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근원적 성찰
울리히 벡.벡-게른스하임 지음, 강수영 외 옮김 / 새물결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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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환상

 

사랑이란 무엇일까? 참으로 어려운 물음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남녀 간의 낭만적인 관계, 행복한 결혼 생활, 단란한 가정. 일상적이면서도 당연한 내용이지만 이런 것들이 과연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사랑이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어떤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그런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 그토록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겨워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역사 속에서 '사랑'에 대한 생각이 언제나 한결 같았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관념들은 대부분이 근대 부르주아 사회 이후에 형성된 것들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의 사랑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관념체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중세의 사랑도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과는 많이 다르다.

 

울리히 벡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랑'이 철저히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임을 밝혀내고 있다. 사랑, 결혼, 가족 과 같은 문제들이 결코 개인적인 영역의 것들이 아니라, 산업사회에서의 노동력의 문제, 남성과 여성의 노동시장에서의 역학관계 등의 '사회적인' 영역의 문제임을 그는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되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고귀한' 내지 '모든 존재들의 간극을 메워주는 위대한' 사랑이란 그저 부르주아적 산업사회가 만들어내는 환상임을 울리히 벡은 지적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모든 개인들은 봉건적 전통으로부터 분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개인화'이며, 비록 그것이 개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 개인들은 세상에 '홀로' 내던져지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독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홀로 내던져진' 개인들 간의 결합을 중요시하는 관념이 생겨났다. 이런 사실들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근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현실에서 사랑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은 개인적인 영역의 것이다'는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개인화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개인들을 아우르고 있는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그런 사회경제적 구조들과의 연관성이 같이 이야기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사랑에 대한 혼란'은 남녀 당사자들의 성격적인 결함으로만 치부되기 십상이다. 결국, 우리는 사랑의 본질 내지 현실을 보려하지 않은 채 '환상'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그렇게 미친 짓은 아니다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5분여쯤을 주인공 토토가 혼자서 수많은 영화의 감미로운 키스신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렇게 낭만적이다 못해 차라리 애처로운 어떤 것으로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랑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다. '결혼'(또는 '동거')으로 이어지고, 가족을 이루면서 임신과 출산, '아이'의 문제가 계속해 따른다. 그러면서 낭만은 저 멀리로 증발하고 삶의 전투가 벌어진다. 이것은 나와 그(녀) 사이 둘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의 문제이자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이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연애의 시간을 넘어 결혼을 결심하려는 단계에만 이르러도 막중한 무게를 느끼게 될 정도다.

 

사회가 점점 복잡할수록 인간의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던 사랑, 결혼은 사회적인 문제로 탈바꿈해 간다. 몇 년 전에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변덕스럽고도 자연스런 감정의 움직임인 사랑을 왜 결혼이라는 제도로 구속하는 걸 반대한다. 낡은 조건과 새로운 의식의 각성은 상호 충돌하게 마련이다. 급증하는 한국의 이혼율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60대 부부의 황혼 이혼이 급증하고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한다. 왜 결혼을 하는 것일까? 인간의 합리성이 아직도 결혼을 '할 만한 것'으로 보는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 '정서적인 헌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어 저자는 가족과 결혼은 사라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모호한 말을 던진다. 왜냐하면 "현대(의 개인화)는 여성과 남성들이 헤어지도록 몰아가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양쪽을 서로의 품안으로 다시 밀어 넣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독의 위협이야말로 결혼의 가장 믿을 만한 토대"라고 말한다.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 싶다면 단순히 '미친 짓'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사랑이나 결혼은 섹스에 대한 생물학적 욕구보다는 정서적인 자기 안정감 또는 소속 의식을 획인하려는 노력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사랑과 결혼보다 인간에게 우선하는 것이 혼자 있지 않기 위한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이혼한 후 남성들이 자신의 혈육에 무섭도록 집착하는 것도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 지독한 혼란을 줘도 사랑은 위대하다

 

 

 

 

 

클래스 올덴버그 「빨래집게」 1976년

 

 

이제 사랑을 위해 결혼한다는 것이 더 이상 가족의 구성, 물질적 안정, 부모 되기 등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측면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기의 개인적인 길을 따라 아주 멀리까지 과감히 나가되 파트너의 끊임없는 후원과 동료애에 기댐으로써 이 두 세계가 가진 최상의 것을 얻는 것을 뜻한다. (293쪽)

 

 

 

최근 들어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회적 이야기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과연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왜 결혼을 해서 가족을 형성하는지. 이 질문들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만 한다. 설령 정답이 없고, 그 정답을 추구하는 과정이 지독하게 혼란스럽더라도. 그러기에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인 것이다. '정상'이 '혼란'이 되고 이혼은 또 다른 결혼을 부른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릴 만큼 가혹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다.

 

하지만 사랑의 반대말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건 '외로움' 즉, 고독의 감정이다. 사회가 무수히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찾아낼 실마리를 대라면 인간의 고독 탈피 욕구에서 찾고 싶다. 그래서 인간은 오늘도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맨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고독을 견디고 일상의 힘겨움을 공유하며 긍정적인 생활 감정으로 발현해 가도록 노력하는 성숙한 두 인격체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위해 함께 살 것이냐, 따로 살 것이냐, 함께 산다면 어떻게 살 것이냐를 목하 고민 중에 있다고 해도, 사랑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위대한 감정의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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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11-0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동생 교양 리포트 땜시 책이 집에 있어서 읽었던 기억이 살포시~ 사랑해도 고독도 때때로 찾아와~ ㅋㅋㅋ

cyrus 2013-11-07 20:05   좋아요 0 | URL
그렇죠. 고독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악의 감정인거 같아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