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득 삶이 불 꺼진 밤의 창문처럼 공허할 때가 있다. 공허는 검은빛이다. 공허라는 말이 주는 아득한 미로 속으로 들어가면 지나고 나서 후회했던 순간들과 다시 마주한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되풀이되었다. 지금과는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하자면, 참 많은 세월을 맨몸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이것이 삶의 이유가 아니라는 두꺼운 벽()을 마주할 줄 몰랐다. 벽을 깨뜨릴수록 수많은 파편이 온몸으로 파고들었고 그리하여 인생을 끝까지 사랑하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세상 곳곳이 전쟁터여서 슬픔을 막을 수 없지만 사랑을 선택하고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때로 삶이 밤하늘의 별처럼 은은히 빛날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나오는 펄롱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 숨이 막혔다. 사소한 삶에서 느끼는 감정과 자기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사람들에게 삶은 사소하거나 사소하지 않다. 사소함은 사람을 살아가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석탄과 목재를 팔면서 다섯 딸을 키우는 그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딸들은 각자 자기에게 필요한 일을 하고 그의 아내 또한 지극히 현실적이며 시퍼런 직감으로 살림을 꾸려나간다. 그의 가족들은 각자 만의 방식으로 사소한 일상을 삶 그 자체로 여긴다. 다시 말하면 사소한 인간은 사소한 일상을 사소롭게 생각한다. 그래서 은유 작가의 표현대로 사소한 인간은 가족 인간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가족 인간은 다름 아닌 가족에게만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가족 인간만 있는 게 아니다. 소설에 나오듯 한겨울에도 먹을 것이 없고 땔감이 없어 힘들게 지내는 불행한 인간들이 있다. 펄롱은 석탄을 배달하면서 불행한 사람들을 본 이후로 가족 인간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얼핏 보면 불행한 인간은 운이 없다고 해도 할 수 있으나 그가 느끼기에는 가족의 결여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불행한 인간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떠올라 어째서 우리는 불행한 인간을 도와주지 못할까? 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그가 반가웠다. 가족 인간인 듯 하면서도 조금은 덜 가족 인간이어서 대화가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불행한 인간을 보면서 저마다의 감정을 자아낸다. 불행이라는 단어는 긴 설명이 없어도 가슴에 와닿는 슬픔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어느 누구는 그와 같이 불행한 인간을 모른 척하며 지나갈 수 없어 남몰래 도와주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의 아내처럼 우리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어.’라고 하며 발길을 돌리기 마련이다. 불행한 인간을 걱정하거나 도와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나름대로 핑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의 아내가 무심하게 말했던 말이 내 머릿속에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차별주의자라는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어느 누구도 차별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이중적인 잣대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얼굴이다. 다섯 딸을 부족함 없이 키우면서 남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누구에게 물어봐도 선량한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선량함이란 당연한 일이니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선량함이라는 말이 오히려 부당한 차별로 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든 운 나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라며 잠잠히 넘기곤 한다. 정말 그들을 스스로 제 무덤 판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부분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게 망설여졌다. 소설에 나오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보수적이었다.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이상적으로만 살려고 해서 그런지 모른다. 하지만 선량한 차별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더 이상 다정함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게 되었다. 그것은 정말 걱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차별이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든 일종의 무시였다.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는 관계만 유지하면서 불행한 그들의 삶에는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는 펄롱이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다행히 사람들의 무관심에 벗어나 자신의 소명을 지키려 했다. 그는 사소한 일상이 끌어당기는 아픈 현실에 대해 외면하지 않았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얼핏 담담해 보이면서도 배어나오는 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지 물으면 우리는 서로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원의 손길을 알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앞만 보고 스쳐 지나갈 뿐이다. 때로는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올 때는 도망가려는 마음뿐이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덜어줄 순 없고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연약했지만 멈춰서 생각하고 뒤돌아보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점점 더 힘들어져서 안간힘을 써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은 후회와 허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그토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의 선량함은 진실이었다.


어느 날 그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수녀원의 온갖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대한 깊숙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부끄러웠던 일이 떠올라 일요일에 미사를 보고 도무지 잠들 수 없을 정도로 고민에 빠졌다. 그저 크리스마스가 이름만 그럴듯한 축제가 아닐까 의심했다. 수녀원의 아름답지도 않은 부조리한 모습에 남들처럼 침묵하며 쉬쉬하며 그냥 살아도 되는지 묻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그가 할 수 없는 일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해서 수녀원에 있는 소녀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소녀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어쩌면 예전보다 최악의 시련과 싸워야 하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안타까운 체념에서 벗어나 참회의 용기를 냈다. 만약 그의 선량한 마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선물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기적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그의 마음은 크리스마스처럼 따뜻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내 마음 어딘가에 그의 절실한 말이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묘한 안도감이 생겼으며 내 마음을 부끄럽게 했다. 동시에 그에게 힘내라는 말도 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줄 때가 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결코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만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사소하더라도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괜찮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다름 아닌 최선이었다.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했다.


클레이 키컨의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천천히 읽었다. 그의 소설은 뭔가 뚜렷한 이야기나 주제는 없어 보였다. 대신 사소한 일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담담한 시선 속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사소한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사소한 일상을 몇 번이고 되돌아보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담담함에는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었다.’라는 미세하면서도 강렬한 울림을 준다. 앞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돌아보는 시간이 우리의 살아 있음을 선명하게 한다.


우리는 까마귀 울음소리로 추악한 세상이 금방이라도 망해버렸으면 하는 섬뜩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어째서 지옥 같은 세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 것일까? 에 대해서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작가의 물음은 아득한 일상의 체념이 아니라 변화로 읽혔다. 우리를 멈추고 또 돌아서게 하면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가장 좋은 부분을 빛나게 하였다. 겨울밤에 켜지는 불빛처럼 춥고 배고픈 세상을 어둡게 하지 않았다. 나는 작가에게 답할 것이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선량한 관심으로 삶의 부드러움이 확장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말이다.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드러움은 다른 존재를 향한 깊은 감정적 관심이다. 부드러움은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유대감을 인식하게 하며 또 우리에게 존재하는 유사성과 동일성을 인식하게 한다.”


이 소설은 사랑을 뒤돌아보게 한다. 부드러운 사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네가 말한 그 도시가 무척이나 궁금한 나머지 나 또한 그 도시를 상상하며 한걸음씩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누구나 한 번쯤 답답하고 반복적인 이 도시를 탈출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으며, 이 도시에서 특별한 능력이 없이 톱니바퀴처럼 살고 있다는 무력감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네가 그 도시에 있으니 더욱 욕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도시는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여 기묘하고 낯설었다. 어쩐지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비로소 믿을 수 있는 도시였다. 시계탑에는 시곗바늘이 없고 도서관에는 책 대신 오래된 꿈들이 있다. 그 도시에서는 누구나 그림자가 없다. 더군다나 너는 분명 열여섯 살 소녀 모습 그대로 그 도시에 있었는데 정작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던 순간의 당혹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결코 간단치 않은 질문을 만나게 된다. 그림자를 포기하고 진짜 나를 만날 것인지, 진짜 나를 포기하고 그림자로 살아갈 것인지를 되묻게 된다. 우리는 살아서는 그림자를 데리고 있다가 죽어서는 영혼으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그림자가 존재 자체를 고민하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이별을 두려워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다른 무엇이 훨씬 더 중요하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정말로 우리는 흘러가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생각하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겠음을 고독하고 공포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 이유 없음이 다름 아닌 우리 존재의 한계 때문인지 모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네가 말한 도시에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놀라운 네가 말한 도시에서 우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산다. 기어이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들어왔으니 우리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불확실한 벽을 통과하고 마주하게 된 도시는 우리에게 진짜 나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림자를 데리고 사는 현실이 얼마나 허무할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허무는 마치 뿌리 없는 식물 같은 그림자였다. 허무로 가득 찬 현실에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림자를 벗어던져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다. 허무는 불확실한 사랑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네가 있는 그 도시에서 우리는 그림자가 없었다. 대신에 진짜 사랑이 환상적으로 그려졌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림자를 구원하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외면했던 그림자는 우리의 분신이었던 셈이다. 그림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순간, 뒤집어 말하면 그림자의 말이 더 진실처럼 들렸다. 도시에 있는 게 가짜고 도시 밖이 진짜라는 것이다. 네가 말한 불확실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말 그대로 불확실해졌다. 오직 확실한 것은 네가 말한 그 도시가 사실은 ‘놀이공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갑자기 네가 말한 도시에 대한 감정은 모호해졌다. 그림자를 믿어야 할지, 아니면 네가 말한 도시를 믿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작가의 말대로 과연 이쪽이 아닌 저쪽 세계에서 사는 게 옳은 일인지 의뭉스러웠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 또한 네가 말한 도시에서 ‘꿈 읽는 이’기를 그치고 그림자를 가진 인간이 되고 싶었다. 결국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죽은 것으로 여겨져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과는 정반대여서 네가 말한 도시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현실과 비현실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현실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환상도 필요한 법이다. 따라서 작가가 보여주는 비현실은 결코 비현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리 내부 속에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현실과 비현실이 흐르는 강물처럼 뒤섞이며 평범한 일상이 되는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나와 너, 그리고 고야스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감을 찾았다. 알고 보면 납득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에서 나는 그림자일 수도 있고 동시에 꿈 읽는 이라는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작가의 혜안을 빌리자면 ‘백 퍼센트 마음’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마음의 경계였다. 어쩌면 네가 말한 도시는 우리가 열망하는 순수가 아니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순수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에게도 불확실한 벽을 통과할 수 있는 특별한 희망이 생겼다. 백 퍼센트 마음으로 살아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광불급(不狂不及). 세상에는 지독하게 날카로운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미치고 않고서는 결코 미칠 수 없을 것 같은 질긴 운명의 그림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운명을 두고 구구절절 좋고 싫음을 따지는 것은 무척이나 따분합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혼자만의 미친 운명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에게는 바다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에게는 그림이 그랬습니다. 그런가하면 제임스 설터의 고독한 얼굴에 나오는 랜드에게 암벽이 진짜 삶이었습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암벽은 하강하는 거대한 강물이며 이런 불가항력에 맞서 암벽 등반하는 과정이 일종의 자신의 삶을 찾는 것입니다.

 

소설은 두 개의 일상이 교차합니다. 황량한 캘리포니아와 아름다운 몽블랑. 그는 캘리포니아의 따분한 일상에서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든지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완벽한 이기주의자로 살아갑니다. 세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 고독을 불태웁니다. 왜 산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등반 앞에서 그는 결코 유유부단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두 번째, 세 번째 동작을 할 수 없으며 결국에는 산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좋아하는 관점에서 그의 독특한 등반은 상상력이 섬뜩했습니다. 상상력은 단순히 산을 정복하려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 다음과 같은 그의 육성은 절박하고 생생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그의 정신적 고뇌는 사실상 바로 나의 고뇌이기도 했습니다. 내 인생을 걸고 끝없이 펼쳐질 도전 같았습니다. ,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195)

 

오로지 그는 산에 미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며 남성성이라는 운명 끈을 뚝뚝 잘라내더니 놀랍게도 남성성 존재에 가까운 산에 자일을 연결하고는 무모할 정도로 목숨을 바쳤습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그의 확고한 기쁨은 마치 햇빛을 받은 몽블랑 같았습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느끼면서 그의 불변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불변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아마도 고독한 얼굴일 것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항상 변하지만 완전히 완벽해 보이는 순간”(227)이 있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는 기묘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면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상의 파편적인 이야기들은 울분을 자극한다. 사랑, 광기, 죽음이 서로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감정은 몹시 서글프다. 이미 지나간 순수한 추억들, 그래서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시절에 대한 북받치는 눈물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백일몽처럼 이어졌다. 작가는 백일몽에다 죽음과 공포의 분자들을 흩어지게 하며 삶의 비밀을 혼란스럽게 한다. 한편으로 비극적 결말은 진실을 위태롭게 한다

 

사랑의 계절의 남자에게 사랑은 제목 그대로다. 첫사랑에 대한 불안한 내면이 사계의 선율을 타고 흐른다. 오로지 그녀만을 사랑하고픈 마음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사랑은 핏줄이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었으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랑은 사회적 통념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과 동시에 환상이 깨졌을 때 생겨나는 동정에서 눈물이 아니라 삶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사랑에 대한 변명이 아닌 마지막 사랑의 불꽃을 터뜨릴 만한 열정이 티끌만큼도 남아있지 않을 때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결코 단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은 허무함이 전부가 아니다. 저 멀리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는 눈물샘이 미칠 듯이 쏟아졌다. 뇌막염에 걸려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그들의 관계는 모호하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닌 불분명한 작은 기억밖에 없다. 문제는 작은 기억이더라도 뇌막염에 걸리면 큰 기억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되고 만다. 어쩌면 뇌막염에 걸린 여자의 병은 사랑의 온도가 41도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맴돌았다. 남들은 사랑 때문에 가슴이 타들어간다고 하는데 여자는 놀랍게도 뇌가 타들어갔다. 뇌막염 때문에 사랑이 변했다. 남자는 사랑을 고백하고 여자는 사랑을 묻는다. “더 이상 착란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도지금처럼 절 사랑하실 건가요?”

 

한편 사랑의 마지막 반전은 사랑의 가능성에 있다. 가능성을 자꾸만 돌아본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사랑의 균형이 깨지고 어느 순간 광기에 휩싸인 무서운 존재가 된다. 엘 솔리타리오에 나오는 보석세공사 카심에게 보석은 사치스러운 몸을 장식하는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보석에 투사된 아내의 욕망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욕망을 죽여 가며 사랑을 쓸쓸하게 마무리 한다. 목 잘린 닭에서 백치로 태어난 네 명의 아이들은 애정이 식어버린 부모에 대한 반발력으로 그들의 여동생을 마치 닭의 목을 잘라 죽이는 듯 하면서 잔인한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깃털 베게에서는 신혼의 꿈이 사라진 여자는 상실감이 증폭되면서 끝내는 괴물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 괴물은 정체가 불문명한 흡혈귀이다. 여자가 사랑을 소화하지 못할수록 인생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작가의 열여덟 편의 단편 소설집에는 사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이 복잡한 사슬로 이어져 있다. 죽음은 때때로 일사병, 가시철초망, 야구아이에서 보듯 동물의 몸을 통해서 전달된다. 이런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는 사뭇 다르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적인 죽음이라고 할까? 죽음의 애잔함이 없지 않으나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의 죽음은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에서 보듯 허풍에 가깝거나 내 손으로 만드는 지옥에서 보듯 뼛속까지 마약에 중독된다. 이러한 죽음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으면 약간은 불쾌하면서도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은 두렵게 느낀다. 비록 죽음 그 너머의 이야기에 대해 알 수 없어도 말이다.

 

돌이켜보면 사랑, 광기, 죽음의 경계선은 없다. 모두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존심이 걸린 문제"(245쪽)여서 그런지 모른다. 사랑이든 광기든 죽음이든 자존심 때문에 아프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통받는 도시들에서

비는 어떤 언어로 내리는가?

-파블로 네루다

 

때로는 너무 많은 분노와 절망으로 숨 막힐 때가 있어요. 가슴이 붉게 타오르면서 폭발할 지경이에요.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꼭 그렇게 해야만 말이 되는 세상은 모순덩어리 같아요. 너무나 살인적인 모순. 세상이 무너지는 작용으로 인해 우리 자신도 무너지는 암흑이에요.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아요. 이렇듯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소 냉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인내심을 가지라고 했어요. 인내심.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를 묵묵히 읽으면서 예전과는 다른 인내심을 알게 되었어요. 소설은 인도의 참혹한 현실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나 기억으로 끝나지 않고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어요. 작은 것들의 신출간 후 20년 만에 내놓은 지복의 성자큰 것들의 신으로 연결된 느낌이에요. 20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흐를 정도로 인도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현실은 비통했어요. 600페이지에서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어요. 고백하자면 증오와 폭력이 어떻게 끝날까, 라는 두려움보다는 언제 끝날까, 라는 조바심이 앞서다 보니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까마귀들이 마구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어요. 소름끼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당신들은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생명체라는 적개심이 투명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마음 속 불을 쉽게 꺼뜨릴 수 없었어요. 인도는 거대한 용광로였어요. 모두를 불안하게 하니까요. 인종, 종교, 성별에 스며든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제도를 바라보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는 게 오히려 부끄러워졌어요. 얼핏 우리가 인도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와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어요.

 

소설의 전반부는 인도의 카스트제도, 특히 불가촉천민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고 있어요. 어머니가 이제 막 태어난 아기(안줌)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6가지 반응하는 이야기로 시작해요. 그녀가 괴물이 아닌 이상 이것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가능했던 것은 그녀가 히즈라였기 때문이에요. 히즈라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을 가졌어요. 이제껏 살면서 제3의 성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 불편했던 것은 남자라서 그랬는지 몰라요. 모든 것이 남자 아니면 여자이었으니까요. “여자-남자, 남자-여자”(p25) 라는 말은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어요.

 

이러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작가의 말대로 언어 바깥에 있기 때문이에요. 언어에는 생각만 있는 게 아니라 영혼도 있어야 해요. 영혼이 없는 언어는 세상과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없어요.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말아요. 히즈라에 대한 박탈감, 삶을 불투명하게 하는 명쾌하지 못한 감정, 이 모든 것들이 언어 바깥에서 비극적이에요. 삶의 욕망으로 날아올랐으나 끝내 절망으로 추락하고 말아요.

 

하지만 그녀는 언어 바깥이라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어 해요. 여자이고 싶고, 엄마이고 싶다는 그녀의 당당함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울컥해져요. 단지 남자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모성의 본능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에요. 울컥함의 중심엔 자기 자신을 파멸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녀가 삼십년을 콰브가(히즈라들이 사는 공동체)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아이마저 자신이 키울 수 없다는 상실감을 깨달아요. 콰브가라는 속박의 베일이 벗겨지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지자 그녀는 떠나요.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그녀에게 최고의 안식처는 아이러니하게도 공동묘지이었어요. 공동묘지 또한 언어 바깥에 있으니까요.

 

작가는 우리가 모르는 언어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어요. 그들은 분명 사회적 편견의 피해자인데 동시에 행복 사냥꾼이라는 가해자라는 존재론적 역설을 문신처럼 지니고 있어요. 그들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늘 불완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게 잘못이 아니에요. 굳이 잘못을 변명할 까닭은 없어요. 변명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한 번쯤 위로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녀가 공동묘지에서 추락 받은 자들을 위로하는 것은 어떠한 대의명분이 있느냐, 없느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영혼이라는 것, 눈으로도 말할 수 없고 입으로도 말하지 못하는 오직 가슴으로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영혼. 사랑은 영혼으로 시작해서 영혼으로 끝나는 것이에요. 만약에 영혼이 없다면 하면 우리는 언어 바깥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어떠한 위로도 받을 수 없어요. 그래서 그녀의 영혼이 묘지를 다른 곳으로 만들어요. 바로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라는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p14)의 낙원이에요.

 

소설의 후반부는 인도의 종교적 갈등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보여주고 있어요. 야만적인 세계는 마치 삶은 계란”(p201) 같았어요.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여도 속으로는 폭력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노란색이 폭력적인 색깔이 아닐까, 라는 조금은 위험한 상상을 해봤어요. 적어도 노란색은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요. 이러한 폭력과 사랑의 경계에서 작가의 분신 같은 틸로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세 남자(무사, 나가, 비플랍)의 이야기가 과거를 기억하게 해요. 비록 과거이지만 현재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어요.

 

전쟁이나 폭력, 기타 사람에게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전염병이 강해요. 집단 감염을 일으켜요. 잿더미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계속 타다 적당한 바람이 불기만 하며 활활 타올라요. 그래서 무사가 카슈미르 남자들처럼 이슬람 전사가 된 불행한 운명을 동정하게 되요. 반대로 인도 정보국에서 근무하는 비플랍은 카슈미르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무사의 허영을 부정해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플랍을 부정하게 되는데 무사는 슬픈 사람이고 슬픈 사람을 보면서 슬퍼지는 감정은 우리 모두 문제이니까요. ,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게 아냐. 일으켜 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 건 너희들 자신이야.(p567)

 

틸로는 영웅적인 무사를 동정하면서도 끝내 사랑하지는 못해요. 그들은 연인인 듯 남매 같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요. 오히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요. 무사뿐만 아니라 나가도, 비플랍도 그래요. 운명을 뚝뚝 끊어내겠다는 의지 때문에 그녀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운명에 배신을 당하더라도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얼마든지 우리도 불로 만들어진 사랑”(p311)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불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불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역설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요. 비록 나가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려는 것에 불과했어요. 그녀는 결혼이라는 가짜 삶을 통해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는지 알게 되요. 자신의 마음과 맞지 않는 주소에 사는 피로감에서 벗어나 끝내는 아이(미스 제빈 2)와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해요. 산산조각이 난 이야기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지?

 

작가 말대로 지복의 성자는 세련되지 못한 이야기가 넘쳐나요. 종교, 계급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자들이 흘린 피가 언제 멈추는지 모르게 비처럼 내렸기 때문이에요. 어느 순간 비는 비가(悲歌)가 되어 죽음을 애도해요. 그러나 천벌을 받은 죽음의 땅에서도 사랑의 시가 노래되고 때로는 겨자 꽃이 피어요. 성자(聖者)의 아이러니는 슬픔이나 탄식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을.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작가의 말을 믿고 싶었어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우리의 일상이 평범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세련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