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것의 역사 - 개역판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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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점  ★★☆  B-



구판 서평

[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

2014421일 작성

평점: 3점(★★★)

https://blog.aladin.co.kr/haesung/6984611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열두 번째 선정 도서

모임 날짜: 2024119일 토요일




기하학을 공부하던 왕은 문제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문제를 풀지 못한 왕은 손에 쥔 펜을 내려놓는다. 기하학에 패배한 왕은 유클리드(Euclid)에게 투정 섞인 질문을 한다.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적을 만나서 싸워봤지만, 기하학만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은 처음이오. 나는 이 펜을 칼처럼 휘두르면서 기하학을 완벽히 제압하고 싶소선생, 기하학을 쉽게 배우는 방법이 없소?” 유클리드는 성미가 급한 왕을 다독인다. 폐하, 기하학을 공부하면 서두르지 마십시오. 기하학에 폐하를 위한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실제로 유클리드가 그런 말을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유클리드가 왕에게 충언하는 일화는 누군가가 지은 것일 수 있다. 그래도 기하학에 왕도(王道)가 없다라는 격언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생각날 때마다 새겨들어야 한. 기하학 대신에 다른 학문을 바꾸면서 쓸 수 있다. 과학을 쉽게 공부하는 방법, 즉 순조롭게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과학책이나 교과서를 보면서 과학을 공부하는 일은 쉽지 않다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용어가 아주 많다. 어떤 용어는 외워야 한다. 문장으로 묘사된 과학 이론이나 자연 현상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이해하려고 시도하면 생각이 꼬여버린다그래서 읽기 쉬운 과학책을 고르는 것도 어렵다아니다, 어쩌면 쉬운 과학책은 현실에 나올 수 없는 책일 수도 있다그래도 과학을 알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 한다. 모르는 내용을 만나면 다른 책을 찾아서 알아보거나 과학에 박식한 사람을 만나서 질문해야 한다.


여러 군데를 하루 만에 거쳐야 하는 여행은 상당히 힘들다. 과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한 권만 읽으면서 여러 분야로 나누어진 과학을 한꺼번에 공부하는 일은 힘들다. 과학 공부는 장기간 여행이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멈출 수 없는 여행이다빌 브라이슨(Bill Bryson)은 종착지가 없는 과학 길을 여행한 작가다. 그는 3년 동안 여러 갈래로 쭉쭉 뻗은 과학의 길을 혼자서 묵묵히 걸어갔다. 그에게 길을 지나는 방법을 알려준 지도가 책이다. 빌은 도중에 막힌 길을 만나면 다른 방향으로 우회해서 전문가를 만나러 갔다. 그는 과학을 공부하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빌의 과학 지도는 과학의 성과가 너무 어렵지 않게 나와 있으며 과학 비전공자도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그 책은 바로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의 과학 지도는 겸손하다. 그의 지도에 그려진 과학은 완전무결한 학문이 아니다. 과학자들도 그릇된 결론이 옳다고 착각한다결론의 문제점을 확인한 동료 과학자들은 가설을 다시 세우고, 정확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 새로운 실험을 진행한다아인슈타인(Einstein)은 우주가 변화 없이 고정된 상태로 유지된다고 믿었다. 그는 점점 팽창하는 우주를 주장하는 허블(Edwin Hubble)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정적인 우주를 이론으로 설명하기 위해 우주상수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하지만 허블과 르메르트의 우주론을 뒷받침하는 관측 자료들이 나오자 아인슈타인은 우주상수를 주장한 일을 본인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로 여겼다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우주상수는 다시 주목받았다. 우주상수를 이용해 우주를 가속 팽창하게 만드는 수수께끼 물질인 암흑 에너지(dark energy, 진공 에너지, 제5원)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영원하다고 믿지 않는다그리고 자신의 견해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다른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거부하지 않는다. 이미 검증된 이론과 이에 상반되는 가설 중 어느 것이 타당한지 실험을 되풀이한다주가 점점 커지듯이 과학책도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커진다. 새롭게 발견된 지식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자연현상을 설명하기에 부족한 오래된 지식은 신선한 지식을 만나는 순간 빛을 잃는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2003년에 태어난 책이다. 2020년에 책은 두 번째 팽창을 겪으면서 개역판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과학책은 더 커져야 한다. 번역자와 편집자는 요즘 과학자들이 언급하지 않는 오래된 지식이 있는지 다시 확인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새로 발견된 과학의 성과를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2장에 명왕성의 특징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38~39). 이 책이 처음 나온 2003년의 명왕성은 태양계 행성이었다저자는 명왕성은 행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천문학자들도 있다고 했다16장에도 명왕성이 다시 언급되는데, 저자는 행성 자체가 매우 작은 명왕성(283쪽)이라고 썼다. 2006824일 명왕성은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당하면서 왜행성이 되었다왜행성은 행성도, 소행성도 아닌 행성과 소행성의 중간급에 해당하는 천체이다.







* 40쪽, 역주


 뉴호라이즌스 호는 20157월에 명왕성에 도착하여 다양한 관측 작업을 수행했고, 20191월에는 카이퍼벨트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번역자는 NASA가 쏘아 올린 명왕성 탐사선 뉴호라이즌스(New Horizons)20191월에 카이퍼벨트(Kuiper Belt, 수많은 소행성이 모여 있는 영역)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했다(40, 역주). 책 속에 박제된 뉴호라이즌스의 시간은 2020년에 멈춰져 있다. 지금도 뉴호라이즌스는 우주를 방랑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탐사선들이 활동한 이후부터 뉴호라이즌스의 위상은 예전만큼 못 하다.

 

2023NASA는 뉴호라이즌스 프로젝트 관련 연구비를 축소하는 동시에 뉴호라이즌스가 태양물리학 연구를 위한 탐사선으로 이용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뉴호라이즌스는 2019년에 카이퍼 벨트에 있는 아르고트(Arrokoth)라는 천체를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NASA는 뉴호라이즌스가 카이퍼 벨트 전체를 탐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했으며 탐사선의 남은 수명을 생각하면 카이퍼 벨트 탐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뉴호라이즌스 프로젝트팀 소속 학자들은 NASA의 탐사 계획 수정에 반발했다. 보이저 탐사선들이 태양물리학 연구 탐사를 이미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물리학 연구자들은 뉴호라이즌스 프로젝트 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뉴호라이즌스는 태양물리학 연구와 카이퍼 벨트 탐사를 병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허블 우주 망원경(42)은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자신이 맡은 임무를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James Webb Space Telescope)에 물려주었다. 제임스 웹은 20211225일에 발사된 차세대 우주 망원경이다. 허블 우주 망원경의 관측 범위에서 벗어난, 아주 먼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구아노돈은 티라노사우루스만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공룡은 아니지만, 이 공룡 화석이 발견된 사건이 기점이 되어 고생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다. 이구아노돈은 오랫동안 고생물학자와 화석 발굴자들을 괴롭혔다. 화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구아노돈이 두 발로 걸어 다녔는지, 아니면 네 발로 걸어 다녔는지 논쟁을 벌였다.



* 107쪽





 이구아노돈의 엄지발가락은 코에 스파이크처럼 붙어 있고, 네 개의 튼튼한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은 당당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너무 크게 자라버린 개처럼 보이기도 한다(실제로 이구아노돈은 네 다리로 서지 않는 양족 동물이다).

 


1878년 이구아노돈 화석을 발굴한 영국의 고생물학자 기드온 맨텔(Gideon Mantell)은 이구아노돈의 엄지발가락 발톱을 뿔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복원한 이구아노돈은 코에 뿔이 달려 있고네 발로 다닌 거대한 도마뱀 형태다. 후속 연구를 거쳐 현재 수정된 이구아노돈은 걸을 땐 사족보행을 하고, 두 다리로 서서 뛸 수 있는 공룡으로 묘사된다.[1]







저자는 디메트로돈이라는 고생물을 단궁형(單弓型)의 파충류라고 소개했다(385). 고생물학 분류 방식에 따르면 디메트로돈은 공룡이 아닌 단궁류과거 고생물학자들은 단궁류 고생물의 생김새가 파충류와 닮았다는 이유로 단궁형 파충류 또는 파충류형 단궁류(mammal-like reptiles)로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단궁류 고생물과 파충류를 구분 지어서 바라보기 때문에 단궁류는 파충류가 아니다.[주2]

 






마리아나해구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다. 2003년의 저자는 마리아나해구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는 잠수정이 없다고 썼다(314). 2012년에 미국의 영화감독 제임스 캐머런(James Cameron)1인 잠수정 딥시 챌린저호(Deepsea Challenger)에 탑승하여 마리아나해구의 가장 깊은 구역인 챌린저 해연을 탐사했다. 2019년에 미국의 퇴역 해군 장교 빅터 베스코보(Victor Vescovo)10.927까지 내려가면서 역사상 가장 깊은 심해 잠수 기록을 세웠다.[주3]







407쪽에 해파리메두사(Medusa)가 함께 언급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두사는 해파리다. 저자와 역자는 해파리와 메두사를 서로 다른 종()으로 착각했다해파리가 성장하는 과정은 종류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해서 별도의 명칭이 있다. 유성생식만 하는 해파리 유생은 가늘고 긴 타원체로 되어 있는 형태로, 플라눌라(planula)라고 한다. 어린 해파리는 플랑크톤에 가까운 형태가 되는데, 유아기에 해당하는 개체의 명칭은 에피라(ephyra).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할 수 있는 대부분 해파리 유생은 바위에 달라붙어서 서식하는 폴립(polyp) 형이다. 폴립형 해파리는 에피라를 거쳐서 성체인 메두사가 된다.


저자도 사람인지라 실수할 때가 있다다음 인용문은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저자가 잘못 쓴 것인지, 번역자가 오역한 것인지 확인이 어렵다.

 

 

* 532~533




 

 1910년대에는 끊임없이 사냥을 했던 탓에, 잡혀서 살던 새 몇 마리가 남았을 뿐이었다. 잉카라는 이름의 마지막 새는 1918년에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죽었다(그로부터 4년 후에는 같은 동물원에서 마지막 나그네 비둘기가 죽었다).

 

 

마샤(Martha)’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지막 나그네비둘기(여행비둘기)191491에 죽었다.[주4] 따라서 4년 후에 마지막 나그네 비둘기가 죽었다라는 내용은 오류다. ‘4년 전에라고 쓰는 게 맞다.


번역자는 엘크(Elk)와 말코손바닥사슴(Moose)큰 사슴으로 번역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엘크를 고라니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 100





 사려 깊었던 설리번은 고라니인지 수사슴의 것인지를 알 수 없는 뿔을 함께 보내주었다.

 

[원문]


 Sullivan thoughtfully included a rack of antlers from an elk or stag with the suggestion that these be attached instead.











KT 경계(226, 저자 주), 남조류(335), 정신 분열증(466)은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용어다. 새로 바뀐 용어는 K-Pg 경계’, ‘남세균’, ‘조현병이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죽을 때까지 살았던 실험실 겸 저택의 이름은 다운 하우스(Down House). 436쪽의 타운 하우스 오자다.









[1] 참고문헌


* 마루야마 다카시, 서수지 옮김, 이융남 감수 모든 공룡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살아 있는 공룡의 경이로운 생명의 노래(레몬한스푼, 2022), 170~171.


* 갈로아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 (한빛비즈, 2019), 215


* 박진영 박진영의 공룡 열전: 여섯 마리 스타공룡과 노니는 유쾌한 공룡 입문(뿌리와이파리, 2015), 4이구아나 이빨, 이구아노돈, 189~190.



[2] 참고문헌


* 갈로아, 263쪽.


* 패트리샤 반스 스바니 · 토머스 E. 스바니, 이아린 옮김 한 권으로 끝내는 공룡(지브레인, 2013), 51.

 


[3] Wikipedia, Mariana Trench Descents



[4] Wikipedia, Passenger pigeon Last survivors, Martha(passenger pig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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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09-16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공부는 장기간하는 여행과 같다고 하신 Cyrus 님 말에 공감합니다. 저도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고 있는 중인데 2년째 읽다 말다 하며 보고 있지요. ㅎㅎ Cyrus 님의 분석리뷰를 보며 늘 감탄합니다. 추석 명절 잘 보내세요!

cyrus 2024-09-16 12:00   좋아요 2 | URL
저도 책을 읽다 보면 착각할 수 있고, 오독할 수 있고, 틀릴 수 있어요. 제 글에 잘못된 점이 있거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얼마든지 댓글로 남겨주세요. 마힐도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
 




가까이서 보면 희곡

멀리서 보면 연극


No. 6








<남일동 부인들>

극단 한울림

연출 정철원

작가 이지영(서채봉 역 외)


2024914일 오후 4시 공연 관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당신은 이 속담이 맞다고 동의하는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일을 했는데도 이름이 사라져 버린 위인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무관심에 씻겨서 지워진 위인의 이름을 찾는 일에 매진한다. 하지만 위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료(史料)가 남아 있지 못하면 영영 찾을 수 없다.

 

대구 중구에 국채보상운동 기념 공원이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에 시작된 항일 독립운동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국권이 완전히 빼앗긴 상태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힘없는 나라에 1300만 원의 빚을 갚으라고 강요하였다. 서상돈(1850~1913)김광제(1866~1920)는 나랏빚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서상돈은 2천만 명의 동포가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한 사람당 20전을 모을 수 있으며 3개월 만에 국채를 갚을 수 있다고 건의했다.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국채보상운동에 나섰다. 대구에서 자란 일곱 명의 여성은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었으며 비녀와 가락지를 내놓아 자금을 마련했다.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에 소속된 일곱 명의 여성은 기혼 여성으로만 알려졌을 뿐, 오랫동안 이름이 잊혔다











국채보상운동 기념 공원에 국채보상운동 여성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가 직접 작성한 선언문과 일곱 명의 여성 회원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여성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남편 이름 처(, 아내) 정씨, 서씨, 김씨, 정씨, 최씨, 이씨, 배씨로 되어 있다.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지 108년이 된 2015년에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의 명단이 확인되었다.

 

정경주, 서채봉, 김달준, 정말경, 최실경, 이덕수. 하지만 한 명의 여성 이름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김수원 아내 배씨.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의 업적을 조명한 <남일동 부인들>김수원 아내 배 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연극이다. 무대 위에 되살아난 배씨는 배영순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연극의 시대적 배경은 을사늑약 이후이다.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1864~1921)은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썼다. 대구 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로 부임한 친일파 박중양(1872~1959)일본 상인들이 대구에 활동할 수 있게 대구 읍성을 헐어버렸다. 연극은 우리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역사적 사실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남일동 부인들이 자주 만나면서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계산성당 근처 빨래터다. 대구의 유일한 빨래터다. 무대 위에 돌 형상의 소품들이 놓여 있는데, 빨래터를 재현한 것이다.

 

역사는 이름 없는 위인에게 주목하지 않는다. 굵직굵직한 사건이나 남성에 초점을 맞춘 역사는 여성들의 일과 목소리를 배제한. 이제는 남성 중심의 역사에 가려진 여성 위인들이 많이 발굴되면서 주목받고 있지만, 여전히 역사 속 여성은 주변인이다. <남일동 부인들>은 극 중간에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사늑약, 서상돈, 장지연, 대구 읍성 철거 사건)을 언급하면서도 온전히 기록되지 못한 일제 강점기 여성들의 일상사(日常史)를 인물 간 대화와 노래로 표현한다. 배영순(김정현 분)은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금을 모은다. 남일동 부인들을 포함한 아낙네들은 빨래터에 모여서 가벼운 대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논의한다. 그리고 기생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다. 연극은 산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남성 중심 역사 그리고 신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압축된 고학력 지식인 중심의 여성사가 주목하지 못한 하층 계급 여성들의 삶과 노동을 빛나게 해준다. <남일동 부인들>경성(서울) 출신 모던 걸로 알려진 신여성만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잘 만든 연극에 아이러니한 그림자가 무대 위에 잠깐 지나갔다. 이 그림자의 정체는 장지연이다. 극 중 장지연(백광현 분, 극단 솥귀, <남일동 부인들조연출)은 통곡하듯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읊는다. 시일야방성대곡에 이날에 목 놓아 크게 우노라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주 잠깐이지만, 백광현 배우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의미를 살려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표현했다. 그러나 장지연은 1914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친일 논설을 여러 편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박중양(천정락 분, 극단 진창)과 함께 친일 인명사전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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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곤충사회
최재천 지음 / 열림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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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점  ★★★  B





지구의 속살은 검다튼튼한 지구의 속살에 석탄이 생긴다석탄은 탄소를 품은 새까만 암석이다. 이 탄소 덩어리는 수많은 꽃과 나무가 돋아난 지구의 풀빛 피부 아래에 깊숙이 박혀 있다식물은 죽으면 싱그러운 풀빛이 사라진다. 풀빛을 잃은 식물은 태양 빛 한 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구의 피부밑으로 내려간다. 그렇지만 지구의 속살은 엄청 뜨겁다. 열기를 쬔 식물의 잔해는 차츰 분해되면서 석탄으로 변한다


인간은 지구에서 유일하게 슬기로운 존재(Homo sapiens)라고 자부한다. 인간은 똑똑하면서도 욕심이 많다잘 먹고 오래 살고 싶어서 지구의 피부에 자란 식물을 뿌리째 뽑는다. 식물을 원하는 인간은 무례하게도 지구의 거대한 얼굴 앞에 불도저와 굴착기를 들이댄다. 불도저는 지구의 피부에 무성하게 자란 숲을 깎기 위해 만든 자연 파괴용 면도기다. 굴착기는 한 팔로 지구의 피부를 박박 긁는다. 끝이 없는 인간의 욕심은 두꺼운 지구의 피부를 뚫는다. 인간은 소란스러운 드릴로 지구 곳곳에 커다란 구멍을 내서 탄광을 만든다.


지구의 속살은 오래전에 죽은 식물이 묻힌 검은 지옥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그곳은 한 번 파면 계속 파고 싶은 검은 천국이다인간은 석탄으로 연료를 만들었다. 연료는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었다석탄 덕분에 인간은 과거에 자주 시달렸던 추위와 배고픔을 완전히 잊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그러나 탄광이 많아질수록 지구의 피부에 난 생채기가 점점 늘어났다. 석탄을 태우면 먼지와 온실가스가 생긴다. 온실가스로 둘러싸인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인간은 새까만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간다땅속에 있는 천국을 마음껏 누린 대가다. 온난화라는 열병을 앓고 있는 지구가 죽으면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지옥이 된다


탄광 속에 갇힌 카나리아는 죽음의 가스를 감지하면 고운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광부들은 살려달라면서 몸부림치는 카나리아를 보면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온다. 탄광 속 카나리아는 위험한 일을 알려주는 경보다온도가 점점 높아지는 탄광투성이 지구의 위태로운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카나리아가 있다. 그것은 바로 곤충이다. 지구가 뜨거워지면 곤충의 삶의 터전인 자연이 파괴된다. 곤충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다지금 탄광투성이 지구에 소리 없는 경보 알람이 울리는 중이다.


최재천의 곤충사회는 인간이 무심코 지나치는 조그만 카나리아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준다민벌레와 개미를 연구한 사회생물학자 최재천은 곤충이 사라지면서 일어나는 최악의 상황을 걱정한다곤충은 기후변화에 민감하다. 조그만 카나리아는 주변 환경의 온도와 날씨에 맞춰 번식한다. 그런데 지구가 너무 뜨거워져서 사계절이 서둘러 오면 곤충의 번식기는 빨라진다. 번식기가 훌쩍 지나가 버리면 철새가 고생한다. 먹잇감인 곤충이 없기 때문이다.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한 철새는 살아남지 못한다. 곤충과 동물의 활동 기간이 겹치지 못한 상황을 생태 엇박자(ecological mismatch)’라고 한다.


지구는 곤충의 행성이다. 곤충은 꽃가루를 실어 나른다. 식물은 곤충이 옮겨준 꽃가루를 받아 수분(受粉) 활동을 한다. 곤충의 생명력 덕분에 지구의 풀빛은 더욱 푸르게 물들 수 있었다최재천은 생물 다양성(Biodiversity)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 기후 온난화 문제보다 더 시급하다고 말한다. 아주 작은 미생물부터 몸집이 큰 동물에 이르기까지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생물종이 멸종하면 그것과 공생 관계를 맺고 있던 다른 생물종도 멸종한다. 생물 다양성이 없는 생태계는 지구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생물 다양성은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 Wilson)이 먼저 사용한 생태학 용어다. 윌슨은 최재천의 스승이다.


최재천의 곤충사회과학 도서. 하지만 과학적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



* 140

 




 개미는 워낙에 성공한 동물이라서 지구촌 어디를 가도 개미가 없는 곳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금 살고 계시는 아파트 집 안에도 개미가 들어와서 기어다니죠. 아마 북극, 남극, 바닷속을 빼놓고는 다 살 겁니다.

 


개미 종은 아주 많으며 주로 따뜻한 기후의 지역에 서식한다. 그렇지만 북극 지역에 사는 개미도 있다. 알래스카에 발견된 렙토토락스 무스코룸(Lepthothorax muscorum)이다차가운 땅에 만들어진 개미집은 혹한에 취약하다. 렙토토락스 무스코룸은 언 땅이 녹기 시작하는 봄에 활동한다.[주]


인간은 곤충을 잘 모른다. 곤충 박사도 예외가 아니다. 여전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곤충이 많다. 곤충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은 너무 단순하다. 꿀벌과 나비와 같은 익충이 식물이 성장하는 데 이로운 곤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생김새만 보면 눈살이 찌푸리게 되는 말벌, 나방, 딱정벌레도 훌륭한 꽃가루 배달원이다. 개미를 오래 연구한 저자는 온갖 동식물과 함께 사는 여러 종의 개미를 소개한다. 그렇지만 생태계를 튼튼하게 해주는 다채로운 곤충 사회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고작 개미뿐인가. 개미에 초점을 맞춘 저자의 설명은 곤충 다양성을 크게 부각하지 못한다. 콘크리트 건물 숲에 익숙한 사람들이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떤 생물이 지구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강조해야 한다. 따라서 생물 다양성보다는 곤충 다양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써야 한다. 인간은 곤충과 친해져야 한다. 작은 카나리아가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진다.





[] 참고문헌: 월터 R. 칭클, 강현주 옮김, 최재천 감수, 개미 건축: 경이롭고 아름다운 지하 건축 탐험, 에코리브르, 2024년,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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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태어난 김에 서울 구경

첫 번째 이야기





8월 말에 써야 할 휴가가 불행하게도 2주나 밀려나고 말았다. 지난주인 9월 첫째 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드디어 쉬게 되었다. 금요일(9월 6일)에 서울에 갔다종로 삼청동에 가면 무조건 <과학책방 갈다>에 간다. 당연히 책을 사기 위해 방문한다. 하지만 <갈다>에 갈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갈다>에서만 살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맥주.






 

올여름에 <갈다>에서 새로운 맥주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벨기에에서 제조된 오메가시그마. 두 병 모두 마셔보고 싶었지만, 빈속에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것은 애주가인 내가 생각해도 너무 나간 행동이라서‥… 자제했다. 그래서 오메가만 마셨다. 신맛이 강했다. 신맛을 좋아한 나로서는 마실만했지만, 신맛을 매우 싫어하는 분은 입에 맥주 한 모금도 대지 마시길.

 
















* 이정모 《찬란한 멸종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다산북스, 2024)


* 마이클 J. 벤턴, 김미선 옮김 《대멸종의 지구사생명은 어떻게 살아남고 적응하고 진화했는가(뿌리와이파리, 2024)




<갈다>에서 산 책은 한 권이다. 털보 과학 관장으로 유명한 이정모찬란한 멸종. 이 책은 한 달 전에 나온 신간 도서이며 현재 과학 도서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있다. 최근에 이 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고, 주제도 비슷한 대멸종의 지구사를 읽었던 터라 내용이 어떤지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과학 전문 인플루언서와 과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쓴 책은 과학 비전공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었다. 하지만 복잡하고 방대한 과학 지식을 축약하면서 글을 쓰게 되면 상세한 내용은 생략된다. 이러면 글쓴이의 의도와 달리 과학적 사실과 다른 내용이 나올 수 있다. 과학자들도 인간인지라 과학적으로 검증이 안 된 내용을 언급할 수 있다. 따라서 대중 친화적인 과학 도서 또한 비평의 칼날을 맞아야 한다. 특히 앞장서서 비평의 칼날을 내세워야 하는 사람은 과학자들이다.
















* 도널드 프로세로, 류운 옮김 《화석은 말한다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류운 옮김바다출판사, 2024) 




고생물학자 도널드 프로세로(Donald R. Prothero)는 자신의 책 화석은 말한다에 과학을 올바르게 이용해야 하는 이유를 언급한다.






* 209쪽


 많은 진화론자는 주요 문제들은 다 해결되었고 이제 자잘한 것들만 풀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의 어느 분야가 되었든 모든 답을 가진 듯이 보여 더는 그 가정들을 물음에 올리지 못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쉼 없는 비판적 태도, 새로 불거진 미해결 문제들, 의심을 품고 입씨름을 벌이는 것은 좋은 과학의 건강에 필수적인 것들이다. 만일 과학이 생각을 시험하기를 멈추고는 본질적인 문제가 모두 풀렸다고 본다면, 과학은 금방 활기를 잃고 죽고 말 것이다

 


과학자들이 쓴 책은 학술 논문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학계에서 늘 하던 논쟁을 잠시 멈추고, 책을 낸 동료 과학자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책이 너무 좋다는 식으로 찬사를 보내고,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면서 호평만 늘어 늘어놓기만 하는 과학 출판계의 상황은 과학의 건강 유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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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4-09-10 09: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갈다>에 가야할 이유가 하나 늘었군요 ㅎㅎ

cyrus 2024-09-14 08:21   좋아요 1 | URL
<갈다>에 행성 캔디라는 간식도 팔아요. 행성 모양의 사탕인데 태양 사탕, 지구 사탕, 목성 사탕 등이 있어요. 지구 사탕은 먹어 봤는데 많이 달지 않아요. ^^

blanca 2024-09-10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신 맥주길래 궁금하네요. ^^ 과학의 발전은 수정을 통해서라고지요, 동의합니다.

cyrus 2024-09-14 08:22   좋아요 0 | URL
그날 안주 없이 마셨는데, 입안에 퍼지는 신맛을 덜 느끼게 하려면 안주를 같이 먹어야 해요. ^^

stella.K 2024-09-10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네가 애주가였나? 난 술은 거의 안 마시지만 달짝지근한 걸 좋아하지. 신맛은 어떤지 모르겠네. 아무튼 재밌게 살아. 심심할 틈이 없겠어. 🤗

cyrus 2024-09-14 08:23   좋아요 1 | URL
예전에 술을 주제로 한 글을 몇 편 썼어요. 즐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시간이 없고, 돈도 없네요.. ㅎㅎㅎ

청아 2024-09-10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책방 ‘갈다‘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서 검색해 봤어요! 대표님이 천문학자 시네요ㅎㅎ
오메가와 시그마라니 맥주도 궁금하고. 저도 꼭 가보고 싶어요^^

cyrus 2024-09-14 08:24   좋아요 1 | URL
네, 이명헌 님은 책도 여러 권 쓰신 유명한 과학자예요. 가끔 <갈다>에 방문하신다던데 저는 주말에만 그곳에 갈 수 있어서 한 번도 뵙지 못했어요.. ㅎㅎㅎ

서니데이 2024-09-1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에 서울에 다녀오셨군요. 주로 온라인 서점에서 미리보기로 보고 책을 사지만 그래도 실물 책을 보고 싶어서 오프라인 서점에 한번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서점에서 맥주가 있다니 둘 다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좋은 공간이겠어요.
cyrus님, 연휴 잘 보내시고, 좋은 주말 되세요.^^

cyrus 2024-09-15 09:04   좋아요 1 | URL
저는 알라딘에 주문하지 못한 책을 책방이나 교보문고에서 구매해요. ^^
 
대멸종의 지구사 - 생명은 어떻게 살아남고 적응하고 진화했는가 오파비니아 25
마이클 J. 벤턴 지음, 김미선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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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점  ★★★★  A-





45억 살의 지구는 다섯 번이나 죽을 뻔했다. 지구가 죽으면 지구에 뿌리내려 이파리를 펼친 모든 생명체도 죽는다과학자들은 시름시름 앓고 있던 지구가 혼수상태에 빠진 순간을 대멸종(mass extinction)’이라고 부른다지구가 의식을 잃었을 때 많게는 수백만 종의 동식물이 한꺼번에 멸종되었다생물의 대량 멸종이 일어난 시기는 오르도비스기 말(, 44400만 년 전), 데본기 말(37200만 년 전), 페름기 말(25200만 년 전), 트라이아스기 말(2100만 년 전), 백악기 말(6600만 년 전)이다.


공룡, 포유류, 조류, 곤충들보다 뒤늦게 지구에 뿌리내린 인간은 지구를 못살게 구는 유일한 존재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은 다른 동식물에게도 피해를 주는 불한당이다뒤늦게 지구의 소중함을 알게 된 인간은 지구가 더 이상 아프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지구는 오래전부터 아팠고여전히 아파한다. 현재 지구가 앓고 있는 병은 지구온난화온실가스는 지구온난화를 일으킨다. 지구가 온실가스로 완전히 뒤덮이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지구의 온도는 태어날 때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지구가 건강했을 때도 온도는 올라갔다. 이때 당시 지구는 무럭무럭 성장하는 청소년이었고, 인간은 태어나지 않았다. 지구는 태양에서 나오는 열을 받아들이고, 그 열의 일부를 대기 밖으로 방출한다. 그런데 온실가스는 지구에 내뿜는 열을 흡수한다. 이러면 지구는 온실가스라는 아주 뜨거운 이불을 덮고 있는 상태가 된다. 추위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불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구는 이불 밖에 있어야 한다. 이불 속에 있는 지구는 위험하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인해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계속 올라간다. 해수면 온도도 올라가는데, 바다에 사는 수많은 생물은 갑자기 뜨거워진 바닷물에 적응하지 못해 살아남지 못한다온실가스에 이산화탄소가 많이 들어 있다.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를 태우면 이산화탄소가 생긴다. 결국 온실가스를 얇게 하려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지구가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화석연료를 포기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구가 아프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생물 종 절반이 빠르게 멸종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면 지구는 또다시 의식을 잃을 수 있다. 인간은 운 좋게도 다섯 번이나 쓰러진 지구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 맞닥뜨릴지 모르는 여섯 번째 대멸종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대멸종의 지구사고생물학자가 지구를 대신해서 쓴 지구 투병 일지. 이 책의 저자 마이클 J. 벤턴(Michael J. Benton)은 예전에 대멸종(류운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7)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다. 대멸종페름기 말 대멸종에 초점을 맞춘 책이라면 대멸종의 지구사5대 대멸종을 소개한다5대 대멸종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은 백악기 말이다. 이 시기에 중생대를 지배했던 공룡이 사라졌다. 지구의 대기권을 뚫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거대한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했다. 정면으로 소행성과 부딪힌 지구는 치명상을 입었다. 우주에서 온 폭탄은 지구에 뿌리내린 공룡을 폭살시켰다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지구는 통증보다 심한 쓰라린 후유증에 시달렸다. 소행성과 충돌하면서 발생한 엄청난 양의 미세먼지는 대기를 어둡게 뒤덮었다. 미세먼지가 지구에 들어와야 할 태양 빛을 차단하는 바람에 지구 온도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식물의 광합성이 중단되면서 생태계가 완전히 무너졌다빛이 부족하면 바다에도 악영향을 준다. 광합성을 하면서 살아가는 식물성 플랑크톤의 개체 수가 줄어들자, 그들을 먹고 사는 해양생물 종들도 멸종했다고생물학자들은 5대 대멸종을 주목한다. 그들은 대멸종 시기에 일어난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감소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여 지구온난화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유추한다과학자들은 안다. 지구가 아프면 일어나는 이상 고온 현상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처가 난 피부에 새살이 돋는다. 지구가 겪은 대멸종은 성장통이다. 지구는 괴로운 아픔을 툭툭 털어내고, 자신의 상처투성이 몸에 생태계가 다시 자라날 수 있게 힘썼다. 생명체가 뿌리뽑힌 지구의 땅과 바다 위에 새로운 생명체들이 나타나서 뿌리를 내렸다. 대멸종 이후에 새로운 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긴다. 지구가 마지막으로 아팠던 백악기 말 대멸종 이후에 본격적으로 포유류가 지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공룡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포유류의 번성도 없었을 테고 인간은 나타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대멸종의 지구사 생명의 멸종과 진화가 맞닿아 있는 지구의 역사를 보여준다. 인간은 역사가 된 지구의 투병 일지를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 지구의 투병 일지에는 지구가 크게 아팠을 때 기후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대멸종으로 인해 무너진 생태계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지구는 다섯 번의 아픔을 겪으면서 스스로 성숙해졌다. 지구가 아픈 만큼 인간도 정신 차리고 성숙해져야 할 텐데‥….






<cyrus의 주석>



* 101




 

 연체동물, 갑각류, 곤충, 어류, 개구리 같은 냉혈동물[주]은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이외르겐센과 동료들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변온동물[주]은 수생과 육생 모두 지구온난화와 함께 열 스트레스가 상당히 증가할 위험이 있고, 증가하는 이 열 스트레스는 지역 규모에서, 그리고 지구가 1도 더 온난화할 때마다 눈에 띄게 두드러질 것이다.”


[] 변온동물은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한다. 그래서 외부 환경의 온도에 맞춰서 체온을 조절한다. 변온동물의 구 명칭은 냉혈동물인데, 동물은 피를 차갑게 해서 온도를 조절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는 냉혈동물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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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9-09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섯번째 대멸종>은 인간에 의해 쓰여지겠고 대멸종의 대상은 인간이겠죠. ‘지구는 괜찮아 인간이 문제지‘ 라는 구절이 생각나네요.

cyrus 2024-09-10 06:23   좋아요 0 | URL
네, 지구는 살 만큼 살았고,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들의 편의를 봐주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