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백화점인 ‘봉 마르셰’를 소재로 한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에는 한 시골 처녀가 백화점 쇼윈도를 처음 구경하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드니즈와 일행은 무엇보다도 오밀조밀한 윈도 디스플레이에 매료되었다. (중략)

하지만 그들을 마치 못에 박힌 듯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 진열창이었다. (중략) 이렇듯 상품이라는 모티브가 바뀌고 진열대라는 생생한 악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나지막이 계속되는 반주가 있었는데, 그것은 크림빛 스카프의 나풀나풀한 주름장식 끈이었다.”

 

‘금발 여인의 보드라운 살갗’, ‘감미롭게 일렁이며 섬세하기 그지없는 꽃들의 다양한 빛깔.’ 온갖 관능의 어휘들로 치장한 졸라의 묘사 안에서 쇼윈도는, 벤야민이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의 전이’라고 풀이한 19세기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창(窓)이다. 창 너머에는 필요에 앞서 펼쳐지는 욕망에 의한 소비의 시대적 매혹이 극장의 판타지처럼 펼쳐져 있다.

 

 

 

 

 

 

 

 

 

 

 

 

 

 

 

 

 

인류가 윈도쇼핑의 쾌락에 처음 몰두하게 된 것은 1784년 프랑스 파리에서였다고 한다. 부르봉 왕가의 루이 필립 오를레앙이 자신의 성 팔레 루아얄의 1층을 개조해 상점 거리를 만든 것. 산책을 나온 시민들은 긴 회랑을 따라 줄지어 입점한 당대의 패션상점들을 비 맞을 걱정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사려는 물건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은커녕 매장에 들어서서도 원하는 물건을 말한 뒤에야 점원이 갖다 주던 식이던 이전과 달리 팔레 루아얄을 한 바퀴만 돌면 당대의 멋쟁이들이 지닌 유행 상품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생활의 혁명이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산책보다 구경, 즉 윈도쇼핑을 목적으로 그 곳을 찾았고, 쇼윈도는 비유도 과장도 아닌,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파리 곳곳에는 유리지붕을 얹은 아케이드 상가가 본격적으로 들어섰고, 기름 램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밝기의 가스등이 등장하면서 윈도 쇼핑은 조명의 세례까지 입게 된다.

 

19세기는 ‘진보’라는 새로운 신앙의 시대였고, 파리는 명실상부 그 신앙의 성지였다. 시민들은 쇼윈도의 풍요와 화려함 속에서 곧 도래할 지상 천국의 약속을 보았고, 그 약속 안에서 쇼윈도는 천년왕국 성전의 제단이자 임박한 미래였다.

 

진보의 신앙이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게 처절하게 확인된 뒤로도 쇼윈도는, 비록 '물신(物神)'의 제단쯤으로 격하되긴 했지만, 건재했다. 의미의 층위에서 추락하는 대신 현실의 저변을 넓혔고 치장의 정성도 날로 더해졌다.

 

그 공간은 이제 저마다 '쇼핑 천국'의 입구와 벽면을 장식하며, 비주얼 머천다이징(VMD), 곧 시각 마케팅 기법과 행위의 총체라 해도 좋을 첨단 소비문화산업의 전시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쇼윈도는 빛과 색채의 마법 공간이다. 문화와 기술의 진보로 소품과 조명이 달라졌고 동시대인의 달라진 취향과 욕망을 겨냥하느라 기법과 분위기가 나아졌을 뿐, 예나 지금이나 저마다의 천국의 꿈 이미지를 구현하려 한다는 점은 같다. 주력 상품들을 전면에 돋보이게 배치한 고전적인 쇼윈도들 사이에는 상품의 진열 공간이라는 인식 자체를 스스로 부인하듯 소비 낙원의 이미지만 드러내는 파격적 은유의 쇼윈도도 있다. 그 때의 상품은 천국의 소품처럼 기둥 뒤나 LED 조명의 그늘 속에 실루엣처럼 배치되곤 한다. 그야말로 벤야민이 변화무쌍한 물신의 세계로 비유한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ía)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 에스테스  「사탕가게」  1969년

 

 

비좁은 폐쇄공간의 그 호사스러운 확장성은 외양과 개성의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소비 욕망을 선도적으로, 또 압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또 멋과 풍요와 여유와 기대 등 억눌린(혹은 억눌러온) 시민들의 욕구를 스스로 발견하게 하고 분출하게 유혹한다는 점에서 하나다. 쇼윈도는 그 자체로는 만질 수도 들쳐볼 수도 없는 시각 공간일 뿐이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쇼윈도의 벽 너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함으로써 소비자의 발길을 매장 안으로 유인하거나 상품의 상징적 가치를 돋보이게 과시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쇼윈도를 향한 개별적 시선의 주체인 소비자는 그 판타지에 대한 욕구의 연대를 통해, 바로 그 집단의 판타지 안에서, 비로소 공동체임을, 이 소비공화국의 구성원임을 확인한다. 그렇게 쇼윈도는, 벤야민이 '물신을 향한 집단 예배의 방식'이라 칭했던 유행을 창조하고 확산시킨다.

 

물론 쇼윈도가 백화점이나 패션 부티크만의 공간은 아니게 된 지 오래다. 가게의 거의 모든 벽들이 투명 유리로 바뀌면서 이제 옷 가게나 자동차 매장 등 어지간한 상점들은 공간 전체가 쇼룸이 됐고, 그나마 남은 쇼윈도는, 음식점들이 더러 그러한데, 메뉴판 수준으로 왜소해진 곳도 적지 않다. 사이버 쇼윈도, 즉 인터넷 쇼핑몰을 통한 상거래가 활성화하면서 오프라인 매장은 공간의 물리적 투명성과 무관하게, 꼼꼼한 소비자들이 실물을 확인하는 곳으로만 기능하기도 한다. 그 때의 오프라인 매장은 매출보다 홍보에 치중하는, 쇼룸이 된다.

 

소비의 대중화와 유행의 확산시차 단축으로 쇼윈도의 마네킹이 어제 입고 쓰고 신은 신상품을 오늘 거리에서 실제로 보게 되는 일도 있다. 연예인이 방송에서 선보인 상품이 거의 실시간으로 조회되고, 또 소비된다. 그 때의 평면 모니터 역시 전자 쇼윈도다. 멋에 민감한 이들로 북적대는 서울 도심의 어떤 거리들은 그렇게 그 자체로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는 쇼윈도가 된다. 도시가, 아니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시장 공간이라는 말은 그렇게도 확인된다.

 

원형으로서의 쇼윈도는, 그래서 사회의 축소판인 동시에 시(詩)적인 시연무대, 시장 자본주의의 내일을 향도하는 깃발이다. 쇼윈도가 스타일과 라이프스타일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혹은 집단의 소비 판타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이 시즌에 소비해야 할 것들을 미리 보여주면, 내일 우리는 그 분위기와 양태를 알게 모르게 본받게 된다.

 

 

 

 

 

 

 

 

 

 

 

 

 

 

 

 

한편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주의 핵심에는 기술 발전보다도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적인 소비의 논리가 있다고 보았다.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서비스 및 물적 재화의 증가에 따른 소비의 풍부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풍요로울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들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새롭게 개발되고 생산되는 상품들의 리듬과 끊임없는 연속에 따라 사람들의 삶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또 이에 맞춰 인간들도 더욱 사물 의존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다. 현대는 말 그대로 상품이 지배하는 시대, 곧 소비를 학습하고, 소비에 대한 사회적 훈련을 사회화의 주된 내용으로 하는 ‘소비사회’인 것이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은 자신의 소설 『사물들』에 관한 인터뷰에서 소비사회에 유혹된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물질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풍요로움이 어떤 정형화된 행복을 가져다주었지요 … (두 주인공) 실비와 제롬이 행복해지려고 하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벗어날 수 없는 사슬에 걸려든 것입니다. 행복은 계속해서 쌓아 올려야 할 무엇이 되고 만 것이지요. 우리는 중간에 행복하기를 멈출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현상은 거꾸로, 쇼윈도의 변신에 대한 사회의 끊임없는 요구로 작용한다. 사회보다 한 발짝 앞서야 하는 그 공간이 더 이상 앞서 나가지 못할 때, 혹은 대중적 욕망의 관성에서 지나치게 벗어날 때, 쇼윈도만큼 금세 남루해지는 공간도 없다. 그 때의 쇼윈도는 물신의 제단이 아니라 상품의 무덤이 된다. 화려함의 그늘은 그렇듯 짙어서, 불 꺼진 쇼윈도와 먼지 앉은 마네킹은, 패잔병의 찢어진 깃발만큼이나 참담하고 스산하다. 그래서 쇼윈도는 밤낮없이 전투가 치러지는 전장도 된다. 그 전투는 경쟁업체와 소비자들의 변덕스러운 취향과 앙다문 지갑과도 치러지지만, 본질적으로는 시간과 치르는 고독한 전투다. 행복을 원하는 도시인들은 오늘도 쇼윈도에 있는 물신 앞에서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바치고 있다 . 인적 끊긴 세모의 거리에서도 쇼윈도의 조명이 꺼지지 않는 것은, 그 적막의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기 때문이다. 멈추고 싶은, 멈출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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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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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자위대를 선동했으나, 싸늘한 반응에 굴복하여 할복을 결정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어우러진 순수미학을 사랑했던 작가로서 꽤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가면의 고백』은 작가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자각해가는 과정을 담아냈다. 주인공 '나'는 성장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몇 가지 이미지를 접한다.

 

 

 

 

 

 

귀도 레니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1616년  / 세바스티아누스로 분한 유키오  

 

 

히르슈펠트가 성도착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회화 및 조각 1위로 ‘성 세바스티아누스 그림’을 꼽은 것은 나의 경우 흥미로운 우연이었다. 이것은 성도착자, 특히 선천적인 성도착자에게는 도착적 충동과 사디스틱한 충동이 구별하기 어렵게 착종되어 있는 경우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기에 아주 적합한 예다. (49쪽)

 

 

귀도 레니가 그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라는 그림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사정한다. 레니의 그림에서 묘사된 세바스티아누스는 주인공의 관능을 더욱 강조하는 이미지가 된다. 유키오에게 죽음이란 불완전한 삶의 보완양식으로서 기능하는 듯하다. 자신이 뜻을 품고 있는 가치가 훼손되거나 그 길이 어긋나 버릴 것 같은 경우, 그는 장렬한 죽음을 통해 그 유한한 삶의 완전함을 이루고 또한 그것에 완벽한 방점을 찍으며 자신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만의 은밀한 미학과 완벽한 죽음에의 동경을 꿈꾸어 왔던 그에게 죽음이란 바로 일생의 유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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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1 0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1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현대미술가 시리즈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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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멀티 아티스트' 호크니

 

 

 

 

 

 

데이비크 호크니 「무제, 2009년 7월 5일, No. 3 」 2009년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를 친구로 두었다면 매일 아이폰으로 그린 새벽 풍경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호사를 누리게 될지 모른다. 그의 아이폰 그림은 붓으로 그려낸 듯한 섬세한 터치가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폰의 브러쉬 기능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린 뒤 갤러리에 판매하고 있다. 호크니의 드로잉에서 ‘보는 것’이 주는 기쁨을 발견하는 순간 당신을 둘러싼 세계 역시 달라질 것이다.

 

1960년대 영국 팝아트를 대표하는 팝 아티스트, 새로운 접근의 포토 콜라주를 시도한 사진가, 일러스트레이터, 판화가, 무대 미술가 그리고 최초의 스마트폰 화가. 영국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호크니를 수식하는 단어는 매우 다양하다. 호크니에 대한 설명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저명한 미술 평론가인 마틴 게이퍼드는 이 ‘멀티 아티스트’와 나눈 10년간의 대화를 한 권으로 정리했다. 호크니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란 어떤 것인지에, 인간은 어떻게 그것을 재현하고 있는지 등 주제는 다양한 영역을 넘나든다.

 

호크니는 청년 같은 왕성한 호기심과 실험정신으로 다양한 매체와 예술 영역을 유랑했다. 그가 평생 몰두한 미술은 ‘사람과 그림’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림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사진이나 영상이 아닌 3차원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겨 놓은 그림이 어떻게 무엇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일까.

 

호크니는 관찰하고 묘사하고자 하는 욕구를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렸다. 매일 보는 똑같은 풍경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꽃병도, 방금 벗어놓은 모자나 슬리퍼도 그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품고 있는 피사체였다. 길을 가다가 차를 세우고 스케치북을 열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풀들을 스케치하곤 했다. 호크니는 그 풀을 사진으로만 찍었다면 드로잉을 할 때만큼 유심히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피사체의 고유한 특징과 매력은 열심히 관찰한 사람들만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열심히 바라보는 것’은 호크니의 삶과 예술에서 핵심적인 행위였고, 큰 기쁨의 원천이었다. 매력적인 풍경화를 많이 그린 호크니에게 늘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은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그래서 보면 볼수록 많은 것이 보이는 그런 주제였다. 호크니는 렘브란트, 반 고흐, 모네의 그림이 놀랍고 감동적인 것은 화가가 많은 것들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Scene #2  눈을 커지게 만드는 그림

 

 

 

 

데이비드 호크니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 2007년  

 

 

호크니의 미술에 관한 열정과 통찰력은 진정 감동적이었다. 책 초반부에 월드게이트 숲을 그린 장부터 이미 인상적인 풍경화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특히 5장 ‘점점 더 커지는 그림’을 읽다가(66~67쪽) 입이 딱 벌어졌다. 거기에는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가 담겨 있다. 게이퍼드는 아마도 미술 역사상 가장 큰 풍경화라고 소개한다. 적어도 전적으로 야외에서 그린 가장 큰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며, 이 작품은 소설과도 같은 시각 경험을 제공해 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책의 도판을 보면서, 그저 그림의 떡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이걸 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지금 ‘데이비드 호크니: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중앙홀에서 올해 2월말까지 호크니의 큰 나무들이 그 무성함을 직접 뽐낸다. 이 그림은 높이 4.5m, 폭 12m에 이른다. 총 50개의 캔버스를 이어 하나의 대형 풍경을 펼쳐낸 대작이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한다. 해가 환하게 미소 짓다가도 금방 심술궂은 먹구름이 온 세상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때때로 굵은 빗줄기를 대지에 쏟아 붓는다. 나무와 들풀도 바람에 몸을 파르르 떨며 잠시도 똑같은 몸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양화가들은 하나하나의 정지된 순간을 고정된 시점으로 포착할 뿐이다.

 

호크니는 이런 게 불만스러웠다. 그는 자연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려면 이런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은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작품 중 하나다. 50개의 캔버스는 하나의 풍경을 포착했지만 각각의 캔버스는 서로 다른 순간을 저마다 다른 느낌으로 표현되었다. 관객은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수십 개 또는 그 이상의 나무 풍경을 감상하게 되는 셈이다.

 

 

 

 Scene #3   결국, 그림이다 

 

 

 

 

데이비드 호크니 「개로비 언덕」 1998년

 

 

현대인의 눈은 스스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보다 카메라 앵글로 조작된 세상(사진, 영화, 광고 등)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재료의 거친 날것이 주는 신선함보다는 조리된 인스턴트 음식의 편안함에 손이 가듯이 말이다. 최근 미술에서의 ‘사실화 경향’ 중 하나도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 기록된 것이거나, 카메라의 기록과 컴퓨터의 조작, 손을 통해 재생산된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호크니의 미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그림은 화가의 내부세계와 그림의 소재가 된 외부의 세계가 발가벗고 만나는 과정, 생생한 라이브 쇼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지각의 주체로서의 시각 인식의 중요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작품 소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 있는 것일까. 오랫동안 작가 자신의 생활 태도와 경험에 의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화면에 담는 대상을 정확히 관찰하고 소화하고 이해해서 ‘나의 것, 나의 이야기, 나의 이미지’로 전환하는 것이 그 구체적인 작업의 시작이다. 반복되는 스케치를 통해 여러 각도에서 세밀하게 관찰하고 동시에 이런 요소들을 큰 화면으로 구성하는 작업인 것이다.

 

호크니는 인간의 눈, 더 이상 과거 이성을 대변하는 눈이 아닌 여타의 감각을 담아내는 눈을 이야기하고 있다. 호크니는 카메라의 눈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변화와 생생함을 회화, 즉 그림만이 잡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그리기 위해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를 자신의 눈으로 실천했다. 실제로 밖에서 자신이 본 풍경을 최대한 그대로 관객에게 전하고자 관객을 둘러쌀 정도의 거대한 멀티캔버스 회화를 펼쳐 보이고 있다.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스쳐지나갈 수도 있을 법한, 어쩌면 큰 특징이 없기까지 한 자연 풍경은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눈에 포착되어 우리 앞에 자리한다. 아니 우리가 그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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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2-20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회 다녀오셨군요! 저도 꼭 보고 싶은 그림인데.. 이번 주말이 마지막 기회네요. 음...

cyrus 2014-02-20 22:27   좋아요 0 | URL
서울에 들릴 때 정말 큰 맘 먹고 과천까지 이동해서 그림을 봤어요. 서울에 한 번 전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아이리시스 2014-03-04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폰에 있는 기능을 듣긴 했는데 저처럼 그림그릴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마저도 그림의 떡인데... 요즘은 드로잉이라도 연습해야하나.. 그러고 있어요. 하다보면 어떻게 안될까.. 잘그려서 화가 될것도 아닌데...

저 논밭 그림 예뻐요!

cyrus 2014-03-04 23:58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아이리시스님. 잘 지내시죠? 요즘 스마트폰으로 손수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도록 알려주는 어플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보기가 힘들죠.. ^^;;
 

 

 

 

마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길」 1689년

 

 

 

길을 그리기 위해 나무를 그린 것인지

나무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또는 길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길과 나무는 서로에게 벽과 바닥이 되어왔네

 

길에 던져진 초록 그림자,

길은 잎사귀처럼 촘촘한 무늬를 갖게 되고

나무는 제 짐을 내려놓은 듯 무심하게 서 있네

 

그 평화를 누가 베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의 도끼는

때로 나무를 길 위에 쓰러뜨리나니

파르르 떨리던 잎사귀와 그림자의 비명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겠네

 

그가 그린 어떤 길은 벌목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

내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네

굽이치며 사라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

 

- 나희덕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

 

 

 

서로 마주 보고 나란히 선 가로수가 만든 선을 연장하면 한 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 점이 소실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차 레일을 멀리서 보면 평행선이 만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처럼.

 

인생은 길과 같다. 길이 마치 소실점 같은 끝이 있어서 어느 지점에서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길을 떠나는 누구나가 길 끝에서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만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인생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소실점에 급히 도달하고 싶은 열망이 아니다. 길은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가 아니다.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자신을 찾아 걷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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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시 삼백수 : 7언절구 편 우리 한시 삼백수
정민 엮음 / 김영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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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시비성(是非聲)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최북 「계류도(溪流圖)」 연대 미상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최북은 이 시의 후반부를 첫 글자 ‘상(常)’만 ‘각(却)’으로 바꿔,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그린 「계류도(溪流圖)」의 화제(畵題)로 삼았다.

 

 

미친 물결 쌓인 돌 묏부리를 울리니

지척서도 사람 말 분간하기 어렵구나.

올타글타 하는 소리 내 귀에 들릴까봐

흐르는 물 부러 시켜 산을 온통 감싼게지.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최치원, 題伽倻山讀書堂 / 가야산의 독서당에 쓰다, 14쪽)

 

 

최치원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의 재능이 좋았고, 그의 고독이 좋았고, 그의 시가 좋았다. 망해가는 신라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가야산에 은거한 그의 삶이 좋았다. 시비(是非)하는 소리가 싫어 바위 사이를 울리며 흐르는 물로 차단해버리고 그 고독 속에 파묻힌 그의 결정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들이 흘러 다닌다. 내가 내뱉은 언어, 내가 듣는 언어, 내가 주울 수 있는 언어, 내가 버린 언어. 세상은 바야흐로 언어의 천국이다. 내가 내뱉은 언어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내가 듣는 언어로 인해 내가 아프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가능하면 모든 언어들을 있는 그대로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 언어가 시(是)하는 것이든, 비(非)하는 것이든 그 모두를 내 속에 받아들인다. 지난 시간과는 달리 내 속에 들어온 시비성(是非聲, 옳으니 그르니 하며 다투는 소리)은 아주 자유롭게 내 속을 흘러 다닌다. 흐르는 물소리로 시비성을 막아버린다고 시비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是)’가 반드시 ‘시(是)’인 것도 아니고, ‘비(非)’가 반드시 ‘비(非)’인 것도 아니다. ‘시(是)’가 ‘비(非)’로 변하기도 하고, ‘비(非)’가 ‘시(是)’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시비’ 모두가 상대적이라고 결정해버린다면 삶은 미궁으로 빠진다. 삶은 끊임없는 ‘시비’의 판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치관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면 무엇으로 ‘시비’를 결정할 수 있을까? 상대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가치판단이다. 개인을 넘어 집단을 대상으로 할 때 거기에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이 생긴다. 어쩌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도덕이고 법일 것이다. 우리가 도덕이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비성’이 들린다고 흐르는 물소리로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 소리와 만나야 한다. 그리고 소통해야 한다.

 

 

 

 Scene #2  아름다워 슬픈 여강, 어쩌면 다시 볼 수 없는 그림

 

 

천지는 가이없고 인생은 덧없거늘

호연히 돌아갈 뜻 어디로 가려 하나.

여강 한 굽이 산은 마치 그림 같아

반쯤은 그림인 듯 반쯤인 시인 듯.

 

天地無涯生有涯

浩然歸志欲何之

廬江一曲山如畵

半似丹靑半似詩

 

(이색, 麗江迷懷 여강에 마음이 심란하여, 108쪽)

 

 

 

여강(남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여주 땅의 아름다움을 이만큼 잘 나타낸 시가 또 있을까.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목은 이색은 자신의 고향인 여주를 이렇게 노래했다. 여주에서 그림 같고 시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강의 풍경이다. 한반도의 중앙을 흐르는 남한강이 여주를 감고 돌면서 비로소 여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충청, 강원은 물론 영남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실어 나르고, 한양으로 가는 길손들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런 강줄기를 여주 사람들은 ‘여강 백리길’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언제나 사람과 풍성한 물자로 흥청거렸던 이곳도 철도와 고속도로의 등장에 잊힌 강이 되어버렸다.

 

4년 전에 여강은 ‘4대강 살리기’ 사업의 핵심 구간이 되면서 찬반 세력이 첨예하게 맞선 곳이었다. 강 생태계 파괴로 환경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며 환경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벌어졌고, 공사로 파괴되는 현장을 직접 보려는 시민순례단의 답사 발길이 이어졌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공사는 진행되었다. 지금쯤이면 여강의 그림은 반쯤은 콘크리트이고, 반쯤은 식당일 것이다.

 

여강길은 철 따라 다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물수제비를 뜰 수 있고 동물발자국과 희귀식물도 찾을 수 있으며 강을 울리는 메아리도 들어볼 수 있다. 자갈길과 모랫길, 억새길, 늪지길이 번갈아 나오는 그 길을 걸으면 이야기가 있고 유적도 있다. 그리고 눈물도 난다.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움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심란하다.

 

 

 

 Scene #3  연밥 던지고 임도 보고

 

 

 

문혜정 「연곷 이야기 1」 2008년

 

 

가을날 맑은 호수 옥 같은 물 흐르는데

연꽃 깊은 곳에 목란배를 매어두고.

임 만나 물 저편에 연밥을 던지고는

행여 남이 봤을까 봐 한참 부끄러웠네.

 

秋淨長湖碧玉流

荷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허난설헌, 採蓮曲 / 연밥 따는 노래, 324쪽)

 

 

 

가장 더운 여름날 새벽에 피어나서 밤이면 꽃잎이 닫히기를 3~4 일간 계속 되는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가장 깨끗하게 피어난다. 흔히 연꽃을 한 꽃 받침에서 두 송이가 핀다 해서 부부간의 금슬을, 연밥에는 씨가 많아 다산을, 연밥의 씨는 수백 년 동안 생명을 유지해서 장수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군자를 의미하고 절개를 뜻하는 연꽃도 한편으로는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연꽃이 심어져 있어 연밥을 따는 연못은 남녀가 자연스럽게 만나 사랑이 무르익는 장소였으며 ‘연밥도 따고 임도 본다’는 대표적인 꽃이다. 연밥(蓮子)을 던져주는 것은 사랑 고백을 의미한다. 정민 교수의 해석대로 ‘연자’(蓮子)의 동음이의어 ‘憐子’로 읽으면 ‘그대를 사랑해요!’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부끄럽지만 임을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하는 구절이 뛰어나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을 사랑으로 갈망하고 꿈꾸었지만 단 한 번도 연인을 가져보지 못했고, 지아비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난설헌의 문학적인 성취의 뒤편에는 더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삶이 자리 잡고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다, 기생집을 전전하던 남편, 그리고 재주를 질시하던 시어머니와의 끝없는 불화, 그리고 두 자녀의 죽음. 그녀의 삶은 질곡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한(恨)을 난설헌은 시로 옮겼다. 아름다운 연꽃잎은 기억할까, 여인의 눈물을. 진흙 속에 활짝 피는 연꽃잎을 만나면 시대와 불화했던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과 못다 핀 사랑을 기억해야겠다.

 

 

 

 Scene #4 종소리보다 묵직하게 울리는 독립의 의지

 

 

사방 산 감옥 에워 눈은 바다 같은데

찬 이불 쇠와 같고 꿈길은 재와 같네.

철창조차 가두지 못하는 것 있나니

밤중의 종소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四山圍獄雪如海

衾寒如鐵夢如灰

鐵窓猶有鎖不得

夜聞鐘聲何處來

 

(한용운, 雪夜 / 종소리, 612쪽)

 

 

 

김광균의 ‘설야’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귀를 열게 하지만, 한용운의 설야는 몇 겹으로 갇힌 감옥 속에서 듣는 종소리로 귀를 당긴다. 안 그래도 감옥인데, 사방에 눈이 하염없이 쌓여, 갇힌 마음을 다시 섬으로 가뒀다. 외롭고 슬픈 마음에 이불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싸늘하고 꿈마저 으스스하다. 그런 가운데 문득, 가둔 울타리 모두 풀고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있다. 저 종소리의 놀라움. 철창도 가두지 못하는 게 있다. 종소리를 가두지 못한다면, 마음인들 어찌 가둘 수 있으랴.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만해 한용운 선생은 변호사를 대지 말고,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주변에 당부했다고 한다. 그가 수감 중 지은 시 '설야(雪夜)'는 꿈마저 재가 될 정도로 혹독한 감옥에서 한 밤 종소리를 들으며 느낀 비감한 심사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몸은 가둘 수 있어도 자유와 독립의 의지를 가두지는 못한다는 그 기개가 미명의 종소리보다 묵직하게 울려온다.

 

돌아온 봄에 꽃은 피고, 회복한 땅엔 새살이 돋았다. 아픔은 사라졌고, 흉터는 남았다. 남은 역사의 흉터가 부끄럽다고 외면하거나 거짓으로 미화할 수는 없다. 더욱 혹독한 아픔을 다시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 옥중에서 뽑아 올린 이 시가 아무리 드높은 예술로 승화된 절창(絶唱)이라 할지라도, 이런 절창은 결코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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