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정치가이자 뛰어난 문인이었던 키케로는 ‘책 없는 방 안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 말했다. 르느와르의 그림 「책 읽는 여인」을 보고 있으면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책을 읽을 때 육체에 영혼이 깃든다’고. 독서를 하고 있는 여인의 빛나는 얼굴은 그녀의 삶 속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생기 있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 같다. 이 여인의 모습을 보면 독서를 통해 간접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넓히고 인격을 높인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모두가 예찬할 것 같은 독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특히 의외로 철학자들 모두가 독서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경우 책을 구성하는 문자 자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대화편 『파이드로스』를 보면 문자의 고안에 대한 신화가 하나 나온다. 이집트의 신은 수, 기하학, 천문학에 이어 문자를 고안한 후 왕에게 보여준다. 왕이 문자의 용도를 묻자 신은 인간을 더 지혜롭게 만들며 인간의 기억력을 향상시켜 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인간은 문자와 글에 대한 믿음 때문에 외부의 기호에만 의존하고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기억해 내거나 상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래서 이 대화편에서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책이 아닌 상대방과 서로 적절히 논박하며 진행되는 살아있는 대화만이 진정한 지식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저작이 모두 대화편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서술 형태로 대화하는 방식을 취해 글로 씌어진 말의 약점을 조금이나마 보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것은 글로써 서술된 것이 아니라 행위와 탐구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런 면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오는 언명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며 책을 읽는 자를 미워한다. 독자를 아는 자는 독자를 위해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한 줄의 글을 읽을 때도 눈으로 훑고 지나쳐 갈 일이 아니라 글쓴이의 정수를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수박 겉핥기라는 속담처럼 독서를 할 때 행간의 뜻보다는 표면적 의미만 읽고 있는 게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쇼펜하우어 역시 책에 대해서 그렇게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책은 어디까지나 실재하는 세계의 재현이고 모방일 뿐이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재현에 필요한 거울이 먼지 하나 없이 완벽하게 깨끗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라고 해 플라톤과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

 

플라톤은 세상의 사물을 참 존재인 이데아를 모방한 불완전한 실재로 봤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책은 이데아에서 2단계나 떨어진 그림자 같은 것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책은 쇼펜하우어에게도 실재 자체가 아니라 흠 있는 모방이었다.책을 통한 지식의 습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은 동양에도 있었다.

 

 

 

 

 

 

 

 

 

 

 

 

 

 

 

 

명대의 철학자 진헌장의 경우 매일 독서에만 집중해 자는 것과 먹는 것을 잊고 도를 추구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책을 통한 공부를 버리고 정좌한 후 사색만 죽어라고 해 마침내 ‘이르는 곳마다 천리를 체인한다’는 학설을 터득하게 됐다.

 

 

 

 

 

 

 

 

 

 

 

 

 

 

 

 

 

태워버려야할 책이라는 뜻의 『분서』라는 제목의 책을 지은 명대의 유학자 이지는 인간의 본성을 아이들의 마음인 ‘동심’으로 파악하면서 “학자들이 책을 많이 읽고 도리를 알아서 오히려 동심을 저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유가의 경전들을 멍청한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적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사상가로서 남녀평등론을 주장하고 틀에 박힌 해석만 하는 유학자들을 비판한 이지는 결국 정치적 박해로 투옥당하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런 철학자들은 독서 자체를 거부하기보다는 책에 담긴 내용을 곱씹어 보는 일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비판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고 뉴턴의 중력이론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보완된 것처럼 전통만 신봉했다면 학문의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대부분의 철학자가 독서를 중요시했고 책을 수집하는 일을 사랑했다.

 

책은 이렇게 사람들을 일깨우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이에게는 탄압의 대상이기도 했다.대부분의 독재자들은 지배의 편의성 때문에 대중이 문맹이길 원하지만 피지배자들이 한번 익힌 읽기 능력은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검열을 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익히 알고 있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태부터 시작해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정권이 자유를 호소하고 권위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돈키호테』를 금서 목록에 올린 것까지 검열은 권력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든 존재했다. 심지어 민주 군대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한국의 국방부도 금서 목록을 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철학에서 책은 더 이상 해석 대상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철학에서 쓰고 있는 ‘텍스트’라는 말은 책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꿈, 문학 등도 포함된다. 해석학의 경우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이든 텍스트로 보기 때문에 넓게 생각한다면 이 세계 전체가 텍스트이며 발생하는 모든 일이 텍스트다. 모든 세계의 현상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해석학의 중점 사항으로 바뀐 것이다.

 

 

 

 

 

 

 

 

 

 

또한 하나의 텍스트를 가지고 해석의 다양성이 어디까지 허용될지도 문제가 된다.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할 때 해석의 한계는 어디인지도 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해석에도 한계가 있어 너무 자의성 짙은 해석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움베르토 에코가 있는가 하면 오독조차 텍스트를 풍부하게 한다며 모든 해석의 지평을 열어놓는 철학자도 있다.

 

텍스트는 우리에게 한 가지 길만 열어놓는 것이 아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책은 하나의 세상이며 세상도 하나의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4-01-25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음악도 하나의 세상이며 세상도 하나의 음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쇼펜하우어와 니체도 책뿐 아니라 음악과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사실이 떠오르네요.

책을 마음껏 읽기 위해 아예 자신의 성에 틀어박혔던 몽테뉴조차 '책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일'을 늘 경계했던 인물이었지요.

* * *

책은 재미있다. 그러나 책과 너무 가깝게 지내다가 우리에게 최선의 부분인 쾌활성과 건강을 잃고 만다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저버리자. 나는 책을 읽는 결과가 이러한 손실을 보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몽테뉴)

cyrus 2014-01-25 23:02   좋아요 1 | URL
저도 나름 책을 엄청 좋아하는 성격인데 독서에 관심 높은 사람 아니면 책 이야기를 잘 안해요. 요즘은 책 밖으로 나와 주변에 접할 수 있는 문화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특히 전시회 관람은 책에 인쇄된 그림을 보면서 생기는 느낌과 전혀 다르더군요. 그리고 너무 책에만 푹 빠져 있으면 좋은 벗을 잃기 마련이죠.
 
[지구의 정복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화가 폴 고갱은 1987년 타이티의 풍경과 사람들을 표현하면서 위와 같은 문장으로 그림 제목을 대신했다. 눈 앞을 가득 채우는 사람과 풍경의 모습을 매일같이 지켜보면서, 그것들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궁금했을 터다.

 

『지구의 정복자』 저자 에드워드 윌슨도 같은 질문을 품었다. 그는 고갱과 똑같은 질문을 던진데 그치지 않고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자는 책 속에서 유전학, 신경과학, 진화생물학, 사회심리학, 역사학을 모두 동원해 인류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를 설명했다.

 

이 책은 인류 진화를 다뤘다. 저자는 6천만년 전에 지구 정복을 완수한 개미와 같은 사회성 곤충과 인류의 삶을 비교하면서 지구가 어떻게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 인류를 어떻게 문명을 만들어냈는지를 설명한다.

 

개미는 여왕개미와 그를 돕는 일개미, 병정개미가 모여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한다. 외부 적이 등장해 개미의 집터를 공격하려고 하면, 일개미는 집을 지키기 위해 떼를 지어 적을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일개미는 자손을 남기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저자는 개미를 예로 들며, 이기적인 행동만으로는 인류 문명을 만들 수 없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집단을 배려하는 마음과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서로 협력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인간 유전자의 ‘이기적 본능’이 아닌 ‘이타적 본능’이 인간 진화와 문명에 핵심으로 작용했다는 얘기다.

 

진화를 다룬 이와 비슷한 책은 과거에도 있었다. 과학자 리처드 도킨슨이 쓴 『이기적 유전자』다. 도킨슨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가 만들어낸 기계라고 정의하며,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고 설명했다. 문명을 만들고, 진화를 하는 이유는 모두 자신의 자손을 퍼뜨리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시작됐다고 본 셈이다.

 

유전자는 자신을 퍼뜨릴 가능성이 높은 경우의 수를 선택한다. 그래서 도킨스의 이론을 ‘혈연선택이론’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두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사촌, 다른 하나는 팔촌이라면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사촌을 구한다. 사촌의 경우가 자신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수가 훨씬 많을 테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혈연선택이론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이 이론은 이미 진화론계의 정설로 자리 잡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유전자는 극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앞서 예처럼 유전자가 복제가 용이한 유전친화적 상황만을 선호한다면 유전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이기적인 선택만을 할 수 있다. 유전자 개념에서 인간을 이해한다면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닌 인간이 이타적인 선택을 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인간의 이타적 행위조차도 유전자 복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이기적 선택의 발로인 것이다.

 

사실 윌슨 또한 혈연선택이론이 주류로 자리 잡는 데 많은 공을 세운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인 『지구의 정복자』에서 현대 진화 생물학계의 주류 이론이자 도킨슨이 주장한 ‘혈연선택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혈연선택 이론에 기반한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사회성 생물의 진화와 이타성의 진화, 헙력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개미와 꿀벌의 삶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혈연선택을 버리고 이타적 집단의 생존확률이 높다고 주장하는 ‘집단선택이론’으로 돌아선 것이다. 윌슨에게 있어 이타적 공동체와 이를 가능케 하는 ‘진사회성’의 유무야말로 인간 진화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진화를 이기적 기제로만 설명한다면 공동체를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알다시피 공동체를 떠받치는 기반에는 이타적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있어서 원로급으로 추앙받는 윌슨으로서는 인간이 지닌 ‘진정한 이타심’에 대한 믿음을 끝내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대안으로 집단 선택과 개체 선택이 상호 작용하는 ‘다수준 선택이론’을 제안했다. 그는 "이기적인 본능만 유전자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이타적 본능도 유전자 안에 함께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80세가 넘은 윌슨은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전복시켰다. 적지 않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그는 연구와 대중을 위한 강연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오랜 학자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무리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다. 지금도 윌슨은 연구논문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겠지만, 논란이 멈추고 있지 않은 이 책이 위대한 원로 진화론자의 유작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윌슨이 그동안 주장했던 이론과 관점을 버린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커리어를 감안한다면 대단한 용기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쌓아온 학문적 업적의 기반에는 혈연선택이론이 있었고 이를 버린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그의 학자로서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하세요. 저는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피부색이라는 유치한 기준에 따라 붙여진, 차별받고 있는 이름이지요.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사람의 피부와 만나면 어떻게 순식간에 ‘이방인’으로 달라질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며칠 전에 찜질방의 여성사우나에 들어가다가 황당한 것을 보게 됐어요. 제가 가야 할 여탕 옆에 외국인 전용 목욕탕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외국인 손님만을 위해서 더 좋게 만든 것이 아니었어요. 외국인들과 같이 목욕하는 걸 한국 손님들이 싫어하니까 따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내부 시설은 샤워기 네 개만 달려 있고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이 없었어요.

 

여러분은 차별에 분노하십니까? 성차별, 학력차별이 여전하더라도 피부색에 따른 차별에 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어떻게 감출 도리도 없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냥 빼도 박도 못하게 규정됩니다. 피부를 다 벗겨 내고 살 수 없듯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 차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X년 전에 한국에 온 이후로 ‘깜둥이’, ‘더럽다’는 주변의 놀림에 시달린 적이 있어요. 향수도 뿌리고 했는데 또 놀렸어요. 이제 결혼해서 자녀를 갖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아이가 저처럼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고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요.

 

TV와 신문에서는 한국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말하더군요. 그만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대부분 사람은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한국 국적을 가졌으면 한국인 아닌가요? 그런데 왜 저만 보면 피하는 건가요? 외국인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무척 속상해요.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라고, 모두가 저처럼 차별을 받으면서 살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피부색 때문에 차별하는 시선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차별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에 발생하고, 편견에 기대어 지속합니다. 그래서 차별은 아주 사소할수록 치명적입니다. 한국에는 차이를 차별이라 부르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엄마 뱃속에서 나와 조그만 차이 하나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왜 그리 사소한 것에 억지를 부리는지요.

 

 

 

 

 

 

 

 

 

 

 

 

 

 

 

 

 

여러분, 제 이름은 ‘외국인’이 아닙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엄연한 ‘한국인’입니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서 인종차별에 맞서는 변호사 애티커스가 딸에게 이런 말을 한다죠. “누군가를 정말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 거야. 말하자면 그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야.” 애티커스는 이 땅에서 편견의 색안경을 벗게 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려줬어요. 차별당하는 우리들의 입장이 되어 보세요. 여러분이 차별받는다면 그럴 땐 어찌하시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필스
어빈 웰시 지음, 김지선 옮김 / 단숨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증오한다.

더 나은 누군가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509쪽)

 

 

 

 

 Scene #1  혐오스러운 악질 경찰 브루스의 일생

 

여기 부패하고 타락한 경찰이 있다. 그는 술과 마약에 중독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지만 진급을 위해 동료들을 모함하고 위기로 몰아넣는 데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변태적 도색(桃色)은 이미 정도를 넘어 동료의 아내들에게까지 뻗쳐 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망쳐 놓았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행복까지도 거리낌 없이 짓밟아 버리는 남자, ‘필스’(Filth, 오물)의 주인공 브루스 로버트슨은 동시대 인간 말종의 초상과도 같다.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독자들에게 브루스는 이해 불가한 주인공이다. 좀 모자라거나 괴짜스럽더라도 착하고 정의로운, 그래서 금방 애정을 갖게 되는 경찰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라이벌들을 이간질하고, 동료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고, 처제와 은밀한 관계를 즐기고, 사건 해결을 위해 협박마저 일삼는 이 비도덕적인 삶이 브루스 자신은 멋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정작 사건 수사는 뒷전이고 진급 라이벌들에 대한 중상모략을 펼치고 그가 좋아하는 갈보들과의 난잡한 행위를 연출하는 장면을 본다면 혐오감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브루스의 계속되는 악질을 보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중간에 등장하는 기다란 촌충의 독백은 이미 악으로 피폐해진 브루스의 상태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촌충은 오직 브루스가 음식을 많이 먹기를 바란다. 브루스 못지않게 탐욕스럽다.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브루스의 타락한 몸과 마음을 숙주 삼아 살아간다. 촌충이 브루스의 탐욕을 먹고 자란다면, 브루스는 권력 상승을 위해 '경찰'이라는 명함을 앞세워 사회에 기생한다.

 

책을 펼치기 시작하기 전부터 무려 500페이지에 달하는 스코틀랜드 아니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인물의 삶을 끝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지 망설이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이미 타락한 인간상의 전형을 보여준 어빈 웰시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트레인스포팅』의 원작과 영화를 본 사람이라도 이 충격적이고 더러운 묘사로 가득한 악질 경찰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망설일지도 모른다.

 

 

 

 Scene #2  권력을 위해 기생하는 탐욕덩어리

 

무엇이 브루스를 타락한 경찰이 되게 만들었는가? 성선설을 믿든 성악설을 믿든 고만고만한 영유아기의 인성을 비정상의 궤도로 밀쳐내는 것은 환경과 정신적 외상이라고 보는 것이 현대의 통념이다.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외면 받은 유년 시절 그리고 첫사랑을 죽음으로 몰았던 브루스의 경험은 그의 현재를 단단히 뒷받침한다.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또한 약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지는 것이다. 어린 브루스는 자신이 받은 멸시와 폭력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동시에 욕구 불만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삼기 시작했다. 즉, 세상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고, 연약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권력과 폭력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권력을 행하기에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만다. 브루스는 그러한 자신이 원망하고 저주스러워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절망감에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주변에 분노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분노를 표출할 수 하기 위해서 권력으로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경찰이 되는 것이었다. 다른 생물체의 몸속에서 먹이와 환경에 의존하여 기생생활을 하는 기생충처럼 이미 비뚤어져버린 심성으로 변한 브루스는 경찰 조직에 들어와 숨겨왔던 탐욕을 드러낸다.

 

곧 경위가 될 자리에 있어도 브루스의 탐욕은 멈출 수 없다. 촌충이 브루스에게 음식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도록 명령하듯이 탐욕과 집착은 브루스의 뇌를 지배했다. 브루스가 직접 고백하듯이 그는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어 약과 섹스에 탐닉하고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를 확인한다. 승진을 위한 권모술수 역시 아내와 딸을 되찾게 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책감으로 인한 정신 분열은 점점 더 빈번하게 브루스를 옥죄어 오는데, 아픈 과거의 기억과 장면이 등장할수록 브루스에 대한 인간적 연민도 정점으로 치닫는다. 이윽고 가해지는 브루스에 대한 처벌들, 범죄자들에게 끌려가 린치를 당하고, 승진에 실패하며,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린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충분히 가혹한 것이다.

 

브루스와 같은 악한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뉠 것이다. 하나는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 쓰레기’라는 것인데 대다수 보통 사람의 감정적 반응이 이것이다. 이에 반해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된 상황적 요인이 있을 것이란 입장이 맞선다. 악행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악행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행동, 특히 악행의 주요 원인은 증오심, 기질과 같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 또는 사회적 구조인가라는 질문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전자의 입장이 훨씬 속 편할지 모른다. 그저 나하곤 전혀 별개의 나쁜 놈, ‘인간 쓰레기’로 규정하면 끝이니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반복되는 인간의 잔혹한 행동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Scene #3  더 많이 불편하고, 아파하시라

 

“악한 일은 스스로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브루스는 사나운 악마는 아니다. 생각이 이상할 뿐, 치유하지 못한 유년기의 상처를 안고 살다가 감정 조절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악(巨惡)’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미 근본적으로 잘못된 오류의 희생자일 뿐이다. 이렇듯 모든 악행은 인간의 악마적 속성이 아니라 사고력의 결여에서 나온다. 아렌트가 만난 아이히만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으로 뭉쳐진 기계적인 인간이었다면, 어빈 웰시가 만들어 낸 가상인물 브루스는 유혹, 본능, 상념과의 갈등에 정신이 게을러져 술과 코카인 그리고 악질에 의존하게 되는 ‘악의 평범성’에 쉽게 지배당하는 허약한 인간이다.

 

그가 악하게 만든 또 다른 요인에는 권력의 환상에 도취된 이상주의적 열정도 한몫하고 있다. 브루스에게 ‘사건’은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이다. 진급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진급 경쟁자들을 견제하며 성과를 얻어낸다. 진급을 위한 성과에 눈이 먼 나머지, 사건 해결에 유리하도록 거짓말과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이처럼 브루스의 왜곡된 이상주의적 열정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도 과격한 실천이다. 그러니까 브루스는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집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옛말에 사필귀정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예견했던 대로 브루스는 용서와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몰락한다. 드디어 '인간 쓰레기'가 스스로 이 세상에 사라지게 되어서 속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존재는 마땅히 처벌받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브루스도 법의 손길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브루스는 법의 손길에 포위되는 대신에 죽음의 신이 뻗친 손길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기를 원했다.

 

장면 하나하나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악질로 가득한 500여 페이지를 참고 견뎌 읽어도, 여전히 불편하다. 왜 그럴까. 브루스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도덕성과 정신을 거의 회복불능 정도로 파괴시킨 '인간 쓰레기'를 복수하지 못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죽기 전에 자신의 유년 시절에 자신과 첫사랑을 모욕한, 어디선가 평범하게 살지도 모르는 속이 시커먼 그들을 죽이든, 협박하든, 욕설을 하던 간에 똑같이 악랄한 방식으로 복수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용서치 못하는 범죄 행위라도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악이 또 다른 악을 응징하는 안티 히어로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필스』를 끝까지 단숨에 읽었는데도 불편하고, 결말에 불만스럽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고 나왔는데도 무언가 개운치 않고, 찜찜한 느낌이 든다. 브루스는 심신을 망가뜨리는 약(藥, 코카인)을 해서 악해진 것이다. 그는 애초부터 폭력에 연약한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이 악한 '괴물'으로 변하고 말았다. 일부 독자들 중에는 여전히 브루스를 절대로 용서와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 쓰레기'라고 손가락질해도 좋다. 무수한 악질로 가득찬 500페이지를 단숨에 끝까지 참고 읽을 수 있다면 더 많이 불편하고 아파해야 한다. 그의 일대기를 보면서 더 많이 불편하게 느끼고 몸속에 촌충이 꿈틀거려 위장을 괴롭힐 때마다 생기는 통증처럼 아프고 찜찜하게 느낀 독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작가 어빈 웰시는 상당히 고마워했을 것이다.

 

 

 

P.s 24시간 악질을 펼치는 주인공을 다룬 이야기답게 입에 담기 어려운 음란한 단어, 온갖 비속어가 줄줄이 나온다. 책의 분량도 적은 편도 아닌데 정신이 해로울 정도로 실감나게(?) 비속어 하나하나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년 전, 한창 헌책방의 매력에 푹 빠진 시기에 운 좋게도 구하게 된 책이다. 손석희 앵커가 쓴 유일한 책이다. 사실 ‘손석희’라는 이름의 활자가 적힌 책이 『풀종다리의 노래(1993년, 역사비평사)』와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아침이슬, 2000년)』, 단 두 권뿐이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단독 저자로서 손석희 앵커가 쓴 책이 아니다. 월간 『말』이라는 잡지에 연재된 유명 연사들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이 책 또한 절판 상태다) 손석희 앵커를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90년대에 태어난 젊은 친구들은 그가 쓴 책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다. 나도 몰랐다. 헌책방에서 『풀종다리』를 만날 때까지는.

 

 

 

 

 

 

 

『풀종다리』가 출간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그러니까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한 첫 해였다. 이 때 뉴스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그 당시 사건사고에 관한 단상부터 시작해서 뉴스와 보도에 대한 자신의 신념 그리고 1992년 문화방송 노조 파업 이야기까지 책에 수록된 글의 사연은 다양하다.

 

글의 장르는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책의 출판사는 ‘역사비평사’다. 『역사비평』이라는 학술지도 만드는 역사 전문 출판사다. 손석희 앵커의 감상적인 에세이와 역사 전문 출판사의 조합. 이렇게 본다면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에세이를 쓴 필자와 역사 전문 출판사의 만남은 ‘진보에 가까운 정도(正度)’를 지향하고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풀종다리』가 나온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지라, 아무리 우리나라에 대중적 영향력이 높은 방송인의 글이라도 지나가는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다. 2004년에 정식 재판되고 난 이후, 절판이 되었다. 절판된 사연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남아 있는 손 앵커의 인터뷰 내용이나 기사를 검색해봤는데 출판사에서 더 찍겠다는 걸 말렸다고 한다.  손 앵커는 왠지 책을 더 내면 책 장사하는 것 같아서 재판을 거절했다고 한다.

 

 

 

 

 

현재 알라딘 중고샵에 판매되는 『풀종다리』.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20년 전 이야기로 가득한 글인데다가 손 앵커가 재판을 허락하지 않는 이상 지금 다시 나올 리 만무하고, 심지어 출판물 DB가 최적화되어 있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 교보문고, 예스24에 정식 등록되어 있지 않다. 인터넷 서점 전문 중고샵에 한두 권은 볼 수 있을 정도다. 절판 상태인데다가 유명 방송인이 쓴 유일한 책이라서 그런지 꽤 비싼 가격으로 헌책방 매물(?)로 나온다. 제일 비싼 가격은 55000원(책의 정가는 9000원). 시중에 구할 수 없고 나름 희귀한 가치가 있는 책은 터무니없이 높게 잡은 금액으로 헌책방에서 판매된다.

 

대구에서 알아주는 헌책방에서 구했을 때 판매가는 30000원이었다. 헌책방의 매력은 시중에 구할 수 없는 한 권의 책을 숨겨진 보물을 찾는 소유의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웬만한 부탁을 해도 가격을 절대로 깎지 않으려는 고집 센 헌책방 주인과의 가격 흥정에서 승리하는 기쁨(?)도 맛봐야 한다. 헌책방에서 자주 출몰하는 젊은 단골손님이 아니었다면 반값에 가까운 가격으로 구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흥정한 끝에 15000원으로 구입했다.

 

 

 

 

 

손때와 먼지가 전혀 묻지 않았을 정도로 워낙 깨끗한 상태로 보존된 책이라서 그런지 책장에 꽂혀있는 것을 매일 보면서도 시간이 딱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풀종다리』가 손석희 앵커 특유의 변함없는 ‘바른 이미지’를 닮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글은 ‘역시 손석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신 있으면서도 잘못된 세태를 비판하는 ‘바른 말’로 이루어졌다. 글이 참 읽기 쉬워서 거의 ‘칼럼’에 가까운 에세이로도 볼 수 있다. 20년 전에 쓴 글인데도 불구하고 기시감이 느껴진다. 20년 전, 손 앵커가 아쉬워하던 세상의 부조리한 장면은 얼굴과 시간만 달라졌을 뿐이지 여전히 남아 있기에 씁쓸한 기시감이기도 하다.

 

 

 

 

 

 

이틀 전 토요일에 중앙일보 오피니언에 대학생 칼럼을 쓴 학생분들과 함께 JTBC 방송국에서 손석희 앵커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만남일 것 같아서 저자로서의 ‘손석희’의 친필 사인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꼭 그 분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었다. 혹시 글이나 책을 쓸 계획이 없냐고. 만약에 손석희 앵커의 칼럼이 중앙일보 오피니언에 게재된다거나 또 새로운 책이 발간된다면 대중의 엄청난 반응을 상상해본다. (그런데 시간 부족 관계상 질문을 하지 못했다)

 

4시간 걸리는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을 때도 『풀종다리』를 다시 읽었다. 그 4시간이 지루할 법한데 책 한 권 덕분에 시간 빨리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여러 번 『풀종다리』를 읽고 나서 느꼈지만, 손석희 앵커를 직접 뵈면서 느낀 감정을 한 마디로 요약한 문장으로 책의 소개를 마무리한다. ‘손석희 클래스는 영원하다’

 

 

 

 

 

 

 * 방송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꼭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 뉴스는 다 외워서 합니까?”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의문이겠지만 매번 그런 질문을 받다 보면 좀 답답해질 때가 있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 많은 부분을 외워두었다가 카메라 앞에서 밑에 있는 원고를 보지 않으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진행자로서의 나는 그저 단순한 ‘전달자’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는 진행자 개인이 부각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중략)

 

진행자들이 아무 의미 없이 때로는 현학적 수사로 포장된 기사를 외우고 있고 화면상 보이는 모든 요소들을 치장해 거기에 자족하고 있다면, 또 시청자들 역시 그에 매몰돼 있다면 우리의 방송은 불행하다. (「그 뉴스는 다 외워서 합니까」128쪽, 130쪽)

 

 

 * 오락 일변도의 시청률 경쟁은 결국 비판적 감시 또는 견제 역할이라는 공공성을 중시하는 방송의 이념적 목적지마저도 그 생존의 싸움터에 매몰시켜 버리거나, 아니면 신기루처럼 날려 버릴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우려하는 것은 이것이다. (「문화관은 슈퍼마켓이 될 수 없다」141쪽)

 

 

 * 문화방송 뒤쪽 아파트 상가의 패스트푸드점 주인 아주머니는 요즘도 날 잘 알아보지 못한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않는 것이란 표현이 맞겠다. 기억력 탓이 아니니까...

연전에 동료들과 그 집에 처음 들렀을 때 주인 아주머니는 날 보더니 “얼굴이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했다. 나는 쑥스럽기도 하여 “이 집에 몇 번 왔었지요”하고 넘어가 버렸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 그랬었지 참”하고 되받는 것이었다. 그냥 웃고 지나갈 참이었는데 우리 중 한 사람이 장난기로 말을 했다.

“아주머니 이 사람 모르시겠어요?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인데.”

“테레비?”

“예. 저녁 때 채널 11번 틀면 이 사람 나와요.”

“아, 그래요? 무슨 시간에?”

“뉴스시간에요. 아나운서거든요.”

나는 옆에 앉아 있기가 영 곤혹스러워 이 친구를 연신 쿡쿡 찌르고 있었는데, 아주머니의 다음 얘기를 듣고는 파안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번이면, 그러니까 그게 TBC지?”

세상에 웬 TBC란 말인가. 십여 년 전에 없어진 동양방송이 멀리도 아니고 문화방송 바로 뒤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통해. 채널 11로 부활한 것이다. (「아나운서, 팔방미인 박명시대」142~143쪽)

 

- comment : 만약 아주머니가 지금 살아 있다고 가정하고 TBC가 채널 15로 부활한 JTBC 뉴스9를 진행하는 손 앵커를 브라운관에서 본다면 무슨 느낌이 들까? 아니, 사실 이 글의 문장만 손 앵커에게 보여주고 싶다. 본인도 20년 전에 만난 아주머니의 말씀처럼 중앙일보의 앞 글자 이니셜 ‘J'가 붙은 TBC에서 일하게 된 운명에 파안대소했을 것이다.

 

 

* 우리가 진실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광기 어린 시대에 부화뇌동의 차원을 넘어 상쇠 노릇을 한 것만이 부끄러운 것인가. 아닐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시기에마저도 침묵한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잉크물에 담긴 63빌딩」168쪽)

 

- comment : 지금은 말할 수 있는 시기에 침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시기를 부정하고, 침묵하기를 강요하는 세력이 존재하니, 이마저도 부끄럽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4-01-14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석희 아나운서가 책을 낸 적도 있었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 사람은 여전히 담백한 모습이라 참 좋아 보여요~

cyrus 2014-01-16 23:19   좋아요 0 | URL
네, 그 날 손석희 아나운서를 직접 가까이서 처음 만났는데요, 역시 정직하고 바른 이미지는 평소에도 여전했어요. 그리고 뉴스와 언론에 대한 소신이 변하지 않았고요.

hnine 2014-01-1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이제는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 되었군요.
전 이 책 나온지 얼마 안되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어요. 그때는 그저 인기 앵커라고만 생각했지 20년 후 지금과 같은 지명도를 같는 인물이 될지 짐작도 못했어요. 20년이 참 훌쩍 간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cyrus 2014-01-16 23:20   좋아요 0 | URL
20년 전에 나온 책을 썼을 당시에도 손석희 아나운서 본인도 그렇고, 그 누구도 훗날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 될 지 예상하지 못했을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