 트루히요에 대한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분노에 가득 찬 염소의 축제에서 도미니카 여성들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도미니카 여성들의 수동성보다는 아이러니하게도 도미니카 남성들의 ‘적극적 수동성’에 실망하게 된다. 도미니카 여성들은 그들의 딸, 아내가 아니었던가. 이 소설에서 아구스틴의 딸이었던 14살 우라니아도 트루히요의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라니아의 처녀성은 파괴되었다.
35년이 지난 후, 우라니아는 다시 조국을 찾았다. 14살 순결을 잃어버렸던 고통을 소녀 혼자 버텨내기에는 얼마나 참담한가. 순결을 잃어버린 후 그녀는 미국에서 다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선택한 치료법은 공부였다. 그녀에게 공부는 기쁨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오락이었다. 그녀는 텅 빈 마음을 메우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부하는 도중에 그녀는 사악한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트루히요 시절에 관한 책을 읽고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도미니카 역사를 읽으며 행복하면서 특별한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특별한 역사에 배신당한 것을 알았으며 자신의 아빠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차가운 저주를 퍼부었다. 그녀가 35년 만에 조국을 방문한 이유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구스틴을 병문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구스틴의 몰락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녀를 얼음 같은 여자로 만들었을까? 이 모두가 트루히요의 탓일까? 일찍이 수잔 손택은『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질병은 두 가지 가설을 통해 확대됐다. 첫 번째 가설은 모든 사회적 일탈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범죄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범죄자는 비난받거나 처벌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되고, 치료받고, 교정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두 번째 가설은 모든 질병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질병은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사건으로 해석되었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했기 때문에 병에 걸리게 된 것이며, 의지를 사용해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으며, 질병으로 죽지 않기를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다고 믿도록 유도됐다.
그녀의 마음 한 켠에는 아버지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원망이 흘러 넘쳤다. 원망은 그녀 마음의 모서리를 차갑게 만들었으며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가두어버렸다. 어린 그녀의 뺨을 람피스(트루히요의 아들)이 만졌을 때 아구스틴은 소스라치게 화를 냈다. 그녀가 그 이유를 묻자 아구스틴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이야.”라고 말했다. 처음과 달리 트루히요의 권력에서 외면받자 아구스틴은 실연당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트루히요의 사랑을 받고자 했던 그는 끝내 자신의 어린 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더러운 파티에 참석한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의 하반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것이 아구스틴에게는 평생 죄의식으로 맴돌았다. 그는 죄의식을 날려버리기 위해 그녀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도왔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로부터 면죄를 받을 수 없었다. 그녀가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허구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트루히요의 역사가 진짜 삶이 아니었을까. 한 때는 조국의 아버지였으나 독재자, 호색한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잊는 것은 아니었을까. 트루히요가 만든 세상은 위험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자유’의 잣대였다. 독재자 앞에서 더 많은 자유는 오히려 더 많은 자유의지를 의심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염소의 축제가 ‘유혈 축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혈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염소가 살아있는 한 자기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을 토해냈다. 그러나 우라니아는 분노를 토해내지 못했다. 대신에 자신을 얼음으로 만들었다. 아구스틴이 트루히요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였듯 우라니아는 아구스틴에게 맹목적인 앙갚음을 했다. 그녀는 도미니카 여자라는 현실을 기꺼이 배반했다. 결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녀는 쌀쌀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염소의 축제』에서 우라니아의 불행은 사소하지 않았다. 바로 처녀성이 상실되었다. 여자에게 처녀성은 평생을 아껴야 할 곳이다. 그곳에서부터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녀성의 파괴는 단순한 신체적인 고통만은 아니다. 결국에는 사랑의 파괴라는 멍에가 되고 만다. 이런 그녀에게 불행한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다독거린다면 그것은 불행했던 순간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얼음 같은 그녀가 녹을 수 있다고 한다면 잘못이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얼음 같은 상처가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라고 몰아세우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얼음은 녹으면 사라지고 마는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마음의 감옥이라거나 마음의 불모지라고 하지 말자. 얼음은 마음의 순결이어야 한다.
201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르가스 요사는 “나의 정치적 견해 때문이 아니라, 내 문학작품에 때문에 수상을 결정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문학작품은 뭘까? 로울로 가예고스 상 수상 연설문에서 작가는 “문학은 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학은 반체제와 반항을 의미하며, 작가의 존재 이유는 항변과 반대와 비판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작가는 독재자 소설『염소의 축제』를 통해 트루히요 역사의 거짓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의의 이름으로 누가 역사의 승리자이며 패배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들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트루히요 역사를 읽을수록 분명해지는 허구 앞에서, 그 모든 것의 거대한 위선 앞에서 그녀의 삶은 얼음 같았다. 어쩌면 차가운 열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너머에는 키치(kitsch: 원래는 싸구려 예술을 말하나 여기에서는 넓은 의미로 순응주의를 표현함)에 대한 절망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