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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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 되어야 한다.

-소로우, 시민불복종

 

 

민주주의(民主主義)는 동력(動力)이다. 다른 정치체제와 달리 강렬한 이데올로기나 독재라는 부정적인 요소가 없다. 작가 E. B. 화이트(E. B. White)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주의는 ‘don’t shove(밀지 마세요)’에서 ‘don’t’에 해당하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가 역주행하고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12.3 비상계엄이 발생했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202116일 미국에서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이 아닐까? 미국의 민주주의가 결코 유용하게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선진국이다. 이런 나라에서도 민주주의를 방임하게 되면 엄청난 폭력성을 발휘하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간과했다.


민주주의는 왜 존재하고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빠져 있을 무렵에 스티븐 레브츠키·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읽었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가 궁금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한다. 동시에 다수의 지배에 대하여 방어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문제는 소수를 보호하는 정책이 오히려 소수의 독재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대략적으로 알면서도 그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단순히 권력의 비대함이거나 지역감정을 상투적으로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는 헌법적 강경 태도때문에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느냐에 대해서 회의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헌법의 허점을 이용하기, 과도하거나 부당한 법의 이용, 선택적 집행, 법률전쟁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말과 장치들의 합법적인 형태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


아담 쉐보르키의 말대로 민주주의는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현실은 민주주의의 기초 상식과는 달리 맹목적이다. 기득권은 선거의 패배를 부정하면서 민주주의를 방패 삼아 무력을 휘두르고 있다.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오염시키며 혐오와 갈등으로 정치적 정당성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촛불과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 나오는 충직한 민주주의자이다. 헌법과 법률을 지키지 않은 극단적인 정치 세력에 맞서며 다시금 민주주의가 최후의 보루라는 것을 강력하게 믿는다.


이번 12.3 비상계엄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국가적 중대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로 대립하며 각자도생에 빠져든 사회는 획일적이며 극단적이다. 국가비상사태를 경험하면서 민주주의가 헌법만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은 더욱 절실해졌다. 헌법을 뒷받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합리적이며 민주적 여론을 형성하면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더 강화하기 위해 대화하고 행동해야 한다.


일찍이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이분법적 사유를 말하면서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질서가 존재한다고 했다. 혼돈의 시대에 국가가 무엇이며 극단주의 폐단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성찰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의 정치 공동체는 극단적 소수자만을 위해서는 안 된다. 정치의 반복되는 무능력, 무책임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극단주의의 페르소나를 벗고 우리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동력으로 인간의 참된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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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 상식과 통념을 부수는 60개의 역설들
조지 G. 슈피로 지음, 이혜경 옮김 / 현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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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개의 역설! 보이는 것을 의심하는 새로운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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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젊어야 한다는 것! 작가나 작품의 생물학적 연령을 뜻하지 않는다. 젊음은 곧 살아있음 그 자체이며 그것의 생명력은 텍스트 스스로가 그 에너지를 못 이겨 급기야 독자의 삶을 찢고 그 안으로 들어서는 국면을 야기한다. 세계의 현상 유지를 중지시키고 변혁의 사태를 일으키는 이 특이점을 문학적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소설의 특이점은 다름 아닌 동시대성솨 그것이 맺는 관계의 자장 안에서 관측된다. 요컨대 문학의 젊음이란 한 작품이 자신의 시대에 접근하는 자세와 그에 관한 해석의 내용으로 파악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정전들, 고전문학이라 불리는 것은 역사적 시간 속에서 내내 청춘을 누릴 수 있다.-전승민/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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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 상식과 통념을 부수는 60개의 역설들
조지 G. 슈피로 지음, 이혜경 옮김 / 현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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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제논의 역설 중에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거북이는 아킬레스보다 10m 앞에서 달린다. 이럴 때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제논의 논리에 따르면 이 경주의 승자는 거북이다. 아킬레스가 10m를 달리는 동안 거북이는 그만큼 1m를 이동하기 때문이다. 아킬레스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는 무한 분열에 있다. 제논은 거리와 시간을 무한히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킬레스는 무한히 많은 지점을 계속해서 통과하게 된다. 하지만 수학적으로 풀어보면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급수의 수렴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급수의 수렴을 통해 무한히 작은 시간 간격들을 합하면 유한한 시간에 수렴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지 G. 슈피로의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에는 상식과 통념을 부수는 60개의 역설들이 나온다. 우리가 역설에 직면하는 순간은 어떤 진술이 타당한 추론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진술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이다. 역설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모순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해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이 바로 역설의 매력인지 모른다. 역설은 일상생활을 의심하면서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통찰력이다. 상식은 세상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역설은 상식을 의심하면서 눈앞의 사실적 현상에 대해 반대하는 질문을 던진다. 덕분에 삶을 폭넓게 이해하는 사유가 열린다.


저자에 따르면 역설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 참 역설이다. 어떤 전제가 결함이 있거나 추론이 부정확하지만 놀랍게도 결론은 옳은 경우다. , 거짓 역설이다. 말 그대로 추론이나 결과 모두 거짓인 경우다. 마지막으로 이율배반 역설이다. 추론하는 과정이 모두 올바른데 결론이 논리에 맞지 않는 경우다. 여기에는 거짓말쟁이 역설이 있다. 예를 들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는 경우다. 이 문장이 참이라고 하면 문장의 내용은 거짓이 되므로 모순이 되고 만다. 반대로 이 문장이 거짓이라고 하면 문장의 내용은 참이 되므로 이것 또한 모순이다. 이렇듯 역설들은 삶의 사전적인 의미와 상반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가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진실과 거짓을 나누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역설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무지함에 대해 스스로 낮추는 겸손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한다. 먼저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내용이 거짓말 같아도 진실처럼 여겨진다. 정말로 자신의 무지를 모른다는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이 되고 만다. 만약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면 소크라테스는 현명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오래전부터 친숙한 지식에 도전하는 다양한 역설을 깨닫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역설이란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이다. 우리가 아는 지식이 언제나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역설이 좀 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비판의 방식이 되기도 한다. 역설은 단순히 지식의 반대어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의 의심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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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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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비싸다.

-유발 하라리

 

정치(政治)에 대해 무관심하며 살았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정치는 나에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정치 때문에 삶이 피곤한 나날의 연속이다. 더군다나 날씨가 갈수록 이상해지는 만큼이나 살림살이가 나쁜 쪽으로 기울다 보니 하루를 버티는 게 힘이 든다. 적어도 정치는 권력(權力)이 아니라 생활력(生活力)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2024123일 계엄은 큰 문제다. 처음에는 픽션이지 싶었는데 사실은 경악할만한 현실이었다. 계엄이라는 야만적인 시스템은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지만 정작 진짜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그나마 남아있던 생활력마저 무기력해졌다. 한편으로는 생활력의 한계를 넘어 분노했다. 어쩌다 민주주의에 맞서 총을 들고 무력으로 통제하려고 했는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계엄이라는 비합리적이며 극단적인 현실이 도래할 가능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온몸으로 불의(不義)에 맞섰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이 있다. 결과적으로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계엄은 대통령의 파면으로 끝났다.


김영민의 한국이란 무엇인가는 비싼 책이다. 책값이 비싸다고 하면 다른 책보다 높아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의 정가는 18,000원이다. 이 정도 가격이면 한국 사회에서 보통 수준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비싼 이유는 바로 진실을 파헤치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발 하라리 말대로 진실은 비싸다는 견해와 다르지 않다. 그가 말하는 진실은 제목에 나와 있듯 한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기존의 방식대로 한국이라는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공허에 불과하다.


계엄으로 돌아가면, 저자는 영화 <서울의 봄>을 바탕으로 쿠데타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한다. 쿠데타는 노상방뇨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단순히 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시녀로 부린다. 만약에 이 정도로 쿠데타를 해석하는 것은 새삼 주목받을 리 없다. 쿠데타의 모든 과정의 정당함을 법이 아닌 자기 자신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려면 자기 자신을 더욱 미화(美化)하는 것으로 정당성을 완성해야 한다.


이러한 시선으로 저자는 12.12 쿠데타를 못생긴 쿠데타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못생긴 의미는 외모의 이미지보다는 쿠데타가 욕망하는 열악하고 조악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계엄을 포고하면서 헌법을 훼손하는 이미지가 좋을 리 없다. 뭔가 부도덕해야 한다. 그 대안으로 정의 사회라는 도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덕은 헌법이 담보하는 것이 아닌가? 이 모두가 못생긴 쿠데타의 결과다. 비록 쿠데타가 실패하고 민주화가 승리했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과제는 민주화 역시 못생긴 민주화라는 불편한 사실을 좀 더 깊이 헤아려보려는 자세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다방면으로 넘나들면서 직면한 문제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물음을 하고 있다. 가령, 오늘날 한국은 결혼에 소극적이라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두고 결혼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대안적 감수성이 되지 못한다. 지금과 같은 직장, 소득, 집을 확보하는 일마저 갈수록 어려운 현실에서 결혼하는 게 불가능하다. 모름지기 설득력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결혼은 자연스러운 인생사업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을 서비스로 접근해야 한다. 서비스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욕망, 기회, 능력이라는 삼요소의 균형이 필요하다. 결혼에 대한 욕망이 없는데 속절없이 제공되는 여러 가지 부가서비스는 오히려 채무감이 되고 말 것이다. 얼마든지 결혼지옥이 될 수 있다.


일찍이 니체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라고 말했다. 알다시피, 한국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여러 가지 문제로 삶이 피곤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도 없다. 더구나 내가 한국에서 태어난 것은 내 욕망이 아니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압도적이다. 그래서 늘 고통은 어려운 숙제와 같았다. 이처럼 숙제의 본질을 그대로 두고 숙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가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듯이, 이런 생각은 게으르다.


이제 우리는 고통을 극복하는 존재여야 한다. 고통을 극복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일차척으로는 개인의 문제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인 문제이다. 한국 사회가 고통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러한 비상사태 또한 픽션이 아니라 심각한 현실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내놓은 대책은 의미 있는 고통이다. 의미 있는 고통은 자신의 현재를 극복하는 자세다. 어떤 점에서 고통은 한국 사회가 대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앞서 말했듯 의미 있는 고통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고통천국이다. 만약에 고통이 무의미하다면 우리가 도저히 감내하기가 어려 고통 그 자체이다. 달리 말하면 고통지옥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면 고통지옥은 자기 심장에 박힌 치명적인 칼이다.


생각해보면, 고통은 어떤 날 어느 순간 발생하고야 만다. 그러니 고통은 우리 삶의 영원한 서사다. 의미 있는 고통을 몰랐으면 치명적인 칼을 몰랐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의미 있는 고통을 몰랐다면 고통의 가치를 몰랐을 것이다. 만약에 고통이 무의미하다면 고통의 진실을 외면했을 것이다. 비로소 고통의 진실을 되돌아보니 왜 그토록 고통이 값비싸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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