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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사계
손정수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8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전(古典)에 대해 간단하면서 명쾌한 정의를 찾아보면,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1923~1985)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 나오는 “고전이란 독자들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궁한 책”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고전이라고 하면 읽지 않아도 마치 읽은 것 같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전 딜레마에 빠진 나머지 고전에 나오는 지식을 암기하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까닭도 고전이라는 타이틀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제대로 완독할 수 없었습니다. 젊은 청년이 가난 때문에 노파를 죽였다는 내용에는 뭔가 특별한 메시기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죄와 벌』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청년이 왜 노인을 죽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궁금한 나머지 다시 읽어보니 로쟈(소설의 주인공)이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생각했으며, 자신 또한 나폴레옹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영웅심으로 로쟈는 노파의 살해를 정당화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이라는 운명에 복수하려고 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같은 맥락으로 읽었습니다. 83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운 좋게도 큰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상어의 공격을 받게 되고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어부가 고기를 잡는 내용은 놀랍지 않습니다. 평생을 어부로 살았으니까요. 문제는 운이 끝났다고 비난을 받은 어부가 끝까지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어쩌면 이 또한 어부의 운명이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운명이 아닌 다른 메시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사자 꿈’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실패는 하더라도 패배는 할 수는 없다는 묵직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변의 가치를 지닌 위대한 작품인 고전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손정수의 비평 에세이 『고전의 사계』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타이틀은 비평입니다. 고전을 읽고 쓰는 리뷰는 한 편의 에세이입니다. 하지만 리뷰는 감상에 가깝습니다. 반면에 비평은 고전에 대한 안목입니다. 고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없이는 비평할 수 없습니다. 특히 저자는 고전의 창작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삶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작가 자신이 곧 소설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문학작품의 주인공을 이해하기 위해 노스럽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를 참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평의 해부』를 살펴보면 역사비평에서 문학작품의 서사 양식를 신화, 로맨스, 상위모방, 하위모방, 아이러니로 구분합니다. 이에 따라 주인공은 신적 존재, 반인반신, 영웅, 보통사람, 인간이하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독창성인 부분은 원형 비평입니다. 원형 비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극의 구성원리를 말하는 데 ‘뮈토스(플롯)’을 시간적 원리로 놓고 ‘디아노이아(테마)’를 공간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뮈토스 시간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순환이 희극, 로맨스, 비극, 아이러니라는 서술 패턴과 대응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제목이 왜 고전의 사계(四季)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평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저자는 나름대로 사계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즉 희극의 뮈토스인 봄을 ‘소설의 열린 결말과 인류의 미래’로 해석합니다. 여기에 대한 작품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전개됩니다. 이러한 논리로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아이러니의 뮈토스로 겨울이며 ‘인간의 고뇌로 빚은 시대의 초상’으로 그려집니다. 반면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가을의 뮈토스로 가을이며 ‘삶의 미궁과 이야기의 미로’로 평가됩니다. 마지막으로 여름은 비극의 뮈토스이며 ‘현실의 압력을 뚫고 나오는 환상의 힘’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고전을 바라보는 시선은 각양각색입니다. 요즈음은 AI가 작품을 요약하고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논리적인 맥락과 숙고하는 과정이 없다고 하면 고전에 대한 무궁무궁한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손정수의 비평 에세이를 읽으면서 고전이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평이라는 정교하고 논리적인 사고의 결에 따라 고전에 대한 안목이 훨씬 풍부해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