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의 구조 - 출간기념50주년 제4판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 까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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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트겐슈타인의 오리? 토끼?

 

 

만일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식생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우리의 ‘젓가락’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손으로 식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젓가락을 공사 중에 사용하는 삽과 같은 도구로 생각하고 불필요한 물건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문화 안에서 젓가락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대상을 떠올리고 그 대상에 해당되는 단어를 사용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오리라고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이것을 토끼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은 불변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의 차이에 의해 해석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을 보고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의 틀이 있고 그 틀 위에서 사물을 새롭게 이해하고 재정립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7’이란 수를 동양에서는 좋은 수로 생각하지만, 서양에서는 좋지 않은 수로 생각하는 것은 사물을 이해하기 전에 사물을 해석하는 사회적인 틀이 각 사람마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현상과 사물이라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현상과 사물을 보는 눈이 서로 다른 사람이 있다면 패러다임(Paradigm)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에 보는 시각에 변화가 있으면 패러다임이 전환(Paradigm Shift)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관점이 바뀐 것이다.

 

 

 

 ♣ 과학은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패러다임’이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를 말한다. 1962년 미국의 철학자 토머스 쿤이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주변 세상을 지각하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토머스 쿤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찰스 다윈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이 책(『종의 기원』)에서 제시된 견해들이 진리임을 확신하지만, … 오랜 세월 동안 나의 견해와 정반대의 관점에서 보아왔던 다수의 사실들로 머릿속이 꽉 채워진 노련한 자연사학자들이 이것을 믿어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데, 편견 없이 이 문제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을 젊은 신진 자연사학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262~263쪽)

 

 

다윈은 왜 이렇게 이야기했을까? 쿤은 왜 이 이야기를 인용했을까? 다윈은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든 지식체계를 완전히 뒤바꾸는 학설을 발표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윈 스스로 이 이야기를 과학자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토마스 쿤은 다윈이 완전히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면서 기존의 사고 틀을 뒤집었던 것처럼 과학이 발전해 왔다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결국, 과학은 ‘발전해 온’ 것이 아니고 ‘이어져 온’ 것이다.

 

과학과 지식은 일반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이어져 왔을까? 정상과학의 시기에는 하나의 패러다임 하에서 연구 작업이 이루어진다. 패러다임이란 기본형, 표준형이다. 패러다임이란 말은 원래 쿤이 언어학에서 차용한 용어인데, 한 동사의 기본형에서 온갖 활용어가 파생되듯이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여러 가지 과학적 인식과 모델이 생겨난다. 따라서 과학적 인식뿐만 아니라 과학적 이론, 나아가 과학자 집단의 공유된 관념과 가치관, 관습까지도 모두 그 지배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한 패러다임을 의문시하는 과학적 증거들이 누적되고 시기가 무르익으면 그 모순은 곪아터지게 된다. 이렇게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을 때 촉발된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정상과학에서 누적된 성과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을 연장하는 선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불연속적으로, 비약적으로, 단절적으로 일어난다. 이때 기존의 것은 철저하게 부정된다.

 

다윈 이전에도 진화론과 비슷한 학설은 많았다. 그런데 다윈 이외의 학자들은 ‘생명체는 어떤 목적을 향해서 발전해 온 것이며, 어떤 미개한 존재가 인간으로 된 것 역시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윈이 그것은 ‘발전’이 아니고 순전히 ‘자연의 선택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다윈의 이론을 받아들이려면 생명체에 대한 개념 규정을 새로 해야 하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인간의 정체성 또한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존의 사고 체계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웬만해선,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을 때까지 새로운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우리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쿤의 과학관

 

장기 게임을 예로 든다면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것은 ‘게임에서 이기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장기의 규칙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쿤이 말했듯이 발전이라는 것은 기존의 어떤 것을 더 개선시키는 일이고, 결국은 과거의 어떤 것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전혀 새로운 이론을 등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것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결국 과학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변환된다. 그래서 과학은 ‘발전이 아닌, 완전히 뒤바뀌는 혁명’을 거듭하는 전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역사는 마치 계속 발전해 온 것처럼 포장되고, 과학 교과서는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 기술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지금까지 과학의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고, 젊은 과학도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할 수 있으니까. 과학이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발전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도 있겠다.

 

쿤은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전혀 해답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출간 50주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쿤의 과학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이 책을 읽고, 연구하는 과학자나 독자들은 지금도 쿤이 이 책을 통해 던지고자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과학이 이렇게 패러다임의 전환을 거듭해 간다면, 과학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과거와 연결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이론의 등장이 과학사를 통째로 뒤바꾼다면 과학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패러다임이 전환 가능하다면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궁금하다면 그 답은 책을 읽는 우리가 찾아야한다. 출간 100주년에 이를 즈음에 미래의 독자와 연구가들은 쿤의 과학관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표시하고,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탐구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쿤의 과학관을 논하는 이 과정 또한 ‘패러다임 전환’으로 볼 수 있겠다.

 

우리는 ‘패러다임’이라는 꽤 정의하기 어려운 말을 마구 쓴다. 심지어 과학뿐만 아니라 사회나 역사 전체를 구성하는 과정을 설명할 때도 사용한다. 또 행정학에서도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게 사용한다. 그러나 이 책을 단 한 번이라고 읽은 사람들 중에 ‘패러다임’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현재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의 서문이 추가되고, 새롭게 개정된 번역본을 읽었지만, 여전히 ‘패러다임’이라는 단어 속에 있는 방대한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버겁게 느껴진다. 개정판을 읽으면서 ‘패러다임’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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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식탁 - 우리는 식탁 앞에서 하루 세 번 배신당한다
마이클 모스 지음, 최가영 옮김 / 명진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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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콜릿의 노예가 된 아이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은 어린아이처럼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개만 먹으면 코스요리를 맛볼 수 있는 풍선껌이나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 민트로 이루어진 풀밭은 군것질거리에 애틋해하는 철없는 사람만이 생각해낼 수 있다. 아마도 로알드 달은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초콜릿과 캔디가 넘쳐나고, 공장의 주인이 창조자처럼 군림하며, 심술궂은 아이들을 마음대로 혼내줄 수 있는.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웡카 초콜릿'. 도대체 그 많은 초콜릿을 누가 어떻게 만드는지 20년 동안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초콜릿의 마술사 윌리 웡카는 그 비밀 공장을 견학하고, 평생 먹을 초콜릿을 얻을 수 있는 황금티켓 5장을 전 세계에 배포한다. 5명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하기 위해. 착하고 속 깊은 찰리를 빼고 황금티켓을 거머쥔 아이들은 저마다 욕심을 부리다 중도에서 무시무시한 벌을 받고 탈락한다.

 

 

 

 

 

 

 

첫 번째 탈락자는 게걸스럽게 초콜릿을 탐하던 먹보 아우구스투스. 그는 초콜릿으로 따끈하게 녹여 만든 강물을 통째로 들이마실 정도로 언제나 초콜릿을 입에 달고 산다. 권장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그는 초콜릿을 즐기는 대신 초콜릿의 노예가 되는 비참한 꼴을 당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말할 것도 없이 ‘초콜릿’이다. 이 초콜릿에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매력적인 함의가 있다. 우선 초콜릿의 맛을 생각해 보라. 물론 달지만, 어딘지 쌉쌀한 뒷맛도 난다. 이 영화 속 초콜릿은, 단맛과 쓴맛처럼 두 개의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

 

먼저 단맛에 해당하는 긍정적인 의미는 ‘동심’과 ‘꿈’이다. 웡카는 초콜릿을 통해 동심과 꿈을 키워 왔다. 반대로 쓴맛에 해당하는 부정적인 의미는 ‘탐욕’이다. 온통 초콜릿으로 이뤄진 꿈의 장소 초콜릿 공장. 그러나 남보다 더 많이 먹으려 하거나(아우구스투스), 남을 무조건 이기려 하거나(바이올렛), 원하는 건 뭐든 소유하려 하거나(버루카), 잘난 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마이크) 마음을 가진 아이들은 벌을 받는다.

 

결국 이야기는 초콜릿이라는 귀중한 자원을 인간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교훈을 들려준다. 동심을 품은 사람에게 초콜릿은 그 자체로 ‘달콤한 행복’이지만,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 초콜릿은 ‘자멸의 지름길’일 뿐이다.

 

 

 

 ♣ ‘맛의 삼각형’(Taste triangle), 단맛·소금·지방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로알드 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처럼 초콜릿의 맛에 중독된 아이들은 갈수록 늘어난다. 아이들의 욕심을 절제하는 윌리 윙카처럼 착한 초콜릿 공장주는 그저 이야기 속의 가공인물일 뿐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단맛의 노예가 되고 있다. 단 음식의 지나친 섭취가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단맛에 탐닉하게 되는 걸까?

 

스트레스를 받으면 유독 단 음식을 찾는 사람이 있다. 단맛이 일종의 쾌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맛에 익숙해지면 더 강한 단맛을 찾게 된다. 예전에 비해 설탕 섭취량이 크게 증가한 원인은 가공과정 중 설탕이 첨가된 식품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탄산음료가 설탕의 가장 큰 공급원이 되고 있고 에너지음료도 설탕의 함량이 높은 편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단맛에 중독되어 있다. 초코 쿠키의 대명사로 꼽히는 ‘오레오’ 쿠키가 코카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점은 우리는 단맛이 나는 초콜릿뿐만 아니라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가공식품의 조작된 맛에도 중독되어 있다. 누구나 가공식품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지만, 쉽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데다 맛도 좋기 때문에 즐겨 찾는다. 그동안 우리는 맛 좋고 간편한 가공식품을 먹을 수 있어서 뱃속 시계의 작동을 멈출 수 있었지만, 혀는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가공식품의 맛에 길들이고 말았다.

 

가공식품 기업들은 윌리 윙카의 초콜릿 공장이 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소금, 설탕, 지방의 물리적 형태와 구조에 손을 댔고, 우리의 뇌와 혀는 그들이 만든 단맛, 짠맛, 기름진 지방의 유혹에 벗어날 수 없었다. 소금은 가공방식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을 정도로 흔한 조미료인데다가 처음 한 입 베어 문 순간 혀끝을 짜릿하게 만든다. 지방은 칼로리가 가장 높으며, 많이 먹어도 몸에 특별한 증상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음식을 손에서 놓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세 가지의 권력 유착 관계를 ‘철의 삼각형’(Iron triangle)이 있다면, 식품 기업들 사이에서는 모든 소비자들의 맛에 영향을 미치는 ‘맛의 삼각형’(Taste triangle)이 있다. 다르지만 서로 비슷한 이 세 가지 맛을 통해 가공식품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리게 만들어 맛보도록 견고한 카르텔을 작동했다. 우리 소비자들은 이런 가공식품 기업의 교묘한 속임수와 거짓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식품기업들은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써가며 건강식품, 기능식품, 유기농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를 속여 왔다. 미량의 건강 성분을 넣은 뒤 설탕 덩어리와 다름없는 제품을 건강식품으로 팔거나, 효능이 입증되지 않은 기능 식품을 비싸게 판매해 폭리를 취한다. 켈로그, 네슬레 등은 어린이 간식이나 어린이 식사용 제품을 내놓고 있지만 실체는 설탕범벅 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비자가 꼭 알아야 할 정보는 감추고, 허위·과대광고가 많은 것도 이들 업체의 특징이다.

 

예컨대 켈로그는 어린이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학교에 재정을 지원하는 일종의 마케팅 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 행사를 통해 켈로그 '착한 기업' 이미지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설탕범벅 시리얼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어린이들이 즐겨 먹는 아침 식사’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설탕 과다 섭취의 문제점을 알며 자녀들에게 설탕을 많이 먹는 걸 원치 않는 부모님들은 켈로그의 마케팅을 선호했다. 겉으로는 영양 교육에 발 벗고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사 제품을 쏟아내 어린이 소비자의 입맛을 길들이려는 의도인 셈이다. 대다수 소비자들은 이미지 마케팅을 활용한 식품기업들의 눈속임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 분별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더욱 큰 피해로 다가올 수 있다.

 

 

 

 ♣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맛의 싸움

 

집에서 먹는 밥이 최고다?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 통념을 신봉하지 마라. 가공식품이 식재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상 우리 몸은 유해 물질로 그득할 뿐이다. 실로 슈퍼마켓 진열대마다 가공식품이 넘쳐난다. 무심코 카트에 담는 이것들에는 몸에 필요한 칼슘, 무기질, 비타민 등 필수영양소 대신 소금, 설탕, 지방 등이 가득하다. 그러니 아무리 아이와 가족 건강을 위해 가공식품으로 만든 음식이 놓인 식탁을 엎는 들 소용없는 일이다.

 

지금도 가공식품 기업 산하 연구소에서는 맛의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 흰 가운 입은 연구자들이 실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식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발에 소금, 설탕, 지방 중 어느 하나에 비난 여론이 집중될 때마다 문제가 된 성분을 빼고 다른 성분을 그만큼 더 넣는다. 좋은 성분 하나만 강조함으로써 소비자가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게 하는 전술이다. 이들은 시정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소비자 보호단체의 공세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 소비자에게 식품을 많이 팔리고 이익을 얻기 위한 기업과 건강에 좋은 영양분이 가득한 맛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소비자들 간의 갈등은 오랫동안 이어지겠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맛의 싸움일 뿐이다.

 

러시아의 시인 뿌쉬낀은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찾아 온다고 썼다. 허나 그동안 먹어왔던 가공식품이 우리의 맛을 속일지라도 노여움과 분노의 감정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가공식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게 된 이상, ‘맛의 삼각형’에 중독된 입맛을 고치는 일만 남았다. 설탕, 소금, 지방을 많이 찾는 식탁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 ‘윌리 윙카’가 되어야 한다. 미각을 죄어왔던 ‘맛의 삼각형’을 파괴해야 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가공식품 광고의 허상을 파악하고, 불편하더라도 가공식품 위주의 식습관을 줄여야 할 것이다. 식탐의 나날 참고 견디면, 건강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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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사람이 사랑이라 믿고 살다 보면 온몸에 상처가 나고, 뒤틀린 형태와 내 삶의 옹색한 크기가 정해지게 마련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야겠지만, 잠시 거기에서 벗어난 내 사랑을 온전히 보고 싶다면

 

지금 헐벗은 자기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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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11-08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자신이 단단해져야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상대방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cyrus 2013-11-08 21:01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디킨슨의 짧은 시를 읽으면서 그동안 느꼈던 사랑에 대한 제 생각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었어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근원적 성찰
울리히 벡.벡-게른스하임 지음, 강수영 외 옮김 / 새물결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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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환상

 

사랑이란 무엇일까? 참으로 어려운 물음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남녀 간의 낭만적인 관계, 행복한 결혼 생활, 단란한 가정. 일상적이면서도 당연한 내용이지만 이런 것들이 과연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사랑이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어떤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그런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 그토록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겨워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역사 속에서 '사랑'에 대한 생각이 언제나 한결 같았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관념들은 대부분이 근대 부르주아 사회 이후에 형성된 것들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의 사랑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관념체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중세의 사랑도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과는 많이 다르다.

 

울리히 벡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랑'이 철저히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임을 밝혀내고 있다. 사랑, 결혼, 가족 과 같은 문제들이 결코 개인적인 영역의 것들이 아니라, 산업사회에서의 노동력의 문제, 남성과 여성의 노동시장에서의 역학관계 등의 '사회적인' 영역의 문제임을 그는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되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고귀한' 내지 '모든 존재들의 간극을 메워주는 위대한' 사랑이란 그저 부르주아적 산업사회가 만들어내는 환상임을 울리히 벡은 지적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모든 개인들은 봉건적 전통으로부터 분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개인화'이며, 비록 그것이 개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 개인들은 세상에 '홀로' 내던져지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독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홀로 내던져진' 개인들 간의 결합을 중요시하는 관념이 생겨났다. 이런 사실들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근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현실에서 사랑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은 개인적인 영역의 것이다'는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개인화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개인들을 아우르고 있는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그런 사회경제적 구조들과의 연관성이 같이 이야기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사랑에 대한 혼란'은 남녀 당사자들의 성격적인 결함으로만 치부되기 십상이다. 결국, 우리는 사랑의 본질 내지 현실을 보려하지 않은 채 '환상'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그렇게 미친 짓은 아니다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5분여쯤을 주인공 토토가 혼자서 수많은 영화의 감미로운 키스신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렇게 낭만적이다 못해 차라리 애처로운 어떤 것으로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랑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다. '결혼'(또는 '동거')으로 이어지고, 가족을 이루면서 임신과 출산, '아이'의 문제가 계속해 따른다. 그러면서 낭만은 저 멀리로 증발하고 삶의 전투가 벌어진다. 이것은 나와 그(녀) 사이 둘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의 문제이자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이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연애의 시간을 넘어 결혼을 결심하려는 단계에만 이르러도 막중한 무게를 느끼게 될 정도다.

 

사회가 점점 복잡할수록 인간의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던 사랑, 결혼은 사회적인 문제로 탈바꿈해 간다. 몇 년 전에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변덕스럽고도 자연스런 감정의 움직임인 사랑을 왜 결혼이라는 제도로 구속하는 걸 반대한다. 낡은 조건과 새로운 의식의 각성은 상호 충돌하게 마련이다. 급증하는 한국의 이혼율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60대 부부의 황혼 이혼이 급증하고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한다. 왜 결혼을 하는 것일까? 인간의 합리성이 아직도 결혼을 '할 만한 것'으로 보는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 '정서적인 헌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어 저자는 가족과 결혼은 사라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모호한 말을 던진다. 왜냐하면 "현대(의 개인화)는 여성과 남성들이 헤어지도록 몰아가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양쪽을 서로의 품안으로 다시 밀어 넣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독의 위협이야말로 결혼의 가장 믿을 만한 토대"라고 말한다.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 싶다면 단순히 '미친 짓'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사랑이나 결혼은 섹스에 대한 생물학적 욕구보다는 정서적인 자기 안정감 또는 소속 의식을 획인하려는 노력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사랑과 결혼보다 인간에게 우선하는 것이 혼자 있지 않기 위한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이혼한 후 남성들이 자신의 혈육에 무섭도록 집착하는 것도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 지독한 혼란을 줘도 사랑은 위대하다

 

 

 

 

 

클래스 올덴버그 「빨래집게」 1976년

 

 

이제 사랑을 위해 결혼한다는 것이 더 이상 가족의 구성, 물질적 안정, 부모 되기 등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측면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기의 개인적인 길을 따라 아주 멀리까지 과감히 나가되 파트너의 끊임없는 후원과 동료애에 기댐으로써 이 두 세계가 가진 최상의 것을 얻는 것을 뜻한다. (293쪽)

 

 

 

최근 들어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회적 이야기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과연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왜 결혼을 해서 가족을 형성하는지. 이 질문들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만 한다. 설령 정답이 없고, 그 정답을 추구하는 과정이 지독하게 혼란스럽더라도. 그러기에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인 것이다. '정상'이 '혼란'이 되고 이혼은 또 다른 결혼을 부른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릴 만큼 가혹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다.

 

하지만 사랑의 반대말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건 '외로움' 즉, 고독의 감정이다. 사회가 무수히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찾아낼 실마리를 대라면 인간의 고독 탈피 욕구에서 찾고 싶다. 그래서 인간은 오늘도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맨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고독을 견디고 일상의 힘겨움을 공유하며 긍정적인 생활 감정으로 발현해 가도록 노력하는 성숙한 두 인격체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위해 함께 살 것이냐, 따로 살 것이냐, 함께 산다면 어떻게 살 것이냐를 목하 고민 중에 있다고 해도, 사랑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위대한 감정의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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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11-0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동생 교양 리포트 땜시 책이 집에 있어서 읽었던 기억이 살포시~ 사랑해도 고독도 때때로 찾아와~ ㅋㅋㅋ

cyrus 2013-11-07 20:05   좋아요 0 | URL
그렇죠. 고독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악의 감정인거 같아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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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티카를 읽는다』 스티븐 내들러 / 그린비

 

 

저번 기수 신간평가단 활동했을 때 읽은 책 중에 눈물 닦고 스피노자라는 것이 있었다. 추천도서 페이퍼를 작성할 때 이 책을 추천하지 않았다. 스피노자가 유명한 철학자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때 내가 너무나도 읽고 싶은 책이 여러 권 있어서 특별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결국 눈물 닦고 스피노자가 신간평가단 도서로 선정되었는데 생각보다 흥미롭고 인상 깊게 읽었다. 스피노자가 쓴 유명한 에티카속 내용을 토대로 현대 사회가 만들어 낸 마음의 병을 진단하는 일종의 철학 힐링류의 내용이었다. 역시 왜 스피노자가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받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에티카읽기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마음먹고 시중에 번역된 에티카를 구입해서 정독하고 싶었으나 마음 가는대로 가고 싶은 곳에 가는 나그네처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잡독을 하는 내 독서 성향상 아직까지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더 솔직하게 말자하면 무작정 에티카를 읽기에는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스티븐 내들러의 에티카를 읽는다출간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상당히 반가웠다. 이런 입문서부터 읽기 시작하면 바로 텍스트를 정독하는데 수월하다. 이 책의 저자는 스피노자 연구에 정평이 나 있으며 이미 스피노자의 일대기와 철학 사상의 발달 과정을 정리한 스피노자 :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는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출간됐다. 에티카의 핵심을 대중적으로 소개한 입문서가 우리나라에 많지 않을 걸로 기억된다. ..고등학생들 논술시험 대비를 위해 스피노자 사상의 기본적인 핵심을 소개하거나 에티카다이제스트 등의 책들을 제외하면. 이 책이 선정된다면 이번엔 진짜 정본 에티카를 구입할 것이다.

 

 

 

 

 

 

 

 

 

 

 

 

 

 

 

 

 

 

 

* 내가, 그림이 되다』 마틴 게이퍼드 / 디자인하우스

 

 

우리나라에도 유명 화가나 아티스트의 행적 또는 예술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들이 많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급격하게 변하는 현대미술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거 같다. 항상 새로운 유행이 등장하고 금방 지나가고, 지금 수많은 아이돌 가수들이 봇물 터지듯이 나오다가 대중의 인기를 외면 받지 못하면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처럼 현대미술계 또한 그렇다. 하루아침 일어나면 새로운 예술가들이 등장하여 대중에게 주목받는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컨템퍼러리(동시대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지 않은 사실이다. 작품 하나가 공개할수록 매번 최고 경매가를 기록하는 데미언 허스트, 최근 대구미술관에서 특별전을 성황리에 마친 일본의 쿠사마 야요이가 그렇다. 그래도 가끔 예술을 좋아하는 독자가 반가울만한 책이 나오긴 한다. 최근에 데이비드 호크니를 다룬 책이 나왔고, 마침 같은 시기에 루시안 프로이트의 삶과 예술을 소개하는 책이 나왔으니 바로 마틴 게이퍼드의 내가, 그림이 되다이다. 마틴 게이퍼드는 미술평론가로서 이미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담을 정리한 다시, 그림이다가 국내에 번역되었다.

 

루시안 프로이드는 상당히 사실적으로 초상화를 많이 제작하는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초상화 혹은 인물화는 척 클로스의 극사실주의적 초상화에 근접하지는 않지만, 굵은 덧칠로 행하는 붓 터치로도 인물의 피부 그리고 표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척 클로스의 극사실주의가 너무나도 완벽에 가까운 사실이라면, 프로이드는 추상회화적인 느낌이 있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야 될까? 마틴 게이퍼드는 생전 프로이드의 그림 작업을 지켜보면서 그와 나눈 대화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인상들을 한 권의 일기 형식으로 풀어냈다. 저자는 흔히 비평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게 되는 주관적인 시선의 덧칠을 하지 않는다. 프로이드가 모델을 나름 사실적으로 표현하듯이, 저자 또한 온전히 프로이드 자체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 1913,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 문학동네

 

 

읽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흥미로운 유럽문명사에 관한 주제인데다 의외로 이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높아서 추천해봤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신간평가단원 중에 지금까지 이 책을 추천한 분,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1913년이라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해에 근대 유럽사회의 문명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지 그 해의 문명사를 소개하고 있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제목을 비유하자면 응답하라 1913’ 정도일 것이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 때 당시 대중문화의 풍경을 응답하라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913, 세기의 여름은 이름만 들면 알만한 예술가들이 총출동한다. 카프카, 릴케, 프루스트, 프로이트, 피카소, 클림트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행적을 한 장의 모자이크처럼 펼치며 동시에 1913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근대 문화의 향연을 재현하고 있다.

 

 

 

 

 

 

 

 

 

 

 

 

 

 

 

 

 

 * 『온도계의 철학』 장하석 / 동아시아

 * 『돈의 철학』 게오르그 짐멜 / 길  

 

 

출간되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 신간평가단이 가장 많이 추천하고 있는 책이다. 하필 두 권의 책 제목에 철학이 들어가 있다. 워낙 많이 소개하고 있는 도서라 굳이 간략한 소개는 생략하고 싶다. 사실 이번 달 신간평가 추천도서로 이 두 권으로 정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가장 높은 추천 수를 받았으나 선정되지 못할 수 있다.

 

장하석 교수의 책은 이미 출간되지 전부터 구입하려고 벼르고 있던 터라, 이번 선정도서 결과를 보고 난 후에 구입할 생각이다. 그런데 평가단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추천받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선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해당 출판사가 알라딘의 도서정가제 반대에 맞서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알라딘과 해당 출판사와의 입장 차가 원만하게 좁혀지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도서 선정 과정에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짐멜의 책 같은 경우에는 분량이 많다는 점에서 선정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막스 베버, 마르크스에 비해 저평가 받은 짐멜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라 조금은 속물적이지만 솔직히 신간평가단 제도를 통해 정가 55000원 가격의 책을 공짜로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다만 정해진 서평 작성 기간 내 완독은 물론 서평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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