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을 소멸시키지 않고 완성까지 다다르는 데는 조각나지 않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말씀만은 꼭 드리고 싶다. 조각나지 않는 시간이라 함은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연락도 알림도 없는, 방해받지 않는, 주의가 분산되지 않는, 분절없이 통으로 이루어진, 질이 높은, 감미로운 고요와 고독의 침잠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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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빨라지는 세상…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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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품격 - 판단의 품격을 높여주는 아홉 번의 생각 수업
투리 문테 지음, 이영래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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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에서 벗어나는 사고의 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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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품격 - 판단의 품격을 높여주는 아홉 번의 생각 수업
투리 문테 지음, 이영래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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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은 생각의 주인이 아니다.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카를 융, 『인간과 상징』

 

오랫동안 우리는 사람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에 관한 복잡한 의심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겉으로 보면 생각이라는 게 나의 자유의지 같은데, 실상은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가 외면하려고 해도 카를 융의 말처럼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투리 문테의 『사고의 품격』에는 흥미로운 질문이 많다. 가령, 고대 그리스 신들은 왜 예수가 되지 못했나? 같은 질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기후의 영향이라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기후가 온화한 지역에서는 가뭄, 지진 같은 기후적 위험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 신들에게는 인간을 닮은 그림자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반면에 기후의 영향이 심각한 지역에서는 ‘도덕적 초월신’이 최선의 가치를 갖는다.

 

기후와 상관관계를 통해 우리는 환경의 커다란 영향을 받으며 결과적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데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기후 변화 현상이 단순히 자연 환경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인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기후 변화의 경험에 따라 도덕적 차이가 결정될 수 있다. 기후가 온화한 지역의 사람들은 자유분방하며 진보적이며 좌파의 경향을 지닌다. 이와 달리 기후가 위험한 지역의 사람들은 권위적으로 보수적이며 우파에 가깝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기후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기후에 대하여 철학자 미리엄 쇤필드는 ‘신뢰할 수 없는 영향’이라고 말했다. 기후를 포함하여 성격, 지역, 감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인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변화시키고 결정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는 데 있어 이성(理性)의 힘이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앞으로도 이성의 중요성은 계속될 것이다. 이성은 우리를 합리적인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니얼 카너먼 같은 행동심리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전망이론(prospect theory)을 통해 우리가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우리의 행동이 완벽히 합리적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합리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만약에 우리가 전체적으로 비합리적이라고 하면 더 이상 추론할 필요가 없다.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의 비합리성은 제한적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인지편향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인지편향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고 있다. 오히려 인지편향이 이성적 사고를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혼자서 하는 추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지적 결함 때문에 일반적인 경험이나 상식에 어긋나고 만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추론은 아주 효과적이다.



그래서 이 책의 중요한 가치는 ‘논쟁’이다. 논쟁은 싸움이 아니다. 논쟁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사고의 방법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진리를 “대립하는 의견들을 조정하고 결합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정치적인 견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좌, 우가 충돌하는 장면을 아주 쉽게 본다. 하지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 정치뿐이겠는가? 양극화라는 사나운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양극화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불신과 혐오이며 일원론적 사고의 궁극적인 형태다.

 

우리가 양극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논쟁하면서 사고의 품격을 높여야 한다. 논쟁은 상대방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로 여긴다. 이유인즉 논쟁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이며 다원론적 사고다. 이로인해 우리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주의는 축구 경기가 아니다. 축구 경기는 승패가 갈리는 유한한 게임이지만 민주주의는 승패가 없는 무한 게임이다. 오직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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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고 적었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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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바쁘다는 핑계로 텃밭에 가지 못했다. 사실인즉 텃밭에 심었던 고추, 토마토 등등 작물들이 가을의 문턱에서 더 이상 수확물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창 수확물이 나올 때는 발걸음이 바빴는데 지금은 작물들의 앙상한 뼈대만이 사람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먹고 사는 일은 다름 아닌 삶의 우선순위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내 삶의 우선순위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반복하는 처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보다 밥벌이를 잘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마음 한구석에 또 다른 삶의 우선순위가 참을 수 없는 존재를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김애란의 『그랬다고 적었다』에는 삶의 우선순위를 나타내는 두 가지 단어가 나온다. 바로 ‘밥과 꿈’이다. 밥과 꿈은 삶에 있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밥에만 신경쓰다 보면 꿈을 잃어버리고 꿈만 꿈꾸면 밥을 먹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때로는 밥과 꿈, 둘 다를 잃을 수도 있다. 밥과 꿈의 적절한 균형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한 덧셈, 뻴셈으로 삶의 답을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통이면 밥과 꿈은 업(業)이 되는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언제나 밥과 꿈은 불투명하다. 밥만으로는 체면을 세울 수 없으며, 혹은 꿈만으로는 몸을 버티지 못하는 아픔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겪는 업을 작가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업을 견뎌내지 못할 때 작가는 “삶에 대한 큰 조망이자 지향, 성찰과 이해를 모두 품은 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내가 되지 않는 꿈’이라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내가 되는 꿈’을 자신의 몫으로 생각한다. 꿈을 위해서 나는 내가 되어야 하고, 기필코 내가 되어야만 한다. 내가 되는 일을 잘해야만 내가 될 수 있다는 논리. 문제는 내가 되는 꿈이 꿈을 초과할 때, 더 이상 버텨낼 수 없는 꿈이 될 때 오히려 내가 되는 꿈이 참 치졸하고 지긋지긋해진다. 내가 되는 꿈을 절반으로 줄인다고 해서 고통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내가 되어야 할까? 내가 되는 꿈은 단단할 정도지만 불안한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꿈을 가지고 살라고 하는데 결코 꿈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이 오히려 꿈을 쪼그라들게 한다. 내가 되는 꿈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이 있다고 계속해서 강요하는 목소리를 참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럴수록 네 의지와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울부짖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작가가 말하는 ‘내가 되지 못한 꿈’은 나를 외면하거나 소모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깨달은 느낌은 ‘무아(無我)’였다. 무아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사건”이다. 삶은 온통 꿈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꿈을 만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내가 나를 증명해야지 모색해야 한다. 꿈의 부조리에 체념했던 나와는 달리 작가는 “나의 농도를 조금씩 옅게” 만든다고 적었다. 가령, 자아실현이라는 일을 노동으로, 자아성취이라는 일은 삶의 기예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삶은 꿈으로 고단하다. 꿈의 방향으로 삶을 몰아세우는 일은 어떤 면에서 ‘비아(非我)’가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무아와 비아의 경계에서 삶을 덤벙덤벙, 혹은 대충대충 보내고 싶지 않은 나의 소소한 마음이 내가 되는 꿈인지 음미해본다. 조금 더 나를 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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