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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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우리에게 두 개의 눈(目)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얼굴에 있는 육체의 눈이며 다른 하나는 가슴에 있는 마음의 눈이다. 얼굴과 가슴과의 거리가 가깝다고 한다면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을 잃어버리면 그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어떻게 보면 마음의 눈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외눈박이다.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평범하다.

그러나 지식인은 게으른 일상을 거부하며 초점을 잃지 않고 산다. 지식인의 사유의 힘은 무엇일까?『지식인의 서재』를 유심히 들여다 본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책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지식인은 독서광이다. 지식인은 만 권의 책을 읽고(讀萬券書) 만 리 길을 걸은(行萬里路)사람이다. 그래서 지식인에게 서재는 책이 꽂혀 있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만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감성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재가 곧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식인의 서재에 담긴 오랜 사연들과 만난다. 가령, 법학자 조국에게는 ‘서재는 책과 교감하는 나의 성(城)’이며 자연과학자 최재천에게는 ‘통섭원’이었다. 솟대 예술작가 이안수에게는 ‘사유의 숲’이며 섬진강 시인 김용택에게는 ‘자연의 숲’이었다. 그런가하면 아트스토리텔러 이주헌에게는 ‘놀이터’이며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에게는 ‘나의 치열한 전쟁터’였다. 출판문화인 김성룡에게는 ‘삶의 흔적’이며 영화 감독 장진에게는 ‘영감과 기억의 창고’였다. 끝으로 전통공연예술 연출가 진옥섭에게는 ‘고물상’이었다.


이렇듯 지식인의 서재는 지식인의 삶과 사유를 이해하는 통로다. 또한 독서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독서를 취미라고 여긴다. 하지만 최재천은 독서는 일이며 전략이고 삶의 현장이라고 했다. 소통을 역설한 조국은 자신을 넓혀가기 위해서 자기 확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과 다른 타인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북디자이너 정병규에 따르면 독서는 ‘약간의 낯섦’을 전제로 한다. 약간의 낯섦이란 곧 자유다.


그런가하면 도시건축가 김진애는 책을 읽을 때는 의문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주헌은 당혹스럽게도 책은 완전하지 않다고 하면서 책은 70%만 이해하면 된다고 했다. 장진의 독서에 대한 생각은 책이 아니라 책을 읽는 태도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조윤범은 책과 음악은 같다고 하면서 독서하면서 웃거나 울거나 화내라고 했다.


우리는『지식인의 서재』에서 15명의 지식인들의 서재를 만나게 된다. 서재 못지않게 독서에 대한 단상은 게으른 정신을 활활 불타오르게 한다.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가 말했듯 책은 보석보다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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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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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는 말에서는 왠지 지혜롭다는 것이 느껴진다. 지혜는 곧 배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지혜롭다고 해서 철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철학을 모른다고 해서 삶이 불편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에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역설하는 철학자가 있다. 바로『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지은 강신주다. 이 책에서 저자는 철학이 필요한 까닭을 ‘인문정신’에서 찾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정신의 핵심은 어렵지 않다. ‘솔직함과 정직함’이면 충분하다. 솔직함과 정직함이 진짜 인문정신의 맨얼굴이라고 한다면 가짜 인문정신은 ‘페르소나’다. 자기 위로와 자기 최면일 뿐이다.


가령, 후회하지 않는 삶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에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을 가두고 있는 담벼락을 망치로 부수겠다고 했다. 니체의 망치는 다름 아닌 ‘영원 회귀’였다. 어제의 고통이 내일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이 ‘영원불멸’이다. 하지만 영원 회귀에서는 어제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몇 년 주기로 해서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 과거는 슬픈 미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재의 고통에 맞서야 한다. 고통에 맞서지 않고 비겁한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삶의 주인과 관련해서 최시형의『해월신사법설』은 당당했다. 이 책에서 최시형은 “나를 향해 위패를 설치하라(向我設位)!”고 주장했다. 또 하나 “사람은 모두 한울님(天主)을 모시는 영기(靈氣)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최시형이 말한 향아설위, 영기 등은 모두 동학(東學)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동학이 기독교의 서학(西學)의 반대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학이 비범한 인문정신인 것은 ‘인내천(人乃天)’에 있다. 저자는 인내천 사상에서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초월자를 긍정하는 초월적 사유를 부정하자마자, 인간 내부에 잠재한 생명력을 긍정하는 내재적 사유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다.


그런가 하면 사르트르는『존재와 무』에서 인간을 ‘대자(對自)’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존재는 컴퓨터나 의자처럼 스스로 행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무는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고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반성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물과 달리 ‘자신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에는 인문정신의 48가지 맨얼굴들이 거침없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48가지 맨얼굴들 이었으나 무심코 지나쳐 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나면서 우리는 철학에 관심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인문정신도 강렬하게 배울 수 있다. 이것은 들뢰즈가 말했던 ‘강렬한 독서’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강렬한 독서란 ‘감응하는 독서’를 일컫는다. 단순히 어휘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삶을 흔들어버리거나 나의 허영을 부수고 내 맨얼굴을 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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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버돗의 선물 - 한정판 스페셜 기프트 세트 (스태들러 색연필 세트 + 그림엽서 + 케이스)
테드 겁 지음, 공경희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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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영혼이 새로 태어나므로 나는 매일 밤 오늘의 기록을 묻는다. 오늘이나 어제의 실망이 내일의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는다.-34쪽

버돗의 선물은 '많을수록 좋다'를 신념으로 삼던 자들에 대한 비난을 의미했다. 엄청난 액수의 구제금에 비해 버돗의 5달러는 보잘 것 없었고, 가장 소박한 구제 노력에도 명함을 내놓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작음과 순수함에 사람들은 감동하고 열광했다. 너무 작은 선물이라 감동하고 열광했다. 너무 작은 선물이라 대공황에 눈금 하나 새기지 못했지만, 그 액수보다는 그 선물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중요했으리라.-44쪽

버돗의 선물은 재산이나 우정을 되돌리지는 못했지만 일부에게 절망에 굴하지 말라는 설득이 되었을 것이다. 몇몇 사람에게는 그의 제안이 자신감을 회복해 일상에 맞서게 했는지도 모른다.-74~75쪽

유대어로 고통을 뜻하는 말은 초리스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인생이 안겨 주는 평범한 고통이 아니라 마음과 의지에 가하는 진짜 큰 타격인 영혼의 무거운 짐을 뜻한다.-95쪽

마침내 남을 도울 위치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큰 변화를 의미했다. 그가 갈구한 것은 바깥의 인정이 아니라, 그런 베풂이 주는 내적인 확인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선언이었다. 또 다른 세상에 살지만 많은 것을 공유한 이들의 가치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다.-147쪽

'충분함'은 대공황기의 대표적인 표현이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의 척도였다. 그것은 소비가 아닌 보존에 대한 말이었다. '충분함'은 전 가족이 모일 수 있는 말이고, 신뢰의 몸짓이었다. 또 반항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것은 축복을 크게 헤아리고, 영혼을 굳건하게 하고, 절망이 틈타지 않게 하는 말이었다.-217~218쪽

조금 더 가진 이가 조금 덜 가진 이게 내미는 손길, 거기에 상대에 대한 배려까지 더해진다면 그 나눔과 베풂 속에서 아름다움이 피어날 것이다. 그런 관계를 이상적인 해결책일 뿐이라고 말하기 쉽지만, 이 책은 우리가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그것일 듯 싶다. 착한 손을 내밀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가르쳐 준다.-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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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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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배움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이면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하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었다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을 것이다.” 하필이면, 이고 가시가 돋친 원망을 하게 되는데 그게 꼭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 한 켠에는 가시는 아름다움의 방해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반쪽자리 진리에 머무를 뿐입니다. 반면에 가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라면 우리는 충분히 배울 수(educate) 있습니다. educate라는 말은 라틴어 ‘educare’에서 생겨났는데 ‘끌어낸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인간의 내부에 원래 갖추어져 있는 능력과 재능을 끌어내어 활성해가는 것입니다.


서울대 최고의 멘토 김난도의『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신선한 충격으로 잠자고 있던 신경을 하나하나 깨웠습니다. 청춘은 활기찬 이미지와는 달리 마음속은 불안과 외로움 그리고 아픔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갑니다. 고 3에서 대학생이 되면 어렵게 통과한 만큼 세상을 다 얻었다고 안심하지만 정작 대학은 취업전선을 방불케 합니다. 과열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많은 전략과 전술로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그렇기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맙니다. 어느 때보다 스펙(specitication)이 강렬한 세상입니다. 스펙을 ‘취업의 바이블’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러나 취업을 내세우며 무의미한 스펙은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합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스펙보다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런 저자의 대담성을 보고 있으면 무릎을 치고도 모자랍니다. 청춘들이 새겨야 할 것들을 솔직하게 끌어내는 덕분입니다. 그만큼 새로운 도전 앞에서 망설이는 청춘들이 많이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경쟁을 통해 성장해온 청춘들이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스펙이 승산 없는 전투라고 하는 것이 또 다른 대안을 찾아야하는 것은 아닌지 벌써부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 말대로 ‘아프니까 청춘’입니다. 혹, 아프지 않기 위해서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모두들 계획대로 하고 싶지만 막상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새로운 미래가 온다』의 저자인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계획을 세우지 마라.”고 했습니다. 대신에 “멋진 실수를 통해 배워라.”고 충고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저자는 청춘을 인생시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한 평생을 80이라고 가정하고 24시간으로 나눠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략 대학을 졸업하는 시간은 ‘아침 7시 12분’입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아침 7시 12분은 청춘들이 열망하기 좋은 최적의 시간입니다. 열망하기 앞서 아침 7시 12보다 빨리 일어나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빨리 일어난다고 해서 자신이 가장 일찍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매화, 벚꽃, 장미 등을 보면 배울 수 있습니다. 계절 따라 피는 꽃이야말로 아름답습니다. 사람의 신체 리듬(rhythm) 또한 계절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며 계절 따라 챙겨야 합니다. 그런데도 청춘들 대부분은 ‘매화’가 되려고만 합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매화는 진정한 의미의 라임(rhythm)이 아닙니다.


저자의 경험이 알차고 진솔하게 스며든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청춘을 풍요롭게 하는 비결을 알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청춘들만을 위한 멘토는 아닌 듯합니다. 바로 자신의 라임으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 하자는 것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로 널리 알려진 카르페 디엠은 ‘평범한 삶을 살지 마라.’,‘현재를 즐겨라.’는 것입니다. 현재를 즐기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필요 없는 의무감으로 현재가 비참해져는 안 된다, 아직 오직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가 흔들거려서는 안 된다, 자신의 목표를 확고하게 하고, 그 목적지를 향해 순간순간의 발걸음을 뚜벅뚜벅 옮겨야 한다는 저자의 멘토는 정말이지 ‘메모하기도 벅찰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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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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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얼음이야. 정말이지 넌 도미니카 여자 같지가 않아.

차라리 내가 더 도미니카 사람 같아.”

『염소의 축제』중에서




얼음을 물끄러미 생각해봤다. 단단한 차가움이 앞섰다. 세상은 얼마든지 얼음이 되거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에 ‘얼음 같은 여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런데 다시 그 말을 되새겨 볼 때 뭔가 강렬함이 새겨졌다. 단순히 얼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얼음보다 더 단단한 그러면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염소의 축제』에서 우라니아의 통증은 얼음 같았다. 그것은 절망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이라고 해서 우중충한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오히려 우라니아는 얼음 같은 여자를 변명하면서 우리의 생을 혼란스럽게 했다. 절망이라는 것이 질병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얼음을 조금씩 깨뜨리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2010년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답게 이 소설에서 얼음도 하나의 열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즉 자신의 존재감의 결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의 욕망을 더 단단하게 얼음이 될 때까지.

『염소의 축제』는 가혹했다. 독재자는 왜 살해되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은 답답했고 참을 수 없었다. 독재자에 대한 불안한 감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더구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경하면서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독재자가 즐기는 축제인지 모른다. 독재자는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킨다. 비록 그것이 권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불과할지라도 독재자는 나쁜 영웅이다. 독재자는 그가 바라던 세계를 열었음에도 결국에는 조롱을 당한다. 조롱을 당하는 그 순간부터 독재자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야멸찬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 소설을 보면 독재자에 얼룩진 역사의 방향은 어긋나지 않았다. 도미니카 공화국 트루히요의 독재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소설에서 트루히요는 ‘조국의 아버지’, ‘자선가’라는 호칭으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트루히요는 거짓과 위선으로 몰락했다. 뿐만 아니라 ‘염소’라는 최악의 질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염소일까? 트루히요는 철저한 규율과 훈련 덕분에 193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영웅과 신비주의자가 지닌 무자비한 규율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는 4시에서 1분도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고 정확하게 일어났다. 그런가하면 무더운 여름에도 그가 원하지 않으면 땀을 흘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강박관념은 특히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외모는 영혼의 거울이네.”라고 엄격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아마도 그의 강한 남성성은 이때부터 단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비판에 노출될수록 혹은 자신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염소’라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반면에 그만큼 피곤한 것이다. 그래서 권력이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달콤한 성욕으로 위로했다. 동시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쾌락을 받쳤다.

도미니카 사람들이 트루히요를 우상화하는 것은 권력의 중독성과 닮았다. 하지만 권력을 넘어서면 어떤 당혹스러움이 가슴을 할퀴면서 나아갔다. 그것은 곧장 사람들의 잠재적 콤플렉스 즉 잠자던 야수성이라는 모순된 힘을 깨웠다. 그러니까 그들의 트루히요에 대한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분노에 가득 찬 염소의 축제에서 도미니카 여성들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도미니카 여성들의 수동성보다는 아이러니하게도 도미니카 남성들의 ‘적극적 수동성’에 실망하게 된다. 도미니카 여성들은 그들의 딸, 아내가 아니었던가. 이 소설에서 아구스틴의 딸이었던 14살 우라니아도 트루히요의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라니아의 처녀성은 파괴되었다.

35년이 지난 후, 우라니아는 다시 조국을 찾았다. 14살 순결을 잃어버렸던 고통을 소녀 혼자 버텨내기에는 얼마나 참담한가. 순결을 잃어버린 후 그녀는 미국에서 다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선택한 치료법은 공부였다. 그녀에게 공부는 기쁨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오락이었다. 그녀는 텅 빈 마음을 메우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부하는 도중에 그녀는 사악한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트루히요 시절에 관한 책을 읽고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도미니카 역사를 읽으며 행복하면서 특별한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특별한 역사에 배신당한 것을 알았으며 자신의 아빠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차가운 저주를 퍼부었다. 그녀가 35년 만에 조국을 방문한 이유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구스틴을 병문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구스틴의 몰락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녀를 얼음 같은 여자로 만들었을까? 이 모두가 트루히요의 탓일까? 일찍이 수잔 손택은『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질병은 두 가지 가설을 통해 확대됐다. 첫 번째 가설은 모든 사회적 일탈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범죄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범죄자는 비난받거나 처벌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되고, 치료받고, 교정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두 번째 가설은 모든 질병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질병은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사건으로 해석되었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했기 때문에 병에 걸리게 된 것이며, 의지를 사용해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으며, 질병으로 죽지 않기를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다고 믿도록 유도됐다.

그녀의 마음 한 켠에는 아버지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원망이 흘러 넘쳤다. 원망은 그녀 마음의 모서리를 차갑게 만들었으며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가두어버렸다. 어린 그녀의 뺨을 람피스(트루히요의 아들)이 만졌을 때 아구스틴은 소스라치게 화를 냈다. 그녀가 그 이유를 묻자 아구스틴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이야.”라고 말했다. 처음과 달리 트루히요의 권력에서 외면받자 아구스틴은 실연당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트루히요의 사랑을 받고자 했던 그는 끝내 자신의 어린 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더러운 파티에 참석한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의 하반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것이 아구스틴에게는 평생 죄의식으로 맴돌았다. 그는 죄의식을 날려버리기 위해 그녀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도왔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로부터 면죄를 받을 수 없었다. 그녀가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허구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트루히요의 역사가 진짜 삶이 아니었을까. 한 때는 조국의 아버지였으나 독재자, 호색한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잊는 것은 아니었을까. 트루히요가 만든 세상은 위험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자유’의 잣대였다. 독재자 앞에서 더 많은 자유는 오히려 더 많은 자유의지를 의심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염소의 축제가 ‘유혈 축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혈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염소가 살아있는 한 자기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을 토해냈다. 그러나 우라니아는 분노를 토해내지 못했다. 대신에 자신을 얼음으로 만들었다. 아구스틴이 트루히요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였듯 우라니아는 아구스틴에게 맹목적인 앙갚음을 했다. 그녀는 도미니카 여자라는 현실을 기꺼이 배반했다. 결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녀는 쌀쌀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염소의 축제』에서 우라니아의 불행은 사소하지 않았다. 바로 처녀성이 상실되었다. 여자에게 처녀성은 평생을 아껴야 할 곳이다. 그곳에서부터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녀성의 파괴는 단순한 신체적인 고통만은 아니다. 결국에는 사랑의 파괴라는 멍에가 되고 만다. 이런 그녀에게 불행한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다독거린다면 그것은 불행했던 순간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얼음 같은 그녀가 녹을 수 있다고 한다면 잘못이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얼음 같은 상처가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라고 몰아세우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얼음은 녹으면 사라지고 마는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마음의 감옥이라거나 마음의 불모지라고 하지 말자. 얼음은 마음의 순결이어야 한다.

201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르가스 요사는 “나의 정치적 견해 때문이 아니라, 내 문학작품에 때문에 수상을 결정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문학작품은 뭘까? 로울로 가예고스 상 수상 연설문에서 작가는 “문학은 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학은 반체제와 반항을 의미하며, 작가의 존재 이유는 항변과 반대와 비판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작가는 독재자 소설『염소의 축제』를 통해 트루히요 역사의 거짓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의의 이름으로 누가 역사의 승리자이며 패배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들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트루히요 역사를 읽을수록 분명해지는 허구 앞에서, 그 모든 것의 거대한 위선 앞에서 그녀의 삶은 얼음 같았다. 어쩌면 차가운 열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너머에는 키치(kitsch: 원래는 싸구려 예술을 말하나 여기에서는 넓은 의미로 순응주의를 표현함)에 대한 절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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