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같은 가짜’ 찌라시, 괴담은 바늘구멍만 한 틈으로 파고드는 순간, 사회적 흉기로 돌변한다. 역시나 지난달에 발생한 세월 호 사고 이후 역시나 인터넷과 문자메시지로 괴담은 퍼져나갔다. 그것은 불행한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퍼지는 괴담은 사람 잡을 정도로 위력이 어마어마하다. 근거 없이 떠돌고 전해지는 루머와 괴담은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인해 뜬소문의 최초 유포자는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책임조차 물을 수 없다. 억울한 피해자만 속출할 뿐이다. 루머는 한 사람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사람들이 불안하거나 낯선 상황에 직면하면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그 불안을 덜어내려고 하는 행위를 자동으로 하게 된다. 또 문자메시지나 SNS로 괴담을 퍼뜨리는 행위 역시 불안한 생각을 남들과 공유하면서 불안감을 줄여보려는 데에서 비롯된다.

 

위기 때마다 괴담이 퍼지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대자연의 힘에 의해, 혹은 안보 환경 변화로 한 나라에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여지없이 또 괴담이 퍼져 나간다면 그 혼란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괴담과 루머에 휘말린 당사자는 극심한 상처를 받지만 ‘아니면 말고’로 끝나는 게 현실이다. 자극적인 사실이 진실이기를 기대하는 심리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도를 넘어선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 이러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항상적 불안감을 안고  산다. 괴담은 이런 불신과 불안을 먹고 자란다. 독자들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선사해 준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면 정신 건강에 해로운 나쁜 이야기 ‘괴담’을 싫어했을 것이다. 마르케스의 장편소설 『더러운 시간』은 나쁜 이야기에 휘말리는 사람들과 체제 유지를 위해 이를 악용하는 권력자의 비열한 모습을 통해 괴담이 평화로운 마을 하나를 점점 파괴시키고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더러운 시간』은 초기 단편집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와 같은 시기에 출판된 마르케스의 첫 장편소설이다. 1962년에 출간되었는데 무려 32년이나 지나서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앞표지에 적힌 카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더러운 시간』이 국내에 출간된 1994년은 마르케스와 그의 대표작『백년 동안의 고독』이 국내에 널리 알려진 시기다. 출판사는 『더러운 시간』을 마르케스의 최신작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마르케스의 약력에 관심을 가진다면 카피의 내용이 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1965년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1967년에 출간되었다. 아무래도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마르케스의 인기를 의식해서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최신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던 것 같다.

 

배경은 조용한 마을 마꼰도(이 작품에서는 마을의 이름이 잘 언급되지 않는다. 84쪽에 『백년 동안의 고독』의 배경인 마꼰도가 딱 한 번 언급될 뿐이다) 마을에 사는 세사르 몬떼로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클라리넷으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목자를 갑자기 권총으로 사살함으로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몬떼로가 자신의 부인과 목자가 동침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 분노한 나머지 그를 죽이고 만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목자의 클라리넷 연주가 자신의 아내를 위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오히려 목자는 이미 다른 여자가 약혼했고, 목자와 몬떼로의 아내가 동침을 했는지 실제로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충동적인 살인 사건으로만 치부했다. 그리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거짓 소문과 루머의 위력은 몬떼로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향해 점점 뻗쳐만 간다. 아침만 되면 말도 안 되는 루머가 적힌 전단지가 마을 사람들의 집 문 앞에 붙여져 있다. 괴상한 전단지가 점점 하나씩 문 앞에 붙여질수록 마을 사람들은 점점 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 또한 괴 전단지에 연루되어 있을까봐 불안감을 느낀다.

 

 

“전단 같은 것은 신빙성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믿게 되는 것이 더 무서운 거죠.” (『더러운 시간』중에서, 58~59쪽)

 

 

마을에서는 불신이 더욱 커져만 가는데 시장이라는 사람은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괴 전단지 사건보다는 마을을 자본화시키는데 관심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주시킬 정도로 마을에 넓은 도로를 건설하고, 자본(돈)의 힘과 위력을 이미 알고 있는 서커스단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시장은 이들과 결탁해서 서커스단원 중에서 미모가 빼어난 여자와 동침하기도 한다. 마르케스의 다른 소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도 시장은 자본을 상징하고, 비리와 부정을 일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시장의 성격과 대립하는 인물은 마꼰도에서 유일한 종교인이며 정신적 지주인 앙헬 신부뿐이다. 그는 자본과 대립하고 맞서는 ‘도덕’을 상징한다. 괴전단지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흉흉해진 마꼰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자신이 직접 시장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해결하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시장은 신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앙헬 신부는 괴 전단지로 인해 불안에 떠는 마을 사람들의 말 못하는 심정을 들어주면서 전단지의 근원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반면 시장은 전단지 사건을 발판 삼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통행금지령’이다.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외출을 할 수 없으며 시장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외출허가증이 있어야 가능하다. 밤에는 경찰과 협조한 시만 순찰대를 배치시킨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마꼰도는 그야말로 혼란으로 가득한 고립 상태가 되어버렸다. 보이지 않는 괴 전단지의 공포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더 이상 사람들 간에서 화해와 용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꼰도는 길고도 더러운 시간에 힘없이 지배당한다.

 

『더러운 시간』의 결론은 슬프다. 앙헬 신부는 괴 전단지 사건의 진짜 주범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믿었던 마을 사람마저 전단지 사건의 주범으로 의심받는 모습에 적잖은 혼란과 괴로움을 느낀다. 그는 평소처럼 교회로 돌아가 기도를 드리면서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드디어 마꼰도가 길고 긴 더러운 시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통행금지령은 계속되고, 여전히 전단지 사건의 주범을 찾기 위한 마을 사람들 간의 총성은 그치지 않는다.

 

『더러운 시간』은 자본과 권력의 유착 관계로 인해 정서적으로 피폐해지는 과정보다는 마을 사람들 전체에 공포를 떨게 만든 유언비어와 소문으로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이 와해되는 사회의 모습이 더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백년 동안의 고독』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앙헬 신부가 전단지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전개되었고, 시장의 권력을 유머스럽게 비꼬는 인물들 간의 대화는 있어서 마꼰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임에도 오히려 이야기가 무척 현실감이 있게 느껴진다. 괴 전단지에 불안에 떨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힘을 더욱 확장시켜 마을의 갈등을 더욱 가중시키는 권력자의 비열한 모습. 세월 호 사건 관련 악성 루머가 SNS에서 한창 떠돌아다닐 때 읽어서 그런지 악성 괴담에 두려워하는 사람과 이것을 악용해서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가 괴담과 루머가 만들어 낸 더러운 시간 속에서 갇혀있다. 과연 이 시간에서 언제 탈출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벗어나도 괴담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진짜든 가짜든지 간에 이야기의 매력에 쉽게 빠져버리는 습성이 있으니까. 허구와 진실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이야기는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쁜 이야기가 지배하는 순간, 그 시간은 갈등과 불신에 의해 더렵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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