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보면 희곡, 멀리서 보면 연극
No. 4
원작 고연옥
연출 정창윤
제작 열혈단
<출연진>
청년: 강대현
여자: 전소영
알리: 이영찬 [주]
수나: 김주은
남자: 임도연
오마르: 성창제
시린: 유이수
아만다: 이주현
라일라: 곽수민 [주]
무함마드, 이브라힘: 박지훈 [주]
바로 그때 젊은 왕 길가메쉬가 깨어났다‥…. 그의 눈‥… 꿈‥…! 꿈‥…!
‥…‥…
“내가 다시 예전의 나처럼 내 어머니 닌순의 무릎 위에
앉을 수 있을까?‥…”
누딤무드 신이 그에게 꿈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 중에서, 김산해 옮김,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321~322쪽)
고대 그리스 신화에 묘사된 ‘죽음의 신’과 ‘잠의 신’은 쌍둥이다. 둘 중 먼저 태어난 형이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잠을 죽음과 비슷한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잠의 신 히프노스(Hypnos)는 ‘작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고대인들은 히프노스를 형보다 늙은 모습으로 묘사했다. 노인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요, 죽음의 신과 가장 가까이에 서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국내 최초 수메르어 · 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 (휴머니스트, 2020년)
큰 죽음과 작은 죽음을 가깝게 맞닿은 관계로 인식했던 고대인들의 생각은 서아시아 신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 이야기들보다 더 오래된 고대 수메르(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근원지, 이라크의 남부 지역에 해당한다) 신화다. 주인공 길가메시(Gilgamesh)는 필멸의 운명을 맞게 되는 영웅이다. ‘길가메시’는 수메르어로 ‘늙은 영웅’을 뜻한다. 영원한 젊음을 얻지 못해 결국 늙어서 죽게 되는 영웅의 최후를 암시한다.
길가메시의 아버지는 수메르의 도시 국가 우르크(Uruk)를 다스린 왕이었으며 어머니는 들소의 여신 닌순(Ninsun)이다.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는 ‘3분의 2는 신, 3분의 1은 인간’이다. 죽음이 두려운 영웅은 불로초를 얻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낸 불로초를 끝내 놓쳐버리면서 길가메시의 모험은 실패로 끝난다. ‘탄식의 침상’에 누운 길가메시는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작은 죽음’을 느낀 길가메시는 절망에 빠진 채 ‘큰 죽음’을 받아들인다.
만약 죽기 직전에 꾸는 생애 마지막 꿈은 어떤 내용일까? 꿈속에 과연 누가 나타날까? 길가메시처럼 ‘큰 죽음’을 맞기 전에 ‘작은 죽음’을 꿈꾸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 피터 브룩, 이민아 옮김 《빈 공간》 (걷는책, 2019년)
영국의 연극 연출가 피터 브룩(Peter Brook)은 일상에서 ‘만약’은 허구이자 회피라고 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상상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는 일은 기분이 유쾌하지 않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것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렇지만 연극에서 ‘만약’은 대단히 좋은 의미다. 피터 브룩은 ‘만약’이 허용된 연극이 실험적이며 ‘진실’에 가깝다고 했다. 진실이 담긴 연극을 보는 관객은 무대 위에 펼쳐진 이야기가 허구로 느껴지지 않는다. 관객은 연극 속에 있는 ‘진실’을 확인한 순간, 그것을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연극과 삶은 하나(피터 브룩, 《빈 공간》 중에서, 277쪽)’가 된다.
* [절판] 고연옥 《고연옥 희곡집 3》 (연극과인간, 2020년)
만약 테러 집단 IS 대원이 자신의 품속에 있는 폭탄을 스스로 터뜨리기 전에 최후의 꿈을 꾼다면 그 꿈은 어떤 내용일까? 고연옥의 희곡 <인간이든 신이든>은 테러 집단 IS 대원이 된 청년이 죽기 전에 꾸는 꿈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인간이든 신이든>이 수록된 《고연옥 희곡집 3》은 2020년에 출간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간이든 신이든>은 아직 공연된 적이 없는 희곡이었다. 2021년에 연출가 김정과 ‘극단 프로젝트 내친김에’가 만든 <인간이든 신이든>이 서울 대학로 선돌 극장에 초연되었다. 이듬해에 선돌 극장에서 두 번째로 무대에 올랐으며 이번 달 17일부터 19일까지 대구 극단 ‘열혈단’이 올해 첫 공연작인 <인간이든 신이든>을 한울림 소극장에 선보였다.
<인간이든 신이든>은 ‘꿈속의 집’에 혼자 있는 청년의 대사로 시작된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청년 역을 맡은 강대현 배우가
무대 위에서 잠자는 연기를 하고 있다.
청년(강대현 역)은 엄마(전소영 역)를 증오한다. 그는 스스로 ‘실패한 인간’으로 여긴다. 현실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열등감과 좌절감을 씻어내려고 답답한 현실에서 도피한다. 청년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초인이 되는 꿈을 꾼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싶어서 ‘위대한 신에게 선택받은 IS 전사’가 된다. 엄마는 집을 떠난 아들을 찾으러 위험천만한 분쟁 지역으로 향한다. 분쟁 지역의 하늘 위에 폭탄 비가 내리고, 지상에 지뢰밭이 무수히 깔려 있다. 이곳 사람들의 일상은 죽음에 너무 가까이에 있다. 엄마는 죽음을 무릅쓰면서 ‘인간 폭탄’이 된 아들을 다시 만나려고 한다.
고연옥의 희곡은 ‘신화’라는 허구와 현실이 만나면서 포개진다. <인간이든 신이든>의 청년은 ‘완벽한 영웅’이 되려고 했으나 ‘인간’으로 죽게 되는 현대판 길가메시다. 청년은 ‘꿈속의 집’에서 엄마를 만나지만, 자신을 만나러 온 엄마의 진심을 거부한다. 청년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엄마와 같이 살아야 하는 집이 아니다. 청년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사회적 인물로 지목하는 사람들의 따가운 비난이다. 그렇지만 사회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청년을 너그러이 안아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엄마다. 죽음 직전의 꿈에서 깬 길가메시가 어머니 닌순의 포근한 무릎을 그리워했듯이 청년은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모든 말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엄마의 포근한 진심을 그리워한다. 꿈속에서 서로의 진심을 알지 못해 계속 멀어져야만 했던 모자는 ‘인간적인 죽음’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마주 본다. 서로를 찾아 나선 모자의 위태로운 모험은 조용한 포옹으로 마무리된다. <인간이든 신이든>은 관객에게 ‘신(을 믿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연극의 질문에 화답하는 관객은 극이 전달하려는 소중한 진실, 즉 나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주] 이영찬, 곽수민, 박지훈은 ‘극단 폼’ 소속 배우들이다. 세 사람 모두 3월 말에 공연된 대구 더파란 연극제 공연작 <죽음의 집>에 출연했다.
<죽음의 집> 공연 감상문:
[죽은 자는 말이 많다(Dead man talking)]
2024년 3월 25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5407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