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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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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네가 말한 그 도시가 무척이나 궁금한 나머지 나 또한 그 도시를 상상하며 한걸음씩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누구나 한 번쯤 답답하고 반복적인 이 도시를 탈출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으며, 이 도시에서 특별한 능력이 없이 톱니바퀴처럼 살고 있다는 무력감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네가 그 도시에 있으니 더욱 욕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도시는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여 기묘하고 낯설었다. 어쩐지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비로소 믿을 수 있는 도시였다. 시계탑에는 시곗바늘이 없고 도서관에는 책 대신 오래된 꿈들이 있다. 그 도시에서는 누구나 그림자가 없다. 더군다나 너는 분명 열여섯 살 소녀 모습 그대로 그 도시에 있었는데 정작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던 순간의 당혹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결코 간단치 않은 질문을 만나게 된다. 그림자를 포기하고 진짜 나를 만날 것인지, 진짜 나를 포기하고 그림자로 살아갈 것인지를 되묻게 된다. 우리는 살아서는 그림자를 데리고 있다가 죽어서는 영혼으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그림자가 존재 자체를 고민하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이별을 두려워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다른 무엇이 훨씬 더 중요하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정말로 우리는 흘러가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생각하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겠음을 고독하고 공포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 이유 없음이 다름 아닌 우리 존재의 한계 때문인지 모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네가 말한 도시에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놀라운 네가 말한 도시에서 우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산다. 기어이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들어왔으니 우리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불확실한 벽을 통과하고 마주하게 된 도시는 우리에게 진짜 나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림자를 데리고 사는 현실이 얼마나 허무할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허무는 마치 뿌리 없는 식물 같은 그림자였다. 허무로 가득 찬 현실에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림자를 벗어던져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다. 허무는 불확실한 사랑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네가 있는 그 도시에서 우리는 그림자가 없었다. 대신에 진짜 사랑이 환상적으로 그려졌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림자를 구원하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외면했던 그림자는 우리의 분신이었던 셈이다. 그림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순간, 뒤집어 말하면 그림자의 말이 더 진실처럼 들렸다. 도시에 있는 게 가짜고 도시 밖이 진짜라는 것이다. 네가 말한 불확실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말 그대로 불확실해졌다. 오직 확실한 것은 네가 말한 그 도시가 사실은 ‘놀이공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갑자기 네가 말한 도시에 대한 감정은 모호해졌다. 그림자를 믿어야 할지, 아니면 네가 말한 도시를 믿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작가의 말대로 과연 이쪽이 아닌 저쪽 세계에서 사는 게 옳은 일인지 의뭉스러웠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 또한 네가 말한 도시에서 ‘꿈 읽는 이’기를 그치고 그림자를 가진 인간이 되고 싶었다. 결국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죽은 것으로 여겨져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과는 정반대여서 네가 말한 도시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현실과 비현실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현실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환상도 필요한 법이다. 따라서 작가가 보여주는 비현실은 결코 비현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리 내부 속에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현실과 비현실이 흐르는 강물처럼 뒤섞이며 평범한 일상이 되는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나와 너, 그리고 고야스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감을 찾았다. 알고 보면 납득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에서 나는 그림자일 수도 있고 동시에 꿈 읽는 이라는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작가의 혜안을 빌리자면 ‘백 퍼센트 마음’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마음의 경계였다. 어쩌면 네가 말한 도시는 우리가 열망하는 순수가 아니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순수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에게도 불확실한 벽을 통과할 수 있는 특별한 희망이 생겼다. 백 퍼센트 마음으로 살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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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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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불급(不狂不及). 세상에는 지독하게 날카로운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미치고 않고서는 결코 미칠 수 없을 것 같은 질긴 운명의 그림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운명을 두고 구구절절 좋고 싫음을 따지는 것은 무척이나 따분합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혼자만의 미친 운명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에게는 바다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에게는 그림이 그랬습니다. 그런가하면 제임스 설터의 고독한 얼굴에 나오는 랜드에게 암벽이 진짜 삶이었습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암벽은 하강하는 거대한 강물이며 이런 불가항력에 맞서 암벽 등반하는 과정이 일종의 자신의 삶을 찾는 것입니다.

 

소설은 두 개의 일상이 교차합니다. 황량한 캘리포니아와 아름다운 몽블랑. 그는 캘리포니아의 따분한 일상에서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든지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완벽한 이기주의자로 살아갑니다. 세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 고독을 불태웁니다. 왜 산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등반 앞에서 그는 결코 유유부단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두 번째, 세 번째 동작을 할 수 없으며 결국에는 산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좋아하는 관점에서 그의 독특한 등반은 상상력이 섬뜩했습니다. 상상력은 단순히 산을 정복하려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 다음과 같은 그의 육성은 절박하고 생생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그의 정신적 고뇌는 사실상 바로 나의 고뇌이기도 했습니다. 내 인생을 걸고 끝없이 펼쳐질 도전 같았습니다. ,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195)

 

오로지 그는 산에 미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며 남성성이라는 운명 끈을 뚝뚝 잘라내더니 놀랍게도 남성성 존재에 가까운 산에 자일을 연결하고는 무모할 정도로 목숨을 바쳤습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그의 확고한 기쁨은 마치 햇빛을 받은 몽블랑 같았습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느끼면서 그의 불변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불변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아마도 고독한 얼굴일 것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항상 변하지만 완전히 완벽해 보이는 순간”(227)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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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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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는 기묘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면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상의 파편적인 이야기들은 울분을 자극한다. 사랑, 광기, 죽음이 서로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감정은 몹시 서글프다. 이미 지나간 순수한 추억들, 그래서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시절에 대한 북받치는 눈물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백일몽처럼 이어졌다. 작가는 백일몽에다 죽음과 공포의 분자들을 흩어지게 하며 삶의 비밀을 혼란스럽게 한다. 한편으로 비극적 결말은 진실을 위태롭게 한다

 

사랑의 계절의 남자에게 사랑은 제목 그대로다. 첫사랑에 대한 불안한 내면이 사계의 선율을 타고 흐른다. 오로지 그녀만을 사랑하고픈 마음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사랑은 핏줄이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었으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랑은 사회적 통념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과 동시에 환상이 깨졌을 때 생겨나는 동정에서 눈물이 아니라 삶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사랑에 대한 변명이 아닌 마지막 사랑의 불꽃을 터뜨릴 만한 열정이 티끌만큼도 남아있지 않을 때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결코 단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은 허무함이 전부가 아니다. 저 멀리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는 눈물샘이 미칠 듯이 쏟아졌다. 뇌막염에 걸려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그들의 관계는 모호하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닌 불분명한 작은 기억밖에 없다. 문제는 작은 기억이더라도 뇌막염에 걸리면 큰 기억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되고 만다. 어쩌면 뇌막염에 걸린 여자의 병은 사랑의 온도가 41도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맴돌았다. 남들은 사랑 때문에 가슴이 타들어간다고 하는데 여자는 놀랍게도 뇌가 타들어갔다. 뇌막염 때문에 사랑이 변했다. 남자는 사랑을 고백하고 여자는 사랑을 묻는다. “더 이상 착란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도지금처럼 절 사랑하실 건가요?”

 

한편 사랑의 마지막 반전은 사랑의 가능성에 있다. 가능성을 자꾸만 돌아본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사랑의 균형이 깨지고 어느 순간 광기에 휩싸인 무서운 존재가 된다. 엘 솔리타리오에 나오는 보석세공사 카심에게 보석은 사치스러운 몸을 장식하는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보석에 투사된 아내의 욕망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욕망을 죽여 가며 사랑을 쓸쓸하게 마무리 한다. 목 잘린 닭에서 백치로 태어난 네 명의 아이들은 애정이 식어버린 부모에 대한 반발력으로 그들의 여동생을 마치 닭의 목을 잘라 죽이는 듯 하면서 잔인한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깃털 베게에서는 신혼의 꿈이 사라진 여자는 상실감이 증폭되면서 끝내는 괴물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 괴물은 정체가 불문명한 흡혈귀이다. 여자가 사랑을 소화하지 못할수록 인생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작가의 열여덟 편의 단편 소설집에는 사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이 복잡한 사슬로 이어져 있다. 죽음은 때때로 일사병, 가시철초망, 야구아이에서 보듯 동물의 몸을 통해서 전달된다. 이런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는 사뭇 다르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적인 죽음이라고 할까? 죽음의 애잔함이 없지 않으나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의 죽음은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에서 보듯 허풍에 가깝거나 내 손으로 만드는 지옥에서 보듯 뼛속까지 마약에 중독된다. 이러한 죽음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으면 약간은 불쾌하면서도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은 두렵게 느낀다. 비록 죽음 그 너머의 이야기에 대해 알 수 없어도 말이다.

 

돌이켜보면 사랑, 광기, 죽음의 경계선은 없다. 모두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존심이 걸린 문제"(245쪽)여서 그런지 모른다. 사랑이든 광기든 죽음이든 자존심 때문에 아프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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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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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도시들에서

비는 어떤 언어로 내리는가?

-파블로 네루다

 

때로는 너무 많은 분노와 절망으로 숨 막힐 때가 있어요. 가슴이 붉게 타오르면서 폭발할 지경이에요.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꼭 그렇게 해야만 말이 되는 세상은 모순덩어리 같아요. 너무나 살인적인 모순. 세상이 무너지는 작용으로 인해 우리 자신도 무너지는 암흑이에요.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아요. 이렇듯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소 냉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인내심을 가지라고 했어요. 인내심.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를 묵묵히 읽으면서 예전과는 다른 인내심을 알게 되었어요. 소설은 인도의 참혹한 현실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나 기억으로 끝나지 않고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어요. 작은 것들의 신출간 후 20년 만에 내놓은 지복의 성자큰 것들의 신으로 연결된 느낌이에요. 20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흐를 정도로 인도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현실은 비통했어요. 600페이지에서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어요. 고백하자면 증오와 폭력이 어떻게 끝날까, 라는 두려움보다는 언제 끝날까, 라는 조바심이 앞서다 보니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까마귀들이 마구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어요. 소름끼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당신들은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생명체라는 적개심이 투명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마음 속 불을 쉽게 꺼뜨릴 수 없었어요. 인도는 거대한 용광로였어요. 모두를 불안하게 하니까요. 인종, 종교, 성별에 스며든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제도를 바라보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는 게 오히려 부끄러워졌어요. 얼핏 우리가 인도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와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어요.

 

소설의 전반부는 인도의 카스트제도, 특히 불가촉천민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고 있어요. 어머니가 이제 막 태어난 아기(안줌)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6가지 반응하는 이야기로 시작해요. 그녀가 괴물이 아닌 이상 이것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가능했던 것은 그녀가 히즈라였기 때문이에요. 히즈라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을 가졌어요. 이제껏 살면서 제3의 성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 불편했던 것은 남자라서 그랬는지 몰라요. 모든 것이 남자 아니면 여자이었으니까요. “여자-남자, 남자-여자”(p25) 라는 말은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어요.

 

이러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작가의 말대로 언어 바깥에 있기 때문이에요. 언어에는 생각만 있는 게 아니라 영혼도 있어야 해요. 영혼이 없는 언어는 세상과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없어요.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말아요. 히즈라에 대한 박탈감, 삶을 불투명하게 하는 명쾌하지 못한 감정, 이 모든 것들이 언어 바깥에서 비극적이에요. 삶의 욕망으로 날아올랐으나 끝내 절망으로 추락하고 말아요.

 

하지만 그녀는 언어 바깥이라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어 해요. 여자이고 싶고, 엄마이고 싶다는 그녀의 당당함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울컥해져요. 단지 남자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모성의 본능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에요. 울컥함의 중심엔 자기 자신을 파멸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녀가 삼십년을 콰브가(히즈라들이 사는 공동체)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아이마저 자신이 키울 수 없다는 상실감을 깨달아요. 콰브가라는 속박의 베일이 벗겨지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지자 그녀는 떠나요.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그녀에게 최고의 안식처는 아이러니하게도 공동묘지이었어요. 공동묘지 또한 언어 바깥에 있으니까요.

 

작가는 우리가 모르는 언어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어요. 그들은 분명 사회적 편견의 피해자인데 동시에 행복 사냥꾼이라는 가해자라는 존재론적 역설을 문신처럼 지니고 있어요. 그들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늘 불완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게 잘못이 아니에요. 굳이 잘못을 변명할 까닭은 없어요. 변명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한 번쯤 위로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녀가 공동묘지에서 추락 받은 자들을 위로하는 것은 어떠한 대의명분이 있느냐, 없느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영혼이라는 것, 눈으로도 말할 수 없고 입으로도 말하지 못하는 오직 가슴으로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영혼. 사랑은 영혼으로 시작해서 영혼으로 끝나는 것이에요. 만약에 영혼이 없다면 하면 우리는 언어 바깥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어떠한 위로도 받을 수 없어요. 그래서 그녀의 영혼이 묘지를 다른 곳으로 만들어요. 바로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라는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p14)의 낙원이에요.

 

소설의 후반부는 인도의 종교적 갈등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보여주고 있어요. 야만적인 세계는 마치 삶은 계란”(p201) 같았어요.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여도 속으로는 폭력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노란색이 폭력적인 색깔이 아닐까, 라는 조금은 위험한 상상을 해봤어요. 적어도 노란색은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요. 이러한 폭력과 사랑의 경계에서 작가의 분신 같은 틸로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세 남자(무사, 나가, 비플랍)의 이야기가 과거를 기억하게 해요. 비록 과거이지만 현재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어요.

 

전쟁이나 폭력, 기타 사람에게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전염병이 강해요. 집단 감염을 일으켜요. 잿더미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계속 타다 적당한 바람이 불기만 하며 활활 타올라요. 그래서 무사가 카슈미르 남자들처럼 이슬람 전사가 된 불행한 운명을 동정하게 되요. 반대로 인도 정보국에서 근무하는 비플랍은 카슈미르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무사의 허영을 부정해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플랍을 부정하게 되는데 무사는 슬픈 사람이고 슬픈 사람을 보면서 슬퍼지는 감정은 우리 모두 문제이니까요. ,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게 아냐. 일으켜 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 건 너희들 자신이야.(p567)

 

틸로는 영웅적인 무사를 동정하면서도 끝내 사랑하지는 못해요. 그들은 연인인 듯 남매 같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요. 오히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요. 무사뿐만 아니라 나가도, 비플랍도 그래요. 운명을 뚝뚝 끊어내겠다는 의지 때문에 그녀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운명에 배신을 당하더라도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얼마든지 우리도 불로 만들어진 사랑”(p311)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불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불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역설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요. 비록 나가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려는 것에 불과했어요. 그녀는 결혼이라는 가짜 삶을 통해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는지 알게 되요. 자신의 마음과 맞지 않는 주소에 사는 피로감에서 벗어나 끝내는 아이(미스 제빈 2)와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해요. 산산조각이 난 이야기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지?

 

작가 말대로 지복의 성자는 세련되지 못한 이야기가 넘쳐나요. 종교, 계급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자들이 흘린 피가 언제 멈추는지 모르게 비처럼 내렸기 때문이에요. 어느 순간 비는 비가(悲歌)가 되어 죽음을 애도해요. 그러나 천벌을 받은 죽음의 땅에서도 사랑의 시가 노래되고 때로는 겨자 꽃이 피어요. 성자(聖者)의 아이러니는 슬픔이나 탄식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을.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작가의 말을 믿고 싶었어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우리의 일상이 평범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세련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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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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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레프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는 전혀 고민해 본 적어 없었던 인생 전체에 대한 묵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의 고민을 읽다보면 어느새 우리 모두의 절박한 문제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단지 머나먼 러시아 이야기가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알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군대에 가려고 한 안드레이 공작은 평화스러운 생각으로 보였다. 전쟁의 반대가 곧 평화라는 오래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안드레이 공작이 바라는 평화는 달랐다. 전쟁을 반대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을 위대한 영웅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려보면, "보나파르트도 일을 하고 한 걸음씩 자기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는 자유로웠어.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리고 그는 목적을 달성했어."

 

다른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건방진 작자'라고 했다. 혁명을 하는 것은 괜찮은데 권력을 잡고 나서부터는 자유와 평등은 공허한 호언장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그래서 더욱 쓸모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그가 군대에 가고자 했던 이유는 목적, 다시 말하면 자기 의지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기 의지의 문제는 영웅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그래서 인생 전체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않을까?

 

한편, 자신의 의지 없이 방탕했던 피예르는 아내 때문에 다른 남자와 결투를 벌어야 하는 불행을 겪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프리메이슨의 형제단인 노인과 대화하면서 그토록 거리가 멀다고 느껴진 하느님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가 불행했던 것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다. 하느님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살아가면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이 눈에 보일 수 있다.

 

사람들은 불행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떻게든 불행을 피하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딜레마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종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때로는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지혜의 극한인지 모른다. 만약에 하느님이 없다면 굳이 하느님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에 대한 구원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최고의 지혜와 진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구원이지 않을까? 최고의 지혜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정화해야 한다. 이유인즉,"최고의 지혜와 진리는 우리가 마시고 싶어 하는 가장 깨끗한 액체"와 같으며 이 깨끗한 액체를 더러운 그릇에 담아놓으면 깨끗함을 판단할 수 없다. 오직 마음의 양심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은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다. 불행을 사용하다보면 슬픔만 있는 게 아니다. 얼마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전쟁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적이 동지가 될 수도 있다.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총과 칼이 없을 뿐 질투와 연민으로 상대방을 구속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는 언젠가 상처라는 부메랑이 되고 만다.


그러면 불행을 사용하는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톨스토이의 시선으로 보면 '역사의 도구'다. 그가 나폴레옹을 역사의 노예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무의식으로는 역사의 도구가 되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도구에 맞는 역사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톨스토이가 말하는 새로운 역사학은 관찰 대상이 다르다. 이것은 운동의 절대성을 인간의 이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운동의 연속성을 우리가 자의대로 단편적으로 분할하면서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류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의 미분과 적분이라는 방법을 통해 역사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작가는 전쟁과 사랑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인간이라는 역사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영원한 고통일수도 있다. 그리고 영원한 고통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다르면서도 사랑이라는 경이로움을 깨닫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좋아하니까 아름다운 것이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들은 물방울 같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합쳐지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세상의 고통 속에서, 죄 없이 받는 고통 속에서 삶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가장 커다란 기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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