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아지트에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책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한 눈에 봐도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뜻한 눈빛에 믿음이 가고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살면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너무나 반가워 헤어지기가 아쉽습니다. 반면에 그런 사람은 걱정과 안타까움을 마구 쏟아내면서 후회하는 듯한 말투와 표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눈빛이 굳어지고 숨이 막혀 답답할 지경입니다.


사람을 아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람,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런 사람은 ‘일루미네이터 Illuminator’입니다.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분하게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 말을 건성 건성으로 하고 남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스스럼없이 늘어놓는 그런 사람은 ‘디미니셔Diminisher’입니다. 상대방에게 겉도는 말을 해서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합니다. 자꾸만 아픈 데를 콕 짚어낼 뿐이어서 오히려 상처로 얼룩집니다.


우리 삶이 좀 더 행복해지고 싶으면 서로가 일루미네이터가 되어야 합니다. 일루미네이터는 불빛이 되어 당신에게 가고, 당신의 마음을 열고 움직이게 합니다. 움직이면서 당신이 미처 몰랐던 자존감을 밝게 비춥니다. 비로소 자존감이 폭발하게 되면 당신은 스스로를 괜찮은 존재라고 느끼게 됩니다. 일루미네터는 당신을 빛나는 존재, 최고의 존재로 만듭니다. 일루미네이터는 당신을 먼저 생각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디미니셔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척 합니다.


일루미네이터는 당신을 변화시켜 주는 좋은 인연입니다. 좋은 인연에는 분명 삶의 거대한 힘이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이며 왜 사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당신의 암호를 풀어주는 조용하지만 카리스마(Charisma)가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라고 하면 비상한 힘과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매료시키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카리스마의 가치를 알고 있기에 우리는 늘 카리스마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보통 카리스마에 대한 기준으로 부와 명예를 가진 성공한 사람이라 믿고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생각해보면 아무나 성공할 수 없다는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공이라는 가치는 카리마스가 있어야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드 브룩스의『사람을 안다는 것』을 읽다가 ‘뒤집힌 카리스마’ 라는 유명한 단어를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소설가 E.M.포스터의 전기를 쓴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포스터와 대화를 나누면서 뒤집힌 카리스마에 사로잡히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내 말에 얼마나 집중하는 지 나 자신이 가장 정직하고 예리하며 최상의 인물이 되는 기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포스터가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로 인해 작가는 무척이나 행복해서 인생의 특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특별한 즐거움이 바로 뒤집힌 카리스마이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책방아지트에 와서 격려와 응원을 해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이웃들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카리스마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카리스마는 부와 명예가 아니라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처럼 부드럽습니다. 모난 데 없이 둥글게 사는 아름다운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리스마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밝은 표정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요즘에도 책방아지트에 있으면 마음에도 없는 쓴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책방으로 밥 먹고 살 수 있냐?’고 묻는 말을 듣게 되면 그걸 헤아리느라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애써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될 리 없습니다. 무기력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면 습관적으로 마음이 캄캄해져 어두운 얼굴을 하게 됩니다.


뒤집힌 카리스마를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요? 카리스마가 됩니다. 내가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뒤집힌 카리스마를 주기 위해서 입니다. 내가 선물해주고 싶은 카리스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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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24절기 중에 입춘(立春)이 첫 번째입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의 시작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입춘이 오면 집 앞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한자를 붙여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봄의 기운이 뭔지 몰랐으나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봄이 왔으니 좋은 일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소원을 바랐습니다. 봄의 힘으로 비로소 인생이라는 꽃이 필 것 같으니까요.


책방아지트의 문을 열고 난 후 두 번의 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입춘대길이라는 글자를 가게 건물 벽면에 붙이지 않았습니다. 일이 바쁘다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입춘대길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좋아하지만 생각해보니 오래된 믿음이라는 게 발목을 잡았습니다. 오래되었으니 그냥 지나쳐도 괜찮겠지, 라며 무감각해진 것이지요.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는 아무 탈이 없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보다는 입버릇처럼 손쉽게 하는 말을 자주 하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 아무 때나 할 수 있으니 신통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수리수리 마수리라는 주문을 외우는 것입니다. 수리수리 마수리라고 주문을 넣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놀라운 마법이 생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릅니다. 비록 내가 무엇을 원한다고 해서 100% 되지는 않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갈망이 있어 답답한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 어디선가 크게 부서지는 느낌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뒤늦게 알고 보니, 수리수리 마수리라는 주문은 틀렸습니다. 원래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입니다. 영화에서나 마술 공연을 보면 마술사들이 수리수리 마수리하며 주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덩달아 수리수리 마수리라는 즐거운 리듬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속아 넘어가고야 맙니다. 만약 마술사의 주문대로 우리가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면 마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마술사가 만든 주문이 아니라 불교경전천수경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천수경은 불자들이 독송(讀誦)으로 쓰는데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으로 시작합니다. 풀이하자면, 입으로 지은 업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참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정구업진언에 나오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는 마법사가 주문하는 대로 수리수리 마수리가 아니라 스님의 염불하는 소리였습니다. 이것을 세 번 외워야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데 아마도 마법사는 한 번 하는 것마저 많다고 생각했는지 수리수리 마수리로 줄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입춘대길, 수리수리 마수리 같은 말들을 쓰고 있을까요? 물론 세상에는 좋은 말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얼핏 마술사들이 사용하는 망토 같기도 합니다. 망토를 걷어내면 그 속에는 우리가 바라는 단단한 희망이 자리를 잡고 놓여 있습니다. 희망은 간절한 너머까지 가보는 일, 과거가 아닌 미래를 생각하는 일, 미래는 우리를 자유롭게 때로는 행복하게 하는 기적 같은 일. 그러고 보니 기적 같은 말입니다. 기적이 생겨날 때까지 기적을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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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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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봄을 여름과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가?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봄에는 어떤 감동이 피어날까요? 봄이 오고 있음을 나무는 먼저 알고 있습니다.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부풀어 올라 머지않아 꽃망울이 터질 것이고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우리가 봄에 느끼는 감동은 꽃의 향연입니다. 더구나 삶이 엉망진창일 때 꽃을 바라보는 것은 축복에 가깝습니다. 나무가 식물이라는 수동적인 자세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것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무 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배리 로페즈의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놀라운 에세이였습니다. 그의 탐구적인 시도는 우리 시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우리 시대 최고의 자연 작가라는 거대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55년간 80여 개 나라에 이릅니다. 그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간, 비인간들을 만났습니다. 비인간의 경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이 비인간이라는 발견, 이 모든 것이 삶이었습니다. 인간이나 비인간 모두 도구가 아니라 생명으로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과 닮지도 않고 비슷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비인간으로부터 지혜를 얻었습니다. 마치 하늘 위 구름 한 조각, 티끌 한 점 없이 청결한 공기, 덤불숲 회색곰 등등.


그중에서도 독특하게 장소에 대한 예찬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장소는 단순히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장소는 우리의 실존적 고독감을 해방시켜주는 곳입니다. 그가 오스트레일리아 노던 준주의 타나미 사막,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의 나미브 사막, 캐나다 북극권의 엘즈미어섬 등등 세계 끝까지 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과 장소에 대한 관계의 속성을 알려짐으로 교감하면서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느냐? 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작가라는 사회적 책임에 헌신하며 자연을 위해 선도적인 대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줄곧 자연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명을 개발하고자 하는 탐욕 때문에 자연을 스스럼없이 파괴해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당연한 권리고 자연의 당연한 희생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절박해졌습니다. 도저히 견디기만 해서는 절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상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악몽 같은 현실을 맞닥뜨린 지 오래입니다.


우리 시대의 미래는 좋은 삶의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환경으로 부터의 위협이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경각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자연의 신비로움을 되찾기 위해서는 실존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불신하는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저자의 생각은 공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화해왔습니다. 우리에게도 긍정적인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연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유인즉 너 자신이 아닌 세계에 인내심 있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184p)은 따뜻하고 평화로운 연민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연민은 자신에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의 지난 시절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의 고통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복수하고픈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 감당해야 할 또 다른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나머지 적당한 침묵으로 아픔을 버텨냈습니다. 침묵은 복수의 칼날이 자신을 겨누는 반복되는 슬픔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슬픔의 피해자라는 것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슬픔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화목하고자 했습니다. 좋든 싫든 슬픔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슬픔을 이해하면서 가해자의 악몽에 공감하는 큰 포용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조차 긍정하게 만드는 자기 존중이라는 빛을 어디에서 찾았는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무한히 용서하고 무안히 위로하는 빛이라는 중심축이 있었다.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어도비 벽돌집의 옅은 벽면과 출렁이는 수면까지,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 그 빛, 그리고 나를 하늘로, 나 자신의 바깥으로 끄집어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새들이 내 삶에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다.(32p)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천천히 읽으면서 생명에 대한 생각이 사뭇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연 앞에 경건했으며 죽음의 매커니즘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메타포를 깨달았습니다. 그의 기도(祈禱)하는 삶을 통해 너무 아름다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가 다 생명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사막이며 숲이며 강이며 북극이 다 생명이었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봄, 여름이 다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꿀벌이 사라지는 기후변화의 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꿀벌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꿀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요? 라는 나침반 같은 질문을 하다 보면 봄과 여름이라는 생명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심정으로 봄을 여름과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삶을 구원하는 배리 로페즈의 섬세하고 묵묵한 시선을 회고하면서 적어도 세상의 불공정한 경쟁에 끌려다니는 것을 반대하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꿀벌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꿀벌의 날개에는 아주 오래된 지혜가 살아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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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0년 가까이 다니던 플라스틱 사출 공장을 후회 없이 그만두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내 몸이 플라스틱처럼 딱딱해지더군요. 더 이상 퇴화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버텨보라고 입을 모아 말해주었습니다. 조금만 버티면 10년이 되는데 아깝지 않냐고 말입니다. 10년을 빈틈없이 일하면 회사에서 주는 감사패와 상당한 공로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생산직을 할 정도로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제조 기계’로 취급되는 불치병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이제 유배되었던 공장에서 벗어나고 보니 의도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월든』을 읽다가 의도적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소로우는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 숲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을 때 헛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만족할 수 있으니까요. 소로우을 보면서 살아있는 동안 한 번쯤은 의도적으로 살고 싶다는 게 결코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헛된 삶인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헛된 삶을 느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헛된 삶의 멍에를 벗어던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남들처럼 성공하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성공이라는 무게감에 눌려 정신이 이상하게 변형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은 성공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합니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게 사소해 보여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10년 후에도 똑같은 사람이라면 절망감과 무력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10년을 살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슬퍼집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책방을 차렸습니다. 젊어서 의무감으로 누리지 못한 자유를 이제라도 되찾고 싶었습니다.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밥벌이를 생각한다면 어디 가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바보 같은 짓을 부러워할지언정 마냥 좋아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지? 두려움과 떨림이 엎치락뒤치락했습니다. 마침내 소란이 한바탕 지나가고 나서야 기어코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소로우의 말을 빌려보면 나의 봄을 여름과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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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3-31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방을 차리셨군요. 축하드려요. 좋은 책들이 가득한, 그 책을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공간이길 바라요.

오우아 2024-03-31 16:59   좋아요 0 | URL
앞으로 10년, 내 인생을 한 번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자목련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는 책방을 하면서 나름대로 책 한권을 준비중입니다^^
 
남자의 후반생 - 새로운 도약을 위한 인생 화두
정진홍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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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는 매년 6월 16일 블룸스데이(Blooms day)라는 축제가 열립니다. 블롬은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사람들이 제임스 조이스를 기념하고자 소설 속 주인공처럼 더블린 시내를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행적을 따라 하거나『율리시스』를 낭독합니다.


그런데『율리시스』가 어떤 책인가요? 영문학사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난해한 소설입니다. 오죽했으면 ‘싫은 사람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라는 악명 높은 소리까지 들었을까요?『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하루 동안 아일랜드 더블린을 무대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단 하루, 좀 더 시간을 확인해보면 6월 16일 오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2시 반까지 되는 19시간여 동안 일어난 소설입니다. 한편, 6월 16일은 제임스 조이스가 평생의 반려자인 노라를 만난 첫날을 기억하는 영원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제임스 조이스를 보면서 미스터리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단 하루,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이 곧『율리시스』입니다. 단 하루 만에 방대한 분량의 『율리시스』를 쓰는 일도 놀라운데 위대한 작품이라는 영광은 더욱 놀라운 사실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떠오릅니다.


이와는 다르게 정진홍의『남자의 후반생』은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율리시스』는 하루 만에 쓴 이야기이지만 하루 만에 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반면에『남자의 후반생』은 작가가 40대 시절에 걸쳐 쓴 이야기이지만 하루 만에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인생 화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 화두라는 주제는 감당하기가 어렵고 무겁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시공을 초월한 다양한 사례와 경험들은 쉽고 흥미롭습니다. 그럼에도 죽비소리가 가득 넘쳐납니다. 놀랍게도 죽비소리를 들을 때마다 ‘후반생(後半生)’을 생생하게 깨달았습니다.


무릇 삶을 전반생(前半生)과 후반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생은 정해진 운명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반생은 “더는 이따위로 살지 않겠다.”라고 각성하며 흔들립니다. 문제는 사람마다 인생의 후반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생이 축구 경기라고 한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반전과 후반전이 명확합니다.


이런 까닭에 인생의 딜레마는 후반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삶을 선택하는 결연한 의지라고 하더라도 선택에 따른 수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 후반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끝까지 갈 수 있을까요? 어느 것 하나 불확실한 상황에서 한 인간이 감당해야 할 후반생을 패배하지 않고 갈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우선적으로 ‘마음의 굳은살’을 떼어내야 합니다. 보통 굳은살이라고 하면 긍정적으로 여깁니다. 굳은살이 생기는 과정을 보면 반복적인 고통을 참아 내거나 노력을 한 결과물이라 그렇습니다. 이로 인해 굳은살은 마음의 창이 아니라 든든한 방패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굳은살의 선한 영향력은 안타깝게도 체념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굳은살이 박일수록 우리의 마음은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무감각해집니다.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고 쉽게 지치고 맙니다.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어왔던 삶의 가치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저자는 마음의 굳은살이 일으키는 부작용을 경계하며 인생의 후반생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련(鍛鍊)하라고 합니다. 단련이라는 한자를 풀이해보면 그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단(鍛)은 일천 번의 일을, 연(鍊)은 일만 번의 일을 말합니다. 마음을 단련해야 비로소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한 것처럼 녹슨 ‘쇠붙이’가 아니라 날선 ‘면도날’로 살아가게 됩니다.


바야흐로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너무나 절실한 세상입니다. 정진홍의『인생의 후반생』을 읽어보면 송곳 같은 질문이 많습니다. 하나같이 절문(切問)이기 때문입니다. 절문 즉, 절실한 질문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후반생의 절문은 정신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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