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아트북스, 2014년)을 읽어보면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1805~1807년)의 제작 배경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 그림 속 인물의 손짓 하나에도 흥미로운 역사가 숨어 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 황후에게 왕관을 씌우기 위해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다. 자기 손을 왕관을 쓰는 파격적인 행동은 황제의 권력이 교황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전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황권의 독립성을 거듭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비드의 그림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나폴레옹도 이 그림에 무척 흡족했다고 한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그림으로 아부를 드러냈다. 그가 이렇게 대관식을 크게 그린 것은 나폴레옹의 주문에 따른 것으로 나폴레옹이 크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고 하여 다비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했다.

 

이 그림에는 70명 정도 되는 얼굴이 등장한다. 다비드는 웅장한 대관식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의 가족과 그를 따르는 고위직 관료들의 얼굴을 그려냈다. 이때 당시 나폴레옹은 자신과 다툰 형을 대관식에 초대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형제의 갈등 때문에 이 영광스런 장면을 가까이 지켜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형과 어머니를 대관식에 참석한 것처럼 그려 넣었다. 다비드나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황제의 가족이 빠진 대관식 장면이 황제의 권위를 돋보이는 데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 그림에서 얼굴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인물들은 누구인지 밝혀졌지만, 아직 이 사람만은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왕관을 든 나폴레옹의 뒤를 주목하시길. 황제와 앉아 있는 교황 비오 7세 사이에 대머리 사나이가 서 있다. 교황을 호위하는 이름 모를 성직자로 추정한다. 그런데 그림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직자의 얼굴 모습이 ‘누구’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로 로마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래서 그 성직자를 ‘카이사르의 유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것으로 봐서는 실제로 대머리였다는 카이사르와 닮긴 했다. 그렇다면 이 성직자는 카이사르가 맞는다면, 다비드는 왜 아주 옛날 사람의 유령을 대관식 장면에 그려 넣었을까? 유럽에서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고 절대 권력을 차지했던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았다. 영미권에서 카이사르를 부르는 ‘시저’(Caesar)는 아예 황제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고,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로 부르게 되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황제의 정통성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카이사르의 영혼을 대관식 그림에 소환했다. 이 거대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면 이름 모를 성직자 혹은 카이사르의 유령을 발견할 수 없다.

 

 

 

 

 

 

 

 

 

 

 

 

 

 

 

 

 

카이사르의 유령에 대한 설명은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뿐만 아니라 역시 이주헌이 쓴 『역사의 미술관』(문학동네, 2011년)에도 나온다. 『역사의 미술관』에서도 다비드의 황제 대관식 그림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책을 비교하면 카이사르의 유령을 가리키는 번호 표시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역사의 미술관』 90쪽에 나오는 작은 크기의 도해,

15번이 카이사르의 유령 (1번은 나폴레옹, 13번은 교황) 

 

 

 

 

 

『역사의 미술관』 91쪽,

왕관을 들고 있는 나폴레옹과 앉아 있는 교황 사이에 있는 인물이 카이사르의 유령 

 

 

 

먼저 『역사의 미술관』에 소개된 그림의 도해에서 카이사르의 유령은 15번이다. 번호가 적힌 도해 크기가 너무 작아서 다음 장에 확대한 도해가 나온다. 그러면 그림 15번의 위치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80쪽 도해,

1번은 나폴레옹, 3번은 교황

그리고 교황 바로 위에 있는 18번의 인물을 카이사르의 유령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다음 도해는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에 실린 것이다. 『역사의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그림에 등장한 인물들의 얼굴에 번호를 기입했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은 카이사르의 유령을 18번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유령을 가리키는 번호 위치가 앞에 소개한 『역사의 미술관』 도해와 다르다. 18번은 3번(교황 비오 7세) 바로 위에 있다. 

 

카이사르의 유령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나폴레옹과 교황 중간에 서 있다. 정면으로 향한 얼굴만 봐도 딱 카이사르와 닮았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의 편집 과정 중에 번호 위치를 실수로 잘못 써넣은 것으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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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28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대단하시네요 ㅎ 잘못된 부분도 찾아내시구ㅋ 덕분에 재밌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저는 그림아는만큼보인다에서 보긴했는데 이런 재밌는 설명 못들었는데 이책두 읽고 싶네요

cyrus 2014-12-28 23:02   좋아요 0 | URL
이주헌씨의 글쓰기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방식이라서 입문자가 읽기에 아주 좋아요. 그림 에세이도 잘 쓰시고요. ^^

12 2015-01-02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단지 사제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타일을 따라했을수도 있긴 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치가, 장군, 작가, 카사노바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로마의 최고 제사장으로 로마의 그 시대 종교계에서 교황 비슷한 직위를 가졌습니다.
그런만큼 과거부터 현대까지 많은 정치가나 독재자, 군인, 바람둥이들이 카이사르를 선망 하면서 빨아댔듯이 종교인들도 빨아댔을만 하죠.
게다가 나폴레옹이 종교인들의 정치를 아에 몰락시키기 전만 해도 고위 직위 종교인들은 정치가들보다 더 위에 속하는 정치가들이었으니까 그 당시 분위기를 보면 여러 의미로 빨아댈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알고보면 유럽 세계의 정통 황제 족보를 처음 만들었다고 할수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임페러(황제)의 어원인 임페라토르라는 명칭도 카이사르라는 가문 이름과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받은것입니다.

게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당시 종교인들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신탁이나 민중,카이사르파들의 지지 때문에 왕으로 추대할려는 여론이 있었지만 계속 부정하고 시민들에게 자신은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던만큼 왕이나 황제였던 인물은 아니지만,
사실상 현대까지 황제라고 여겨지고 있는만큼 유럽 황제 가문의 첫번째 황제로서 여겨지고 있죠.

그러므로 나폴레옹 시대의 유럽 왕조가 오로지 카이사르 가문의 핏줄만을 황제에 올라갈수 있다고 여겼던걸 생각하면 그림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넣음으로써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걸 ˝첫번째˝ 황제 가문 사람인 카이사르도 인정한다는 뜻으로 그림을 그렸을수도 있습니다.

까고 보면 그 당시 유럽 황제의 가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자 친척이었던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마저 자신의 아이들이 아이를 못낳거나 죽음으로써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핏줄은 몇천년전에 완전히 끊긴 상태로 양아들격인 사람들이 황제의 가문을 이어간만큼 나폴레옹도 핏줄과 상관없이 카이사르에게 인정만 되면 황제가 될수 있었으니까 말이 된달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교황이 황제직위를 내리는 전통이나 권한도 알고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종교계에서 최고 직위를 가지고 사실상 황제의 족보를 만들고 아우구스투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주었다고 여겨지고 신성시 되었던 모습들이 교황의 직위와 비슷한데요.... 단순한 우연일까요?
종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줘서 황제의 직위를 받을 사람을 정하는 교황까지 만들수 있게 한건 콘스탄틴 황제였다지만 흠....

저 그림에서 정말 여러의미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자취가 느껴지는군요...

cyrus 2015-01-02 22:1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이 견해도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카이사르의 유령`설은 전문가들의 추측에서 기인한 해석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정체불명의 사제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계획대로 전 연대가 전멸했다! 훌륭하군! 이제 아예 사신이 명령을 내리고 있어. 나도 거기 있었지. 시체가 즐비한 드넓은 전장을 보았다고! 짓이겨진 인간의 살점이 눈 속에 얼어붙어 있었어.” (카렐 차페크  『곤충 극장』 제3막에서, 76쪽)

 

 

카렐 차페크의 희곡 『곤충 극장』(열린책들, 2012년)은 한 편의 잔혹한 우화에 가깝다. 작품에 묘사된 곤충의 세계는 타락을 일삼던 소돔과 고모라가 연상된다. 인간인 여행자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곤충들의 생태를 바라본다. 여행자가 만난 곤충들은 한심하고, 사악하다. 여행자 앞에서 교태를 부리면서 유혹하려 드는 나비, 둥그런 똥 덩어리를 황금같이 여겨 누군가가 훔쳐갈까 봐 노심초사하는 쇠똥구리, 자식의 생존을 위해 다른 곤충들의 목숨을 빼앗는 맵시벌 그리고 과학의 진보를 믿고 영토 확장을 위한 야욕을 버리지 못하는 개미들. 이들은 탐욕 덩어리 인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다.

 

 

 

 

 

 

 

 

 

 

 

 

 

 

 

 

 

제3막은 격렬하면서도 끔찍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 상황을 개미 연대의 싸움으로 재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여행자는 개미들이 싸우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훌륭하다!’라고 비꼰다. 그리고 자신 또한 시체가 널브러진 전장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눈 속에 얼어붙은 짓이겨진 인간의 살점. 짤막한 여행자의 독백 대사는 살아남은 자가 없었던 당시 참호전의 풍경을 어렴풋이 떠오르게 한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연합군과 독일군 간의 서부 전선은 가장 많은 전사자가 속출할 정도로 치열했던 장기전이었다. 이적을 공격하기보다는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기나긴 참호는 스위스에서 영국해협까지 만들어졌고, 그 길이만 1000km에 달한 것도 있었다. 지루한 참호전이 이어질수록 연합국과 독일 간의 적대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영국의 애국주의자들은 독일산 개 닥스훈트를 죽여 적국을 향한 분노를 표출했고, 독일에서는 ‘영국 증오가’가 유행했다. 1914년 크리스마스 하루 동안 양측 군대가 자발적으로 전쟁을 멈추었던 기적의 날을 제외하면 서부 전선은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 낸 지옥과 같았다.

 

 

 

 

 

 

 

 

 

 

 

 

 

 

 

‘시체가 즐비한 드넓은 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은 『곤충 극장』에 나오는 여행자(또는 카렐 차페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자원입대하여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고, 비참함에 치를 떤다. 그는 끔찍한 참상의 증인이었고, 역겨운 장면 그대로 캔버스에 담아낸다. 

 

 

 

 

 

오토 딕스  「전쟁」  1929~1932년

 

 

 

1929~1932년에 그린 「전쟁」은 참혹한 죽음이 생생한 묘사한 거대한 그림이다. 턱밑이 날아가거나 총탄 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병사들의 시체가 참호 속에 널브러져 있다. 그야말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짓이겨진 인간의 살점이 눈 속에 얼어붙어 있었어”라는 절규에 가까운 대사를 내뱉는 여행자가 목격했던 그 장면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이 그림이 공개된 당시 사람들과 비평가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딕스가 묘사한 그림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의 그림은 전쟁을 옹호하는 애국 보수주의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림에 대한 비난이 커지자 딕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 딕스도 『곤충 극장』의 여행자처럼 전장 한가운데 거기 있었다.

 

 

 

 

 

 

 

 

 

 

 

 

 

“이 그림은 ‘그림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일반적인 통념을 철저하게 깨뜨린다. 인류사상 최초의 총력전인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에 ‘아름다운 그림’ 따위는 더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일까.”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 중에서)

 

 

「전쟁」을 본 서경식 선생의 감상처럼 무조건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세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아름다운 세상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화롭지 않은 지옥 같은 세상도 펼쳐져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모습이며 우리의 멈출 줄 모르는 탐욕과 증오가 만들어 낸 소돔과 고모라이기도 하다. 딕스의 「전쟁」을 본 어느 비평가는 “구역질이 난다”고 비난했다. 딕스는 이 그림을 통해 휴머니즘이라는 고귀한 영역마저도 짓밟는 전쟁, 아니 전장에 나서는 인간의 광기를 전달하려고 했다. 거대한 그림은 살육을 일삼는 괴물 같이 변해버린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비춘 불편한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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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수집광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60
존 딕슨 카 지음, 김우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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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수집광사건』(원제: The Mad Hatter Mystery)은 존 딕슨 카가 두 번째로 창조한 아마추어 탐정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사실 펠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은 『마녀가 사는 집』(해문출판사, 2003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Hag's Nook』이다. 이 작품과 『모자수집광사건』은 1933년 같은 해에 발표되었다.

 

펠 박사도 카가 맨 처음 창조한 탐정 앙리 방코랭처럼 사건 현장에 조수를 대동한다. 미국 출신의 랜폴이라는 인물이다. 『모자수집광사건』이 펠 박사가 나오는 두 번째 소설이라서 그의 특징을 소개하는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다. 기드온 펠 박사는 사전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콧수염을 가진 뚱뚱한 인물이다. 움직임이 둔한 편이라서 두 개의 지팡이를 짚고 이동한다. 복장은 주로 낡은 망토와 중절를 착용한다. 『모자수집광사건』이 시작되는 이야기 초반부에 해드리 경감 '스태버스 사건'을 잠깐 언급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대화가 나온다. 여기서 '스태버스 사건'이란 바로 『마녀가 사는 집』에서 펠 박사가 처음 맡은 사건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적 과정을 고려하면서 읽으려면 『마녀가 사는 집』, 『모자수집광사건』 순으로 읽어야 한다.

 

『모자수집광사건』은 이전에 발표한 카의 작품(『밤에 걷다』『해골성』)보다 사건이 복잡하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원제의 'The Mad Hatter'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는 특이한 '미친 모자 장수'를 말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실크 모자를 훔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를 가리킨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도난 사건을 펠 박사가 맡게 되는데 이것은 사건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어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슬프고 잔인한 역사가 남아있는 런던탑에서 필립 드리스콜이라는 젊은 기자가 중세 때 사용했던 무쇠 화살에 찔린 채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더 특이한 것은 죽은 드리스콜이 미친 모자 장수가 훔쳐서 사라진 실크 모자를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드리스콜을 죽인 범인은 모자를 훔치고 다닌 미친 모자 장수란 말인가. 사건 현장을 조사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미친 모자 장수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그러나 범인이 너무 뻔뻔하게 자신이 범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단서를 살해 현장에 그대로 남겨둔 이유는 무엇일까? 펠 박사는 처음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모자 도난 사건이 드리스콜의 죽음과 연관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일단 미친 모자 장수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한다. 그런데 펠 박사는 모자 도난 사건, 드리스콜 살해 사건에 관한 수사를 해드리 경감에게 맡긴 채 또 다른 사건에도 신경 쓰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져버린 에드거 앨런 포의 미발표 원고를 찾는 것.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희귀한 원고는 죽은 드리스콜의 삼촌 윌리엄 경이 소유하고 있었다. 결국, 펠 박사는 세 가지 사건을 동시에 맡은 셈이다.

 

미친 모자 장수의 모자 절도사건, 런던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그리고 포의 미발표 원고 도난사건. 카는 전혀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세 가지 사건을 절묘하게 얽혀 복잡한 트릭을 선보인다.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범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트릭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신선한 소재이지만, 이야기가 중반부로 진행할수록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흠이다. 아무래도 세 가지 사건의 연관성을 독자에게 잘 설명하기 위해서 카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새도록 커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크게 고심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해드리 경감이 여러 인물을 직접 만나면서 수사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길어져 버렸다. 책의 300쪽 정도 돼서야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버린 사건의 내막이 점점 밝혀지게 된다. 결말이 궁금하다면 꾹 참고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독자는 펠 박사만의 수사 방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펠 박사는 해드리 경감이 수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쭉 지켜보고 나서야 경감의 추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사건이 완벽한 해결에 도달할 때까지 펠 박사는 자신의 추리를 공개하지 않는다. 일단 상대방의 추리를 듣고 나서 자신이 지금까지 머릿속으로만 정리했던 추리를 덧붙여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이러한 펠 박사의 수사 방식은 겸손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질질 끌어 결말이 궁금한 독자의 마음을 애타게 한다. 사건 현장에 들어서마자 간단한 단서만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단번에 알아내고, 자신의 추리를 왓슨과 형사들에게 잘난 척하면서 설명하는 셜록 홈즈와 무척 비교된다.

 

이 소설에서 해드리 경감은 항상 사건 현장에서 침묵하는 펠 박사의 수사 방식에 불만을 표출한다. 펠 박사가 소설에 나오는 탐정처럼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신비스럽게 보이는 행동을 흉내 낸다고 비꼬는 것이다. 그러자 펠 박사는 자신은 소설 속에 나오는 탐정과 전혀 다르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소설 속 탐정은 현실적이지 못해 부정하고 나선다. 그는 자신이 추리에 뜸 들이는 이유를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신중하게 해결하는 자세라고 말한다.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조차 알지 못하면서 다 알고 있다는 듯 남들에게 뽐내고 싶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펠 박사는 단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검증하는 추리야말로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신중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펠 박사의 모습은 독자에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실 그는 프랑스 요리를 좋아하는 대식가인데 음식과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면 범죄 이야기를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성품은 놀 땐 잘 놀고, 공부할 땐 완벽하게 암기하면서 공부할 줄 아는 똑똑한 모범생 같다. 이런 친구들이 성적 잘 나오는 비결은 항상 똑같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교과서만 쭉 봤는지 알 수 없지만,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은 뚝심 있게 공부한다. 자신만의 공부 방식을 고수한다. 문제에 한 번 파고들면 풀 때까지 매달린다. 펠 박사는 인내심이 많고 뚝심이 센 탐정계의 모범생이다. 문제의 답을 완전히 찾을 때까지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신중하게 문제를 푸는, 공부와 문제 풀이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모범생. 이들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탓에 문제 하나라도 틀리는 실수를 두려워한다. 펠 박사 또한 섣부른 추리를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 잘못된 추리가 사건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는 치명적인 오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이런 모범생을 은근히 싫어하고 질투했다. 문제를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런 모범생 친구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이런 친구들을 보면 무언가 꽉 막히면서도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펠 박사의 추리가 익숙하지 않다. 국내에 그가 등장한 작품은 많이 소개되지 않은 편인데 앞으로 이 신중한 탐정과 친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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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4-12-2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추리소설과는 아직 친해지지가 않아. 읽어볼 생각도 안 들고. 이유가 뭘까 곰곰_

cyrus 2014-12-28 14:04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을 잘 읽지 않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문화적 차이감이 독서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아요.

qualia 2014-12-28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 뚱딴지 같은 질문인데요. 원제 『The Mad Hatter Mystery』를 『모자수집광사건』으로 번역한 까닭이 궁금합니다. cyrus 님 글을 읽어보면 “Mad Hatter”는 “미친 모자 장수” 혹은 괴짜 모자 장수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미친 모자 장수가 실제로도 모자 수집에 미친 “모자수집광”인가요? 원작 소설에 그렇게 그려지고 있는지 걍 궁금해서요.

구한말 혹은 개화기 초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어느 외국인 탐험가(?)가 그랬다고 합니다. 한국(조선)처럼 모자가 다양하고 수많은 나라는 첨 봤다고요. 만약 어떤 모자수집광이 당시 한국에 들어왔다면 대박을 쳤을 거란 생각이...^^ 가만 돌이켜보면 정말 우리 민족은 수많은 갖가지 모양의 모자를 만들어냈고, 또 일상에서도 많은 시간을 모자를 쓴 채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살펴봐도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지위고하, 사농공상을 가리지 않고 아주 다양한 모자들을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죠. 그중에서 ‘갓’의 실용성/예술성/독창성/문화적 상징성은 정말 압권이죠.

cyrus 2014-12-28 17:57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쓰다가 ‘미친 모자 장수’라는 말을 빠뜨리고 말았군요.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출판사가 이 작품을 ‘모자수집광사건’이라고 정했는데 사실 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목이 잘못 지은 듯한 느낌이 났어요. 왜냐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모자 도둑이 모자를 수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자를 훔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모자만 훔치는 절도범이라고 보면 됩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모자만 수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모자를 보유한 수집가의 반열에 올랐을 겁니다. ^^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 우리 시각으로 다시 보는 서양미술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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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예술 분야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은 미술이다. 음악, 무용 같은 공연예술이 절대로 미술보다 못해서가 아니다. 미술품의 탁월한 보존성 때문이다. 수천 년 전에 제작된 고대 그리스의 조각, 중세의 벽화는 아직도 남아 있지만, 당시 음악이나 무용은 재현할 수 없다. 소리나 몸동작은 후대에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림 한 점에서 역사와 시대 문화를 해석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분석과 해설은 딱딱하고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특히 배경 지식 없이 그림을 보면 그것은 '페인팅'에 그칠 것이다. 예술이나 미술전시장이 어색한 사람들의 많은 고충은 도무지 미술품 앞에 서 있으면 무슨 생각부터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양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서양미술사를 완파하지 못한 이는 자신의 지적 교양 수준을 반성하며 작품설명 기기를 목에 걸고 귀 기울여 듣기 바쁘다.

 

대부분 서양미술 관련 서적은 입문자에게 불친절하다. 진지하고 어려운 말만 골라서 하는 강의실의 교수님처럼 좀처럼 친해지기가 쉽지 않다. 한쪽을 읽고 넘기면 앞의 내용이 벌써 가물거린다. 몇십 쪽을 넘기고 나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다. 개념어와 역사적 배경 사이에서 널뛰기하다 보면 어느새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사실 서양미술작품은 화가 개인의 생각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서양 사람들의 집단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서양미술을 만든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불친절한 서양미술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이주헌이라는 친절한 안내자를 동원해야 한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은 미술작품을 통해 지루함을 넘어 흥미 있는 미적 여행의 세계로 안내한다.

 

 

 

 

틴토레토  「은하수의 기원」 1570년대

 
 
저자는 서양미술의 본질에 좀 더 쉽게 다가서기 위한 세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인간 중심적, 사실적, 감각적 특징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이 잘 살린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의 「은하수의 기원」이다. 어린 헤라클레스가 잠자는 헤라에게 몰래 다가와 젖을 먹고 있는 장면이다. 헤라가 잠에서 깨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제우스는 얼른 어린 헤라클레스를 떼어놓지만, 헤라의 가슴에 나오는 젖방울은 하늘과 땅으로 향한다. 하늘로 간 젖은 은하수(Milky way)가 되었고, 땅에 흘린 젖은 순결한 꽃의 상징으로 알려진 백합이 되었다. 

 

틴토레토의 그림에 나오는 신은 인간의 모습과 같다. 이뿐만 아니라 종교화에 등장하는 예수나 천사 또한 인간의 형상을 띤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특징은 역사화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장르가 역사화다. 화가는 역사화를 통해서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데만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 한가운데 있는 인간 그 자체를 그리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 관한 이야기며 그 속에서 역사적 상황에 마주친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서양미술에서는 시각적 재현 또는 모방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체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연마저도 똑같이 그리려고 했다. 원근법의 등장으로 눈으로 보는 듯한 풍경이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어졌고, 여기에 더 나아가 빛과 그림자를 묘사함으로써 완벽한 환영적 재현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다시 틴토레토의 그림을 살펴보면 벌거벗은 헤라의 몸에 그림자에 의한 음영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도 화사한 색채를 통해 시각이 촉각으로 환기하는 공감각적 표현을 구사하여 관객은 사실적인 느낌을 받는다.

 

 

 

 

 

김홍도  「씨름도」  1745년

 

 

저자는 서양미술의 세 가지 특징을 입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동양미술과 직접 비교한다. 서양미술과 동양미술의 차이점은 우리가 서양미술을 이해하는 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동서양의 다양한 시대와 작가의 미술작품에서 발견한 차이점을 통해 서양미술에 접근하는 길을 터주고 있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서 그림자 한 점이라도 나타나지 않은 사실을 알고 나면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동양미술은 그림자를 묘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적인 외양보다는 본질의 진실한 내면(정신)을 표현하는 것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김홍도의 그림이나 정선의 풍경화를 처음 본다면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원근법이나 그림자 표현이 없어서 사실감이 떨어지는 어설픈 그림으로 오해하기 쉽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시각으로 다시 서양미술을 바라보는 접근방식을 제시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참신한 내용이라고 볼 수 없다. 17년 전부터 시작된 미술 특강에서 가르친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대학교에서 교양 미술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게다가 서양미술을 보는 이 세 가지 시각은 고전미술(현대미술로 규정하는 20세기 이전 미술사조, 즉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인상주의까지)에서만 한정되어 있다. 서양미술을 독학하는 독자라면 유의해야 할 점이다. 이 책을 이해하고 난 뒤에 중상급 정도의 서양미술을 더 알고 싶으면 역시 동일 저자가 펴낸 『지식의 미술관』(아트북스, 2009년)과 『역사의 미술관』(문학동네, 2011년)을 읽어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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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창비시선 173
김용택 지음 / 창비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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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그 여자네 집’ 중에서, 12쪽)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그 여자네 집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알싸하게 아파온다.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면 박완서의 동명 소설도 보인다. 박완서 선생이 이 시를 읽고는 반해서 길이가 만만찮은 시 전체를 소설의 앞머리에 인용했다. 일제의 강제 징병과 정신대 징발 때문에 결국 헤어져야만 했던 만득이와 곱단이의 그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그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슴아슴 피어난다.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그 여자네 집’ 중에서」, 14쪽)

 

 

시에 등장하는 그 여자네 집은 밀착된 풍경이 아니라 적어도 열 걸음 이상 거리를 두고 떨어져 바라본 풍경이다. 그 거리로 인해 그 여자와 화자의 관계는 계속 짝사랑 특유의 떨림을 유지한다. 지금은 가까이 없기에 더욱 그리운 떨림. 사랑이란 그 지독한 열병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런 지독한 열병 같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생명에 대한 따스한 사랑, 대자연에 대한 더없이 큰 사랑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사랑을 모르므로 어떤 대상을 사랑할 수도 없다.

 

 

나도 아버지처럼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시를 쓰고
그 시 속에서 살고 싶다.

 

(「농부와 시인」 중에서, 79쪽)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을 사랑한다. 그의 삶에서 섬진강을 빼어놓고 말할 수 없듯이 그의 가족, 짝사랑했던 여자 그리고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은 그의 시이자 삶이다.

 

 

강물에 가네
나는 강물에 가네
저문 강물 저물어 나도 가네
강가에 서서
강물을 보네
강물을 보네
아, 이 고요로움을 한움큼 길어
사랑하는 님에게 드리고 싶네
서편에 뜬 붉은 구름이랑 같이 드리고 싶다네
내 깊은 데서 아직도 타는 이 그리움, 이 사랑을
아, 산봉우리 젖네
저 푸르른 솔잎
가을에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좋다네
물에는 물에만 있네

 

(‘나는 집으로 간다’ 중에서, 34~35쪽)

 

 

시인의 마음에서도 섬진강은 흐르고 흐른다. 그 섬진강은 그저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는 강이 아니리라 느끼고 겪어야 하는 강이다. 그 강가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섬진강이란 풍경을 두고 느끼고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가에서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을 볼 일이다
무엇이 바쁜가
이만큼 살아서 마주할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도 저 혼자 돌아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그 강에 가고 싶다’ 중에서, 66~67쪽)

 

 

사는 일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음 한끝을 흐르는 강물에 적셔보고 싶다. 강이라면 저리 천천히 흐르며 때때로 고이기도 해야 수면 위에 비진 세상을 볼 수 있다. 기슭에 부딪히는 물결 소리와 뒤섞인 제 울음소리도 들을 수도 있어야 한다. 강물처럼 우리도 천천히 지나가며 때로 멈추어 서서 자신을 가늠해본다.

 

 

강 끝
하동에 가서
모래 위를 흐르는 물가에 홀로 앉아
그대 발밑에서 허물어지는 모래를 보라
바람에 나부끼는 강 건너 갈대들이
왜 드디어 그대를 부르는
눈부신 손짓이 되어
그대를 일으켜 세우는지

 

왜 사랑은 부르지 않고 내가 가야 하는지
섬진강 끝 하동
무너지는 모래밭에 서서
겨울 하동을 보라 

 

 

(‘강 끝의 노래’ 중에서, 68~69쪽)

 

 

김용택 시인의 시에 있는 섬진강은 당신을 못잊어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과 같이 편안하다. 후미진 하동 포구의 갈대들은 지나가고 지나가는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다. 만나며 헤어지며 흘러가는 강물의 몸짓으로 섬진강의 갈대숲은 기다리며 잊혀가는 세월의 빛으로 그렇게 강인하게 흔들린다. 그런 갈대를 만날 수 있다면 겨울 하동은 춥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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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27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시가 주는 운율적 서정적 이끌림은 언제나 좋네요 김용택 시인님을 처음 알게되었지만 하동 갈대숲이 부르는 그손짓 느껴보고 싶네요^^

cyrus 2014-12-27 10:13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섬진강에 가보지 않았어요. 비록 시에 나오는 섬진강 풍경이 세월이 많이 지나버려 달라졌지만요. 하동에 한 번 가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