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면 군 입대 하기 전에 무조건 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있었다. 입대를 하는 순간, 평생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여자를 오랫동안 볼 수 없다. 한창 혈기왕성한 사내들에게는 군 생활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총각 딱지’를 뗀다. 집창촌에 가서 섹스로 욕구를 푼다.

 

집창촌은 ‘총각 딱지’를 떼려는 젊은 사내뿐만 아니라 중년 남자들도 많이 찾는다. 집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섹스할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에 돈을 지불해서라도 집창촌으로 향한다.

 

아내는 사랑해서 섹스를 할 수 있지만, 집창촌의 매춘부는 그저 섹스하기 위한 여자일 뿐이다.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버는 매춘부는 영혼 없는 섹스를 어떻게 생각할까. 매춘으로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쾌락의 감각은 일시적이다. 남자의 뇌는 자위를 한 후에 성적 흥분 상태가 가라앉으면 이성을 되찾는다고 한다. 이런 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현자타임’이라고 한다. 매춘부들도 처음에 돈을 많이 받고, 남자 손님들로 성욕을 풀 수 있어서 좋았겠지만 섹스를 하고 나면 후회감이 밀려올 것이다. 섹스로 인해 점점 더 망가져만 가는 몸. 늙으면 매춘을 할 수 없다.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차라리 몸을 파는 직업이 아니라 조금만 더 판단을 잘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매춘부도 사람이다. 자신의 몸을 남성들을 위한 ‘상품’으로 만들어 돈을 버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과연 이것을 ‘직업’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다만, 매춘부라고 해서 섹스에 굶주린 색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매춘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자신의 몸을 상품화시켜서 돈을 버는 것 그리고 그런
행위 때문에 남자들에게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노는 계집, 창>에서 집창촌에 간 중년 손님이 매춘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소란스럽게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있다. 손님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거나 돈이 터무니 없이 비싸다는 이유로 매춘부는 그들로부터 무시 받고, 여자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험한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 페이스북 유머 관련 페이지에서 매춘 행위를 하는 여자의 경험담을 인터넷에 올린 20대 남자의 글을 사진으로 캡처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사연은 이렇다.

 

자신의 사연을 올린 21살 남자는 영등포에 위치한 여관에서 매춘 행위를 하는 40대 아주머니와 섹스를 했다. 그런데 남자는 비싼 돈에 걸맞지 않은 매춘 행위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화가 나서 자신보다 20살 많은, 거의 어머니뻘 되는 아주머니를 때리면서 ‘너 같은 창녀는 죽어야 된다’고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남자의 멸시에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울면서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남자의 말은 어이가 없다. ‘빡촌(집창촌의 속어)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보통 눈물도 없지 않나요? 독해지지 않나요? 이 아줌마는 울면서 나가더라고요. 창녀도 직업 아닌가요? 서비스업 아닌가요? 그럼 손님한테 잘해야 되는 게 아닌가요? 잘못했으니 욕 먹는 건 당연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매춘이 정당한 직업이고, 서비스업이라고 해야 될 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40대 아주머니가 나이와 몸을 생각하지 않고 매춘으로 돈을 버는 행위는 좋지 않게 본다. 하지만 매춘, 그러니까 섹스가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를 함부로 손찌검하고 욕설을 하는 21살 남자도 잘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인터넷에 공개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태도는 같은 남자로서 부끄럽고 한심하다. 그저 섹스로 욕구를 풀지 못한 화풀이를 매춘을 ‘직업’이라는 이유로 불만을 표출하는 모습은 나잇값 제대로 못한 철없는 행동이다.

 

이 남자는 매춘부를 그저 섹스를 하기 위한 상품으로만 보고 있다.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춘부는 눈물도 없고, 독하다고? 도대체 그런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남자 손님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욕설을 듣는다면 제 아무리 섹스가 좋아서 매춘을 하는 여자라도 화가 나고, 마음에 상처받기 쉽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못 받는 것이다. 그저 섹스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다. 그들이 매춘을 혐오하고 무시하는 인식은 이중적인 생각이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마치 에두아르 마네가 파리의 매춘부을 연상시키는 「올랭피아」를 살롱에 출품했을 때 욕설과 비난의 융단폭격이 쏟아진 것을 연상시키듯 매춘부를 ‘성적 상품’으로 격하시켜 멸시하는 모습은 위선적이다. 살롱의 신사들은 매춘부가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마네의 그림이 격에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그림은 고귀한 비너스가 벌거벗은 그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네가 활동했던 19세기 파리는 매춘이 성행했다. 마네의 그림에 분노한 신사들 중에 매춘을 안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밤이 되면 집창촌에서 자주 보던 매춘부의 누드를 살롱에서 마주하는 순간, 낮 뜨겁고 부끄러운 것이다. 당시에 유행하는 누드화에서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성 모델’이고, 「올랭피아」는 그저 여성 모델이 아닌 매춘부였다. 올랭피아는 그림 속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없었다. (「올랭피아」의 모델은 실제로 매춘부가 아니다. 평소 마네의 그림에 모델로 자주 섰으면 화가로 활동한 빅토린 뫼린이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매춘부는 ‘여자 아닌 여자’다. 마음이 연약하고 쉽게 눈물을 흘리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그리고 밤만 되면 그녀를 탐하는 남자들은 매춘부를 보통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물을 흘러서 안 되고, 그저 남자 손님의 정액을 받아야하는 상품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한 집안의 딸이거나 가장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기 때문에 매춘을 할 뿐이다. 가족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아도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매춘부들의 말 못하는 마음을 프랑스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잘 알고 있었다. 로트렉은 물랑 루즈의 사창가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매춘부들의 일상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마네가 매춘부처럼 누드를 그렸다면, 로트렉은 진짜 매춘부의 누드를 그렸다. 누드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일상 하나하나 그림으로 묘사했다.

 

 

 

 

로트렉  「거울 앞에 선 누드 여인」  1897년

 

 

로트렉이 묘사한 매춘부의 모습은 반쯤 벌거벗고 있지만, 그렇게 야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의 얼굴은 생기가 없고 힘없어 보인다. 자신들의 삶이 좋을리가 없다.

 

로트렉의 「거울 앞에 선 누드 여인」 속 매춘부는 너무나 평범한 검은 스타킹을 신은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매춘부의 손엔 방금 벗은 듯한 블라우스가 들려져 있다. 손님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선 이 부분이 여자로서의 세월이 불과 얼마 안 남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핵심적 의미는 다른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왼쪽에 그려진 흐트러진 침대가 그것이다. 이는 매춘부가 나이 들면 제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사랑 받지 못함을 상징하고도 남음이 있다. 비록 이 그림은 매춘부를 모델로 했으나 로트렉은 시들어가는 여인의 육체의 덧없음을 그림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내려 애썼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처럼 매춘을 정당한 노동행위, 직업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해도 매춘부를 여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매춘부도 여자다. 섹스만 하는 장난감이 아니다.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야하는 여자. 여자 아닌 여자. 그녀도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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