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아트북스, 2014년)을 읽어보면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1805~1807년)의 제작 배경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 그림 속 인물의 손짓 하나에도 흥미로운 역사가 숨어 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 황후에게 왕관을 씌우기 위해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다. 자기 손을 왕관을 쓰는 파격적인 행동은 황제의 권력이 교황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전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황권의 독립성을 거듭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비드의 그림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나폴레옹도 이 그림에 무척 흡족했다고 한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그림으로 아부를 드러냈다. 그가 이렇게 대관식을 크게 그린 것은 나폴레옹의 주문에 따른 것으로 나폴레옹이 크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고 하여 다비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했다.

 

이 그림에는 70명 정도 되는 얼굴이 등장한다. 다비드는 웅장한 대관식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의 가족과 그를 따르는 고위직 관료들의 얼굴을 그려냈다. 이때 당시 나폴레옹은 자신과 다툰 형을 대관식에 초대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형제의 갈등 때문에 이 영광스런 장면을 가까이 지켜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형과 어머니를 대관식에 참석한 것처럼 그려 넣었다. 다비드나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황제의 가족이 빠진 대관식 장면이 황제의 권위를 돋보이는 데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 그림에서 얼굴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인물들은 누구인지 밝혀졌지만, 아직 이 사람만은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왕관을 든 나폴레옹의 뒤를 주목하시길. 황제와 앉아 있는 교황 비오 7세 사이에 대머리 사나이가 서 있다. 교황을 호위하는 이름 모를 성직자로 추정한다. 그런데 그림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직자의 얼굴 모습이 ‘누구’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로 로마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래서 그 성직자를 ‘카이사르의 유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것으로 봐서는 실제로 대머리였다는 카이사르와 닮긴 했다. 그렇다면 이 성직자는 카이사르가 맞는다면, 다비드는 왜 아주 옛날 사람의 유령을 대관식 장면에 그려 넣었을까? 유럽에서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고 절대 권력을 차지했던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았다. 영미권에서 카이사르를 부르는 ‘시저’(Caesar)는 아예 황제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고,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로 부르게 되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황제의 정통성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카이사르의 영혼을 대관식 그림에 소환했다. 이 거대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면 이름 모를 성직자 혹은 카이사르의 유령을 발견할 수 없다.

 

 

 

 

 

 

 

 

 

 

 

 

 

 

 

 

 

카이사르의 유령에 대한 설명은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뿐만 아니라 역시 이주헌이 쓴 『역사의 미술관』(문학동네, 2011년)에도 나온다. 『역사의 미술관』에서도 다비드의 황제 대관식 그림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책을 비교하면 카이사르의 유령을 가리키는 번호 표시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역사의 미술관』 90쪽에 나오는 작은 크기의 도해,

15번이 카이사르의 유령 (1번은 나폴레옹, 13번은 교황) 

 

 

 

 

 

『역사의 미술관』 91쪽,

왕관을 들고 있는 나폴레옹과 앉아 있는 교황 사이에 있는 인물이 카이사르의 유령 

 

 

 

먼저 『역사의 미술관』에 소개된 그림의 도해에서 카이사르의 유령은 15번이다. 번호가 적힌 도해 크기가 너무 작아서 다음 장에 확대한 도해가 나온다. 그러면 그림 15번의 위치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80쪽 도해,

1번은 나폴레옹, 3번은 교황

그리고 교황 바로 위에 있는 18번의 인물을 카이사르의 유령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다음 도해는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에 실린 것이다. 『역사의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그림에 등장한 인물들의 얼굴에 번호를 기입했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은 카이사르의 유령을 18번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유령을 가리키는 번호 위치가 앞에 소개한 『역사의 미술관』 도해와 다르다. 18번은 3번(교황 비오 7세) 바로 위에 있다. 

 

카이사르의 유령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나폴레옹과 교황 중간에 서 있다. 정면으로 향한 얼굴만 봐도 딱 카이사르와 닮았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의 편집 과정 중에 번호 위치를 실수로 잘못 써넣은 것으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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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28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대단하시네요 ㅎ 잘못된 부분도 찾아내시구ㅋ 덕분에 재밌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저는 그림아는만큼보인다에서 보긴했는데 이런 재밌는 설명 못들었는데 이책두 읽고 싶네요

cyrus 2014-12-28 23:02   좋아요 0 | URL
이주헌씨의 글쓰기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방식이라서 입문자가 읽기에 아주 좋아요. 그림 에세이도 잘 쓰시고요. ^^

12 2015-01-02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단지 사제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타일을 따라했을수도 있긴 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치가, 장군, 작가, 카사노바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로마의 최고 제사장으로 로마의 그 시대 종교계에서 교황 비슷한 직위를 가졌습니다.
그런만큼 과거부터 현대까지 많은 정치가나 독재자, 군인, 바람둥이들이 카이사르를 선망 하면서 빨아댔듯이 종교인들도 빨아댔을만 하죠.
게다가 나폴레옹이 종교인들의 정치를 아에 몰락시키기 전만 해도 고위 직위 종교인들은 정치가들보다 더 위에 속하는 정치가들이었으니까 그 당시 분위기를 보면 여러 의미로 빨아댈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알고보면 유럽 세계의 정통 황제 족보를 처음 만들었다고 할수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임페러(황제)의 어원인 임페라토르라는 명칭도 카이사르라는 가문 이름과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받은것입니다.

게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당시 종교인들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신탁이나 민중,카이사르파들의 지지 때문에 왕으로 추대할려는 여론이 있었지만 계속 부정하고 시민들에게 자신은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던만큼 왕이나 황제였던 인물은 아니지만,
사실상 현대까지 황제라고 여겨지고 있는만큼 유럽 황제 가문의 첫번째 황제로서 여겨지고 있죠.

그러므로 나폴레옹 시대의 유럽 왕조가 오로지 카이사르 가문의 핏줄만을 황제에 올라갈수 있다고 여겼던걸 생각하면 그림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넣음으로써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걸 ˝첫번째˝ 황제 가문 사람인 카이사르도 인정한다는 뜻으로 그림을 그렸을수도 있습니다.

까고 보면 그 당시 유럽 황제의 가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자 친척이었던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마저 자신의 아이들이 아이를 못낳거나 죽음으로써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핏줄은 몇천년전에 완전히 끊긴 상태로 양아들격인 사람들이 황제의 가문을 이어간만큼 나폴레옹도 핏줄과 상관없이 카이사르에게 인정만 되면 황제가 될수 있었으니까 말이 된달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교황이 황제직위를 내리는 전통이나 권한도 알고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종교계에서 최고 직위를 가지고 사실상 황제의 족보를 만들고 아우구스투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주었다고 여겨지고 신성시 되었던 모습들이 교황의 직위와 비슷한데요.... 단순한 우연일까요?
종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줘서 황제의 직위를 받을 사람을 정하는 교황까지 만들수 있게 한건 콘스탄틴 황제였다지만 흠....

저 그림에서 정말 여러의미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자취가 느껴지는군요...

cyrus 2015-01-02 22:1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이 견해도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카이사르의 유령`설은 전문가들의 추측에서 기인한 해석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정체불명의 사제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