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령의 시간 ㅣ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평점 :
상전벽해(桑田碧海). 풀이하면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고사성어이다. 보통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어떻게든 변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문화적 충격을 보면서 사람은 어떻게 될까? 라는 것이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변화의 속도를 거창하게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은 어떤 한 시대를 지배하는 우리의 인식이나 사고를 뜻한다. 패러다임에 따라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변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목숨을 바친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내일을 상상하며 메시아적 희망을 꿈꾸기 때문이다.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은 60세 김이섭이 자서전을 쓰는 내용이다. 자서전에는 해방 30주년 전후의 혼란스러운 현대사가 격동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하여 한국전쟁, 박정희 독재 정권 등의 사건들이 배경으로 잡혀 있다.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역사적 사건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라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의 자서전 역사적 사건을 고발하는 울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신 역사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격동의 물결에서 “김일성은 싫지만 사회주의자가 지금도 옳다”고 믿는 지식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수배자가 되었고 평생을 ‘빨갱이’라는 주홍글자를 달며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살 수 없었다. 권력자들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이념과 사상으로 민족을 와해시키고 분단의 상처를 치료하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반공(反共), 사회안전법이라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강요했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은 원고지 ‘스물 두 장’에서 미완성으로 멈추고 말았다. 이때가 그의 딸 지형의 나이 15세이었다. 그로부터 40년 지나도록 그녀의 묵직한 슬픔은 흉터로 남았다. 이러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녀는 그를 애도하였고, 퍼즐 조각마냥 흩어진 그의 삶을 하나하나 완성하였다. 그의 자서전의 제목대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유령의 시간’이었다. 이중삼중으로 고립된 삶, 이 땅 어디에서도 그는 존재하지 못했으니까.
작가는 무엇 때문에 지금에 와서 김이섭의 비극적인 삶을 복원하는 것일까? 단순히 ‘국가와 사회의 역사가 어떻게 개인의 역사를 망가뜨렸는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서둘러 달려온 한국 현대사가 흘린 남겨진 진실’에 눈을 뜨면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진실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한 대가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가혹했다. 소설을 읽어보면 그의 불행한 가족사에 대한 책임이 오로지 그 자신에게 있는 듯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얼마나 다행이지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가족은 물론 친족까지 위험에 빠뜨렸다. 그들은 신원조회라는 바늘구멍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원망 때문에 가혹한 운명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이중적인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국가는 그가 그토록 믿었던 사회주의를 개인의 문제로 외면해버렸다. 그러면 국가는 책임져야 할 부분에서 은근쓸쩍 물러나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장인이 말한 것처럼 어떤 사상도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다. 절대적 믿음은 적대적 관계로 파생된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게 더 인간적인 제도냐의 문제인지 모른다.
정말로 인간적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나는 인간적이라는 것을 조금 오래 생각해 보았다. 그가 공평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믿었던 이념도 인간적이었고, 이념 때문에 월북했지만 “이쪽에서 내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더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 때문에 다시 가족이 있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인간적이었다. 그의 삶을 바라보고 있으면 참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얼굴에는 삶에 대한 비극과 찬가가 혼재되어 있었다. 결국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욕망이 철저히 통제된 세계와 욕망이 지나치게 과잉된 세계”의 경계선에서 희망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유령의 시간』은 역사적 소용돌이를 겪은 사람들의 상처를 주목하고 있다. 그들의 상처는 한 번 지나고 나면 사그라지는 별거 아니라는 냉소적인 말과 달랐다. 오히려 아주 오래도록 가슴속에 새겨져 있어 완전히 상처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망상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최선은 아니었다. 유령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존재와 같았다. 이러한 유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기꺼이 과거를 소환하고 대화하였다. 작가에게 과거는 고통인 동시에 부적(符籍) 같았다.
소설 속에서 그는 유령 같았던 삶을 회고하면서 딸에게 “뭐든지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돼. 공부를 해도 마음을 다 바쳐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의무감만 남고 사는 게 재미없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를 ‘몽상가’, ‘이상주의자’라고 부르며 실패한 삶을 증명하였다. 마치 물 밖에 나온 새우의 모습처럼 투항의 자세처럼 보였다. 만약 그가 의무감으로 자신의 신념대로 살았다면 영원히 비극 속에서 외롭게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후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 그는 세상을 절망했으나 삶을 살았다, 실패한 인간이 아니라 뜨거운 인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