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는 어디에

 

 

 

 

 

 

 

 

 

 

 

 

 

 

 

 

 

 

 

벌써 9년 동안 피렌체 시내를 헤맸다. 청년은 자신의 심장 속에 남아있는 9년 전의 시간, 그 때의 순간을 찾고 싶었다. 심장의 은밀한 방 안에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심하게 요동치던 그 시간으로.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명망 높은 은행가 집안의 축제에 참석한 청년은 그 곳에서 만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는 은행가 집안의 딸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눈부신 에메랄드빛 눈을 한 소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매너와 상냥한 응대로 순수한 소년의 가슴을 고동치게 했다. 그녀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듯했다.

 

그 후 청년은 하루도 소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은행가의 집 앞을 서성거렸다. 어떤 때는 주변의 도로에 주저앉아 온종일 망부석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마치 천국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럴수록 소녀의 환영은 아련히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더 생생한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소녀의 환영이 먼저 그를 깨웠다. 그리고 그 환영은 하루 종일 그의 무언의 동행자가 됐다.

 

 

 

 

 

헨리 홀리데이 「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 1883년

 

 

그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순례하듯 피렌체 시내 중심가를 한 바퀴 소요하고 있었다. 베키오 다리 아래 난간에 기대 무심히 강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 위로 여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은행가 집안의 딸이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는 성숙한 여인의 체취를 풍기긴 했지만 9년 전의 고고한 자태 그대로였다. 뜻밖에도 그녀는 청년이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심장도 입도 얼어버린 청년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짤막한 9년 만의 해후를 허망하게 지나보내야 했다.

 

그러나 소녀가 자신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을 확인한 청년은 오랜 내면의 불안감을 떨치고 본격적으로 학업에 정진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문학수업에 열중하는 한편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나선다. 그는 소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 있은 지 2년 후인 1285년 다른 여인과 백년가약을 맺는다. 이제 청년은 여름날의 폭풍우처럼 스쳐지나간 짝사랑의 흥분을 거두고 현실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짝사랑을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청년의 가슴속에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승화되어 내면의 등불로 자리한다.

 

청년이 결혼한 지 2년 뒤에 소녀 역시 은행가 집안 출신의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 청년은 우연히 소녀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녀 나이 방년 24세. 16년간 자신의 가슴에 자리해온 천사를 잃은 상실감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슴 떨리게 사랑했던 그녀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한마디 고백도 감히 하지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청년에게 그녀의 죽음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일생일대의 충격이었다.

 

그러나 한 손에 쥐어진 펜과 종이는 그의 감수성을 위로해주고 다독여주었다. 청년은 자신의 인생에 축복을 내려준 영광스러운 여인 베아트리체를 위해 아름다운 문장으로 보답했다.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 이후 그에게 바친 연시를 모아 『La Vita Nuova』라는 책을 출간한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새로운 인생’, 청년은 세상에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된 출판물에 자신의 이름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를 서명한다.

 

 

 

 

 ♣ 화가로 환생한 단테

 

 

 

 

 

 

 

 

 

 

 

 

 

 

 

단언컨대,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가장 완벽한 사랑이다. 슬프게도 죽음의 신이 ‘천사’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는 단테를 시기한 나머지 너무 일찍 그녀의 영혼을 천상으로 멀리 보내고 말았지만. 그러나 단테는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천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신곡』에서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천국과 지옥으로 안내하는 여인이 바로 베아트리체다. 존재는 그의 영혼과 심장을 관통하는 큐피드의 화살처럼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의 마음속에 영원불멸의 사랑으로 각인되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 단테가 실제로 10년 동안 타락한 채 외지를 방황했다고 한다. 첫사랑에 상처 입은 외로운 영혼이 짊어진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되었을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단테에게는 좀 섭섭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또 그렇게 일찍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신곡』을 접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처럼 인간의 삶을 더 풍요하게 하고, 그 덕분에 세대에 걸쳐 사랑받는 불멸의 예술작품의 뒤에는 언제나 예술가의 영감의 원천인 ‘뮤즈’가 존재했다.

 

그런데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40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의 벽을 넘어 이탈리아가 아닌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로 환생하여 다시 한 번 사랑의 재회를 하게 된다. 단테는 화가로, 베아트리체는 그 화가의 아내이자 뮤즈로.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1828~1882). 부모가 단테를 흠모하여 붙인 이름이다. ‘단테’라는 이름에 함축된 시성(詩聖)의 기운 덕분일까. 로세티는 일찍부터 미술과 문학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동지들과 함께 그 유명한 ‘라파엘 전파’를 결성하고 주도하는 화가로 급부상하게 된다. 예술적 재능에 의한 명예로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사랑 운 역시 좋았다.

 

라파엘 전파 소속의 모델이었고 연인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달과 결혼한다. 로세티의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이 대부분 시달을 모델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La Vita nuova』『신곡』이라는 뛰어난 걸작을 남긴 단테와 그의 문학적 영감에 지대한 영향을 준 베아트리체의 관계가 떠올리게 된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펜과 종이로 뮤즈에게 바치는 축복의 노래를 읊었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붓과 캔버스로 뮤즈의 아름다움을 경배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이 곳 영국에서도 오래 가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다시 만나선 안 될 불행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로세티와 시달의 사랑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에 비하면 썩 아름답지 못했고 비극적이다. 오랜 기간 연애 끝에 그들은 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시달은 병세가 완연할 정도로 연약한 여자였다. 요양 차 시달이 런던에 지내고 있을 때 로세티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라파엘 전파 소속 화가 헌트의 아내와 불륜에 빠졌다. 시달은 충실하지 못한 남편과 여유롭지 못한 경제 그리고 아이까지 사산하면서 우울증을 앓는다. 시달은 영국에서 구하기 쉬운 아편으로 우울증을 달랬고, 결국 아편중독에 걸리게 된다. 우울증에 시달린 시달은 결혼 생활 2년 만에 아편 중독으로 사망하고 만다.

 

이번에 죽음의 신은 화가 단테의 그릇된 사랑에 분노했다. 그의 연인 시달을 아편의 늪으로 유혹하여 은밀하게 자신의 검은 손길로 이끌도록 만들었다.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시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한동안 시달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정도로 실의에 빠진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베아트리체가 죽는 순간에 단테가 꾼 꿈」1871년

 

 

‘단테’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화가의 운명은 놀라울 정도로 이탈리아 시성의 삶을 닮아가고 있었다. 로세티는 그림뿐만 아니라 시인으로 활동할 정도로 문학적 자질이 뛰어났다. 오히려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아닌 시인 단테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지 느껴질 정도다. 단테의 처녀작 『La Vita nuova』을 번역한 건 물론이고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을 주제로 그린 그림도 몇 점 남겼다.

 

베아트리체가 죽어가는 순간에 환상적인 꿈을 꾸는 단테의 묘사한 모습은 시인 단테의 영혼이 화가 단테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흰 옷을 입은 베아트리체는 막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양쪽에 도열한 하녀들은 꽃무늬 천으로 그녀의 몸을 가리고, 들꽃과 화살을 손에 든 천사가 여인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선사하고 있다. 잠옷을 입은 단테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이 광경에 충격을 받은 양 땅에 못 박힌 듯 얼어붙어 있다. 사랑하는 연인의 마지막 모습을 정지된 시간으로 고이 간직하려는 것일까.

 

시인 단테가 고정된 시선으로 뚫어지게 바라봤던 환상의 장면을 화가 단테가 그림으로 재현했다. 이 그림을 그린 시기가 1871년. 시달이 죽은 지 9년째 되는 해다. 소년 단테가 소녀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 지 9년 후에 서로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 결정적인 삶의 순간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화가 단테는 이미 죽고 떠나버린 시달을 9년이 지나서야 한 폭의 그림에서 만나게 되었으니까. 천사같이 흰 옷을 입은 채 이제 막 숨을 거두려는 베아트리체와 그녀를 바라보는 단테처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베아트리체 일주기 날 천사를 그리는 단테」 1853년

 

“내 여인이 영원한 생명의 시민이 된 후 한 해가 다 간 어느 날, 홀로 앉아 그녀를 생각하면서 몇 개의 화판에다 천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단테 알리기에리, 『새로운 인생』중에서)

 

로세티는 자신이 시인 단테와 같은 운명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을까? 1853년. 그러니까 시달과 결혼하기 전에 로세티는 베아트리체 일주기 날에 천사를 그리는 단테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천사, 이제는 ‘영원한 생명의 시민’이 된 베아트리체가 그려진 종이를 손에 쥔 채 여전히 충격에 헤어나지 못하는 단테의 표정을 보라. 그 표정은 정확히 십년 후에 로세티의 얼굴에 나타난다. 시달을 떠나보내고 난 뒤에 시인 단테와 같은 운명을 그 또한 맞이하게 된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베아타 베아트릭스」 1864~1870년

 

 

베아트리체 사후 일주년에 단테가 그녀의 얼굴을 그렸듯이 로세티도 그녀를 잊지 못한 나머지 ‘사후 초상화’를 그린다. 그로 인해 나온 작품이 바로 「베아타 베아트릭스」. 이 그림은 『신곡』의 한 장면을 그렸지만, 로세티는 시달과의 사랑을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과 동일시해 시달을 베아트리체로 표현했다.

 

로세티의 최고의 걸작인 이 그림은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면서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림에서 시달은 무아지경에 빠져있으며 그녀 뒤에 피렌체 도시와 황금색의 베키오 다리가 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화면 왼쪽의 붉은 색의 옷을 입은 베아트리체와 단테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후광이 있는 붉은 색의 새가 시달에게 꽃을 떨어뜨리고 있다. 붉은 색의 새는 죽음의 사신을 암시하고 있으며 새가 떨어뜨린 양귀비는 시달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아편을 의미한다.

 

 

 

 

 ♣ 지독한 사랑

 

 

 

 

 

 

 

 

 

 

 

 

 

 

시인 단테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작품 속에 베아트리체 한 여인을 줄곧 바라봤고 ‘문학’이라는 새로운 인생을 구축하여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다. 그러나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사별한 시달 한 사람만 바라보기에는 힘들었던가 보다. 시달이 죽자 은둔생활을 하다시피하고 있던 로세티는 친구이자 시인 겸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1834~1896)의 아내 제인 모리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모리스는 친구와 아내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두 사람의 동거를 받아들인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페르세포네」 1882년

 

 

제인은 로세티의 후기 그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세티는 제인과의 특별한 사랑을 신화나 문학작품으로 표현했다. 그가 원한 ‘새로운 인생’은 자신의 예술에 생명의 기운이 요동치게 만들 수 있는 살아있는 뮤즈와의 만남을 원했을 것이다. 죽음을 초월하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외도와 재혼을 거듭한 로세티의 사랑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크게 기분 언짢을 필요는 없다. 신은 시인 단테의 사랑을 지옥에서도 허용했지만 화가 단테의 사랑만큼은 끝까지 불행과 고통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제인과 불같은 사랑을 했지만 전 아내 시달과 친구 모리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 로세티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급기야 그 역시 약물에 손을 대고 만다. 점점 미쳐만 가는 로세티를 감당하지 못한 제인은 스스로 그의 곁을 떠남으로써 불행하게 끝을 맺는다.

 

 

 

 

 

 

 

 

 

 

 

 

 

 

 

사랑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사랑의 뒷모습은 미움이고 옆모습은 시기와 질투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뿌리에서 자라난 잎사귀고 열매이다. 어디 사랑의 모습뿐이랴. 그 대상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죽어서도 끝까지 사랑한다지만,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부평초처럼 옮겨 다니는 바람둥이 사랑도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사랑을 언급할 때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자주 회자된다. 최근에는 영국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A.N. 윌슨은 『사랑에 빠진 단테』라는 자신의 책에서 『신곡』을 단테가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기 위한 일종의 상징으로 구성된 자서전이라고 해석했다.

 

 

 

 

 

 

 

 

 

 

 

 

 

 

몇 몇 사람들은 결혼한 아내가 두 눈 뜨고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죽은 연인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단테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어찌 보면 단테의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과 죽은 여자와의 숭고한 로맨스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시인 단테와 화가 단테의 사랑.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위대한 로맨스 혹은 서로 만나서는 안 될 불행한 만남이 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러브스토리를 바라보는 감정에는 정답은 없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사랑이란 이렇게 한 사람의 생애를 온전히 사로잡고 삶의 의미까지 바꾸는 격렬한 감정의 파도라는 점이다. 정말 지독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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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3-08-2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도 폰트를 11로 해서 쓰는구나. 글씨가 크니까 보기가 좋다.
단테의 신곡이 새록새록 나오고 있구나.
'단언컨대,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가장 완벽한 사랑이다.'ㅎㅎ 좋아, 좋아!
단언컨대, 너의 글은 나날이 일취월장 하는구나!^^

cyrus 2013-08-26 22:4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ㅎㅎㅎ 가끔 예전에 쓴 글 읽어보니 이렇게 개미만한 폰트를 쓰고 있었다는 게 제 스스로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ㅋㅋ 평소 속 좁은 소리 듣는 편 아닌데 글씨는 왜 이렇게 작은 걸 쓰고 있었던지 참.. ㅎㅎㅎ 요즘 댄 브라운 신작소설이 단테의 신곡을 모티브로 만든 거라서 요즘 단테 읽기에 푹 빠져 있어요. ^^

oren 2013-08-2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명의 단테 얘기가 정말 흥미롭네요. 저는 비록 피렌체를 예전에 '단 하루' 밖에 거닐어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cyrus님의 글을 읽어보니 그곳에서 봤던 붉은 성당 지붕과 베키오 다리와 다비드 조각상 등등 피렌체의 곳곳이 아직도 눈에 선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 때 '단테가 살던 집'을 둘러봤던 기억도 다시금 생각나는군요. 정치적인 이유로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단테가 죽을 때까지 결코 다시 밟아보지 못했던 그 피렌체와 베아트리체와의 지독한 사랑 얘기를 만나볼 수 있어서 참 좋네요.
* * *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은 그렇게도 크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의 그 힘은 무한히 크다. 어디를 걷든지 우리는 역사의 유적 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 키케로 (비록 그가 '다른 도시'에 대해 했던 말일지라도 '피렌체' 또한 그가 찬탄했던 도시와 그리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는 않을 듯해서 덧붙여 봅니다.)

cyrus 2013-08-26 22:46   좋아요 0 | URL
와~ 저도 단테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네요. 단테의 러브스토리를 언제나 읽어도 가슴이 뭔가 먹먹해지면서 따뜻해지는거 같아요. 지금 그 곳에 간다면 단테가 느꼈던 감정의 황홀감을 완벽히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키케로의 말처럼 회상시킬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

그렇게혜윰 2013-08-27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이에요. 단테의 단자도 모르지만 궁금증이 생깁니다^^

cyrus 2013-08-27 22: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신곡>은 내용 분량이 방대해서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렵지만 <새로운 인생>은 분량이 얇고 시가 많아서 읽기가 편안합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외의 사랑을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새로운 인생>을 먼저 읽어보는게 좋습니다 ^^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그린 이 시대 50대의 인생 보고서
송호근 지음 / 이와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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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귀로(歸路) 세대가 처한 현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의 추억을 아파하지 마라 / 나는 왜 귀로(歸路)를 맴돌고 있나 아직 꿈이 가득해 그 자리에….’

 

10년 만에 나온 ‘가왕’ 조용필 앨범에 들어 있다는 ‘어느 날 귀로에서’ 한 대목이다. 사회학자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노랫말을 붙여 화제가 된 곡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돌아오는 퇴직자의 발그림자가 처연하게 느껴지는 가사다. 송 교수는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는 특이한 형식의 보고서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베이비부머의 내밀한 사연과 냉철한 세대분석을 교직한다.

 

1970년대에 베이비부머는 이른바 신문명의 담지자가 되었고, 이후 1980년대 ‘운동권 세대’, 1990년대 ‘탐닉 세대’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즉 베이비부머는 ‘근대’가 끝나는 절벽에서 ‘현대’로 나아갈 수 있는 교량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스스로 몸을 누이면서 말이다. (8쪽)

 

 

 

2013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50대란 어떤 모습일까? 가정에선 외로운 아버지로, 직장에선 뒤안길로 밀려나는 선배로, 사회에선 말 안 통하는 꼰대 아저씨로 비춰지는 것이 씁쓸한 현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베이비붐세대 10만 명 당 자살율이 2008년 31.4명에서 2011년에는 40.6명으로 늘었다. 하루 평균 6명씩 자살로 세상과 작별 한다. 자살의 주된 원인은 2010년 글로벌경제위기 이후 조기은퇴와 창업실패 등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 이라고 한다. 충격적인 것은 이 같은 내용이 보도 되었음에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OECD 자살율 1위 국가다운 우리 사회의 무덤덤한 반응이 더 무섭다. 한국의 중장년층, 농경시대에 태어나 산업화 시대의 주력으로 치열한 생존경쟁 무대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으며 IT 시대의 서막을 열고 퇴장하는 베이비부머들이 주류다. 대부분이 닮은꼴인 고단한 삶의 여정을 달려 왔다. 그럼에도 인생의 끝자락까지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짊은 그대로 진 채 고려장 같은 은퇴자로 밀려나 자살로 마감하는 이 시대의 암울한 초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한때는 독재정권에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민주화 투사들이었고, 찬란한 미래를 꿈꿨던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실상 이 땅의 산업화를 일군 성공의 주역들이다.

 

베이비부머는 경륜, 기술, 인간관계가 성숙한 경지에 도달했고 이제 남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재가동하려는 투지로 가득한 연령 집단이다. 본격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양질의 인력(人力)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들에게 귀가조치를 발령한다. 자립심과 책임감이 강해 힘겹게 가정을 꾸려왔지만 정작 자신의 독립은 위태롭다. 정처 없이 ‘귀로’를 맴도는 숫자가 매년 100만 명이다.

 

 

 

 ♣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없는 ‘가교(架橋) 세대’

 

책은 한달음에 읽힐 정도로 분량은 얇다. 삶이 그믐달처럼 오그라드는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온’ 50대의 삶이 ‘날것’으로 담겨 있다. 공고 출신 박 회장, 대기업 출신 대리기사 등 실제 베이비부머의 사례를 들어 국민연금 고갈, 부동산 거품 같은 한국사회 고질병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도 은퇴 후 상실감, 노년을 앞둔 공포 등 정서적 공허함도 따스한 시각으로 어루만진다.

 

송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직장에서 은퇴한 50대들이 갈 곳이 없는 게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한국 시장에서 자영업은 이미 포화상태로, 은퇴 후 작은 식당이라고 해볼까하는 생각은 곧 망하는 지름길이 되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재취업이 쉬운 것도 아니다. 특히 단순 기술·기능직에 비해 좋은 대학 나와 번듯한 기업에서 고위직까지 오른 사람들일수록 기업들이 받아주기를 꺼리고, 그만큼 재취업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 고용센터에서 제공하는 각종 취업관련 프로그램을 이수하더라도 재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일 뿐, 대부분 50대 은퇴자들이 눈치 보면서 집에서 돈만 까먹고 있는 상태라고 할까? 게다가 자녀 결혼문제는 닥쳐오고, 모아놓은 돈은 점점 바닥나고... 부러움의 대상일 법한 ‘서울대 교수’인 저자도 팔순 넘은 부친을 부양하는 장남이며 두 딸의 학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이다. 노후 문제를 해결할 자원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사이먼 & 가펑클의 노래 제목으로 유명한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는 1970년대 대학가 구호였다. 송 교수는 베이비부머를 가교(架橋) 세대면서 마지막 유교 세대라고 규정한다. 근대를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자유주의자 김수영이 자신의 시 ‘거대한 뿌리’에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일갈했듯 베이비부머는 이단(異端)의 세대였으나 전통과 온전히 결별하지 못했다. 유교라는 굴레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않았다. 충, 효 같은 낱말에 매여 살았기에 가난했으되 당당한 부모와 개성 넘치는 자녀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물러날 때가 되니 다리가 돼줄 사람이 없다. 이제 자신의 삶을 뒷받침해 줄 새로운 가교가 없는 것이다.

 

최빈국이던 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리고 현장에서 물러나는 베이비부머들에게는 허무함이 엄습한다. 근대가 끝나는 절벽에서 현대로 나아가고자 쉼 없이 달려왔으나 여전히 교육, 주택, 부모 부양으로 허덕인다. 젊고 튼튼했던 허리는 점점 휜다. 힘들고 아파도 그저 묵묵히 참고 견뎌낼 뿐이다. 그저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았다.

 

 

 

 ♣ 함께 아파하고 걱정하는 공감과 위로가 필요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50대 베이비부모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이고, 내 자식, 내 형, 내 동생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체감하고 적극적 대책마련에 나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정부가 월급쟁이 중산층 유리지갑에 손을 댄 세법 개정안 때문에 베이비부머들의 눌린 기를 또 한 번 크게 죽일 뻔했다. 과연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마음껏 소리 내 웃는 날은 언제 올까?

 

이 책 또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서글픈 현실을 고발할 뿐 앞으로 어떻게 해야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게 비단 베이비부머 세대와만 관련된 것도 아니요, 일자리정책, 교육정책, 주택정책, 복지정책과도 맞물려있어 “금 나와라 뚝딱” 같은 요술방망이 식으로 해답을 내놓기가 어렵다.

 

한국의 50대 절반이 이런 절망의 균열 상태에 내몰리게 된 이유는 결국 십시일반 자신들의 자산을 할애해서 공적 안전망을 만들지 않은 탓이다... 베이비부머들이 구축하고 자신이 스스스로 갇힌 저 지독한 양극화 구조는 한국 사회 전체로 그대로 증폭되고 젊은 세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음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겪고 있는 지금의 고통은 베이비부머 세대 스스로가 만든 탓도 있다. 결국 베이비부머 문제는 비단 정부에게만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결국엔 우리 모두가 풀어야한다. 지금 우리 젊은 세대들은 그만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보지 말고 공동체적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볼 때다. 연대감 확인을 통한 공감과 위로는 곧 베이비부머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이를 통해 젊은 세대에겐 아버지 세대, 가장의 힘겨운 삶을 이해할 기회를, 장년층에게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가질 기회가 생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할 포용과 나눔. 배려가 필요한 때이다. 함께 아파하고 걱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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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9
너대니얼 호손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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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06] 주홍 글자

 

 

 

 

“그녀의 웃옷 가슴에는 화려한 주홍빛 헝겊에 금실로 꼼꼼하게 수를 놓아 환상적으로 멋을 부린 ‘A’ 자가 보였다. 그 글자는 아주 예술적으로 만든데다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공상을 마음껏 발휘한 것으로,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식적 효과를 내고 있었다.” (16쪽)

 

17세기의 미국 보스턴. 청교도정신으로 똘똘 뭉친 마을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사생아를 낳은 헤스터는 간통(Adultery)을 상징하는 주홍 글자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주위의 조롱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못 당당하게, 진정한 속죄와 참회로 이웃에 선행을 베풀면서 딸을 키우며 살아간다. ‘A’는 간통의 상징에서 점차 ‘Able’(능력)과 ‘Angel’(천사)의 의미로 승화되기까지 한다.

 

다른 쪽에는 그녀와 간통한 목사 딤스데일, 전 남편 칠링워스라는 인간형이 있다. 이들 역시 보이지 않는 ‘A’를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딤스데일은 간통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죄책감에 의해 정신적인 고통(Agony)에 시달리며, 칠링워스는 그것을 알고 분노(Anger)에 찬 채 복수를 노린다.

 

넓게 보았을 때 딤스데일의 죄는 숨겨진 죄를 상징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묘사되는 병약한 모습과 죄를 숨기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비추어 볼 때 그의 죄가 헤스터의 죄보다 더욱 악한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호손은 죄를 저지른 행위보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숨기는 은폐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딤스데일의 죄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반면 칠링워드의 죄는 헤스터처럼 공개되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드러난 죄는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을 파괴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상징한다. 작품 전반에 계속적으로 나타난 인간애를 상실한 그의 차가운 모습과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자의 비참한 결말은 칠링워드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얼마나 사악한 죄인가를 한층 더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주홍글자 A를 평생 달고 다녀야 하는 헤스터는 공개적으로 ‘왕따’를 당한 채 변두리 오두막에 살며 바느질로 생계를 잇는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간통 사실이 폭로되는 것을 당당하게 견디면서 융통성 없는 청교도의 권위에 도전하며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산다. 그래서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딤스데일의 무덤 곁에 묻힌 그녀를 ‘청교도적 파우스트’라고 부르는 해석도 있다. 종교적 계율과 사회적 규범의 쇠사슬을 박차고 인간으로서의 본능에 충실하며 개인의 참다운 자유를 구하려 한다. 물론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도둑맞은 칠링워스의 사유재산, 한낱 남성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녀는 이러한 현실에 저항한 페미니스트였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 헤스터는 딤스데일이 사망한 뒤 청교도 사회를 떠나 유럽에 머물다 뒷날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와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남녀 간의 모든 관계가 상호 행복이라는 좀 더 굳건한 토대 위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으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식을 기른 최초의 편친모(偏親母)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여성 상담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설은 이처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근대적 주제의 천착을 통해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받는 헤스터와 달리 딤스데일이 끝까지 자신의 죄를 숨기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죄를 실토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두 사람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도 관련이 있다. 청교도 사회에서 간통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이지만 평범한 시민이 아닌 목사의 직분을 지닌 딤스데일에게는 더욱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는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7년 동안 자신의 죄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헤스터와 딤스데일, 두 사람의 개인적 성품 차이일 수도 있지만 사회 구성원의 정직성은 사회적 관용 수준과도 관계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보는 타인 또는 사회 전체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리고 원치 않던 낙인에 대해 좌절하고, 숨기고, 때로는 평생의 상처로 안고 간다. 그러나 그 낙인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헤스터가 ‘간음의 A’를 ‘유능함의 A’와 ‘천사의 A’로 바꿨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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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어느 한 식당에 갔다. 손님은 음식을 고르기 위해서 종업원이 소개하는 메뉴에 귀 기울어 듣는다. ‘맙소사!’ 종업원의 말을 듣는 순간 손님은 당황한다. ‘계란과 스팸, 베이컨과 스팸, 거위 간에 스팸’ 식당의 모든 메뉴에 다진 고기로 만든 통조림 햄인 스팸(Spam)이 들어간다. 손님은 스팸을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먹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쳐졌다. 다행히도 모든 음식에 스팸을 빠짐없이 넣는 별난 식당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1970년대 영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코미디 시리즈 ‘몬티 파이돈의 나는 서커스(Monty Python’s Flying Circus)’에 나온 한 장면이다.

 

 

 

스팸은 손님이 뭘 먹고 싶은지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강제로, 반복 투입된다.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수신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전송되는 스팸 메일이 그렇다. 취업에 목맨 우리 젊은 세대들이 먹는 또 다른 스팸 또한 문제다. 스펙(Spec), 열정(Passion), 학력(Academic Background) 그리고 멘토(Mentor). 취업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네 가지 조건을 다져서 만들어진 한국에서만 맛 볼 수 있다.

 

 

 

 

 

 

 

 

 

 

 

 

 

 

대학생에게 여름방학이란 ‘취업용 스팸’을 치열하게 먹는 시간이다. 도서관에는 토익과 자격증을 준비하기 위한 학생들로 가득하다. 스펙 쌓는 비결을 전수하는 수많은 멘토의 강연과 그들이 쓴 성공담에 눈이 안 갈 수가 없다. 더 나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편입에 시간을 투자하는 노력도 감수한다. ‘농활’과 같은 봉사활동은 피하고 인지도 높은 기업이 주관하는 해외봉사에 관심이 많다. 자기소개서에 쓰는 한 줄로 기업이 원하는 열정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대학생들에게 ‘열정’을 기대하지만, 사실 억지 춘향인 측면이 있다. ‘스펙보다 열정’이라고 한다지만 초라한 스펙 때문에 열정을 보여 줄 기회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대학생 멘토로 알려진 유명 작가 김원기 씨가 자신의 학력과 경력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한 일이 있었다. 이번 사건은 거짓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이력을 속인 작가도 문제지만 스펙, 열정, 학력, 멘토를 강조하는 사회적 풍토가 만들어 낸 안타까운 현상이기도 하다.

 

취업용 스팸의 맛에 길든 우리 젊은 구직자들도 거짓의 탈을 쓴 짝퉁으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이력서 부풀리기’ 신공을 발휘해 한순간에 화려한 스펙을 소유한 명문대 출신 학생으로 변신한다. 학력에 이어 요즘은 ‘경력 뻥튀기’를 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성공한 인생의 사람이 되기는 힘들어도 짝퉁은 되지 말아야 한다.

 

취업용 스팸을 권하고 강조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원하지 않아도 그것을 먹어야 한다. 먹지 않으면 달콤한 ‘성공’의 후식을 맛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취업용 스팸’ 과식의 부작용을 알면서도 점점 자유와 주체성을 잃어가는 우리들의 귓가에는 ‘스팸’을 반복해서 외쳐대는 세상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다. 스팸! 스팸! 스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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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c와색깔있는책들' 공식 페이스북에서 퍼온 것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에 대한 간윤의 청소년 유해매체물 선정에 대한 출판사의 반박 입장이다. 내용이 상당히 길다. 만화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미리 알아보고 구입한 독자도 있겠지만 타당성 떨어지는 간윤의 결정 때문에 단지 야한 장면'을 얼마나 음란한지 알아보기 위해 구입하는 기이한 현상이 나올거라 예상을 해본다. 이런 어쭙잖은 논란에 휘말려 책의 판매 부수가 늘어나는 것을 출판사 측은 탐탁스럽지 않을 것이다.    

 

 

 

 

 

 

1. 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님들, 심의는 제대로 하셨나요?

 

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간윤)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산하 단체로, 전자출판물을 포함 거의 모든 간행물의 유해성을 심의하고 있습니다. 간윤이 이 업무를 수행하여 어떤 출판물을 ‘유해하다’고 판정하면 그 출판물은 출간과 유통 자체가 금지되며,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판정하면 19세 미만 구독불가인 '청소년 유해매체'가 되어 유통에 심각한 제약이 따르게 됩니다.

간윤이 맡은 일은 법에 의거하고 있으며, 따라서 법조문의 범위 안에서 심의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과 달리, 관련법은 생각보다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얘기하신 것처럼 "노출 장면이 있으면 19금" 식이 아니에요. (청소년보호법 원문은 http://goo.gl/Ivioam 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만약 이 법이 아주 단순하고 깔끔하여 정말 기계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면, 간윤이 존재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음모를 노출하거나 언급하는 장면이 1회 이상이면 청소년 유해매체임” 식의 명확한 법 조항이 있다면, 그런 장면이 있는 소설이나 만화는 간단히 법에 의해 청소년 유해매체가 되어야겠죠. 심의위원들은 그냥 쓱 훑다가 그런 장면이 있으면 청소년 유해매체라고 선언하는 역할만 하면 됩니다. 이건 특별한 자격이 필요없어요. 눈만 잘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을 써도 됩니다. 하지만 문화상품이라는 게 그런 식의 '기계적 판단'으로 심의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 집단이 법을 근거로 하여 법조문이 지적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는 매체를, 강조하지만 장면이 아니라 매체를, 가려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간윤의 존재 자체가 법 조문의 기계적 적용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며, 따라서 간윤은 법 조문들 각각과 전체가 보호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를 제대로 판별하여 작품 심의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의를 담고 있는 대표적인 법 조항이 사진 하단의 “문학적·예술적... 측면과 그 매체물의 특성을 고려”하라는 “청소년보호법 제9조 제2항”입니다.

 

그럼 간단히 정의해 특별한 서사문학이자 그림과 문자의 조합으로 특유의 예술성을 지닌 ‘만화’ 매체인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에 대한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과 관련해 간윤이 적시한 법 조문들과 해당 장면들을 살펴볼까요? (여기서 모든 장면을 그림으로 보여드리지 못하는 점은 양해바랍니다. 인터넷에서 노출 장면을 업로드하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단속해서 그럴 수가 없어요. 장면을 분절적으로 보여드리는 건 작품 감상에도 악영향을 줄 뿐이고요.)

 

“심의결정 내역”에 따르면 “이 간행물은 외국 만화 번역물로, 스페인 내전으로 프랑스로 탈출, 제2차 세계대전때 레지스탕스 활동 후 종전과 함께 조국으로 귀국한 주인공이 프랑코 독재정권 등 유럽과 스페인의 격동적인 현대사를 온몸으로 맞이했던 자신의 아버지 일대기를 그린 내용으로,” (여기서 잠시 쉽시다. 무슨 문장이 이렇게 오류 투성이인지 타이핑도 어렵네요.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 일대기를 그린 내용”이라고요?? 읽었는지 안읽었는지도 모호하지만, ‘심의’라는 중대한 일을 감당하시기에는 국어 글쓰기 실력이 참 부족하십니다. 이어서~ 각 항목에 매긴 번호는 글쓴이가 붙인 겁니다.) “-㉠성인 남성이 16세 여성 및 ㉡직업 여성과의 성행위와 ㉢남성이 여성의 엉덩이를 만지는 성추행, ㉣남녀 간의 성애 및 성행위 장면(93-94, 136, 142, 149-154면) 등을 묘사 수록.”한 게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장면들은 “출판문화산업진흥법 제19조 제2항, 청소년보호법 제9조 제1항 제1호 제3호 및 동법 시행령 제9조 개별심의기준 나목 다목 라목 사목에 저촉.”된다고 합니다.

 

앞서 말했듯 법조문에 근거하여 판단한 것인 만큼 문제가 된 장면 각각은 적시된 법조문 중 하나라도 해당되어야 합니다. 또한 매체 특성을 고려하는 것 역시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인 남성이 16세 여성과 성행위를 한 장면(93~94면)은, 서사 상 또한 문학적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게 묘사될 필요가 있는 장면인 거죠. 이건 그냥 성행위도 아니고 굳이 '16세'가 강조될 필요도 없습니다.(참고로 이 장면의 배경은 1930~40년대입니다.) 남녀가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다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이라 보는 게 전체적 맥락에서 온당한 해석입니다. 굴러떨어지는 건 보기보다 굉장히 중요한데요, 앞서 주인공 안토니오가 친구 바실리오와 나무로 만든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 차가 부서지는 장면, 노년기에 친구와 휠체어를 달리다 역시 굴러떨어지는 장면, 또한 결정적으로 생을 마치는 낙하 등과 함께 안토니오의 몇 안 되는 행복한 시간을 그려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 속에서 행복은 늘 낙하의 이미지를 수반하거든요.(작품의 원제가 "비행의 기술"입니다.) 이건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속 성애 장면들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는 문학적이고 만화적인 장치인 거예요.

 

㉡직업 여성과의 성행위 장면(136면)의 경우는 아주 짧게 안토니오의 고뇌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단 두 컷으로 처리된 이 장면은 서사적으로는 ㉢에서 논할 장면들의 맥락과 닿아있으며, 안토니오의 정서를 드러내고 프랑코주의 치하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해당 장면에서 안토니오가 바로 그 행위를 후회하고 있으며, 작품이 "매춘 행위"를 긍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칸 속 독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창녀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쾌락만을 주니까… 하지만 그녀들의 벗은 모습도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마치 죄를 짓는 듯한 느낌이었다…"

 

㉢은 다시 논하기로 하고 ㉣남녀 간의 성애 및 성행위 장면을 살펴봅시다. 적시된 페이지를 감안할 때 여기 포함될 수 있는 장면은 이미 논한 ㉠과 ㉡을 제외하면, 부부 간의 성행위 및 안토니오와 콘차의 불륜 장면입니다.(142, 150-154면) 부부 간의 성행위는 단 세 컷인데요. 이 장면들은 전혀 음란하게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노출도 거의 없고요. 안토니오의 아내 페트라는 성관계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 장면은 바로 그것을 드러냅니다. 안토니오는 결혼을 했음에도 욕구불만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직장 동료 앙헬의 아내인 콘차와 안토니오의 불륜 장면은 이 작품에서 이례적으로 길고 육감적으로 처리된 장면입니다. 안토니오의 당시 상황에 대한 불만과 윤리적 타락을 드러내는 장면인데요, 이를 통해 안토니오의 욕구불만이 얼마나 심각한지가 설명됩니다. 동시에 콘차의 벌거벗은 몸이 여러 컷에서 다뤄지는 건 친구 앙헬이 콘차를 구타해왔다는 것을 콘차의 몸에 가득한 멍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 이후로는 더이상 불륜 장면이 없습니다. 안토니오가 스스로 콘차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윤리적 결단을 내리거든요. 어쨌거나 이 부분은 분명 장면만 보면 야합니다. 하지만 역시 "롤리타"와 "상실의 시대" 속 야한 장면 정도입니다. 글쓴이는 이런 작품들이 몇몇 장면들 때문에 '청소년 유해매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매체적인 또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특성을 감안한다면요. 이 작품들이 아니라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도 이 장면 때문에 '청소년 유해매체'가 되어야 하지는 않을 것이고요.(형평성과 관련한 문제는 또 다른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림도 함께 붙인 “㉢남성이 여성의 엉덩이를 만지는 성추행” 장면을 다뤄 봅시다. 이 장면 어떠세요? 149쪽만 보면 "성추행을 묘사”한 게 맞을 겁니다. 그런데 154쪽을 보면요? 주인공 안토니오가 다른 남자(앙헬)의 성추행을 저지하는 장면을 묘사한 거 아닌가요? 이게 출판문화산업진흥법 제19조 제2항: “음란한 내용을 노골적으로 묘사하여 사회의 건전한 성도덕을 뚜렷이 해치는 것”에 해당하나요? 아니면 사진 속에 노란색으로 표시한 다른 법 조문들 중 하나라도 해당하나요? 여러분이 법의 눈으로 이 그림을 성추행 묘사로 볼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봐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매체를 대상으로 한 법을 장면을 중심으로 적용하는 간윤의 판단을 비판하다 보니 이 글도 장면 중심으로 서술되었지만, 바로 그걸 통해서 간윤이 정말 심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게 드러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 장면을 간윤이 음란성에 해당하는 항목으로 적시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간윤 심의위원들이 전체내용을 보지 않았다는 게 드러나거든요. 청소년보호법 시행령에 따르면 "심의위원 중 최소한 2명 이상이 해당 매체물의 전체 내용을 파악한 후 심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전체 내용을 파악했다면, 이 장면을 성추행 묘사로 판단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게 그에 해당한다면, 성추행을 막기 위한 어떤 작품의 어떤 상황 묘사도 ‘성추행 묘사’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이 대목을 성추행으로 판단했다는 건 “전체 내용을 파악”하지 않고 149쪽만 보았다거나, 154쪽의우측 컷은 무시하고 좌측 컷만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간윤 위원님 중 최소 2명이 법을 어기고 심의한 셈이잖아요. 다른 대목들은 백번 양보해서 해석의 차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손 쳐도, 이건... 정말 명백히 문제가 있습니다.

 

“간행물윤리위원회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균형된 심의를 통해 건전한 출판문화 조성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를 위해 진정성과 열정을 가지고 정직과 청렴을 기치로 삼아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겠습니다.”

 

홈페이지 소개글에 있는 간윤 이근배 위원장 님의 말씀입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법 조항에도 없는 '기계적' 판단으로 예술성과 문학성이 있는 작품 속에서 일부 장면만을 문제 삼는 '내용중심주의'를 버리고 전체적인 맥락을 두루 살펴서 심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부 야하다고 할만한 내용이 있었음에도, 이 작품을 읽고 리뷰 써주신 분들에게는 그 장면들이 문제되지 않았는데, 그건 작품을 작품으로 읽었기 때문일 겁니다. 부디 위원님들도, 바쁘시겠지만, 작품은 작품으로 읽어주세요. 야한 장면만 찾아 보는 건, 이제 그만하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법 시행령에서도 이렇게 적시하고 있잖습니까! "심사위원 중 최소한 2명 이상이 해당 매체물의 전체 내용을 파악한 후 심의할 것"

 

 

- 다음 글에서는 제도 자체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예정입니다. "'청소년 유해매체'라서 19금인가요, 19금이어서 '청소년 유해매체'인가요?""19금이라면서 왜 성인의 접근권도 제한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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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8-0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간행위의 행위는 그냥 병맛이지요.그냥 자기 밥그릇 챙기기위해서 하는 행동같습니다.이걸보니 아주 오래전에 백투더퓨쳐란 영화가 근친상간을 연상시킨다면서 국내에 상영불가를 하려고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생가나네요ㅡ.ㅡ

cyrus 2013-08-12 23:28   좋아요 0 | URL
간윤의 백두터퓨처 태클, 코미디네요. 재밌어요ㅎㅎㅎ 타임머신 원리의 문제점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부모 중 한 사람과 사랑하게 된다면 미래가 꼬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근친상간 연상은 너무 나갔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