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편역 / 창비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5공 시절인 1986년, 정부는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렸다. ‘대통령의 임시 집무실에 놓여 있는 목민심서가 눈길을 끈다’고 보도할 것. 전두환 전 대통령은 외국행 비행기를 탈 때 기자들의 사진촬영에 대비해 이 책을 꼭 비치하도록 했다.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다. 비록 읽지는 않고 선전용으로 홍보효과를 노린 것일지라도 이 책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는 있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대표 저서인 이 책은 지방행정관이 지켜야 할 준칙을 담고 있다. 책 전체에 흐르는 사상은 애민(愛民)정신과 실사구시(實事求是) 철학이다. 특히 관(官)이 몸을 낮추어 민생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강조했다.

 

옛말에 백성을 부양하는 것을 일러 ‘목(牧)’이라 했다. 이 책에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6가지 계율이 있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가정을 바로 다스리고, 청탁을 물리치고, 철저히 절약하고, 즐겨 베풀라는 것이다. 다소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곧은 마음과 곧추선 자세야 말로 행정을 하기에 앞서 목민관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심은 역시 민본주의이다.

 

이 책이 쓰인 1800년대 초반은 임진왜란 이후 군사력 증강에 국력을 기울인 결과 국가재정이 궁핍하던 때였다. 관리들은 뇌물 챙기기에 바빴다.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으나 조정은 나라 다스리는 일보다 당파싸움에 빠져 국가가 몰락의 길을 걷던 시기였다.

 

사실 목민에 대한 정약용의 구상은 일찍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이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할 때 임지에 따라가서 견문을 넓혔다. 그뿐 아니다. 자신도 한때는 암행어사와 수령으로서 지방행정의 문란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을 생생히 목도한 터였다. 그래서 다산은 책의 서문(자서, 自序)에서 수령들의 부패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따끔하게 질타하고 있다.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 모른다.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15쪽)

 

다산이 살다 간 시대와 오늘의 현실은 무엇이 다른가. 혹시 이 나라의 공무원들은 200년 동안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아닌가. 많은 사람이 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꼽는다. 정책 대결이 아닌 정당 간의 지역 대결만 있고 극단적인 분열과 대립 속에서 우리의 정치의 시계는 멈춰 선 지 오래다. 매일 보도되는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정은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불러일으켜 정치적 무관심을 만연시켰다. 아직도 이 나라는 부정과 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공직자들의 부패 사건은 무시로 터지고 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정치권을 보면서 새삼 다산 정약용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백성이 수령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강조한 다산이 요즈음 전개되는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이를 과연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다산이 암행어사와 부사 등의직무를 수행하면서 겪은 자신의 경험이어서인지 더욱 설득력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의 처신은 다르지 않아 항상 청렴과 자기희생이 으뜸의 덕목으로 꼽힌다. 공직자의 몸가짐과 자기관리가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다산은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이다.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뇌물에 또는 사사로운 인연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후손에까지 불명예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경계한 말일 것이다. 그 중 율기(律己)편에 나오는 한 구절. ‘청렴은 수령의 본래 직무로 모든 선(善)의 원천이며 모든 덕(德)의 근본이다.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 노릇을 잘할 수 있는 자는 없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관피아’ 문제가 부각되면서 정부는 대대적인 공직 개혁에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시 열풍’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국가 경영에 참여하고 국민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투철한 국가관과 봉사정신을 갖추지 않은 채, 소시민적 안락을 추구하고자 공직을 지망한다면 걱정스럽다. 공직자는 귀찮은 일도 기피하지 않아야 하며, 때로는 골치 아픈 경쟁도 벌여야 한다.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지망할 곳이 아니다.

 

공직자가 된 사람의 최고 욕심은 최고위 공직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일 것이다. 그런 큰 욕심을 접고 눈앞의 조그만 뇌물에 현혹돼 중도에 흠집이 나거나 낙마하고 만다면 큰 욕심을 채울 방법이 없게 되므로 진짜 큰 장사꾼만이 청렴한 공직자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엄격한 도덕성으로 무장되지 않은 공직자가 돈까지 가지려는 데서 수많은 문제가 생긴다.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옛사람들의 뜻이었다. 교체되고자 슬퍼한다면 수치스럽지 않은가?” (해관 6조 중에서, 328쪽)

 

그 밖에도 다산은 청렴한 선비의 부임길 행장은 이부자리와 속옷 외에 책 한 수레라고 했다. 또 퇴임 행장은 낡은 수레와 여윈 말에 토산품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고생한 노력 끝에 높은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생각하면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공직을 통해서 자신의 소명을 이루었다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하는 초연함도 있어야 한다. ‘공복(公僕)’이라는 초심을 잃고, 권력과 재물에 욕심을 부리면 ‘박봉(薄奉) 타령’을 늘어놓거나 ‘검은 돈’의 유혹에 빠져 패가망신하기 쉽다.

 

‘청렴’은 여전히 공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공부문이 아직도 많은 영향력과 권한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에서 공직자의 인간됨과 자세는 참으로 중요하다. 청렴 다음으로 정약용이 강조하는 것이 자기 수양이다. “아전을 단속하는 일의 근본은 스스로를 규율함에 있다.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행해질 것이고,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하더라도 일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고 말함으로써 목민관의 마음 자세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목민관의 몸가짐이 바로 서야 올바른 행동이 나오k고 이를 아랫사람이 본받아 원칙과 기강이 바로 서게 된다는 것이다.

 

청렴을 말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세상이지만, 그 무엇도 인물 검증의 잣대가 될 수 없어 보이는 현실에서 유권자의 이름으로 『목민심서』를 읽었는지 시험이라도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악독하고 간사한 자는 모름지기 정당(政堂) 밖에다 비석을 세우고 그 이름을 새겨 영구히 복직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전 6조 중에서, 147쪽)

 

만약에 다산의 시험에 통과된 공직자 중에 도의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과오를 덮은 채 공직에 복귀하려는 사람이 많다. 과연 누가 그들을 믿고 선거에서 표를 행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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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군 입대 하기 전에 무조건 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있었다. 입대를 하는 순간, 평생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여자를 오랫동안 볼 수 없다. 한창 혈기왕성한 사내들에게는 군 생활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총각 딱지’를 뗀다. 집창촌에 가서 섹스로 욕구를 푼다.

 

집창촌은 ‘총각 딱지’를 떼려는 젊은 사내뿐만 아니라 중년 남자들도 많이 찾는다. 집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섹스할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에 돈을 지불해서라도 집창촌으로 향한다.

 

아내는 사랑해서 섹스를 할 수 있지만, 집창촌의 매춘부는 그저 섹스하기 위한 여자일 뿐이다.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버는 매춘부는 영혼 없는 섹스를 어떻게 생각할까. 매춘으로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쾌락의 감각은 일시적이다. 남자의 뇌는 자위를 한 후에 성적 흥분 상태가 가라앉으면 이성을 되찾는다고 한다. 이런 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현자타임’이라고 한다. 매춘부들도 처음에 돈을 많이 받고, 남자 손님들로 성욕을 풀 수 있어서 좋았겠지만 섹스를 하고 나면 후회감이 밀려올 것이다. 섹스로 인해 점점 더 망가져만 가는 몸. 늙으면 매춘을 할 수 없다.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차라리 몸을 파는 직업이 아니라 조금만 더 판단을 잘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매춘부도 사람이다. 자신의 몸을 남성들을 위한 ‘상품’으로 만들어 돈을 버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과연 이것을 ‘직업’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다만, 매춘부라고 해서 섹스에 굶주린 색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매춘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자신의 몸을 상품화시켜서 돈을 버는 것 그리고 그런
행위 때문에 남자들에게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노는 계집, 창>에서 집창촌에 간 중년 손님이 매춘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소란스럽게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있다. 손님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거나 돈이 터무니 없이 비싸다는 이유로 매춘부는 그들로부터 무시 받고, 여자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험한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 페이스북 유머 관련 페이지에서 매춘 행위를 하는 여자의 경험담을 인터넷에 올린 20대 남자의 글을 사진으로 캡처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사연은 이렇다.

 

자신의 사연을 올린 21살 남자는 영등포에 위치한 여관에서 매춘 행위를 하는 40대 아주머니와 섹스를 했다. 그런데 남자는 비싼 돈에 걸맞지 않은 매춘 행위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화가 나서 자신보다 20살 많은, 거의 어머니뻘 되는 아주머니를 때리면서 ‘너 같은 창녀는 죽어야 된다’고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남자의 멸시에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울면서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남자의 말은 어이가 없다. ‘빡촌(집창촌의 속어)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보통 눈물도 없지 않나요? 독해지지 않나요? 이 아줌마는 울면서 나가더라고요. 창녀도 직업 아닌가요? 서비스업 아닌가요? 그럼 손님한테 잘해야 되는 게 아닌가요? 잘못했으니 욕 먹는 건 당연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매춘이 정당한 직업이고, 서비스업이라고 해야 될 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40대 아주머니가 나이와 몸을 생각하지 않고 매춘으로 돈을 버는 행위는 좋지 않게 본다. 하지만 매춘, 그러니까 섹스가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를 함부로 손찌검하고 욕설을 하는 21살 남자도 잘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인터넷에 공개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태도는 같은 남자로서 부끄럽고 한심하다. 그저 섹스로 욕구를 풀지 못한 화풀이를 매춘을 ‘직업’이라는 이유로 불만을 표출하는 모습은 나잇값 제대로 못한 철없는 행동이다.

 

이 남자는 매춘부를 그저 섹스를 하기 위한 상품으로만 보고 있다.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춘부는 눈물도 없고, 독하다고? 도대체 그런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남자 손님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욕설을 듣는다면 제 아무리 섹스가 좋아서 매춘을 하는 여자라도 화가 나고, 마음에 상처받기 쉽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못 받는 것이다. 그저 섹스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다. 그들이 매춘을 혐오하고 무시하는 인식은 이중적인 생각이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마치 에두아르 마네가 파리의 매춘부을 연상시키는 「올랭피아」를 살롱에 출품했을 때 욕설과 비난의 융단폭격이 쏟아진 것을 연상시키듯 매춘부를 ‘성적 상품’으로 격하시켜 멸시하는 모습은 위선적이다. 살롱의 신사들은 매춘부가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마네의 그림이 격에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그림은 고귀한 비너스가 벌거벗은 그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네가 활동했던 19세기 파리는 매춘이 성행했다. 마네의 그림에 분노한 신사들 중에 매춘을 안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밤이 되면 집창촌에서 자주 보던 매춘부의 누드를 살롱에서 마주하는 순간, 낮 뜨겁고 부끄러운 것이다. 당시에 유행하는 누드화에서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성 모델’이고, 「올랭피아」는 그저 여성 모델이 아닌 매춘부였다. 올랭피아는 그림 속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없었다. (「올랭피아」의 모델은 실제로 매춘부가 아니다. 평소 마네의 그림에 모델로 자주 섰으면 화가로 활동한 빅토린 뫼린이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매춘부는 ‘여자 아닌 여자’다. 마음이 연약하고 쉽게 눈물을 흘리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그리고 밤만 되면 그녀를 탐하는 남자들은 매춘부를 보통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물을 흘러서 안 되고, 그저 남자 손님의 정액을 받아야하는 상품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한 집안의 딸이거나 가장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기 때문에 매춘을 할 뿐이다. 가족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아도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매춘부들의 말 못하는 마음을 프랑스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잘 알고 있었다. 로트렉은 물랑 루즈의 사창가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매춘부들의 일상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마네가 매춘부처럼 누드를 그렸다면, 로트렉은 진짜 매춘부의 누드를 그렸다. 누드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일상 하나하나 그림으로 묘사했다.

 

 

 

 

로트렉  「거울 앞에 선 누드 여인」  1897년

 

 

로트렉이 묘사한 매춘부의 모습은 반쯤 벌거벗고 있지만, 그렇게 야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의 얼굴은 생기가 없고 힘없어 보인다. 자신들의 삶이 좋을리가 없다.

 

로트렉의 「거울 앞에 선 누드 여인」 속 매춘부는 너무나 평범한 검은 스타킹을 신은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매춘부의 손엔 방금 벗은 듯한 블라우스가 들려져 있다. 손님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선 이 부분이 여자로서의 세월이 불과 얼마 안 남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핵심적 의미는 다른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왼쪽에 그려진 흐트러진 침대가 그것이다. 이는 매춘부가 나이 들면 제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사랑 받지 못함을 상징하고도 남음이 있다. 비록 이 그림은 매춘부를 모델로 했으나 로트렉은 시들어가는 여인의 육체의 덧없음을 그림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내려 애썼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처럼 매춘을 정당한 노동행위, 직업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해도 매춘부를 여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매춘부도 여자다. 섹스만 하는 장난감이 아니다.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야하는 여자. 여자 아닌 여자. 그녀도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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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이것만큼은 해보고 싶은데 실컷 하지 못한 것이 한 두 개 정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만화책을 읽는 것이다. 만화 엄청 좋아한다, 어렸을 때 TV에서 하는 만화영화는 무조건 챙겨봤다. 둘리, 달려라 하니, 머털도사 같은 한국 만화부터 꼬마자동차 붕붕, 세일러문, 포켓몬스터, 명탐정 코난까지 일본 만화도 거의 챙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책은 많이 읽은 기억이 없다. 고등학생 때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만화방에 가서 만화책 몇 권 빌려서 야자(야외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읽긴 했지만, 공부를 완전 소홀히 할 정도로 질리도록 만화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알라딘 중고샵에 가면 만화책이 잔뜩 꽂혀 있는 서가 근처에 만화책을 보거나 구입하는 학생들을 만난다. 혼자가 아닌 또래 친구들과 같이 읽고 싶은 만화책을 찾아보고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다. 아마도 중고샵 내부에서 제일 시끌벅적한 곳이 만화책이 꽂혀 있는 서가 근처일 것이다. 가끔 그런 어린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부럽다.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만화책을 같이 읽어 본 적이 없다. 한 일 년 아니 한 몇 달이라도 질릴 때까지 만화책을 빌려다 읽고 싶다.

 

어쩌면 나는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만화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요즘은 이름난 만화들을 어쩌다 뒤늦게 찾아 읽는 것을 빼고는 만화를 자주 보지 않는다. 아니, 이 말이 과장일지도 모르겠는데, 이름난 만화들을 찾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만화에 별로 목숨을 걸지 않는다. 어렸을 때 많이 보던 만화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다. 가끔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재밌게 봤던 만화가 하고 있으면 보곤 한다. 만화의 결말을 뻔히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기억하면서도 본다. 어렸을 때 본 만화를 그리워하는 추억은 채널 돌리느라 쉴 틈이 없는 리모컨 컨트롤을 한 템포 쉬게 할 정도로 그 향수는 너무나도 강하다.

 

만화를 본 적은 없지만 그 만화 캐릭터를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만화 캐릭터를 기억해서 그가 나온 만화작품과 작가에 흥미를 가질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박수동 화백의 '고인돌'이다.

 

“빠빠라빠빠빠~ 삐삐리 삐삐코~ 빠!삐!코!” 중독성 있는 CM송을 유명한 아이스크림 TV 광고에 나온 고인돌 캐릭터는 16년이 지난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1989년에 처음 빠삐코 TV 광고가 제작되었다던데 사람으로 치면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다... 비록 1970년대 한창 인기를 끌었던 원작을 접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스크림 광고 한 편 덕분에 고인돌 캐릭터를 기억할 수 있었다. 고인돌 캐릭터는 빠삐코뿐만 아니라 스크류바 광고에도 진출했다. 스크류바 광고 CM송도 빠삐코 못지않게 유명하다. “이상하게 생겼네. 롯데 스크류바~ 삐삐 꼬였네, 들쭉날쭉해~.” 지금까지도 슈퍼마켓에 가면 볼 수 있는 장수 아이스크림 제품 광고에 나올 정도로 박수동 화백의 고인돌 캐릭터는 친숙하고 재미있다.

 

그런데 박수동의 『고인돌 왕국』을 만화 원작으로 읽어보지 못한 8090 세대는 이 만화가 아동 독자를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들에게는 원작의 캐릭터보다 TV 광고 속 고인돌 캐릭터 이미지가 강한 탓이다. 사실 『고인돌 왕국』은 성인만화다. 성인 주간잡지의 대명사였던 ‘선데이 서울’ 연재 만화였다. 1974년부터 1991년까지 17년 동안 총 833회 연재됐다.

 

『고인돌 왕국』은 삐뚤삐뚤 대충 그린 듯한 구불구불한 선화(線畵)체 그림에 에로틱한 분위기로 원시 조상의 유쾌한 일상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당시만 해도 사회분위기는 만화의 질펀한 성적(性的) 담론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만화는 고루했던 분위기를 단숨에 깨버렸다. 야하면서도 이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에로티시즘. 만화에 나오는 야한 농담과 성적 비유는 그 당시 독자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았다. ‘미스터 고’를 비롯해 ‘인’, ‘돌’ 이 세 남자 원시인과 고인돌 마을을 이끄는 임금은 여색을 밝힌다. 성적으로 농담하기를 좋아하고, 성적 욕구를 멈출 줄 모르는 전형적인 남성을 대표한다. 여자 원시인 ‘미스 오’, ‘육’, ‘팔’ 역시 성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끔 세 명의 남자 원시인을 꼼짝하게 못할 정도로 기가 센 편이다.

 

박수동의 『고인돌 왕국』은 선사시대 조상들의 유쾌한 일상을 4칸 만화로 만든 조니 하트의  ‘Back to the B.C’(1958년)와 비교하고 필적하곤 한다. 작품의 분위기는 하트의 만화와 많이 닮았다. 그러나 성냥 개피에다 먹물을 찍어 그리는 고인돌 그림체는 자니 하트의 꽉 짜인 듯한 펜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고인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매력은 글씨체다. 허투루 그려 제낀 듯한 그림이지만 꽉 짜인 구도, 그에 걸맞은 휘청휘청 끊어질 듯 흘러내리는 글씨체.

 

 

 

 

 

예전에 남자들의 가슴에 확 불을 지펴서 설레게 만들었던 ‘우리 집에 라면 먹고 갈래?’ 못지않은 『고인돌 왕국』 속 야릇한 의미의 표현은 지금도 봐도 신선하고 재미있다. 일부 표현 중에는 여성의 외모나 신체를 성적으로 희화한 것이 있어서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요즘 성(性)에 대해 개방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다시 만화가 나온다면 충분히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다.

 

만화는 1978년 까치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처음 발행됐으며 ‘선데이 서울’ 폐간 이후로 고인돌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들이 단행본으로 묶어져 줄줄이 출판되었다. 이듬해 『소년 고인돌』이 출간되었고, 90년대 중반까지 다양한 출판사를 통해 고인돌 만화집 단행본이 나왔, 그러나 이제는 절판되었으며 지금은 헌책방에서 고가로 매길 정도로 희귀본이 되었다. 최근에 헌책방에서 구한 우석출판사의 『고인돌 왕국』은 2001년에 출간된 마지막 만화집 단행본이다. 한 권짜리 분량으로 봐서는 ‘선데이 서울’에 연재된 833회의 작품 중 일부만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우석출판사판에는 소설가 김홍신의 서문, 책 중간에 만화평론가 손상익의 짧은 비평을 읽어볼 수 있다.

 

박수동의 <고인돌>은 인간애를 저버리지 않는 따스한 시선이 있어 좋다. 권위도 없고 뽐냄도 없다. 그저 사람답고 동물답고 약간 모자란 듯한 가슴을 느낄 수 있어 예쁘다. (김홍신, 『고인돌 왕국』 서문 중에서)

 

『고인돌 왕국』은 네이버에서 약간의 요금을 내면 볼 수 있다. 허나 젊은 시절, ‘선데이 서울’에 연재된 만화를 즐겨본 기억이 있는 중장년층들에게는 그 때 그 시절의 향수까지 바란다면 욕심일 수 있겠다. 만화는 만화책이 낫다. 종이를 훨훨 넘기면서 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만화책 보는 맛이다. 올해가 『고인돌 왕국』이 ‘선데이 서울’에 처음 연재된 지 40년이 되는 해다. 타이밍이 딱 좋다. 『고인돌 왕국』이 단행본으로 복간되기에 아주 좋은 시기다. 한국만화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그저 과거의 추억으로 대표되는 유물로 남기에는 너무 아깝다. ‘선데이 서울’ 열혈 남성 독자들을 키득키득거리게 만든 성인만화의 재미를, 나 같은 젊은 친구들도 누려 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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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4월 4일

 

어젯밤에 영화관에 갔다. 모두 전쟁 영화였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가 지중해 근처에서 폭격을 당하는 장면이 가장 볼만했다. 크고 뚱뚱한 사내가 그를 추격하는 헬리콥터를 피해 헤엄쳐 도망가다가 사살되는 장면에 이르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18쪽)

 

윈스턴은 자신의 일기에서 잔인한 장면이 넘치는 전쟁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오늘날 세상은 폭력이나 잔인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더욱 더 차고 넘친다. 기술 발달 덕분에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재앙이나 참혹한 전쟁도 TV와 인터넷 그리고 SNS을 통해 바로 알 수 있다. 그런 이미지가 워낙 홍수를 이루다 보니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장면조차 스펙터클한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그것이 시신경을 통하여 심장을 두들길 때 우리는 관음증적인 가학적 쾌감의 유혹에 사로잡힌다. 남의 고통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틀림없이 윤리적 문제를 동반하는 일이지만, 때때로 그것은 자극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되어 쾌락의 썩은 내를 풍기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윤리의 의미는 무색해진다.

 

 

 

 

케빈 카터  「수단의 굶주리는 소녀」  1993년

 

 

타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은 온갖 시각적 이미지는 윤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고통에 대한 공감마저도 잊게 만든다. 남아공 출신의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인간의 윤리적 본능인 공감을 사진 작품과 맞바꿨다. 그 결과, 셔터를 누른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케빈 카터는 명예와 죽음을 동시에 안고 말았다.

 

수단의 식량센터에서 보급을 받기 위해 걷다가 지쳐 쓰러진 소녀, 그 뒤로 독수리가 호시탐탐 때를 기다리던 순간에 카터는 셔터를 눌렀고 케빈 카터는 이 사진으로 1994년에 보도사진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수상의 기쁨도 잠시, 그 순간의 상황에 셔터를 누를 게 아니라 독수리를 쫓았어야 했다는 여론의 비난 포격을 맞아야 했다. 카터는 사진을 촬영하고 난 후 당장 독수리를 내쫓았다고 항변했지만, 그의 내면은 종잡을 수 없는 혼란과 고통 속으로 사로잡혔다.

 

케빈 카터의 죽음은 시각적 이미지 생산과 윤리적 의무 사이의 딜레마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사례로 회자된다. 하지만 케빈 카터가 겪은 딜레마는 비단 세상 속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몸담고 있는 사람들만의 경험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사진을 찍어 일상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우리 또한 그 딜레마를 피할 수 없으며 이를 무시한다면 심각한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사진출처: 위키트리 (2014년 5월 22일 기사)

 

 

여성 응급구조사는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의 환부 상태를 직접 사진을 찍는다. 의료인 동료들끼리 공유하면서 공부하는 차원으로 그 사진을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다. 과연 응급구조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그녀의 행동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사진을 찍고 공개했다면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찍은 사진 속 환자의 환부 상태는 미미한 정도가 아니다.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할 정도로 두 눈으로 직접 보기 힘든 끔찍한 상태다. 당연히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응급구조사는 페이스북 사진에 대한 비난이 일파만파 커지게 되자, 해당 병원에 사과문을 올렸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정상적인 사람도 차마 보기 힘든 환자의 환부를 많이 목격했다. 그러한 환경이 타인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고 그저 하나의 구경거리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동료 응급구조사를 위해서, 그리고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공개 설정으로 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아무리 공부의 목적으로 사진을 찍었다하더라도 윤리에 어긋난 잘못된 행동이다.

 

사실 페이스북에는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고, 공유되고 있다. 일부러 ‘좋아요’ 수를 늘리기 위해서 자극적인 사진만 올리는 특정 페이스북 페이지도 있다. 영화배우 찰리 쉰이 우연히 페이스북에 접속하다가 신체의 일부가 절단된 사람의 사진을 보는 순간, ‘스너프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다. SNS에서 공유되는 끔찍하고 잔인한 사진들은 스너프 영화 못지않을 정도로 불쾌감을 느낄 정도다.

 

페이스북에서는 가끔 반려견이나 동물이 사람의 폭력에 의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은 사진이 오르기도 한다. 사진의 게시자는 동물학대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공개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합당한 목적을 위해 찍은 사진이라도 윤리적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 상처 입은 동물을 얼른 동물병원에 보내서 치료를 받는 것이 우선이다. 결국 이러한 사진 또한 일시적인 구경거리로 전략하고 만다.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일이 아닌 탓에 안도하며 그것을 보고, 즐기고, 연민을 갖는다. 그걸로 끝이다.

 

그러나 그걸로 부족하다. 고통 속의 타인과 우리가 같은 지구상에 살고 있다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고통과 연결돼 있을지 모른다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잔혹한 이미지 속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세계를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구 저 편에서 누군가 전쟁이나 기아, 고문 등 부당한 폭력에 짓밟히고 있음을 전하는 뉴스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내가 당한 일이 아니므로. 희생자에 대한 연민이나 가해자를 향한 분노가 솟구치는 것도 잠시, 우리는 곧 잊는다.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우리는 남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눌 힘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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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같은 가짜’ 찌라시, 괴담은 바늘구멍만 한 틈으로 파고드는 순간, 사회적 흉기로 돌변한다. 역시나 지난달에 발생한 세월 호 사고 이후 역시나 인터넷과 문자메시지로 괴담은 퍼져나갔다. 그것은 불행한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퍼지는 괴담은 사람 잡을 정도로 위력이 어마어마하다. 근거 없이 떠돌고 전해지는 루머와 괴담은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인해 뜬소문의 최초 유포자는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책임조차 물을 수 없다. 억울한 피해자만 속출할 뿐이다. 루머는 한 사람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사람들이 불안하거나 낯선 상황에 직면하면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그 불안을 덜어내려고 하는 행위를 자동으로 하게 된다. 또 문자메시지나 SNS로 괴담을 퍼뜨리는 행위 역시 불안한 생각을 남들과 공유하면서 불안감을 줄여보려는 데에서 비롯된다.

 

위기 때마다 괴담이 퍼지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대자연의 힘에 의해, 혹은 안보 환경 변화로 한 나라에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여지없이 또 괴담이 퍼져 나간다면 그 혼란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괴담과 루머에 휘말린 당사자는 극심한 상처를 받지만 ‘아니면 말고’로 끝나는 게 현실이다. 자극적인 사실이 진실이기를 기대하는 심리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도를 넘어선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 이러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항상적 불안감을 안고  산다. 괴담은 이런 불신과 불안을 먹고 자란다. 독자들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선사해 준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면 정신 건강에 해로운 나쁜 이야기 ‘괴담’을 싫어했을 것이다. 마르케스의 장편소설 『더러운 시간』은 나쁜 이야기에 휘말리는 사람들과 체제 유지를 위해 이를 악용하는 권력자의 비열한 모습을 통해 괴담이 평화로운 마을 하나를 점점 파괴시키고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더러운 시간』은 초기 단편집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와 같은 시기에 출판된 마르케스의 첫 장편소설이다. 1962년에 출간되었는데 무려 32년이나 지나서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앞표지에 적힌 카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더러운 시간』이 국내에 출간된 1994년은 마르케스와 그의 대표작『백년 동안의 고독』이 국내에 널리 알려진 시기다. 출판사는 『더러운 시간』을 마르케스의 최신작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마르케스의 약력에 관심을 가진다면 카피의 내용이 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1965년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1967년에 출간되었다. 아무래도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마르케스의 인기를 의식해서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최신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던 것 같다.

 

배경은 조용한 마을 마꼰도(이 작품에서는 마을의 이름이 잘 언급되지 않는다. 84쪽에 『백년 동안의 고독』의 배경인 마꼰도가 딱 한 번 언급될 뿐이다) 마을에 사는 세사르 몬떼로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클라리넷으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목자를 갑자기 권총으로 사살함으로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몬떼로가 자신의 부인과 목자가 동침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 분노한 나머지 그를 죽이고 만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목자의 클라리넷 연주가 자신의 아내를 위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오히려 목자는 이미 다른 여자가 약혼했고, 목자와 몬떼로의 아내가 동침을 했는지 실제로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충동적인 살인 사건으로만 치부했다. 그리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거짓 소문과 루머의 위력은 몬떼로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향해 점점 뻗쳐만 간다. 아침만 되면 말도 안 되는 루머가 적힌 전단지가 마을 사람들의 집 문 앞에 붙여져 있다. 괴상한 전단지가 점점 하나씩 문 앞에 붙여질수록 마을 사람들은 점점 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 또한 괴 전단지에 연루되어 있을까봐 불안감을 느낀다.

 

 

“전단 같은 것은 신빙성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믿게 되는 것이 더 무서운 거죠.” (『더러운 시간』중에서, 58~59쪽)

 

 

마을에서는 불신이 더욱 커져만 가는데 시장이라는 사람은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괴 전단지 사건보다는 마을을 자본화시키는데 관심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주시킬 정도로 마을에 넓은 도로를 건설하고, 자본(돈)의 힘과 위력을 이미 알고 있는 서커스단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시장은 이들과 결탁해서 서커스단원 중에서 미모가 빼어난 여자와 동침하기도 한다. 마르케스의 다른 소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도 시장은 자본을 상징하고, 비리와 부정을 일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시장의 성격과 대립하는 인물은 마꼰도에서 유일한 종교인이며 정신적 지주인 앙헬 신부뿐이다. 그는 자본과 대립하고 맞서는 ‘도덕’을 상징한다. 괴전단지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흉흉해진 마꼰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자신이 직접 시장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해결하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시장은 신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앙헬 신부는 괴 전단지로 인해 불안에 떠는 마을 사람들의 말 못하는 심정을 들어주면서 전단지의 근원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반면 시장은 전단지 사건을 발판 삼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통행금지령’이다.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외출을 할 수 없으며 시장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외출허가증이 있어야 가능하다. 밤에는 경찰과 협조한 시만 순찰대를 배치시킨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마꼰도는 그야말로 혼란으로 가득한 고립 상태가 되어버렸다. 보이지 않는 괴 전단지의 공포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더 이상 사람들 간에서 화해와 용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꼰도는 길고도 더러운 시간에 힘없이 지배당한다.

 

『더러운 시간』의 결론은 슬프다. 앙헬 신부는 괴 전단지 사건의 진짜 주범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믿었던 마을 사람마저 전단지 사건의 주범으로 의심받는 모습에 적잖은 혼란과 괴로움을 느낀다. 그는 평소처럼 교회로 돌아가 기도를 드리면서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드디어 마꼰도가 길고 긴 더러운 시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통행금지령은 계속되고, 여전히 전단지 사건의 주범을 찾기 위한 마을 사람들 간의 총성은 그치지 않는다.

 

『더러운 시간』은 자본과 권력의 유착 관계로 인해 정서적으로 피폐해지는 과정보다는 마을 사람들 전체에 공포를 떨게 만든 유언비어와 소문으로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이 와해되는 사회의 모습이 더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백년 동안의 고독』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앙헬 신부가 전단지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전개되었고, 시장의 권력을 유머스럽게 비꼬는 인물들 간의 대화는 있어서 마꼰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임에도 오히려 이야기가 무척 현실감이 있게 느껴진다. 괴 전단지에 불안에 떨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힘을 더욱 확장시켜 마을의 갈등을 더욱 가중시키는 권력자의 비열한 모습. 세월 호 사건 관련 악성 루머가 SNS에서 한창 떠돌아다닐 때 읽어서 그런지 악성 괴담에 두려워하는 사람과 이것을 악용해서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가 괴담과 루머가 만들어 낸 더러운 시간 속에서 갇혀있다. 과연 이 시간에서 언제 탈출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벗어나도 괴담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진짜든 가짜든지 간에 이야기의 매력에 쉽게 빠져버리는 습성이 있으니까. 허구와 진실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이야기는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쁜 이야기가 지배하는 순간, 그 시간은 갈등과 불신에 의해 더렵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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