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4월 4일
어젯밤에 영화관에 갔다. 모두 전쟁 영화였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가 지중해 근처에서 폭격을 당하는 장면이 가장 볼만했다. 크고 뚱뚱한 사내가 그를 추격하는 헬리콥터를 피해 헤엄쳐 도망가다가 사살되는 장면에 이르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18쪽)
윈스턴은 자신의 일기에서 잔인한 장면이 넘치는 전쟁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오늘날 세상은 폭력이나 잔인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더욱 더 차고 넘친다. 기술 발달 덕분에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재앙이나 참혹한 전쟁도 TV와 인터넷 그리고 SNS을 통해 바로 알 수 있다. 그런 이미지가 워낙 홍수를 이루다 보니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장면조차 스펙터클한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그것이 시신경을 통하여 심장을 두들길 때 우리는 관음증적인 가학적 쾌감의 유혹에 사로잡힌다. 남의 고통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틀림없이 윤리적 문제를 동반하는 일이지만, 때때로 그것은 자극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되어 쾌락의 썩은 내를 풍기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윤리의 의미는 무색해진다.
케빈 카터 「수단의 굶주리는 소녀」 1993년
타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은 온갖 시각적 이미지는 윤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고통에 대한 공감마저도 잊게 만든다. 남아공 출신의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인간의 윤리적 본능인 공감을 사진 작품과 맞바꿨다. 그 결과, 셔터를 누른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케빈 카터는 명예와 죽음을 동시에 안고 말았다.
수단의 식량센터에서 보급을 받기 위해 걷다가 지쳐 쓰러진 소녀, 그 뒤로 독수리가 호시탐탐 때를 기다리던 순간에 카터는 셔터를 눌렀고 케빈 카터는 이 사진으로 1994년에 보도사진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수상의 기쁨도 잠시, 그 순간의 상황에 셔터를 누를 게 아니라 독수리를 쫓았어야 했다는 여론의 비난 포격을 맞아야 했다. 카터는 사진을 촬영하고 난 후 당장 독수리를 내쫓았다고 항변했지만, 그의 내면은 종잡을 수 없는 혼란과 고통 속으로 사로잡혔다.
케빈 카터의 죽음은 시각적 이미지 생산과 윤리적 의무 사이의 딜레마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사례로 회자된다. 하지만 케빈 카터가 겪은 딜레마는 비단 세상 속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몸담고 있는 사람들만의 경험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사진을 찍어 일상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우리 또한 그 딜레마를 피할 수 없으며 이를 무시한다면 심각한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사진출처: 위키트리 (2014년 5월 22일 기사)
여성 응급구조사는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의 환부 상태를 직접 사진을 찍는다. 의료인 동료들끼리 공유하면서 공부하는 차원으로 그 사진을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다. 과연 응급구조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그녀의 행동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사진을 찍고 공개했다면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찍은 사진 속 환자의 환부 상태는 미미한 정도가 아니다.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할 정도로 두 눈으로 직접 보기 힘든 끔찍한 상태다. 당연히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응급구조사는 페이스북 사진에 대한 비난이 일파만파 커지게 되자, 해당 병원에 사과문을 올렸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정상적인 사람도 차마 보기 힘든 환자의 환부를 많이 목격했다. 그러한 환경이 타인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고 그저 하나의 구경거리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동료 응급구조사를 위해서, 그리고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공개 설정으로 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아무리 공부의 목적으로 사진을 찍었다하더라도 윤리에 어긋난 잘못된 행동이다.
사실 페이스북에는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고, 공유되고 있다. 일부러 ‘좋아요’ 수를 늘리기 위해서 자극적인 사진만 올리는 특정 페이스북 페이지도 있다. 영화배우 찰리 쉰이 우연히 페이스북에 접속하다가 신체의 일부가 절단된 사람의 사진을 보는 순간, ‘스너프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다. SNS에서 공유되는 끔찍하고 잔인한 사진들은 스너프 영화 못지않을 정도로 불쾌감을 느낄 정도다.
페이스북에서는 가끔 반려견이나 동물이 사람의 폭력에 의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은 사진이 오르기도 한다. 사진의 게시자는 동물학대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공개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합당한 목적을 위해 찍은 사진이라도 윤리적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 상처 입은 동물을 얼른 동물병원에 보내서 치료를 받는 것이 우선이다. 결국 이러한 사진 또한 일시적인 구경거리로 전략하고 만다.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일이 아닌 탓에 안도하며 그것을 보고, 즐기고, 연민을 갖는다. 그걸로 끝이다.
그러나 그걸로 부족하다. 고통 속의 타인과 우리가 같은 지구상에 살고 있다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고통과 연결돼 있을지 모른다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잔혹한 이미지 속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세계를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구 저 편에서 누군가 전쟁이나 기아, 고문 등 부당한 폭력에 짓밟히고 있음을 전하는 뉴스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내가 당한 일이 아니므로. 희생자에 대한 연민이나 가해자를 향한 분노가 솟구치는 것도 잠시, 우리는 곧 잊는다.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우리는 남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눌 힘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