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백화점인 ‘봉 마르셰’를 소재로 한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에는 한 시골 처녀가 백화점 쇼윈도를 처음 구경하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드니즈와 일행은 무엇보다도 오밀조밀한 윈도 디스플레이에 매료되었다. (중략)

하지만 그들을 마치 못에 박힌 듯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 진열창이었다. (중략) 이렇듯 상품이라는 모티브가 바뀌고 진열대라는 생생한 악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나지막이 계속되는 반주가 있었는데, 그것은 크림빛 스카프의 나풀나풀한 주름장식 끈이었다.”

 

‘금발 여인의 보드라운 살갗’, ‘감미롭게 일렁이며 섬세하기 그지없는 꽃들의 다양한 빛깔.’ 온갖 관능의 어휘들로 치장한 졸라의 묘사 안에서 쇼윈도는, 벤야민이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의 전이’라고 풀이한 19세기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창(窓)이다. 창 너머에는 필요에 앞서 펼쳐지는 욕망에 의한 소비의 시대적 매혹이 극장의 판타지처럼 펼쳐져 있다.

 

 

 

 

 

 

 

 

 

 

 

 

 

 

 

 

 

인류가 윈도쇼핑의 쾌락에 처음 몰두하게 된 것은 1784년 프랑스 파리에서였다고 한다. 부르봉 왕가의 루이 필립 오를레앙이 자신의 성 팔레 루아얄의 1층을 개조해 상점 거리를 만든 것. 산책을 나온 시민들은 긴 회랑을 따라 줄지어 입점한 당대의 패션상점들을 비 맞을 걱정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사려는 물건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은커녕 매장에 들어서서도 원하는 물건을 말한 뒤에야 점원이 갖다 주던 식이던 이전과 달리 팔레 루아얄을 한 바퀴만 돌면 당대의 멋쟁이들이 지닌 유행 상품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생활의 혁명이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산책보다 구경, 즉 윈도쇼핑을 목적으로 그 곳을 찾았고, 쇼윈도는 비유도 과장도 아닌,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파리 곳곳에는 유리지붕을 얹은 아케이드 상가가 본격적으로 들어섰고, 기름 램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밝기의 가스등이 등장하면서 윈도 쇼핑은 조명의 세례까지 입게 된다.

 

19세기는 ‘진보’라는 새로운 신앙의 시대였고, 파리는 명실상부 그 신앙의 성지였다. 시민들은 쇼윈도의 풍요와 화려함 속에서 곧 도래할 지상 천국의 약속을 보았고, 그 약속 안에서 쇼윈도는 천년왕국 성전의 제단이자 임박한 미래였다.

 

진보의 신앙이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게 처절하게 확인된 뒤로도 쇼윈도는, 비록 '물신(物神)'의 제단쯤으로 격하되긴 했지만, 건재했다. 의미의 층위에서 추락하는 대신 현실의 저변을 넓혔고 치장의 정성도 날로 더해졌다.

 

그 공간은 이제 저마다 '쇼핑 천국'의 입구와 벽면을 장식하며, 비주얼 머천다이징(VMD), 곧 시각 마케팅 기법과 행위의 총체라 해도 좋을 첨단 소비문화산업의 전시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쇼윈도는 빛과 색채의 마법 공간이다. 문화와 기술의 진보로 소품과 조명이 달라졌고 동시대인의 달라진 취향과 욕망을 겨냥하느라 기법과 분위기가 나아졌을 뿐, 예나 지금이나 저마다의 천국의 꿈 이미지를 구현하려 한다는 점은 같다. 주력 상품들을 전면에 돋보이게 배치한 고전적인 쇼윈도들 사이에는 상품의 진열 공간이라는 인식 자체를 스스로 부인하듯 소비 낙원의 이미지만 드러내는 파격적 은유의 쇼윈도도 있다. 그 때의 상품은 천국의 소품처럼 기둥 뒤나 LED 조명의 그늘 속에 실루엣처럼 배치되곤 한다. 그야말로 벤야민이 변화무쌍한 물신의 세계로 비유한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ía)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 에스테스  「사탕가게」  1969년

 

 

비좁은 폐쇄공간의 그 호사스러운 확장성은 외양과 개성의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소비 욕망을 선도적으로, 또 압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또 멋과 풍요와 여유와 기대 등 억눌린(혹은 억눌러온) 시민들의 욕구를 스스로 발견하게 하고 분출하게 유혹한다는 점에서 하나다. 쇼윈도는 그 자체로는 만질 수도 들쳐볼 수도 없는 시각 공간일 뿐이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쇼윈도의 벽 너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함으로써 소비자의 발길을 매장 안으로 유인하거나 상품의 상징적 가치를 돋보이게 과시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쇼윈도를 향한 개별적 시선의 주체인 소비자는 그 판타지에 대한 욕구의 연대를 통해, 바로 그 집단의 판타지 안에서, 비로소 공동체임을, 이 소비공화국의 구성원임을 확인한다. 그렇게 쇼윈도는, 벤야민이 '물신을 향한 집단 예배의 방식'이라 칭했던 유행을 창조하고 확산시킨다.

 

물론 쇼윈도가 백화점이나 패션 부티크만의 공간은 아니게 된 지 오래다. 가게의 거의 모든 벽들이 투명 유리로 바뀌면서 이제 옷 가게나 자동차 매장 등 어지간한 상점들은 공간 전체가 쇼룸이 됐고, 그나마 남은 쇼윈도는, 음식점들이 더러 그러한데, 메뉴판 수준으로 왜소해진 곳도 적지 않다. 사이버 쇼윈도, 즉 인터넷 쇼핑몰을 통한 상거래가 활성화하면서 오프라인 매장은 공간의 물리적 투명성과 무관하게, 꼼꼼한 소비자들이 실물을 확인하는 곳으로만 기능하기도 한다. 그 때의 오프라인 매장은 매출보다 홍보에 치중하는, 쇼룸이 된다.

 

소비의 대중화와 유행의 확산시차 단축으로 쇼윈도의 마네킹이 어제 입고 쓰고 신은 신상품을 오늘 거리에서 실제로 보게 되는 일도 있다. 연예인이 방송에서 선보인 상품이 거의 실시간으로 조회되고, 또 소비된다. 그 때의 평면 모니터 역시 전자 쇼윈도다. 멋에 민감한 이들로 북적대는 서울 도심의 어떤 거리들은 그렇게 그 자체로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는 쇼윈도가 된다. 도시가, 아니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시장 공간이라는 말은 그렇게도 확인된다.

 

원형으로서의 쇼윈도는, 그래서 사회의 축소판인 동시에 시(詩)적인 시연무대, 시장 자본주의의 내일을 향도하는 깃발이다. 쇼윈도가 스타일과 라이프스타일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혹은 집단의 소비 판타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이 시즌에 소비해야 할 것들을 미리 보여주면, 내일 우리는 그 분위기와 양태를 알게 모르게 본받게 된다.

 

 

 

 

 

 

 

 

 

 

 

 

 

 

 

 

한편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주의 핵심에는 기술 발전보다도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적인 소비의 논리가 있다고 보았다.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서비스 및 물적 재화의 증가에 따른 소비의 풍부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풍요로울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들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새롭게 개발되고 생산되는 상품들의 리듬과 끊임없는 연속에 따라 사람들의 삶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또 이에 맞춰 인간들도 더욱 사물 의존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다. 현대는 말 그대로 상품이 지배하는 시대, 곧 소비를 학습하고, 소비에 대한 사회적 훈련을 사회화의 주된 내용으로 하는 ‘소비사회’인 것이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은 자신의 소설 『사물들』에 관한 인터뷰에서 소비사회에 유혹된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물질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풍요로움이 어떤 정형화된 행복을 가져다주었지요 … (두 주인공) 실비와 제롬이 행복해지려고 하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벗어날 수 없는 사슬에 걸려든 것입니다. 행복은 계속해서 쌓아 올려야 할 무엇이 되고 만 것이지요. 우리는 중간에 행복하기를 멈출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현상은 거꾸로, 쇼윈도의 변신에 대한 사회의 끊임없는 요구로 작용한다. 사회보다 한 발짝 앞서야 하는 그 공간이 더 이상 앞서 나가지 못할 때, 혹은 대중적 욕망의 관성에서 지나치게 벗어날 때, 쇼윈도만큼 금세 남루해지는 공간도 없다. 그 때의 쇼윈도는 물신의 제단이 아니라 상품의 무덤이 된다. 화려함의 그늘은 그렇듯 짙어서, 불 꺼진 쇼윈도와 먼지 앉은 마네킹은, 패잔병의 찢어진 깃발만큼이나 참담하고 스산하다. 그래서 쇼윈도는 밤낮없이 전투가 치러지는 전장도 된다. 그 전투는 경쟁업체와 소비자들의 변덕스러운 취향과 앙다문 지갑과도 치러지지만, 본질적으로는 시간과 치르는 고독한 전투다. 행복을 원하는 도시인들은 오늘도 쇼윈도에 있는 물신 앞에서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바치고 있다 . 인적 끊긴 세모의 거리에서도 쇼윈도의 조명이 꺼지지 않는 것은, 그 적막의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기 때문이다. 멈추고 싶은, 멈출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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