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이것만큼은 해보고 싶은데 실컷 하지 못한 것이 한 두 개 정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만화책을 읽는 것이다. 만화 엄청 좋아한다, 어렸을 때 TV에서 하는 만화영화는 무조건 챙겨봤다. 둘리, 달려라 하니, 머털도사 같은 한국 만화부터 꼬마자동차 붕붕, 세일러문, 포켓몬스터, 명탐정 코난까지 일본 만화도 거의 챙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책은 많이 읽은 기억이 없다. 고등학생 때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만화방에 가서 만화책 몇 권 빌려서 야자(야외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읽긴 했지만, 공부를 완전 소홀히 할 정도로 질리도록 만화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알라딘 중고샵에 가면 만화책이 잔뜩 꽂혀 있는 서가 근처에 만화책을 보거나 구입하는 학생들을 만난다. 혼자가 아닌 또래 친구들과 같이 읽고 싶은 만화책을 찾아보고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다. 아마도 중고샵 내부에서 제일 시끌벅적한 곳이 만화책이 꽂혀 있는 서가 근처일 것이다. 가끔 그런 어린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부럽다.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만화책을 같이 읽어 본 적이 없다. 한 일 년 아니 한 몇 달이라도 질릴 때까지 만화책을 빌려다 읽고 싶다.
어쩌면 나는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만화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요즘은 이름난 만화들을 어쩌다 뒤늦게 찾아 읽는 것을 빼고는 만화를 자주 보지 않는다. 아니, 이 말이 과장일지도 모르겠는데, 이름난 만화들을 찾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만화에 별로 목숨을 걸지 않는다. 어렸을 때 많이 보던 만화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다. 가끔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재밌게 봤던 만화가 하고 있으면 보곤 한다. 만화의 결말을 뻔히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기억하면서도 본다. 어렸을 때 본 만화를 그리워하는 추억은 채널 돌리느라 쉴 틈이 없는 리모컨 컨트롤을 한 템포 쉬게 할 정도로 그 향수는 너무나도 강하다.
만화를 본 적은 없지만 그 만화 캐릭터를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만화 캐릭터를 기억해서 그가 나온 만화작품과 작가에 흥미를 가질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박수동 화백의 '고인돌'이다.
“빠빠라빠빠빠~ 삐삐리 삐삐코~ 빠!삐!코!” 중독성 있는 CM송을 유명한 아이스크림 TV 광고에 나온 고인돌 캐릭터는 16년이 지난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1989년에 처음 빠삐코 TV 광고가 제작되었다던데 사람으로 치면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다... 비록 1970년대 한창 인기를 끌었던 원작을 접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스크림 광고 한 편 덕분에 고인돌 캐릭터를 기억할 수 있었다. 고인돌 캐릭터는 빠삐코뿐만 아니라 스크류바 광고에도 진출했다. 스크류바 광고 CM송도 빠삐코 못지않게 유명하다. “이상하게 생겼네. 롯데 스크류바~ 삐삐 꼬였네, 들쭉날쭉해~.” 지금까지도 슈퍼마켓에 가면 볼 수 있는 장수 아이스크림 제품 광고에 나올 정도로 박수동 화백의 고인돌 캐릭터는 친숙하고 재미있다.
그런데 박수동의 『고인돌 왕국』을 만화 원작으로 읽어보지 못한 8090 세대는 이 만화가 아동 독자를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들에게는 원작의 캐릭터보다 TV 광고 속 고인돌 캐릭터 이미지가 강한 탓이다. 사실 『고인돌 왕국』은 성인만화다. 성인 주간잡지의 대명사였던 ‘선데이 서울’ 연재 만화였다. 1974년부터 1991년까지 17년 동안 총 833회 연재됐다.
『고인돌 왕국』은 삐뚤삐뚤 대충 그린 듯한 구불구불한 선화(線畵)체 그림에 에로틱한 분위기로 원시 조상의 유쾌한 일상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당시만 해도 사회분위기는 만화의 질펀한 성적(性的) 담론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만화는 고루했던 분위기를 단숨에 깨버렸다. 야하면서도 이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에로티시즘. 만화에 나오는 야한 농담과 성적 비유는 그 당시 독자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았다. ‘미스터 고’를 비롯해 ‘인’, ‘돌’ 이 세 남자 원시인과 고인돌 마을을 이끄는 임금은 여색을 밝힌다. 성적으로 농담하기를 좋아하고, 성적 욕구를 멈출 줄 모르는 전형적인 남성을 대표한다. 여자 원시인 ‘미스 오’, ‘육’, ‘팔’ 역시 성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끔 세 명의 남자 원시인을 꼼짝하게 못할 정도로 기가 센 편이다.
박수동의 『고인돌 왕국』은 선사시대 조상들의 유쾌한 일상을 4칸 만화로 만든 조니 하트의 ‘Back to the B.C’(1958년)와 비교하고 필적하곤 한다. 작품의 분위기는 하트의 만화와 많이 닮았다. 그러나 성냥 개피에다 먹물을 찍어 그리는 고인돌 그림체는 자니 하트의 꽉 짜인 듯한 펜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고인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매력은 글씨체다. 허투루 그려 제낀 듯한 그림이지만 꽉 짜인 구도, 그에 걸맞은 휘청휘청 끊어질 듯 흘러내리는 글씨체.
예전에 남자들의 가슴에 확 불을 지펴서 설레게 만들었던 ‘우리 집에 라면 먹고 갈래?’ 못지않은 『고인돌 왕국』 속 야릇한 의미의 표현은 지금도 봐도 신선하고 재미있다. 일부 표현 중에는 여성의 외모나 신체를 성적으로 희화한 것이 있어서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요즘 성(性)에 대해 개방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다시 만화가 나온다면 충분히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다.
만화는 1978년 까치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처음 발행됐으며 ‘선데이 서울’ 폐간 이후로 고인돌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들이 단행본으로 묶어져 줄줄이 출판되었다. 이듬해 『소년 고인돌』이 출간되었고, 90년대 중반까지 다양한 출판사를 통해 고인돌 만화집 단행본이 나왔, 그러나 이제는 절판되었으며 지금은 헌책방에서 고가로 매길 정도로 희귀본이 되었다. 최근에 헌책방에서 구한 우석출판사의 『고인돌 왕국』은 2001년에 출간된 마지막 만화집 단행본이다. 한 권짜리 분량으로 봐서는 ‘선데이 서울’에 연재된 833회의 작품 중 일부만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우석출판사판에는 소설가 김홍신의 서문, 책 중간에 만화평론가 손상익의 짧은 비평을 읽어볼 수 있다.
박수동의 <고인돌>은 인간애를 저버리지 않는 따스한 시선이 있어 좋다. 권위도 없고 뽐냄도 없다. 그저 사람답고 동물답고 약간 모자란 듯한 가슴을 느낄 수 있어 예쁘다. (김홍신, 『고인돌 왕국』 서문 중에서)
『고인돌 왕국』은 네이버에서 약간의 요금을 내면 볼 수 있다. 허나 젊은 시절, ‘선데이 서울’에 연재된 만화를 즐겨본 기억이 있는 중장년층들에게는 그 때 그 시절의 향수까지 바란다면 욕심일 수 있겠다. 만화는 만화책이 낫다. 종이를 훨훨 넘기면서 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만화책 보는 맛이다. 올해가 『고인돌 왕국』이 ‘선데이 서울’에 처음 연재된 지 40년이 되는 해다. 타이밍이 딱 좋다. 『고인돌 왕국』이 단행본으로 복간되기에 아주 좋은 시기다. 한국만화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그저 과거의 추억으로 대표되는 유물로 남기에는 너무 아깝다. ‘선데이 서울’ 열혈 남성 독자들을 키득키득거리게 만든 성인만화의 재미를, 나 같은 젊은 친구들도 누려 봤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